(제 36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6

 

홀에 있는 긴 쏘파에는 뜻밖에도 비행장에서 만났던 젊은 녀인이 앉아있었다. 분홍빛갈의 양복을 입은 그는 단정하게 앉아 마주 오는 김현철을 지켜보고있었다. 김현철은 그 녀인의 앞에 놓인 쏘파에 앉으면서 그의 가느다란 왼손가락에 끼여진 보석반지를 일별했다.

《부인이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김현철을 쳐다보는 녀인은 심중한 표정이였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하고 김현철은 조용히 물었다. 녀인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 저도 부인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지 않을가요?》

녀인이 침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녀인은 미색의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김현철은 녀인과 봉투를 일별하며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현철은 봉투를 열고 안에 든것을 꺼내들었다. 여러장의 사진들이였다. 그가 새상점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나오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나머지 사진들에 찍힌것은 배경은 같은데 낯모를 사내들이였다. 김현철은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보았다. 이들이 혹시 택시운전사가 알려주었던 뒤를 쫓던자들일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주앉은 이 녀인은 대체 누구이며 이 사진들을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김현철이 묻자 녀인은 준비하고있은듯 단마디로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럼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도 전 모릅니다.》

《그러면 부인은 대체 누굽니까?》

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신경쓰실것이 없습니다. 전 단지 부탁을 받고 이 일을 할뿐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것이 없어요. 전 그저 전하라는 말만 전하면 됩니다.》

녀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았다.

김현철은 그의 표정을 뚫어지게 지켜보다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이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선생님이 만난 녀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녀인은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그들에게 되풀이했고 모두 록음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홍콩경찰의 신분증을 가지고있었지만 위조된것이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새상점의 녀인은 별일이 없답니까?》

《그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제게 전할 말이 그게 답니까?》

녀인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고는 소리를 더 낮추었다.

《지금 선생님이 드신 804호실 옆방인 803호실에 방금전에 새 손님이 들었습니다. 그 손님이 급히 선생님을 만났으면 한다는것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부인은 그가 누군지 모르시겠지요?》

녀인은 눈을 차분히 내리감는것으로 수긍했다. 그리고는 쏘파에서 일어섰다.

《본의아니게 귀찮게 굴었다면 참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녀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김현철은 잠시 그를 제지시켰다.

《마지막으로 한두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제가 도착한 날 비행장에서 나에게 주의를 주도록 부탁한 사람과 이 사진을 넘겨준 사람이 동일합니까?》

역시 녀인은 눈을 감았다 뜨는것으로 대답했다.

《남자입니까? 녀자입니까?》

그 물음에 녀인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아마 전할 내용밖에는 그 무엇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였다.

《이모저모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음번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떳떳하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잠시 주저하던 녀인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김현철은 지체하지 않고 승강대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놓고 계책을 꾸미고있다. 자기에게 위험을 알리는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의 옆방에 들었다는 손님이 이 일에 련관이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가 누굴가?

김현철은 승강기에 올라 8층의 번호를 누르며 생각을 이어갔다. 803호실에서 기다리는 손님은 과연 누구일가? 주소성명도 밝히지 않는 녀인을 내세운것은 그들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꺼리기때문일것이다. 그러면 그래야 할 리유는 무엇일가? 혹시 문태석이나 김춘옥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있는 사람들이 아닐가?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 그들이 자기들만이 아는 비밀을 남몰래 전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밀수도 있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함정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알려왔다. 남몰래 나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일단 만나봐야 한다. 피할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만나야 한다!

803호실로 다가선 김현철은 주위를 살폈다. 고요했다. 복도로 나드는 손님이 없었다.

김현철은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고있은듯 문은 인차 열렸다. 김현철은 한사람만이 들어올수 있을 정도로 빠금히 열린 문사이로 방안을 응시했다. 둥근 탁자와 꽃병이 눈에 띄였다. 이어 큰 나무옷장과 사무용 겸 응접용으로 쓸수 있는 다리가 가는 책상, 장미색유리갓을 씌운 탁상등, 벽체를 따라 ㄱ자형으로 놓인 쏘파… 그런데 응당 맞이해야 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문만 소리없이 열렸을뿐이였다. 잠시 주춤했던 김현철은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가 안으로 네댓걸음 들어서는데 뒤에서 문이 딸각하고 닫겼다. 김현철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등뒤에 서있는 방주인이 어서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온몸이 귀가 되여 긴장해졌다. 그런데 쌔근거리는 숨결로 보아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상대는 말을 먼저 걸어오지 않았다. 김현철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놀랐다. 뜻밖에도 문에 몸을 기댄채 하얀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몰아쉬며 서있는 사람은 바로 연희였던것이다.

