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2 장 특종기사를 찾아서

27

 

의식을 잃은 김현철은 길가던 사람에게 발견되여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되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찾아왔다. 그가 겪은 봉변의 전말을 조사하고 당장 폭력배들을 붙잡아 응당한 징벌을 내린다고 장담하며 사라졌지만 예상했던대로 꿩 구워먹은 자리였다.

김현철이 입원한 다음날 저녁에 연희가 찾아왔다. 인천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그를 부지런히 호출했으나 다음날 새벽까지도 김현철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아침일찍 보험회사로 출근하기 바쁘게 신문사에 전화했더니 뜻밖에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다고 알려주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왼팔에는 키브스를 한데다가 가슴이 결려 얼굴을 찡그리는 김현철은 아픔을 감추지 못하는 키다리소년같이 애처로웠다. 그를 바라보는 연희의 얼굴표정에는 근심걱정과 미안함이 가득 실려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기에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이 정도일줄을 상상도 못했던것이였다. 더우기 그가 자기의 부탁을 들어주고 돌아오던 길에 당한 봉변이라 더 죄송스러웠다.

한손을 내밀어 붕대를 감은 그의 팔을 조심히 어루쓸던 연희가 물었다.

《몹시 아파요?》

《괜찮습니다.》

고통속에서도 웃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연희의 속을 더욱 저리게했다.

《저때문이예요. 제가 괜한 부탁을 해서 밤늦게 돌아오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거예요.》

자책하는 그 모습을 보며 김현철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이 꼴이 된게 연희씨와 무슨 상관입니까? 연희씨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큰 위험도 마다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지금 롱담을 할 겨를이 있어요? 이러다가 무슨 경을 치려고…》

《아닌게아니라 이보다 더 큰 졸경을 치를지도 모릅니다.》

《그건 무슨 의미예요?》

연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요? 우연히 싸움에 말려든게 아니였어요?》

김현철은 대답대신 천정만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를 기다리고있었다는것을 잘 안다. 그들은 다름아닌 자기의 이름까지 확인하고 달려들었다. 이상한것은 아무런 요구조건이 없다는것이다. 그는 《그러다 죽이겠다!》 하고 한 녀석이 뇌까린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그런즉 자기를 공격했던자들의 목적은 주먹을 휘둘러 기를 꺾자는것이 분명했다. 어떤 놈들일가? 개중에는 내가 알만 한 녀석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혹시 어두워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것은 아닐가. 막연한 속에서도 김현철은 장필성의 여러차례의 경고가 떠올랐다. 어딘가 숨어서 노리는 삵과 같은 놈들이 느닷없이 나타나 멱을 물어뜯을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명백히 알려주었다.

하다면 그가 암시하던 그림자들이 끝내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한걸가? 그렇다면 정말로 《랍북미수》사건에 련관된자들이 나타난걸가? 과연 어떤 자들일가? 무슨 목적이였을가? 혹시 문태석이 꾸민것일수도 있지 않을가? 다른 한편으로는 억이 막혔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한 대가가 바로 이런 폭행이라니… 별로 기대를 건것은 아니지만 신고를 받고 마지못해 나타나 시끄러운 인상으로 몇마디 묻고는 조서에 수표나 받는것으로 수사를 대치해버리는 경찰의 태도는 그의 가슴에서 울분이 끓게 했다. 민중우에 군림한 저런 권력의 하수인들에게 보호는커녕 갖은 우롱과 피해를 받아도 묵묵히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이 땅의 현실이 아니던가. 가난하고 무권리한 사람들은 아무리 정의롭다 해도 짓눌리우고 언제나 피해자가 되여야 하는 이 불공평한 사회… 분노가 모진 아픔을 누르며 가슴속에서 꾸역꾸역 괴여올랐다.

연희의 머루알같은 눈동자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금시 쏟아질듯 찰랑거렸다.

