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10

 

《사실 좀전에 이 기사를 읽었을 때는 말이야. 그저 이 사회에 흔하디 흔한 카멜레온같은 매문기자나부랭이가 몇푼의 돈을 노리고 쓴걸로 짐작했었지. 그런데 자네의 말대로 자네가 존경하는 선배기자이며 나름의 주견이 있는 언론인이 썼다면 문제가 좀 심중해지는구만.》

최세진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김현철은 혹시나 하여 말했다.

《우리가 공연한 의심을 하는게 아닐가요?》

최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서로가 모순되고 론리도 맞지 않네. 만일 문태석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에서 진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의 처는 홍콩의 자기 집에서 변사체로 나타날수가 없네.》

《문태석이 탈출했으니까 랍치범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의 처를 살해한것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하필 자기의 집인가? 문태석은 사건이 발생하기에 앞서 자기의 처가 사라졌다고 주장했었네. 그리고 모르긴 하겠지만 일단 문태석랍치가 불발로 되였다고 해서 신분이 로출되지도 않은 녀인을 죽이는것과 같은 극단적이고 위태로운 일처리가 왜 필요한가 말일세. 또 문태석이 랍치위기를 겪고나자 안해의 생사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대뜸 간첩이였다고 고발하는것도 극심한 비약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로숙한 첩보원들이라면 최대한 증거를 없애버리는것이 상식인데 시체가 있는 방에 보란듯이 어마어마한 간첩기재들을 남겨놓은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겠나? 서푼짜리 드라마대본을 보는감이 들지 않나?》

김현철은 그가 던진 질문들중에 어느것 하나 쾌히 답변할수 없었으나 그냥 우기였다.

《혹시 문태석의 주장과 드러난 현실이 아귀가 잘 맞지 않게 보여 이 사건을 일부러 복잡하게 얽혀놓기 위해서 한짓이 아닐가요? 녀인을 다른곳에서 살해한 다음 집으로 옮겨놓았고… 앞일까지 예견한 치밀하게 째인 작전이라고 볼수도 있지 않습니까?》

최세진은 김현철을 바라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억지를 부릴 정도로 장필성이라는분을 믿는건가?》

《사실…》 하고 김현철은 머뭇거리다가 긴숨을 내쉬였다.

《뜻밖의 일이라 좀 얼떨떨해집니다.》

최세진은 팔걸이를 가볍게 다독이며 생각에 잠기였다가 조언을 주었다.

《속을 썩일것 없네. 장필성이라는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이 사건에 대해 직접 물어보게.》

《좀전에 했었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잘 생각나지 않는다구?! 그러니 더욱 이상하군그래. 사건자체도 의문투성이인데 취재기사를 낸 기자는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지?》

《10여년전의 일입니다. 10여년이 결코 짧은 세월이야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이런 사건을 쉽게 잊어버릴수 있을가? 다른 시기도 아니고 1987년도에 있은 사건을…》

《무슨 뜻입니까?》

《그해 1월에 일어난 박종철고문학살사건! 뒤이어 폭발한 6월민주항쟁! … 그때 얼마나 격동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었나?》

불현듯 김현철은 당시의 사건경위를 게재한 신문기사들이 금시 눈앞에 떠올랐다.

1월 중순 어느날 서울 남영동에 자리잡고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였던 박종철이 수사도중에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말하면 서울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의 핵심이였는데 《보안법》위반죄로 수배중인 선배를 만났다는 리유로 야밤삼경에 랍치되다싶이 끌려간것이였다. 치안본부장은 이 사건과 관련한 담화에서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하면서 불의의 심장마비에 의한 죽음으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사망현장을 다녀온 의사는 《수사관들이 <박씨가 물을 많이 먹었다.>는 얘기를 했고 바닥에도 물이 고여있었다.》라고 하면서 그가 중세기적인 물고문에 의해 살해되였다고 까밝혔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경찰의 왕진요구에 따라 갔을 때는 이미 박종철이 숨진 상태였으며 나는 치료를 한것이 아니고 사체검안서를 작성했을뿐이다.》