《어떻게? …》

김현철은 이 한마디를 뱉고는 눈만 슴벅거렸다. 별안간 눈굽이 달아올랐다. 서울에 있을줄로만 알았던 처녀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있었다. 그 숨소리가 그의 흉벽을 두드리고있었다.

이윽고 연희가 어줍은 미소를 입가에 피여올렸다. 여전히 문을 등지고 선채로 나직이 물었다.

《몹시 놀랐어요?》

연희의 단마디의 물음이 그 어떤 마술과도 같이 긴장이 풀린 그를 휘청거리게 하였다. 잠시후 자신을 다잡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꽉 메여서 단 한마디의 말도 뱉을수가 없었다. 연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놀라게 하려던건 아니였는데…》

김현철은 연희에게로 바투 다가섰다. 그의 일종의 벅찬 감정은 마치 전류처럼 연희에게 옮겨갔다. 연희는 얼굴이 능금알처럼 빨개지며 당황했다. 어쩔바를 몰라하는 그의 눈길을 감촉한 김현철은 그제야 격양된 자신을 억제했다.

《어디 좀 앉을가요?》

김현철은 갈린 목소리로 말하며 돌아섰다. 응접실 쏘파에 마주앉은 그들은 한동안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연희가 소곤거리듯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사하니 정말 다행이예요.》

김현철이 물었다.

《그러니 나를 만나자고 한 사람이 연희씨였습니까?》

《예.》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예.》

그제서야 김현철은 좀전까지 자기가 김춘옥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알려줄 그 누군가의 상봉을 그려보며 이곳까지 왔었다는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지금 자기만이 아니라 이 위험천만한 곳에 연희도 와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연희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묻지 않는가요?》

김현철은 그가 먼저 그 질문을 꺼낸것이 다행스러웠다.

《지금 막 물어보려던 참이였습니다. 대체 언제 여기로 왔습니까?》

《현철씨가 홍콩으로 올 때… 3등객실에 타고 따라왔지요.》

《내가 홍콩으로 가는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비공개로 떠난게 아니지 않습니까?》

연희의 말은 사실이였다. 만일 그의 행처를 알고싶다면 신문사에 전화 한통을 걸어도 알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의혹이 다 풀린것은 아니였다. 김현철은 말을 돌렸다.

《좀전에 웬 이상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 부인이 여기로 오면 누군가가 나를 기다릴것이라고 하더군요. 이 일을 꾸민게 설마 연희씨는 아닐테지요?》

연희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기분이 몹시 거슬렸나요?》

《뭐,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미안해요. 저로서도 어쩔수 없었어요.》

연희는 한편으로는 김현철을 기만한것 같아 죄스러웠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큰일이 날번도 했다. 김현철이 모르게 그의 뒤를 쫓으며 만일에 대비하자고 하였으나 뒤골목에서 끝내 그가 탄 택시를 놓쳤다. 곽동수는 하는수없이 현지의 동료들에게 택시번호와 함께 김현철의 모상을 전송했다. 그런데 라단거리에서 새상점에 들어가는 김현철과 함께 그의 뒤를 쫓는 낯선자들이 포착되였다. 아니나다를가 역시 김현철을 노리는자들이 홍콩에 있었던것이다. 한둘이 아니였다. 그자들의 목적이 미행이였으니 다행이지 만일 김현철의 목숨을 노린것이였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끝나버렸을것이라고 곽동수가 말했다. 그래서 더이상 피동적으로 쫓아다닐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홍콩에 온 사실을 알리고 김현철이 주동적으로 방조를 받게 해야 한다고 곽동수는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김현철에게 어떤 보호자들이 있다는것이 알려지면 그에 대비한 음모자들의 계책이 꾸며질수도 있으므로 은밀하게 그를 만난다는 각본이 짜여졌던것이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혼자 오지 않았어요.》

