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1

 

박영준은 자기의 이전 상관이 걸어온 전화를 사무실에서 받았다. 정보원의 국장인 그가 회사 아래층에 있는 차집에서 잠간 만나자고 하였다. 박영준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 하여 상면하지 않는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닐것 같았다. 또 기구조정을 구실로 토사구팽하듯 정보원에서 내쫓았던 그가 뭐라고 지껄여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박영준은 부러 늑장을 부리며 차집으로 내려왔다.

검은 안경을 쓰고 까치다리를 한채로 식어가는 차잔을 앞에 놓고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우고있던 국장은 박영준이 문으로 들어서자 불쑥 일어나 마주나왔다. 마치도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옆으로 지나치면서 넌지시《따라오게.》라는 말을 던지는것이였다. 흡사 이전 부하를 대하듯 하는 그 버릇이 괘씸하였지만 회사 가까운 곳에서 정보기관의 고위인물을 만난다는것이 속에 걸려 박영준은 누군가를 찾는것처럼 차탁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되돌아나갔다.

그가 차집문을 나서자 검은 승용차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차에 오르자 국장은 삵의 웃음을 짓고 쳐다보았다.

《뜻밖일테지?》

차안에는 특수가림막이 있어서 뒤좌석에서는 앞을 볼수 있어도 앞좌석의 운전수나 경호원은 뒤를 볼수도 없고 뒤에서 나누는 얘기를 엿들을수도 없었다.

《큰집을 떠나니 꽤 살만 한게로군. 제꺽 회사도 하나 내오고… 내가 잘못 본것은 아닌가?》

묻고있지만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준은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잠자코 있었다.

《아직도 날 원망하오?》

어쩌는가 보자고 배포유하게 나온 박영준이였지만 옛 상전을 맞대고 그의 살가운 목소리를 듣자 별안간 섬찍했다. 잘못 걸려들었다고 자책하며 박영준은 머리를 조아렸다.

《다 제가 모자란탓입니다. 어찌 국장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좋구. …》

국장은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자네도 고육지계라는 말을 알테지?》

《고육지계라 하심은…》

《자네도 바쁠테니 짧게 말하겠네. 자네의 해임은 우리의 전략에 따른거였어. 조대풍이네 사람들이 정보원에 기웃거린다는 정보가 있었지. 그리고 그들이 이번 대선에 참여할 예정이라는건 이미 알고있었구. 조대풍은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바쁘게 신당을 내왔거던. 그동안 조대풍이 인기를 높이기 위해 벌려놓는 일들을 보면 역시 옛 안기부장의 솜씨가 다르더군. 정계에서는 그가 대통령선거에 나서는것은 무리라고들 하였네만 우리는 달리 보았지. 이런걸 자네들은 천리혜안이라고 부르던가? … 그런데 말이야. 궁금한것은 조대풍이 다른건 몰라도 자기보다 정치경륜이 월등한 대선후보들을 어떻게 제쳐놓으려는가 하는것이네. 그럼 조대풍의 비상카드가 뭔지 알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지. 공무원으로서 로골적인 선거개입은 위법이니까. … 그렇다고 손 붙들어매고 앉아있다가 돌을 얻어맞을수도 없는노릇 아닌가? 조대풍이네 사람들을 속이자니 어쩔수없이 자네를 해임하는 제스츄어를 쓰지 않을수 없었네. 이외에 다른 의도는 없었으니 자네가 넓게 리해하게.》

박영준은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그 우리라는분들은 대체 누구들입니까?》

박영준이 물었으나 국장은 그쯤 알라는듯이 대답을 피했다. 박영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충 맥을 짚으면 조대풍의 수하에 박아넣기 위해서 자기를 해임시켰다는 소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는 식의 짜맞추기가 아닐가. 하지만 박영준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뜻은 십분 리해되지만 그걸 왜 지금 제게 알려주십니까?》

《그새 머리가 둔해졌구만. 대통령선거날까지는 이제 두달정도 남았는가! 선거가 끝나면 곧 큰집으로 복귀하도록 해. 그동안은 조대풍을 위해 열심히 뛰고… 대신 이제부터는 내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게.》

《그러니 정보원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조대풍을 밀어붙이렵니까?》

《난 누구라는 특정후보를 지목하지 않았네. 그리고 우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후보는 누구나 다 지지해. 다만 무게를 가늠해보며 조절하는거지. 그렇다고 누워 홍시 떨어지길 기다릴 멋이야 없지.》

《…》

《뛰다보면 내 손도 필요할걸세. 즉시 알리라구. 힘껏 도와줄테니…》

국장은 박영준의 어깨를 한번 툭 치는것으로 작별인사를 남기고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박영준을 떨궈두고 차는 뺑소니를 치듯 사라졌다. 간판들을 보니 자기의 회사와 한 구획을 사이에 두고있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박영준의 마음은 기쁘다기보다 찜찜했다. 이러다가는 두 총알에 맞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하나도 뿌리칠수 없었다.

