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2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거리에는 각이한 네온등들이 번쩍거렸다. 연희는 한적한 차집에 홀로 앉아 창밖을 보고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연희는 세번째로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확인해보아야겠어.) 연희는 마음을 다잡았다.

《김현철입니다.》

수화구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연희예요.》

인사말이 오간 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전화를 건 사람이 먼저 용건을 이야기하는게 례의였으나 연희는 한순간 꼭지를 떼려던 말을 잊은것이였다.

김현철은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바쁘십니까?》

잠시 호흡을 길게 뽑고나서 김현철이 대답했다.

《사흘전부터 신문사로 출근하고있습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일이 꽤 많이 밀려있더군요.》

《예, 그렇겠지요.》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목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 선배님이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요. 그저 좀…》

순간 연희의 머리속으로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현철씨, 래일 시간을 좀 내주실수 없을가요? 저의 아버지랑 다시 낚시질을 가셨으면 하는데요.》

《래일요? 래일은 안될것 같습니다. 취재때문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럼 모레는요?》

《모레도 안될것 같은데… 한 닷새후에는 제가 시간을 낼수 있습니다.》

《그럼 닷새후로 정하지요. 약속을 어기면 안됩니다.》

《예, 꼭 지키겠습니다.》

숨을 돌리고난 연희는 얼핏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물었다.

《그런데 먼곳을 다녀와야 하는가요?》

《그리 먼곳은 아닙니다.》

《혹시 그 문태석이란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건은 접었습니다.》

김현철은 딱 잘라맸다. 연희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렇군요. 저와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통화를 끊고난 연희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좀전에 명동일보사의 녀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이전에 김현철기자가 해외로 출장가는 경우 알려달라고 하였지요? 래일 아침에 김기자가 홍콩으로 갑니다. 갑작스레 조직된 일인데… 경제실무대표단을 수행하는 기자단의 성원으로 가게 됩니다. 김기자의 이름은 우에서 직접 찍어내려왔다고 해요. 이런 일은 참 드문 일인데… 그래서 결국 경제부도 아닌 사회부소속의 김기자가 가게 되였다나봐요.》

그 소식을 전해듣고 연희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홍콩이였다. 그 녀기자에게 김현철의 움직임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한것도 실은 홍콩으로 갈가봐 념려되여서였다. 연희는 방금전에 전화로 나눈 대화를 깐깐히 되새겨보았다. 김현철은 문태석에 대해서는 거의 잊은듯이 말하고있었다.

(그래, 우연한 일치일수도 있어.)

그런데 김현철은 어째서 자기가 가는 곳은 먼곳이 아니라고 하였을가? 기자인 그에게는 바다너머에 있는 홍콩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였기때문일가? 혹시 알려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가? 아니면 나에게 숨기고싶어서일가?

갑자기 뇌리를 치는 예감이 있었다.

(그래, 우연이라고 하자. 그러나 현철씨는 다른 곳도 아닌 홍콩으로 가고있어. 지금까지 홍콩에서의 살인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온 그가 사건현장에까지 접근한 기회인데 과연 가만있을수 있을가. 만일 그가 다시 사건취재에 뛰여든다면…)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팔을 어깨에 맨 철부지소년같은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나타났다. 거기에다가 스산한 꿈장면까지 겹쳐들었다. 마침내 연희는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새 안녕하셨어요? 미안해요. 그동안 련락을 끊고있어서… 지금 좀 만날수 없을가요?》

곽동수와의 통화가 있은 후 연희는 자기가 참으로 리기적이라고 생각되였다. 연희는 차 한잔을 다시 주문하고나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해전 이맘때였다. 그날도 회사에서 입금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연희의 앞을 낯선 두사람이 불쑥 가로막아섰다. 구척장신이라더니 가로수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는 사나이들이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있었는데 쩍 벌어진 그들의 어깨가 어쩐지 의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장연희아가씨지요?》

《누구신데요?》

묻는 말이 자연히 떨려났다. 곁으로 낯선 승용차가 스르르 미끄러져왔다.

《저희 형님이 모셔오랍니다.》

《형님이 누군데요?》

《곽동수형님이십니다.》

《곽동수? …》 하고 기억을 더듬던 연희는 저도 모르게 《아, 그 조폭(조직폭력배의 략칭)…》 하고 말을 뽑다가 얼른 말꼭지를 삼켜버렸다.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두 사나이를 지켜보았으나 그들은 다행히도 마지막말을 듣지 못한듯 목석같이 서있었다.