《조심하세요.》

《조심히 살란 말인가요?》

《무슨 일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걱정스러워요.》

김현철의 눈길은 허공을 바라보고있었다. 그 순간 왜 《랍북미수》사건의 취재에 연희를 끌어들였는가고 힐책하던 리도희의 목소리가 떠오른것이였다. 더이상 연희를 끌어들이지 말라! 이것이 헤여지면서 그가 한 당부였다. 분명 그도 김현철의 주위에 위험이 배회하리라는것을 예감하고있었다. 아니, 확신하고있었다. 해사하게 생긴 간호원이 다가와 연희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의사를 만나고 오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맞이한 의사는 환자와 어떤 관계인가고 묻고는 간호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환자의 보호자가 나타나면 데려오라고 했지 아무나 데려오라고 했는가?》

그의 무례한 행동이 무척 거슬렸으나 연희는 자기의 기분을 감추고 환자의 병상태에 대해 물었다. 의사는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머리만 설레설레 저었다.

연희는 속이 덜컹 하여 다시 물었다.

《생명이 위험한건 아니겠지요?》

《글쎄요. 아직까지는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여하간 경과를 지켜봐야 아는거고…》

의사는 말도 채 맺지 않고 책상우에서 병력서를 감아쥐고는 제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도 보호자가 아닌 사람과는 대상하지 않는다는 태도인듯싶었다. 하긴 치료비문제랑 협의해야 하는 조건에서 결정권이 없는 대상과 마주서있어야 시간랑비로 된다고 생각하고있을것이다.

연희는 의사의 무정한 행위에 속이 불끈했지만 물러서고말았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돈을 더 중시하는 세상이니 의사를 탓해선 무엇하랴싶어서였다.

무엇보다 법적으로 공인된 그의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연희는 언제인가 술에 취한 아버지와 그를 찾아갔을 때 전화련락을 취했던 양어머니라는 녀인이 생각났다. 지방 어디엔가 있다고 하였는데 아마 그에게는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연희도 그 녀인이 어디에서 사는지는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때 전화번호를 기억해두는건데 하고 생각하며 연희는 입원실로 돌아왔다.

연희가 다가오자 김현철이 물었다.

《의사가 왜 찾았습니까?》

연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보호자를 찾는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김현철의 속을 허빌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궁싯거리다가 입원비용때문에 찾았다고 하면서 자기가 물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김현철이 다급히 밀막았다.

《입원비용은 내가 처리합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쩐지 찬바람이 쌩 부는 딱딱한 말투였다. 연희는 그가 무엇인가를 오해하는듯싶어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제 말뜻은…》

《다 압니다.》

그는 연희의 말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잘라버렸다. 연희가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그가 말했다.

《바쁠텐데 돌아가보십시오.》

여전히 무정한 목소리였다. 연희는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곁에 있는게 불편한가요?》

《그런건 아니지만 공연한 수고를 끼치는것 같아서…》

연희는 자리를 잡고 다시 앉았다. 침대머리맡에 있는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아닌게아니라 텅 비여있었다. 그는 가져온 과일이며 당과류들을 차곡차곡 함에 넣고나서 물었다.

《무엇을 드실래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입에 대고싶지 않습니다.》

《입안이 쓰거울거예요. 그럴수록 잡숴야 해요.》

《주겠으면 술이나 한잔 주십시오.》

연희의 눈이 올롱해졌다.

《그건… 절 미워서 하는 말인가요?》

《허 참, 아닙니다. 속에서 불이 일어서 그럽니다.》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전 이만 돌아가겠어요. 치료를 잘 받으세요.》

작은 손가방을 걸치고 복도로 타박타박 걸어가던 연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며칠전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애정에 대해 추억하는 연희에게 그는 자기는 태여날 때부터 고아였다고, 그래서 부모들의 사랑이 어떤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퉁명스럽게 내쏘았었다. 그때도 그의 얼굴에는 지금과 같은 랭랭한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 내가 공연히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놓았어.)