만약에 조대풍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소위 이 일을 직접 기획했다는자들은 박영준을 빗대고 나도 당신을 이렇게 도왔수다 하고 나서려는 모양이였다. 그렇게 되면 그자들은 최소한도 자기의 벼슬자리를 보존할지 모르나 박영준은 배신자로 조대풍이나 리기철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 저자들의 반대편에 선다는것은 무리한 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인 박영준은 자기도 흔히 쓰던 치졸한 수법을 직접 당하고보니 정말 너절하다는 기분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자들의 지시는 박영준에게 있어서 불가항력이였다. 그자들은 빠른 시일내에 조대풍의 선거전략의 진수를 뽑아낼것을 요구하고있다. 그런데 기밀중에도 최고의 기밀인 그것을 알아낸다는것이 정말 헐치 않을것이였다.

최상의 방도는 조대풍의 턱밑에 바싹 다가붙는것인데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그런 찰나에 별안간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김현철을 감시하던 부하에게서 그가 경제실무대표단의 수행기자로 홍콩으로 갈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던것이다.

박영준은 쾌재를 올렸다. 죽을 일이 생기면 살수가 생긴다더니 옛말 그른데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김현철이 홍콩으로 가는 리유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다만 1987년 홍콩에서 발생한 《랍북미수》사건의 내막을 추적하던 그가 홍콩으로 간다는 정보를 가지고 조대풍의 곁으로 접근할 구실이 생긴것이였다.

옛 병법에 《타초경사》라는것이 있다. 풀을 움직여 뱀을 놀라게 한 다음 그것을 잡는다는것인데 흔히 적정이 불명확할 때 쓰는 꽤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수 있었다.

박영준에게 있어서 현재 두려운 존재는 리기철이였다. 그러나 리기철이는 그를 그리 꺼려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무서워하는것은 조대풍뿐이였다. 그럼 조대풍이 꺼려하는것은 누구겠는가?

박영준은 다시한번 사색의 창끝을 집중했다. 이 사회에서 정치란것은 가까운 사람부터 밟고 올라가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정치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기의 비밀을 가장 잘 아는자 즉 최측근이 아니겠는가!

(그래, 조대풍이 리기철을 신뢰한다고는 하지만 그도 정계에 몸을 담근것만큼 일종의 경계심을 가지고있을것이다. 더우기 지금과 같이 예민한 시기에는 자기 보안에 더 큰 신경을 쓰기마련이다.)

조대풍의 선거전략은 그자신과 손발과도 같은 최측근만이 알고있을것이다. 그렇다고 후보당사자에게 선거전략을 직접 물을수는 없는노릇이다. 그러면 남은것은 최측근이라고 할수 있는 바로 리기철이였다. 조대풍과 리기철이가 서로 등을 돌리게 하면 최고기밀인 선거전략을 알아낼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기의 생사도 달려있었다.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는것만큼 쉽게 결단을 내릴 문제가 아니였다.

박영준은 부하들이 제출한 문건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홍콩에서 진행될 경제실무회담과 관련한 자료들과 수행기자단의 명단이였다. 이것이면 풀을 흔들어 뱀을 놀래우기에 충분하겠는가를 따져보다가 드디여 조대풍과 직접 만날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리간질이 최상의 방법이였다. 유세를 위해 주요도시들을 차례로 돌아야 하는 멀고도 련이은 《선거려행》으로 고달픔에 시달리고있는 조대풍에게 있어서 안기부장시절의 《랍북미수》사건에 대한 폭로기사가 준비되고있었다는 밀고는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것이였다.

《대체 무슨 말이야? 차근차근 다시 말해봐.》

박영준은 이전에 김현철이 자기 부장에게 제출했던 기사원고의 복사본을 조대풍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조대풍으로서는 자기의 재직기간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다 기억한다는것이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순간이지만 박영준이 말하는 그 사건이 자기에게 큰 역풍을 몰아올수 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그러니 자네 말뜻은 이 사건에 리기철이 관여되여있다는건가? 또 리기철이도 그 김현철인지 뭔지 하는 기자에 대해 알고있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박영준은 조대풍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이번에는 여당측 《대통령》후보진에서 뽑아낸 자료를 이야기했다.

《그뿐인가?》

조대풍이 덤덤히 묻자 박영준은 끙끙 갑자르다가 마지막 주패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문태석이 사장으로 되여있는 마카오의 유령회사가 실상은 리기철이 주도하는것이며 그 회사에서 지출된 조대풍의 선거비자금목록이 모두 그의 손에 장악되여있다는 정보였다. 결국 리기철은 암암리에 조대풍의 목에 걸 올가미를 준비하고있는셈이였다. 조대풍의 눈까풀이 푸들푸들 떨었다. 당장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뇌까렸다.

《잘 알았소. 자넨 그만 돌아가보게.》

박영준이 돌아간 후에도 조대풍은 장시간 혼자 있었다.

