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4

 

홍콩으로 가는 려객기는 상공을 날고있었다. 구름속에 들어가니 동체가 가볍게 진동하는것이 느껴졌다. 두터운 기창너머로 망망한 바다가 보였다.

김현철은 드디여 홍콩으로 가고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홍콩은 전혀 생소한 곳이 아니였다. 재작년 5월 중순경에도 신문사에서 조직한 취재차로 다녀왔었다. 그때는 홍콩의 무더위와 습식한증탕이나 다름없는 높은 습도에 헐떡거리면서 며칠간을 고생속에 지냈다. 그리고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맥을 짚어보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셨군요. 김기자 체질에 홍콩처럼 습도가 높고 무더운 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이런 충고를 주더니 복잡한 약처방을 떼주었었다. 그 고달픈 일들이 어제런듯 삼삼하고 홍콩이라면 거부감부터 느끼던 그였으나 어쩔수없이 지금 그곳으로 가고있다. 지금은 11월말이니 그때보다는 좀 나으리라는 일종의 기대감으로 속을 달랠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날씨보다 김현철을 긴장하게 하는것은 홍콩에서의 사건취재였다. 아직까지는 무엇이, 어떤것이 자기를 기다리고있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이번 출장은 최세진의 도움으로 이루어진것이였다. 현철에게서 경제실무대표단의 수행기자로서 홍콩에 가는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말을 들은 그가 외교통상부에 줄을 놓아 성사시켜주었던것이다.

최세진은 미군장갑차녀중생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서 매일과 같이 벌어지는 추모행사와 반미초불시위때문에 몸을 뺄수가 없어 위험하고도 어려운 길을 홀로 보내게 되는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량해를 구하였다.

김현철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었다. 6월 중순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장갑차가 북침전쟁연습도중에 백주에 길을 가던 두명의 녀학생들을 깔아죽인 사건은 사람들의 두뇌를 가지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천인공노할 만행이였다.

그 다음날로 충청지역의 대학총학생회련합이 항의성명을 발표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처에서 이 전대미문의 야만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들이 련쇄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의 립장표명에 이어 여야를 포함한 진보세력들이 대국민합동보고대회를 열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제8차 반미련대집회에서는 10만인 항의서명운동선포식이 진행되였고 수많은 시민단체들을 망라한 미군장갑차녀중생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된 후 반미투쟁은 날과 달을 이어 나날이 격렬히 고조되여갔다. 그런데 현지의 미군법원이 공무집행중의 불상사라는 리유로 미군장갑차 운전사에게 무죄판결을 내리자 민중의 분노는 드디여 활화산으로 폭발하고야말았다.

서울 광화문주변은 밤추위도 무릅쓰고 반미초불시위에 참가한 대중들로 초불바다를 이루었다. 수천수만에 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 지어 초, 중등학교 학생들과 유모차를 앞세운 가정주부들도 달려나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선동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구호가 새겨진 표말들과 초불을 들고 한결같이 웨쳤다.

《민족자주!》 《미군살인자처벌!》 《미군철수!》 《미국반대!》

초불시위는 추모의 성격으로부터 반미로 급속히 전환되였으며 이것은 누구도 감히 거스를수 없는 대세로 확대되여갔다.

미군사단장의 사과표명이나 저희 대통령의 위임에 따른 미국대사의 《유감》 같은것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과의 우호관계증진을 《대선》공약의 기본으로 내걸었던 보수계 야당후보들까지도 황황히 공약을 재검토한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였다. 명동일보사의 동료기자들도 시위현장으로 달려나갔다.

최세진은 김현철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민심이라는거지. 반세기이상 쌓이고쌓였던 민족적울분과 통한의 폭발이라는걸세. 지금까지 이 땅의 해방자, 우방국, 혈맹관계로 미화분식되고 우상화되여온 악마의 흉체가 백일하에 드러난것이지. 이제 두고보게. 이 도도한 반미자주의 흐름이 어떤 새 력사를 새기는가를!…》

그는 이제 곧 미군장갑차녀중생사망사건 싸이버범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근 20여개에 달하는 지역위원회와 해외위원회가 구성된다고 하면서 그 목적은 워싱톤의 백악관홈페지를 상대로 반미싸이버시위를 진행하는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김현철은 피가 끓었다. 하지만 이런 격동적인 시기에 그는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의 심정을 엿보기라도 한듯 최세진은 말했다.