사건의 진상해명을 요구하는 사회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치안본부는 서둘러 두명의 수사관을 구속한 뒤 《이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때문에 빚어졌다.》라며 또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박종철이 수사관들에 의해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나중에는 야만적인 물고문을 당하던 도중에 질식되여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에다가 이 사건의 진상이 당국의 지시에 의해 고의적으로 축소, 은페되여온 사실까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였다. 마침내 앙양된 민심의 분노는 폭발하고야말았다. 대학생들과 교수, 학자들은 두말할것 없고 민주정당들과 재야시민단체들, 종교단체 인사들을 비롯하여 각계층 민중이 군부파쑈통치의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여 거리와 광장으로 떨쳐나섰다.

추모기간이 선포되고 도처에서 추모식들이 진행되였으며 당국의 살인적이며 파쑈적인 폭압을 단죄, 규탄하는 항의성명들이 련이어 발표되였다. 수개월동안 치렬하게 전개된 이 투쟁은 사실상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서막이였고 전주곡이라고 할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김현철이 말을 이었다.

《제가 시공간을 따져본바로는 그 박종철고문학살사건이 있기 며칠전에 문태석랍북미수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언론의 초점이 되였던 기사들이 박종철고문학살관련기사들에 치워서 사라진게 아닐가요?》

최세진은 김현철의 내심을 짚어보는듯 눈을 쪼프리고 한동안 주시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자네라면… 만일 그때 주장이 엇갈린 기사를 쓴게 장필성기자가 아니라 자네였다면 십여년이 지났다고 감감 잊을것 같은가?》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것이다.

최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난 요즘 참으로 바쁘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오는 여름에 서울에서 8. 15민족통일대축전이 열리게 되네. 정말 꿈같은 일이지. 그동안 해방의 이날이 와도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질시했고 분렬이라는 민족적비애를 씹어삼키군 했네. 과거의 통일행사는 또 어떠했나? 공안당국의 야만적인 탄압속에서 서울과 평양, 판문점과 해외 각지에서 분산개최되여야 했고 투옥될것을 각오하고 분단선을 넘어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되였지. 그나마 사선을 넘어 한피줄을 나눈 겨레들과 가슴을 맞대고 통일열기를 시위한 의로운 사람들은 돌아오자바람으로 죄인으로 몰리워 쇠고랑을 차야 했지.》

서가에 다가가 자료집 비슷한 서류를 가지고 돌아선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6. 15공동선언이 밝힌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에 따라 반세기이상 동족대결과 불신의 동토대였던 이 서울바닥에서 새 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우리 겨레가 공동으로 통일행사를 가지게 되였으니 정녕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나? 북에서 한두사람도 아니고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녀성, 종교인, 문화예술인, 경제인, 언론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100여명을 헤아리는 대표단이 내려온다니 아마 우린 그들과 함께 겨레의 화해와 단합을 상징하는 통일기가 푸른 하늘높이 펄럭이는 행사장에서 민족도 피줄도 언어도 말그대로 모든것이 하나임을 되새기게 될거네. 자네에게 미리 알려주네만 나의 이 어깨우엔 그 민족통일대축전준비위원회 상무위원이라는 중임이 걸머져있네. 축전기간에 열릴 각종 전시회와 상봉모임들, 공동학술토론회와 예술공연행사 등을 계획하고 준비할라니 정말 눈코뜰새도 없이 바쁘구만. 그러다보니 미지의 랍북미수사건을 해명하고싶어하는 자네의 어려운 일을 잘 도와주지 못해 참말 미안하네. 하지만 앞으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혼자 속을 썩이지 말고 나한테 말해달라구. 내 힘껏 도와줄테니. 재삼 당부하고싶은것은 지나간 과거에 동족대결에 악용되여온 이런 의혹사건들일수록 민족단합, 민족공조의 시대정신에 부합되게 철저히 해명하고 바로잡아나가야 한다는것일세. 그것이 바로 6. 15공동선언을 명실공히 고수하고 리행해나가는 진정한 첫걸음이 되지 않겠나! 자네도 나와 생각이 다를바없으리라고 믿고싶네.》

최세진과 헤여져 밤거리로 나온 김현철은 목적지가 따로없이 발길이 닿는대로 거닐었다.