연희는 다소 마음을 진정하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차에 올랐다. 호화로운 식당앞에서 내리니 다부진 사나이가 반가운 미소를 짓고 마주 오고있었다.

그가 이끄는대로 식탁에 마주앉은 연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출옥하셨는가요?》

《얼마전에 나왔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보다싶이 괜찮습니다.》

폭력조직의 작은 두령이였던 곽동수는 계파싸움에 말려들었다가 폭행치사죄로 감옥에 갇혔었다.

음식을 권하면서 곽동수는 진정을 담아 말했다.

《아가씨가 보험에 들라고 권고할 때는 장난삼아 들어본건데 그게 저의 처와 아기를 살릴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더우기 아가씨는 우리 가정을 구원해준 은인입니다.》

연희는 상냥하게 말을 받았다.

《뭐 별로 큰 도움이라고 할수도 없는걸요.》

사실 곽동수가 폭력배인줄은 알지도 못하고 결혼하였던 그의 처는 아기를 임신한 상태로 리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본인보다도 친가부모들이 강요했던것이다. 연약한 녀인은 리혼을 하였으나 태아를 살리기 위해 친정을 뛰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곽동수의 부하들은 그의 리혼을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로 보고 해산한 후에도 돌봐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일로 곽동수의 개인구좌도 이미 동결된 상태였다. 그런 속에서 곽동수의 처와 아기를 살린것은 리혼을 하는 경우 보상되는 작은 보험금이였다.

《연희씨에게 큰 부담을 끼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험금도 연희씨가 노력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받지 못할번 했다더군요.》

《보험분쟁은 사사건건 제기된답니다.》

연희는 심상한듯이 말했으나 실상은 쉽지 않은 결정이였다.

사실 조직폭력배들과 그의 가족들은 보험금지불대상에서 제외되고있었다. 연희도 보험가입수속을 해줄 당시에는 곽동수가 폭력배인줄을 전혀 몰랐었다. 그러니 기만당한 연희에게는 곽동수의 안해에게 반드시 보험금을 지불해주어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리 행동했다. 어쩌면 그 돈때문에 그자신이 보험회사에서 쫓겨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신한 몸으로 생계비와 해산비, 어린이생육비까지 마련해보려고 궂은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고 아득바득 애를 쓰는 임신부를 외면할수 없었다. 그 연약한 임신부의 모습에서 이전날의 자기 어머니를 보았던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기의 생을 줄일 각오를 가지고 연희를 낳았다고 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같은 모성애가 아니였다면 그는 결코 이 세상에 태여날수도 없었을것이다. 연희는 보험회사에서 해고당하는것은 물론 어쩌면 회사측에서 사기협잡건으로 자기를 고소할수 있다는것도 각오하고 미친듯이 뛰여다니며 보험금전액을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때 보험회사의 동료들은 한결같이 연희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연희의 피타는 노력에 의해 지불된 보험금으로 녀인의 해산비와 어린이생육비를 얼마간 충당할수 있었다.

곽동수의 처는 연희에게 자기와 아기를 살려준 은인이라며 눈물을 흘렸었다. 아마도 곽동수는 감방에 있으면서도 이런 사실들을 전해들은 모양이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

연희가 물었다.

《차차 일을 정리하렵니다.》

곽동수는 고개를 연희쪽으로 수그리고 말했다.

《실은 어려서부터 배운것이란 주먹질뿐이고 또 가난과 무권리를 유일한 유산으로 물려받은 몸이라 그 길밖에는 살길이 없었지요. 그 길만이 자신을 지켜낼수 있고 약자로부터 강자가 되는 길이라고 위안하기도 했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돈과 권력이 없으면 숨도 못 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런데 이번에 꼼짝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연희씨의 방조를 받고보니 정말 생각되는바가 많았습니다. 비록 늦은감이 있지만 인간의 순정과 도리를 되찾고 가엾고 불행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연희씨 같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도 가지게 되였습니다. 제 반드시 의롭고 떳떳한 사내가 되여 아기와 처에게로 돌아가렵니다. 제 안해와 아기를 살려준 연희씨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인데 곽동수는 아마도 연희의 도움을 인생의 큰 빚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연희가 난처한 일에 맞다들릴 때마다 어느새 알아채고 솔선 도와나서군 하였던것이다.