연희는 입원비용을 물어주겠다던 자기의 말이 결국은 값싼 동정심으로 오인되여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점혈육도 없이 병상에서 외롭게 이밤을 홀로 보내야 하는것이였다.

(첫날밤이라 동통이 꽤 심할텐데…)

짙은 련민의 감정이 연희의 가슴을 비틀었다. 연희는 걸음을 돌렸다. 김현철은 되돌아온 연희를 의아하여 바라보았다. 연희는 그가 자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부러 빨간 입술우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깜빡 잊어먹은것이 생각나서 미안스러운대로 다시 들렸어요. 아직까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으셨지요?》

《예. 그런데 그걸 왜 지금…》

《그것 봐요.》 하고 연희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자기는 건강체라고 의료보험을 홀시하였지만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사고나 봉변을 당할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의료보험에 가입하면 여러가지로 편리하답니다. 이제부터 제가 그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어요.》

《이제말입니까? 밤이 퍽 깊었는데…》

김현철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희는 의자를 당겨 그의 침대곁에 바투 다가앉았다.

《전 일을 두고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제 일이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되는 일이기때문이죠.》

《그래도 사람들은 생명이 위험하면 의사부터 찾지 보험회사를 찾지는 않더군요.》

김현철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만만치 않게 응수했다.

《이제 제 말을 들으면 찾게 될거예요.》

살뜰하던 연희의 말투가 별안간 명령투로 바뀌였다.

이윽고 편안한 몸자세를 취한 그는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최근에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과 대상하면서 자기가 겪은 흥미있는 일화들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김현철은 이른새벽에 먼저 눈을 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연희가 침대곁의 의자에 앉은채로 말뚝잠을 자고있었다.

흰 살결, 선이 또렷한 붉은 입술, 긴 속눈섭… 자는 모습이 꼭 어린애같아 김현철은 빙그레 웃었다. 그가 진정으로 고마웠다. 연희가 아니였더라면 참으로 지루하였을 여름밤이였다. 그때문에 김현철은 간밤에 아마 일년동안의 웃음을 다 웃어보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별로 올 사람도, 간병해줄 다정한 친구도 없는 그였다. 물론 라경숙에게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눈물이 많고 잔근심도 많은 다심한 녀인이였기에 걱정만 끼칠가봐 부디 그에게 알리는것을 미루었던것이다. 아마도 라경숙은 지금 그가 지방출장을 나가있는줄로 알고있을지도 몰랐다.

《깼어요?》

연희의 목소리가 살뜰하게 울렸다. 김현철은 그가 마치 자는척 하면서 자기의 동정을 엿본것 같아 쑥스러웠다.

《출근 안합니까?》

《이제 하겠어요. 우선 아침식사를 하세요.》

《좀 있다 먹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는 연희에게 김현철이 당부했다.

《이젠 혼자 나다닐수 있으니 저녁마다 오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저녁에는 보험문건들을 잊지 않고 가져와야겠군요.》

연희가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김현철은 웃고말았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연희는 오군 했다. 며칠째 퇴근후면 꼭꼭 병실로 방실거리며 들어섰는데 그때마다 《오늘은 의료보험에 드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보험에 들기로 약속을 한게 언제인데 매번 서류들을 잊고 왔다고 핑게를 대였다. 김현철은 그것이 자기를 간병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럴수록 자기를 위로해주려는 연희의 노력이 눈물나도록 고마웠고 그런 그가 퍽 귀여웠다.

어느날 연희가 불쑥 말했다.

《참, 내가 잊은게 있어요.》

김현철은 웃으며 물었다.

《또 뭡니까?》

《우리가 제일 관심하는 사람이예요.》

《우리가 제일 관심하는 사람? …》

《문태석!》

김현철은 얼굴을 찡그렸다. 문태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끝으로 전류가 흐르는듯 쩌릿했던것이다.