차거운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긴 그는 양복의 량어깨가 서서히 젖는것도 모르고 거리를 걷고있었다.

언제 들어봐도 최세진의 말은 론리가 정연했고 대세의 추이와 민심을 정확히 담고있었다. 그것은 김현철자신보다 년장자이거나 과거시절에 운동권핵심으로 맹활약하면서 지닌 안목의 덕만도 아니였다. 늘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면서 민중의 요구와 지향을 의식하며 사색하고 탐구를 거듭할뿐아니라 순간이나마 그것을 잊을세라 혹은 그에 뒤떨어질세라 끊임없이 되새기며 채찍질하는 정신이 그 바탕이였고 원동력이였다.

하지만 자기자신은 그와 꼭같은 공기, 꼭같은 물을 마시며 생의 순간순간을 흘러보내고있건만 의식의 령역과 심도에 있어서 최세진을 따라서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그것이 자책스럽고 안타까왔다. 밤거리의 번쩍거리는 간판들도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어느 캬바레앞을 지나치려는데 노랑덧머리를 한 미모의 젊은 녀자가 교태어린 웃음을 날리며 소매를 잡는다. 날도 추근추근한데 잠시 들렸다가라는것이였다.

그것을 뿌리치고 몇십보쯤 걷다가 무심결에 뒤돌아보던 김현철은 자기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캬바레안으로 들어가는 한 젊은 녀성의 모습이 눈에 익었던것이다. 꼭 어디선가 본 사람이였다. 한찰나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김현철은 그가 연희임을 알아차렸다.

(왜 거기로 들어가는걸가?)

저도 모르게 김현철은 걸음을 되돌려 캬바레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훈훈한 대기가 몸을 한결 덥혀주는듯싶었다. 안쪽에서는 박자가 빠른 탕고곡이 울려나오고있었다. 춤판에는 흥미가 없었다. 2층 로비로 올라갔다. 여기라면 연희를 쉽게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빈 식탁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는데 예쁘게 생긴 처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와 동무해주겠다고 달라붙었다. 가볍게 거절해버리고 아래층을 살펴보느라니 한쪽구석에 자리를 잡은 연희의 모습이 눈에 띄웠다. 한순간 그가 2층 로비쪽을 눈여겨보는듯싶어 김현철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혹시 그가 비에 푹 젖은 자기의 궁색한 꼴을 볼것 같아 두려웠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자기가 왜 그 녀자를 따라 캬바레안으로 들어왔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연희는 잠시 접대원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이윽고 접대원이 가버리자 웬 사나이가 그의 탁자앞으로 다가가는것이 보였다. 역시 낯익은 모습이였다.

(그러면 그럴테지.)

김현철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전에 만났던 그 감때사나운 녀석은 아마 연희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였다. 김현철은 까닭없이 기분이 언짢아 지나가는 접대원에게 술을 청했다. 한편 곽동수와 마주앉은 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너무 빨리 온게 아닌가요?》

곽동수는 접대원에게 손짓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과일즙이 도착하자 곽동수는 자기 손으로 받아 연희에게 권했다.

《고마워요.》

연희는 살짝 미소하며 과일즙을 마셨다.

곽동수는 답례하듯 머리를 약간 숙여보이고는 점잖은 표정으로 묵묵히 술잔을 들었다. 연희는 미안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히 바쁘신걸 찾은건 아니예요?》

《괜찮습니다.》

곽동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긴 언제 봐야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내였다. 연희는 알릴듯말듯 한숨을 호 내쉬며 말을 이었다.

《실은 꼭 알아야 할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곽동수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연희는 잠시 갑자르다가 꼭지를 뗐다.