《짐작하고있었습니다.》

김현철은 연희를 마주보며 물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현철씨도 한번 만난적이 있을거예요. 전에 신문사에서 교통사건기사와 관련해서 저와 좋지 않은 충돌이 있을 때 현철씨를 제지시킨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왔습니다.》

김현철은 미간을 찌프렸다. 목에 흉터가 있는 인상이 좋지 않은 그《오빠》였던것이다. 좀전에 아래층에서 만난 녀인과 그가 들고 온 사진들도 그와 동료들의 솜씨일것이다. 연희는 심기가 불편해하는 김현철을 위해 곽동수를 알게 된 사연과 그가 자기를 돕고있는 리유에 대하여 그리고 이번 홍콩려행의 동반자로 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실들에 대해서도 죄다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간청하듯 말했다.

《제발 절 믿어주세요. 동수오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신의를 지키는 좋은 사람이예요. 그리고 그는 정의와 진리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도 알고있어요. 그건 제가 보증할수 있어요.》

그의 말을 꺾지 않고 주의깊게 듣던 김현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난 연희씨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희씨가 믿는다면 그 동수라는 사람도 믿어보겠습니다.》

연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확 피여올랐다.

《그럼 동수오빠를 만나보시겠어요?》

김현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난 우선 생각을 좀 정리해보아야겠습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철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창문가에 기댄채 오래도록 서있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벅차올랐다. 연희의 그 진정이 눈물겹도록 고맙고 그로 하여 무등 행복스러웠다. 거의 들뜨다싶이 흥분하여 쏘파로 다가가던 그는 문득 손에 들고있는 미색의 봉투에 눈길이 갔다. 자기의 뒤를 쫓았다는 낯모를자들… 드디여 서울의 밤거리에서 자기를 공격했던자들이 얼굴을 드러낸것인가? 뒤를 로골적으로 쫓고있다는것은 서울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여기 홍콩에서 마무리지을수도 있다는 결단을 보여주는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위험하다. 어느 골목에서 서슬푸른 칼날이 옆구리에 박힐수도 있었고 무성권총의 탄알이 그의 가슴을 꿰뚫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자들이 나를 해치는것이 목적이였다면 새상점이 있는 분주스러운 그 거리에서 끝장을 볼수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은 감시목적에서 움직인다고 하였다. 무엇때문일가? 내 목숨을 노리는게 아니라는걸가? 아니다! 하고 김현철은 자기의 사고를 부정했다. 그들은 한개의 돌로 두마리의 새를 잡으려고 한다. 바로 김현철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그 순간에 김현철과 함께 그 자료까지도 깡그리 없애려고 하는것이다. 그자들은 바로 김현철이 자기들이 처리하지 못한 어떤 증거를 쥐는 그 순간을 노리고있는것이 분명했다. 그가 이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는 그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였다. 그것은 바로 래일이다!

김현철은 연희의 요청대로 곽동수의 도움을 받고싶었다. 이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노리는자들은 한두놈이 아니라 잘 째인 조직이였다. 게다가 자기가 조명이 환히 비치는 무대우에 홀로 서있다면 상대는 어둠속의 관람석에서 떼를 지어 그를 노려보고있었다.

김현철은 그들을 볼수 없지만 그를 노리는 적들은 그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고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에게는 자기처럼 믿을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참으로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는것이였다.

김현철은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듯 놀랐다. 만일 자기가 곽동수에게 손을 내민다면 어차피 연희도 이 사건에 말려들게 될것이다. 불쑥 리도희의 주름덮인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당부했었다. 더이상 연희를 이 사건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 그런데 지옥같은 곳으로 연희와 함께 갈 생각을 하다니…

(미련한 놈!)

김현철은 스스로 자기를 욕하며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연희는 김현철에게 안부인사를 하려고 방으로 전화를 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접수구에 문의했더니 그는 803호실 손님에게 전해주라고 한장의 비행기표를 남겨둔채 나갔다는것이였다.