연희도 그것이 고마왔지만 그것이 점차 반복되고나니 도리여 그에게 빚지는 심정이였다. 몇달전에도 곽동수는 연희를 대신하여 많은 액수의 현금을 사망한 택시운전사의 가족에게 전해주었다. 그것이 곽동수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가 하는것은 연희도 모르지 않았다. 그때 연희는 자기가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우에 얹혀진 돌과 같은 존재로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촉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출옥하자바람으로 인차 단란한 가정을 되찾겠다던 초기의 심정과는 달리 곽동수는 다시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드는것 같았고 그것이 꼭 자기때문인듯싶었다. 그래서 우정 그를 멀리할 결심을 내렸고 련락도 끊고 지냈다. 그런데 김현철이 홍콩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지금 도움을 청할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 현실이 연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

《홍콩말입니까?》

원체 과묵한편인 곽동수는 연희의 의중을 떠보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예. 어쩌면 제가 래일 홍콩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희는 눈을 내려깔고 차분하게 말했다. 곽동수는 분명치 않은 그의 말투에 의아한듯싶었다.

연희가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꼭 가야 할것 같은데… 그런데 전 홍콩이 처음이라… 어쩌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전에는 오빠라고 부르기도 했던 곽동수가 보험금에 맞먹는 자금을 토의없이 택시운전사의 미망인에게 넘겨주었을 때 자기들의 관계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라고 랭정하게 선언했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자기가 일방적으로 규정해놓은 선을 제가 먼저 넘어서자니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전화련계마저 끊고 살아온터라 이전처럼 오빠라고 부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쩔지 몰라 입술을 감빨던 연희는 어정쩡하게 얼버무렸다.

《거기서 그곳을 잘 알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곳 형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도움이 될것 같기도 하고…》

곽동수는 연희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심정을 알만 합니다. 여기 서울만큼은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홍콩이라면 그리 낯선 곳은 아닙니다. 한때 저와 사업을 하던 친구들이 여러명 있으니까요.》

《다행이군요.》

연희는 애써 웃었다.

《홍콩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주십시오.》

《이야기만 들려주면 되겠습니까?》

속을 빤드름히 들여다보는것 같은 예리한 눈초리였다. 연희는 고개를 숙여 그 눈길을 피했다. 곽동수가 말을 이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다.》

연희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싶었다. 그러자 바로 곽동수가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차잔으로 코와 입주변을 가리다싶이 하고 힐끔힐끔 훔쳐보던 한 사내의 모습이 자꾸만 얼른거렸다. 김현철의 모습이였다. 그를 위해서 지금 연희는 자존심도 체면도 주저없이 내던지고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철면피한이 되였지? 무엇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하지만 연희의 입에서는 왕청같은 요구가 흘러나왔다.

《될수만 있다면 저랑 같이 홍콩에 가주었으면 합니다.》

《그냥 함께 가면 됩니까?》

곽동수가 거침없이 물었다. 연희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강잉히 속을 누르며 말했다.

《한사람을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갑자르다가 김현철에 대해서와 그가 겪은 일 그리고 아버지와 그와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곽동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래일 비행장에서 뵙겠습니다.》

극히 짧은 대답이여서 연희는 재차 확인해야 했다.

《도와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만 내 식대로 도울것입니다.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드실수도 있겠지만… 김기자가 손톱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만은 약속하겠습니다.》

곽동수가 떠나간 후에도 연희는 오래도록 홀로 앉아있었다. 울고싶은 심정이였다. 애써 부정하고싶지만 김현철이 홍콩으로 가는 중요한 리유의 하나가 《랍북미수》사건의 증거를 찾아내려는것이라고 확신하고있었다. 그리고 김현철의 생명을 노리는자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으리라는것도 명백했다. 그로부터 오는 불안감과 근심걱정이 끝내 곽동수에게 손을 내밀게 하였던것이다. 곽동수는 자기식으로 김현철을 돕는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기식이란 무엇인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곽동수는 한가지만은 약속하지 않았는가. 김현철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겠다고 했던것이다! 과정이 어떻든 그렇게만 되면 되는것이다. 연희는 병상에 누워있는 김현철을 다시 보고싶지 않았고 꿈속에서처럼 차거운 거리바닥에 선지피를 뿌리고 쓰러진 모습 같은것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래서 김현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없이 다할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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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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