《아마 알고있을겁니다. 며칠전에 일어난 교통사고말이예요. 내겐 그 유가족에게 보험금을 전해줄 의무가 있는데 그게 여의치 않게 되였어요. 아무래도 보험재판까지 가야 할것 같아요. 그래서 유가족측에 량해를 구하려고 찾아갔었는데 그들은 며칠전에 보험금전액을 보상받았다더군요. 뜻밖의 장례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던 유가족은 보험회사에서 온줄로 알고 보험관련증서들을 내주고 보험금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그 돈은 회사에서 지출된게 아니였어요. 그래서 보험금을 전해준 사람의 생김새와 옷차림을 묻고 짚이는게 있어 한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가족측은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연희는 자기의 손전화기에서 한사람의 사진을 골라 곽동수에게 내보였다. 곽동수는 거기에 찍혀져있는 자기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볼뿐이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연희가 물었다.

곽동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처리한 일이라 뒤탈은 없습니다. 그 돈 역시 부정한게 아니니 마음놓아도 됩니다.》

《돈의 행처가 걱정돼서 그러지 않아요. 그 보험금을 대신 물어주는 리유를 알고싶어요.》

곽동수는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연희가 교통사고현장을 다녀온 때부터 불안감을 느끼고있었다. 아무리 불의의 사고라고 하여도 사람이 죽으면 껄끄러운 일들이 따르기마련이라는것을 그는 자기의 실체험을 통해 잘 알고있었다. 그 시끄러운 사연들이 연희라고 하여 피해갈리가 만무했다. 아니나다를가 연희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한번밖에 만난적이 없다는 기자에게 신문을 내치는가 하면 웬 끈질긴 변호사가 그를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그 모든게 보험금때문이라는것과 그때문에 연희가 난처한 상태에 빠져있다는것을 눈치챈 곽동수는 그 돈을 자기가 나서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연희에게 부담이 덜어지고 그가 당당해질수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두루 아는 사람들을 발동시켜 돈을 몰래 변통해본것인데 그 사실을 연희가 제꺽 알아차린것이였다.

곽동수가 백년이 가도 입을 열지 않을 태도를 보이자 연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좋아요. 리유를 말할수 없다면 더 따지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할건 우리사이가 더이상 오빠, 동생사이가 아니라는거예요. 난 어쩔수없이 빚을 지게 되였어요. 채무자가 된거지요. 당장이라도 물어주고싶지만 그만한 돈이 지금 제게는 없어요. 그러나 반드시 그 돈을 갚도록 하겠어요.》

곽동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연희는 눈물이 쏟아질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았다. 별안간 한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집 대문앞에 웅크리고 앉아 집없는 사내처럼 애처롭게 자고있던 청년, 당황망조하여 신문을 움켜쥐고 자기를 쫓아오던 모습, 차잔으로 입술과 코끝을 가린채 흘끔흘끔 연희의 눈치를 살피던 다름아닌 김현철의 얼굴이였다.

연희는 자기를 이런 처지에 빠뜨린 그가 정말로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각 김현철은 어느새 연희며 곽동수에 대한 고까움마저 까마득히 잊고 맞은편 웃층에서 제 생각에 옴해있었다.

(그래, 장선배님은 불꺼진 화산의 재를 뫃지 말라고 했지. 다 식어버린 재라?!)

그러자 뒤미처 그에 대한 반박이 꼬리를 물었다.

(홍콩에서 사람이 죽었다. 더우기 간첩으로 락인된 녀자다. 그러나 그 녀인은 이 땅에서 살다가 홍콩으로 건너간 교민이다. 그러면 그의 유가족이나 친척들이 여기에 남아있을수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괴이하게 종결된 상태로 그냥 덮어두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을 더듬을수록 뭐가 뭔지 모를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듯싶었다.

최세진의 말대로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애매한것은 장필성이였다. 10년도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이니 어쩌면 잊고 사는것이 당연할지모르나 그렇게 단언하기에는 석연치 못한것이 많았다.