《죽은 홍콩교민녀성의 남편!》

《떠들지 마십시오.》

김현철이 나직하게 당부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럽니까?》

연희는 으쓱한 태도였다.

《그 사람의 행처를 알아냈어요. 지금 라주정신병원에서 치료중이예요.》

뜻밖의 소식에 놀라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키던 김현철은 다친 가슴이 저려들어 어쩔수없이 신음소리를 냈다. 연희가 황급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 바로눕히였다.

김현철은 아픔을 참으며 되물었다.

《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 사람은 지금 마카오에 있을텐데…》

《실은요.》 하며 연희는 주머니에서 웬 종이장을 꺼내들었다.

《엊저녁에 자정이 지난 뒤에 한 간호원이 전해주라고 주더군요.》

라주정신병원에서 보낸 문서의 사본이였다. 병동을 수리하려고 하니 문태석환자를 당분간 귀가치료하던가 다른 병원으로 옮겼으면 한다는 통지서였다.

(그런데 이게 왜 내게 온걸가?)

김현철은 긴장하여 연희에게 물었다.

《이 문서를 전해준 간호원이 기억납니까?》

《처음 보는 간호원이였어요.》

《이제 보면 알아볼수 있겠습니까?》

《알아볼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해요?》

《아니, 아닙니다.》

그렇다. 그 간호원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왜 이 문서장이 자기의 손에 전해졌는가 하는것이다. 누군가가 문태석의 행처를 알리려고 했다. 그럼 밤중에 공격한자들은 누구이며 이 문서장을 보내온 미지의 인물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걸가?

《륵골 한개가 부러지고 두개가 금이 갔습니다. 팔도 골절되고 머리에 타박상이 있고… 다행히도 내장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부러진 륵골이 페를 찔렀더라면 죽지 않더라도 페인이 되였을지도 모릅니다. 불행중 다행입니다. 이 정도에서 완치되자면 최소한 석주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입원초기에 들은 의사의 이 말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안겨왔다. 누구들인지 알수 없으나 치료시간까지 비교적 정확히 타산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지켜보면서 이제 이삼일후에 퇴원할 그에게 문태석의 행방을 알려주고 다음 일정을 무언으로 가리켜주고있었다. 확실한것은 누군가가 자기가 취재를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문태석을 만날것을 바라고있다는것이였다.

위협과 추동이라는 두 상반되는 요구를 강요해오는자들은 누구인가? 무엇때문일가? 연희가 보험회사로 떠난 후 김현철은 외출복으로 바꿔입고 간신히 병원밖으로 나섰다.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우려는 찰나에 차 한대가 스르르 다가와 멎어섰다. 의아해서 안을 들여다보니 운전사곁에서 연희가 생글거리고있었다.

《전 라주로 가는 길인데 동행이라면 타시지요? 서울역전까지 무임승차로 봉사해드릴테니…》

이미 김현철의 인상에서 그곳으로 가려는 결심을 눈치챘던 모양이였다.

김현철은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연희가 자기곁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것이 명백한 이상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라주정신병원은 역전에서도 뻐스를 타고 퍼그나 가야 했다.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 병원에서는 입원병동을 보수하면서 보호자들이 데려가지 않은 환자들은 모두 강당에 밀집시켜놓고있었다. 말할수 없이 쓸쓸하고 음침하였으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으시시했다.

김현철이 아픈 몸을 추스리며 간신히 찾아낸 문태석의 몰골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들이 보호를 위해 마취주사를 놓아 눈의 동공이 거슴츠레하게 풀린데다가 안면근육신경마비까지 와서 도무지 사람의 꼴이 아니였다. 이전에 있은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것은 물론 제절로 걸을수도 없어서 밀차로 움직이며 치료운동실에 다니는 형편이였다.