리기철을 자기의 수족처럼 여기면서도 경계해온 그였지만 박영준의 고발은 정말 뜻밖이였다. 다른 일들은 제쳐두고라도 문태석이라는자의 명의로 유령회사를 만들어 돈을 세척하면서 그 돈을 《대선》의 비자금으로 리용하고 그 목록이라는것을 비밀리에 정리하여 자기의 목을 조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시급히 조사해보아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눈섭에 붙은 불만 불이라고 하면서 발등에 떨어지는것을 등한시할수는 없었다. 바로 김현철이라는 기자나부랭이가 뚜지고있다는 사건추적이라는 장난질이 발등의 불이 될수 있었다.

조대풍은 어떻게 하면 하나의 돌을 던져 두마리의 새를 잡을것인가를 궁리하고 타산해보았다. 리기철에게 비자금목록이 있다는것을 알아냈으니 이제 남은것은 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그의 심복들을 달구어 찾아내여 없애버리면 될것이다. 그렇게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집행자들까지도 철저하게 골라낸 뒤에야 조대풍은 리기철을 호출했다.

리기철은 자기에게 이제 어떤 불덩이가 날아들지도 모른채 신심에 넘친 목소리로 보고하였다.

《저희들은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제 서울대학교의 박교수가 어르신네에 대한 지지를 공식표명하였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우리의 반대편에 섰었으나 대선후의 장관직을 거듭 약속하자 결국 우리 선거팀에 협조해나섰습니다. 이건 민심이 이미 어르신네를 따르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조대풍은 이전 같으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리기철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즐거웠을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민심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전략이야. 우리가 이미 세운 기존의 전략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내밀어야 해.》

《어김이 있겠습니까. 아마 모레쯤이면 군소정당출신의 민후보가 후보사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이 있을것입니다. 벌써 두번째입니다. 앞으로 남은 다섯사람 역시 민후보의 뒤를 따르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어르신네외에 여당과 제1야당의 후보들만 남게 됩니다.》

《그래그래, 기자회견전에 우선 후보를 만나 잘 설득해. 그래도 오랜 경륜을 가진 정치인이 아닌가. 그렇게 무작정 뒤통수를 치면 도리가 아니지. 설득해서 오히려 우리 편으로 돌려세워보게. 그것만이 그 사람의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길이라는것을 잘 납득시키는거야.》

조대풍은 고양이가 쥐를 동정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알았습니다.》

리기철이 머리를 조아리자 조대풍이 다시 물었다.

《여당은 어쩔텐가?》

《이전에 어르신네께서 지시하신대로 여당후보가 당선되는 경우에 대비해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선거투표결과가 발표된 직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자금법위반으로 걸어 여당후보의 당선무효화를 선언하게 될겁니다. 물론 지금부터 여당후보의 사상동향이 좌경용공이며 자유민주주의에 배치된다는 여론을 확산시켜나갈것입니다.》

《여당의 선거자금류출과 관련된 증거들은 빈틈없이 준비했겠지?》

《만전을 기하고있습니다.》

《그 증거들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그 좌경용공에로 몰아가는것이 기본이야. 그런 분야에서는 지난 시기 경륜을 많이 쌓아온 자네가 아닌가. 내 말의 뜻을 알겠나?》

《어르신네의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리기철을 주시하던 조대풍이 다시 불러세웠다.

《내가 자네에게 줄게 있네.》

조대풍은 박영준에게서 받은 자료들중에서 김현철과 관련된것만을 골라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것을 읽는 리기철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

《면목이 없습니다.》

조대풍은 리기철을 노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자가 인차 홍콩으로 간다!》

《예?!》

《아직까지 그것도 몰랐는가?!》

조대풍의 눈에서 린광이 번쩍했다.

《이제부터 자네는 모든 유세에서 손을 떼! 절대로 사람들의 눈앞에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해. 대신 당장 홍콩으로 가서 김현철인지 뭔지 하는 녀석의 입막음을 단단히 해.》

《반드시 다시는 입을 못 열게 하겠습니다.》

《여기보다는 해외에서 일처리를 하기가 쉬울수도 있어. 김현철인지 뭔지 하는 그 기자녀석뿐만아니라 같이 밀려다니는자들도 처리해. 다시는 허튼 나발을 불어대지 않도록 아가리를 찢고 혀를 끊어놔! 잊지 말아. 한번 헛수를 놓으면 수십년의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걸. 반항의 싹은 시작부터 잘라내야 한다! 이제 당장 떠나라.》

조대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자기의 비자금관리대장을 찾으려는 조대풍의 속궁리를 전혀 알수가 없는 리기철은 이미 자기가 태워버린줄로만 알고있었던 김현철의 기사원고사본을 으스러지게 구겨쥐였다. 개미 한마리가 뚝을 터치고 쥐 한마리가 큰 산을 무너뜨린 격이였다.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한명의 햇내기기자때문에 이런 멸시를 당하다니… 매돌에 갈아죽여도 성이 가라앉을것 같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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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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