《쓸데없는 고민은 말게. 자넨 벌써 이 민심의 대하에 합류하지 않았나! 이제 자네가 밝혀낼 진실 역시 이 땅의 무고한 생명들에게 수십년동안이나 참혹한 노예의 운명과 분렬의 슬픔을 강요해온 파쑈독재와 그 배후조종자를 폭로하고 단죄하는 고발장이 될거네.》

그 바쁜 속에서도 비행장에 바래주러 나온 그는 주의를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것도 물론 중요하네. 하지만 신변안전에도 주의를 돌려야 하네. 특히 그곳에 가서 그 누구도 믿지 말고 오직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부득이 한 경우에는 지체하지 말고 되돌아서게. 알겠나?》

종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듯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진정에 코마루가 울렸으나 김현철은 시치미를 떼고 념려말라며 배심좋은 웃음을 지었다. …

비행기는 정상고도를 유지하며 날고있었다.

김현철은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이제 홍콩에서 진행할 일들을 그려보고있었다. 문제는 문태석의 고발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가 하는것이였다. 만일 처음부터 꾸며낸것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아올수 있었다.

(과연 이 사건속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가? 이제 홍콩에 가면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할가?)

무엇보다도 홍콩경찰들의 도움을 받는것이 필수적일것 같았다.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한다. 하지만 유능한 수사관들은 피해자의 죽음에서 살인자에 대한 고발을 듣는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만큼 당시 현장을 목격하고 사건을 취급한 홍콩경찰의 수사내용을 확보하는것이 중요했다.

문득 김현철은 자기가 아직 기자일반의 사유령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홍콩에서 발생했던 10여년전의 살인사건을 해명하여 기사로 옮기는것과 과거의 흑막을 파헤쳐 력사의 진실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심어주는것과는 아득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한토막의 탐방기사를 쓰는데는 한쪼박의 단서가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력사의 진실을 밝히는데서는 그 한쪼박의 단서가 출발점으로 될뿐이다. 진실에는 자그마한 의혹도 가설도 통하지 않는다.

김현철은 눈길을 기창으로 돌렸다. 기창너머로 창공에 뜬 태양의 광채가 파란 공간속에서 빛나고있었다. 푸른 날바다우에 떠있는 작은 점같은 기선이 보이였다. 그런 점들이 점점 늘어갔다.

홍콩이 바야흐로 가까워오고있다는것을 느끼고있는 그에게 불쑥 연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다른것도 아니고 딱딱한 병원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머리를 약간 기울인채 까딱까딱 말뚝잠을 자던 귀여운 모습이였다.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그의 심장속으로 살그머니 슴배여들었다. 그 기운은 어느새 불꽃으로 확 피여올라 김현철의 가슴을 따스하게 덥혀주고있었다.

그는 느닷없이 심중을 촉촉히 적시는것만 같은 야릇한 감정을 흐뭇하게 맛보았다. 이 순간 연희와 인연을 맺게 된 모든것이 왜서인지 즐거워났다. 외등아래서 마뜩지 않게 흘겨보던 모습도 여느때없이 귀여웠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자기에게 신문을 던지던 뿔난 인상이며 보험재판에 나서겠다는 자기를 경멸하고 조롱하던 그 표정도 가슴이 아릿하게 사랑스러웠다. 이전에는 그토록 모멸감을 안겨주던 모든 추억들이 어느새 아름다운 꿈처럼 달콤하게 채색되여있었다.

김현철은 별안간 그가 못견디게 보고싶어졌다. 그의 청순한 목소리를 듣고싶었다. 아무 말이든 좋았다. 칭찬이 아니라 모욕적인 말이라도 듣고싶었다.

(지금 뭘 하고있을가?)

김현철은 시계를 얼핏 보았다.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있을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내가 홍콩으로 가고있다는걸 알면 연희가 무척 놀라겠지?)

김현철은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이 휘둥그래질 그의 모습이 상상되여 빙긋이 웃었다.

어제 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김현철은 하마트면 홍콩으로 가게 된다는것을 실토할번 하였다. 통화가 끝난 후 그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내리쓸었다. 라주정신병원에서 돌아올 때 마지막으로 그루박듯 하던 연희의 말투와 억양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있었다.