일반 교통사고나 강도행위와 같은 흔한 사건이 아니라 《랍북미수》에 죽음이 뒤따른, 정치적파란을 초래한 특이한 사건인데다가 이 땅에서 진행된 일도 아니고 홍콩이라는 이국에서 벌어진 동족대결극의 한토막이였다. 그런데 그것을 해명한 기자는 자기의 주장을 온탕, 랭탕으로 오가며 뒤집다 못해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만일 장필성이라고 찍혀진 필자의 이름을 제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았더라면 김현철은 그가 주장도 엇갈리고 론거도 불충분한 기사를 써냈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부정했을것이였다. 그 기사는 여태껏 그가 알고있는 장필성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것이였다. 심각한 자체모순에 빠져있던 김현철은 불쑥 연희네 생각이 떠올라 그들이 앉았던 탁자에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거기에는 낯선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연희의 보호자연하던 그 사내의 목에 난 흉터가 떠올랐다. 대체 그런 인상특징을 남길 상대라면 그의 직업은 짐작할수 있었다.

그런데 왜 연희는 그런 사내더러 오빠라고 부르는가? 그 녀자는 오빠라고 하지만 장선배님이 모르는것으로 보아 남매도 사촌간도 아닌듯 하다. 아니, 장선배님의 인상을 봐선 그 사내를 전혀 모르는것 같진 않고 어딘가 귀찮아하는 태도가 분명하다. 하긴 연희가 오빠라고 부르는것을 보면 자주 만나는 모양인데 아버지란 사람은 사내의 이름조차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딸의 이상한 남녀관계에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사랑하는 외동딸이라면서 그토록 왼심을 쓰던 평소의 모습과는 좀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건 도대체 뭔가. 《랍북미수》사건도 모순투성이인데 장선배님의 가정내부관계도 모순적이지 않는가. 이전 같으면 장필성의 말이라면 설사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었을 김현철이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 존경심이 오래가기를 바래요!》 하고 연희는 말했었다. 오래전도 아니고 바로 몇시간전에 한 말이였다. 그리고 그 몇시간동안에 장필성에 대한 김현철의 믿음도 의혹으로 바뀌여버렸다.

그러고보니 연희는 이미 이런 결말을 예감이라도 하고있은것이 아닐가.

그 처녀는 아마도 아버지의 모든것을 낱낱이 알고있을것이다. 김현철이 잘못 리해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것이 분명했다.

이러다가 장선배님의 가정사까지 파고들게 되는것은 아닌가. 어쨌든 한번 부딪쳐보는거다. 우격다짐이 될지 몰라도 따끔하게 따져야겠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모든 가설들과 예측들이 확인될지도 모른다.

김현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동 네거리의 간이술집에 도착한 그는 전화를 받고 먼저 와있는 장필성과 마주앉았다. 장필성의 낯빛은 그가 여러건의 신문기사들을 펼쳐보이자 대번에 어두워졌다.

《정말 집요하구만.》

김현철은 장필성의 태도에서 그가 이미 그 사건을 낱낱이 기억하고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확인했다. 이제는 장필성이 거짓말을 하며 한사코 회피한 리유를 알아야 했다. 장필성은 식탁우에 놓인 신문을 대충 구겨쥐다싶이 꿍져서 자기의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가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하필 왜 이 사건에 흥미가 동했소?》

《꼭 알고싶어서입니다.》

《누구의 의뢰라도 있었소?》

《아닙니다.》

《그럼 손을 떼오!》

단호한 목소리였다.

김현철은 의아해졌다.

장필성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리유는 묻지 마오!》

《전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진실보다 더 중요한것은 생명이요.》

김현철은 심장이 후두둑 뛰였다. 지금까지 장필성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 불쑥 떠올랐다.