《이 환자가 언제부터 이곳에서 치료받았습니까?》

김현철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장은 벌써 10여년전부터 마약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증으로 입원해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간 치료가 되는가싶으면 어느 통로로 마약을 입수했는지 감쪽같이 복용하여 도리여 병이 심해졌다는것이였다. 10여년전이라면 《랍북미수》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이 있은 직후일수도 있었다. 원장은 그외에는 더이상 해줄 말이 없는듯 했다. 김현철은 오래동안 문태석을 담당해온 간병원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과정에 뜻밖에도 그가 라경숙과의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뚱뚱하고 푸근해보이는 50대 중반가량의 간병원은 20여년전에 어느 수녀원에서 일한적이 있는데 그때 라경숙과 자주 만나 친숙해졌다는것이였다. 그 인연때문인지 간병원은 김현철의 질문에 성근하게 대답해주었다.

《문태석환자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 있었는데 환자와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김현철은 대뜸 긴장해졌다.

《남자인데 아주 흥미있는 사람입니다. 몇번 찾아왔었는데 그때마다 문태석환자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누굽니까? 왜 자기가 이 환자에게 관심을 돌리는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친척이나 친구는 아닙니까?》

《그건 알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한 간병원은 기억을 더듬고나서 말했다.

《그는 문태석의 죽은 처에 대해 잘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믿을수밖에 없었지요. 꽤 신사적인 사내였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그의 외모와 언변에서 그걸 느꼈지요. 그런데 무엇이 이상한지 압니까? 환자를 잘 안다면서도 환자를 위해서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음식도 선물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를 찾아와 물어볼뿐이였습니다.》

《대체로 무엇을 물어보았습니까?》

《그저 환자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미가 없는가 하는겁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김현철은 간병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예.》

김현철이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그 사람은 환자를 잘 알고있는것 같았지만 환자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환자는 병원에 오기 전에 있은 일들에 대해서도 아예 기억하지 못합니다.》

《환자가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것을 어떻게 압니까? 환자에게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해주었습니까?》

《아니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자신이 직접 환자가 기억력을 상실했다는것을 확인하려고 했으니까요. 내가 환자를 데리고 공원에 산보하러 나왔을 때 그는 몇번이나 환자의 곁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환자는 그에게 아무런 주의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김현철이 물었다.

《그럴수도 있지요.》 하고 간병원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매우 흥미있습니다.》

김현철은 자기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말했다.

《제가 한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인지 들어봐야 대답하죠.》 간병원은 조심스럽게 응수했다.

《제가 전화번호를 남겨놓겠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면 즉시에 전화를 걸어주십시오. 그 사람이 다녀간 다음이 아니라 즉시에 말입니다.》

《노력해보지요.》 하며 간병원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맥빠진 걸음으로 병원정문을 나오던 김현철은 불쑥 상처입은 가슴부위에 동통이 느껴져 상체를 비틀며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보수중인 정신병동의 음울한 형체가 보였다. 마치 그를 통쾌하게 비웃는것만 같았다. 이전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문태석은 그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줄수 없으며 아무런 증거도 내놓을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문태석을 찾아왔던 그 사람, 문태석의 죽은 안해와 잘 아는 사이라는 사람은 다를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혹시 그가 문태석의 행처를 자기에게 알려준 사람이 아닐가? 만일 그렇다면 왜 직접 찾아오지 않는것일가? 병원에서는 몰래 문태석에게 마약을 투입하는자가 있다고 하였다. 간병원은 문태석을 찾아오는 사람이 그와 직접 대면한적은 한번도 없다고 하였다. 문태석은 이전에 있은 사실뿐만이 아니라 친척, 친우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있다. 하다면 몰래 마약을 전달하고 복용시키는자는 어떤자인가?

모든 증거는 권력자들이 가지고있고 우리가 추측할수 있는것은 의혹과 정황뿐이라던 장필성의 말이 생각났다. 과연 그렇단 말인가?