연희는 당황했다. 급히 손전화기를 들어 김현철을 찾았으나 받지 않았다. 연희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곽동숩니다.》

연희는 다급히 말했다.

《현철씨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가 없어요.》

《그는 지금 홍콩섬으로 넘어가고있습니다. 다행히도 배를 탔습니다.》

《제가 따라가야겠습니다.》

《꼭 그래야 하겠습니까?》

《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곽동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보내겠습니다. 그 차를 타고 홍콩섬과 련결된 해저턴넬을 리용하면 인차 따라잡을수 있습니다.》

연희는 급히 방을 나와 호텔앞에서 차에 올랐다.

구룡반도에서 홍콩섬으로 넘어가는데는 두가지 통로가 있었다. 하나는 싼 가격의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가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바다밑으로 이어놓은 턴넬을 통과하는것이였다. 대개 홍콩으로 온 관광객들은 특유의 바다풍경을 즐기기 위해 배편을 리용하였다. 연희가 곽동수가 지적해준 부두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김현철은 배에서 내려서고있었다. 연희는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세련된 말투로 건넸다.

《홍콩섬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중국어로, 다음은 영어로, 그 다음은 조선어로 되풀이했다. 관광객들이 연희를 관광안내봉사원으로 여겼는지 힐끔힐끔 돌아보며 지나쳤다. 아연해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던 김현철은 허허 웃고말았다.

《난 정말 철저하게 감시당하고있었군요.》

연희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렵게 여기 홍콩까지 왔어요. 그런데 왜 저를 기어이 따돌리려고 하세요?》

김현철은 너그럽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때가 올겁니다. 그때 함께 다니면 돼죠.》

《지금이 그럴 때예요.》

연희가 먼저 승용차의 뒤문을 열며 오를것을 권했다.

뒤좌석에 앉은 김현철이 운전사에게 말했다.

《우린 호텔로 돌아가야 합니다.》

연희가 눈이 둥그래서 쳐다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호텔 접수구에 비행기표를 맡겼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길로 홍콩을 떠나십시오. 단장에게 사정이 생겼다고 말했었지만… 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직접 연희씨를 바래워야겠습니다.》

《오늘 오찬으로 대표단의 공식일정도 끝나지 않는가요?》

김현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습니다. 공식일정이 끝나고 다들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미 며칠간 관광을 더 하다가 돌아가겠다고 얘기해놓았습니다. 신문사에 보낼 원고는 어제 밤에 미리 전송했습니다.》

《대표단이 떠나버리면…》

연희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명백히 표적으로 남아있게 되겠지요?》

《일반관광객이 될테니 그만큼 위험이 커지겠지요. 그래서 연희씨는 더욱 내곁에 있으면 안됩니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현철씬… 정말 모질군요.》

김현철은 덤덤히 말을 계속했다.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는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연희씨가 무사히 돌아가는것입니다.》

그는 연희가 돌아갈수 있도록 여유를 두는것을 잊지 않았다.

《만일에 말입니다. 연희씨가 돌아간다면 말입니다. … 내가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곽동수라는 사람을 만나겠습니다. 그에게 내가 진행해온 일들과 그동안 겪은 사연들, 이제 겪게 될지도 모를 위험들에 대해서 알려주겠습니다. 그래도 그가 나를 돕겠다고 한다면 나는 고맙게 그의 협조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연희씨가 이곳을 떠나야만 이루어질것입니다. 연희씨가 그냥 이곳에 남아있겠다면 별수없이 나는 자취를 감추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감시를 해온다고 해도 따돌릴 자신이 있습니다.》

김현철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있었다. 연희는 그의 옆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전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한가지만은 꼭 약속해주세요.》

연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게 감아쥐고 새끼손가락을 빠끔히 세웠는데 그 희고 귀여운 주먹이 바르르 떨고있었다.

《한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반드시 성한 몸으로 돌아오겠다고요!》

김현철은 연희의 작은 주먹을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연희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비행장에서 수평승강대로 이동하는 그의 모습을 김현철은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무사히 하늘로 날아오른 뒤에야 그는 전화기를 들고 연희가 알려준 번호를 눌렀다.

《김현철입니다. 곽동수씨를 만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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