《특종기사란 무엇인가? 특종기사는 력사를 만드는 힘을 가졌다는게 중요하오. 만일 그것이 없었더라면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버리고말았을지도 모르는 숱한 진실들이 특종기사를 통해 발굴되였소. 그것으로 력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하였소. 그 많은 특종기사들에는 례외없이 기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여있소.》

그런데 장필성의 지금 이 순간의 권고는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장필성은 김현철의 의중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넨 젊었소. 그래서 다 모르오. 진실을 써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두손을 높이 들고 환성을 올리리라고 생각되겠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소. 때로는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진실이라는것도 있소. 왜 그런가? 사람이란 모두 리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니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를 바란건 악한 마음을 가진 단 한명의 신이였다는걸 잊지 마오.》

김현철은 어리둥절해졌다.

《전 선배님의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바라지 않는다는 그 사람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장필성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아주 무서운… 거대한 절대권력의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있는 괴물들이라고 할가.》

《그래서요?》

김현철은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았다. 긴장감에 귀를 바싹 강구었다. 장필성은 자기가 붙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는걸 알았다.

아차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럴바에는 아예 겁을 줘 물러서게 하는것도 방도였다.

《언론이 량심의 대변자라고 하지만 나의 수십년 언론생활의 총화는 실상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것이요. 김기자가 파고드는 그 랍북미수사건의 배후에는 당시의 군사독재권력이 숨어있소. 지금은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고있지만 아직도 반공을 <제일국시>로 삼고있던 과거의 독재권력은 이 땅에 남아있소.》

(그러니 그때 장선배님에게 어떤 운명적인 일이 있은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시작과 종말이 모순되는 이런 괴이한 기사들을 썼던것이다. 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가?)

한동안 장필성의 말을 음미해보던 김현철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올해 설날 발언상의 <죄>로 은퇴했다는 유럽의 어느 유명언론사의 론설위원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관리들을 숭배한적이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오직 우리들만이 매일 대통령에게 질문할수 있으며 그가 자기 일을 책임지도록 만들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국왕으로 될것이다.>

선배님! 오늘 우리가 과거의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후세가 그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지나간 슬픔과 불행의 력사는 계속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지내 앞질러 과장하지는 말게. 그리고 우물에는 침을 뱉지 말라고 했소. 젊은 혈기에 고집하지 말고 한뉘 언론에 종사한 이 늙은이의 충고를 존중하는게 좋을거요.》

김현철이 아무리 설득해도 장필성은 그때의 일을 추억하기조차도 꺼려했다. 더이상의 권유는 시간랑비일것 같았다.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선배님은 그때 홍콩에 누구와 함께 가셨댔습니까?》

《난 홍콩에 간적이 없소.》

《그럼 이 마지막기사는 어떻게 된겁니까?》

《정보를 제공받아 쓴거요. 이젠 괴로운 과거의 이야기는 그만두기요.》

장필성은 큰소리를 치고는 쓴술을 들이켰다. 그의 주름진 두볼이 실룩거렸다. 다시 술병을 잡으려던 그의 후들거리는 손이 별안간 맥없이 내리워졌다. 그는 자기를 주시하는 김현철의 눈초리를 견디여내기 힘든듯 고개를 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었다.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뒤모습이 김현철에게는 측은하게 안겨왔다.

김현철은 홀로 남았다. 오른손으로 턱을 고이고 왼손으로 식탁을 다독거리며 하루동안에 있은 일들을 되새겨보았다.

차집에서 진실이 어떻든간에 좋은 결과만 이루면 되는듯이 말하던 연희의 실용적인 태도며 지난날에 동족대결에 악용되여온 의혹사건들을 민족단합, 민족공조의 시대정신에 부합되게 말끔히 해명해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6. 15공동선언을 명실공히 고수하고 리행해나가는 진정한 첫걸음으로 된다던 최세진의 주장이 가슴속에서 고패쳤다. 그래도 자기에게는 진실을 알려주리라고 굳게 믿었건만 낯설게 등을 돌려대는 장필성의 모습에서 김현철은 가긍한 수난자의 번민같은것도 엿보았다.

밤은 차츰 깊어갔다.

김현철은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 장필성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밤거리에 나선 김현철의 가슴속에서 3년동안 품고 자래워 온 장필성에 대한 존경심에 금이 가고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슬프고 서글프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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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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