한편 연희는 가슴이 섬찍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해서 일반 우울증 같은것으로 여겼는데 안면근육마비로 일그러지고 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문태석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어떤 괴물을 련상케 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병원에 찾아와서는 문태석의 상태를 감시하고 장악하고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불안감을 더해주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자들이 김현철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앞서며 가슴이 활랑거렸다.

연희는 돌아오는 뻐스안에서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폭행을 가한자들이 저 문태석이라는 사람과 련관이 있지 않을가요?》

김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다고 찍어 말할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됩니다.》

연희는 가슴이 서늘해왔다. 설마 했는데 김현철은 《랍북미수》사건과 깡패들이 련관되여있다고 넘겨짚고있는것이였다. 연희는 여간만 걱정스럽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쩔려구요? 이 사건을 계속 취재하렵니까?》

은연중 연희는 자기의 목소리가 떨리는것을 감촉했다. 김현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듯 아무런 대꾸도 없이 차창만 내다보다가 되물었다.

《연희씨라면 어쩔것 같습니까?》

《나라면…》 하며 주저하던 연희가 한숨을 토했다.

《이렇게까지 심각할줄은 몰랐어요. 참 끔찍했어요. 게다가 무서운 폭행까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전 사건취재를 여기서 그만두었으면 해요.》

연희의 목소리는 무척 간절했다. 김현철은 길게 뻗어간 산발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연희가 겁에 질린것은 응당하다. 그자신도 밀차에 맥없이 축 늘어져있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문태석을 보고 소스라치듯 놀라지 않았던가!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있다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그런 모습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어떻게 되여 인간이 저렇게까지 타락할수 있을가싶었다. 그밖에도 환자의 병이 좀 호전될가 싶으면 어느 틈에 투약된다는 마약이며 몇달전에도 병원에 찾아와 상태를 확인했다는 미지의 사나이 등은 1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문태석의 주위에 검은 그림자들이 여전히 배회하고있다는것을 암시하고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불길한 예측과 대략적이며 추상적인 짐작만이 있을뿐 그 무엇도 석연치 않았다.

김현철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지금까지 취재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하소를 밀어버리며 불쑥 리도희의 목소리가 공명되여 울려왔다.

《… 단지 기사를 내는것이 목적이라면 김기자의 취재대상은 나까지로 마무리했으면 좋겠소. 일단 안기부가 개입되여있다는것과 이 사건의 의문점들을 나름대로 제시해준것은 그만큼 이 취재의 뒤맛이 재미없을터이기때문이요. 그저 과거의 의문사에 대한 의혹을 표명하는 정도의 기사였으면 하오.…》

마치도 그는 이 모든 결말을 미리 내다보고있은것 같았다. 그래서 자기도 진실을 밝히고싶지만 그 진실을 위해 생명까지 내대고싶지는 않다면서 젊은 목숨을 아끼라고 충고도 주었다. 장필성과 같은 론조였다. 그도 김현철의 취재를 마지막까지 반대하지 않았던가! 연희가 또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결심이세요?》

김현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처녀도 다를바없다. 제 아버지와 리도희선생처럼 똑같이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이 취재를 중도반단하기를 원하고있다. 더이상 이 고마운 사람들이 걱정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김현철은 우정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고싶어도 더이상 길이 없습니다. 모든 실마리가 끊겼습니다.》

《정말이예요?》

김현철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정말 약속할수 있어요?》

연희가 끈질기게 곱씹어 물었다. 그제서야 김현철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떡였다. 연희는 그의 태도가 미덥지 않았다. 그래서 표정을 통해 진실여부를 타진하려 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일부러 연희의 시선을 피하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한참만에야 얼굴을 돌린 김현철을 바라보니 고집스럽게 닫긴 입술은 피기가 없고 조갈이 들어 터갈라져있었다.

연희는 그 입술에 눈길을 박으며 이 사람이 꼭 다른 실마리를 찾아낼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것을 어쩔수없었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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