《…전 사건취재를 여기서 그만두었으면 해요.》

그의 목소리에는 김현철에 대한 걱정이 가득차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김현철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진심으로 념려해주는 처녀의 그 마음은 귀한 진주와도 바꿀수 없는것이였다.

(제발 다른 일이 없어야 하겠는데…)

대표단의 공식일정은 2박3일이였다. 이 기간에 김현철은 목적한 일들을 모두 끝내야 한다. 만일에 그가 정보기관이 개입한 증거를 쥐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로정에는 위험이 동반되게 될것이다. 비록 경제실무대표단의 기자라는 모자를 쓰고가지만 위험이 덜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지의 홍콩경찰들의 협조에 전적인 기대를 거는것도 일종의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김현철은 인차 항공역사밖으로 나왔다. 벌써부터 번잡한 홍콩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절기로 보면 초겨울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별로 추운것을 느낄수가 없었다. 양산을 들고 지나가는 중국의 전통옷차림을 한 처녀며 해빛에 탄 붉은 얼굴로 광고판을 들여다보는 혼혈인소년 등이 눈길을 끌었다.

김현철은 초기에 계획한대로 우선 홍콩에 주재하고있는 자기네 신문사의 특파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홍콩에 가게 되면 많이 도와달라고 미리 전화로 약속했었다.

긴 신호음이 갔다. 그런데 특파기자는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세번째만에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무등 반가웠다.

《김현철입니다. 지금 홍콩에 도착하였습니다.》

특파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내가 마중나갔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선배님이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이상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김현철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아니야.》

《그래요? 그런데 선배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군요. 어디 편찮습니까?》

《그런게 아니고… 어쩌지? 나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홍콩에 없거던.》

《예?!》

《정말 미안해. 김기자가 홍콩에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자네의 일을 잘 도와주고싶었는데… 좀 좋지 않은… 아니, 아니야.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신경쓸것 없어.》

두서없는 이야기가 김현철을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전화가 끊어진듯싶더니 다시 이어졌다.

《그리구 말이야. 요즘 홍콩의 거리들이 좀 어수선하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자꾸 나다니지 말고 호텔에 조용히 있으면서 대표단취재나 마치고 돌아가는게 좋을것 같아. 선배로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참고하라구. 후환이 없기를 바라네. 김기자 일도 잘되고…》

통화는 끊어졌다.

김현철은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했던 약속을 어길 정도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였다. 어떤 경고나 협박이 있은지도 모른다. 하다면 이미 어떤자들이 자기를 노리고 이곳까지 손을 뻗쳤다는것이 아닌가? 이것도 모종의 위협일가? 김현철은 외롭고 쓸쓸해났다. 그 특파기자는 홍콩에서 그가 믿고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그의 방조는 바랄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타박타박 다가왔다. 김현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곱살하게 생긴 20대 중반의 녀인이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낯선 녀인이였다.

《서울에서 오시는분이 아닙니까?》

《예, 그런데 누구십니까?》

김현철은 인사를 받으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녀인은 어줍은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전 이곳에서 사는 교민입니다. 보매 여기 홍콩에 처음 오시는분 같아서요. 이곳은 번화하고 경찰들도 많지만 자주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군 합니다. 집단폭행이나 패싸움 같은것도 가끔 벌어지는데 그런데 말려들면 괜히 크게 다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택시강도들도 많아졌다더군요.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따기를 맞힐 념려가 좀 있어도 대중교통수단을 리용하는편이 이곳에 오는분들에게는 더 안전하답니다. 미안합니다. 쓸데없이 참견해서…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현철은 천천히 멀어져가는 녀인의 뒤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녀인이였다. 처음에는 관광안내를 맡으려는줄 알고 사양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난 충고를 제잡담하고는 떠나가버린다. 김현철은 그 녀인이 인파속으로 사라진 후에야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태전 봄에 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것은 없어보였다. 그런데도 왜서인지 생소한 느낌이 강렬했다. 과연 이곳에서 어떤 이상한것이 자기를 기다리는것은 아닌지…

순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되돌아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곧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내짚었다.

그는 방금전의 그 녀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말투나 행동거지를 미루어보아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했던것 같지는 않았다. 연희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웃음이 남실거리는 밝은 얼굴이였다. 그 모습이 김현철이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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