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9

 

S대학 도서관 2층의 한켠구석에 자리잡고있는 최세진의 방은 이상할만큼 고요했다.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생각에 골몰하고있던 김현철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의자등받이에 기대고있던 몸을 꼿꼿하게 폈다. 탁자우에서 이미 수십번도 더 읽은 두툼한 신문뭉치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당시의 많은 신문들이 랍치되였다가 탈출했다는 문태석의 기자회견소식과 발언내용을 일제히 게재하고있었다. 그리고 마치 유명인의 광고나 되는듯이 그의 수염이 덥수룩한 방랑객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싣고있었다.

랍치되였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것 같은데 행색을 보면 몇달쯤 인질로 잡혀있은듯 한 모습이였다. 아니면 가짜수염까지 붙이고 신문기자들의 사진기렌즈앞에 나서라고 누가 시킨것일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위적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이 광대같은 사진은 누가 연출한것일가?

기자회견내용을 요약해보면 1987년 정월초하루 홍콩에 있는 문태석의 집으로 그의 안해인 김춘옥을 만나러 온 세 사나이가 있었다.

문태석은 안해의 부탁대로 손님들의 접대에 필요한 몇가지 식료품을 사오려고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집이 텅 비여있었다. 두시간쯤 지나서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웬 사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안해가 이미전에 진 빚을 물지 않았기때문에 싱가포르로 데려갔는데 그를 찾으려면 그곳으로 오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홍콩을 떠났던 문태석은 이틀간 행적을 감추었다가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나타나 《이북공작원》들에게 랍치당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에는 느닷없이 타이의 수도 방코크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가진 후 서울로 돌아왔으며 역시 김포비행장에서 같은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벌려놓았다. …

김현철은 신문더미중에서 한장을 다시 골라쥐였다.

《홍콩에서 발견된 변사체-누가 김춘옥을 죽였나?》

혹시 바늘귀만 한 틈이라도 찾아볼수 있을가싶어 몇번째나 훑어보는 기사내용이였다.

《… 홍콩경찰은 김녀인의 집에서 심한 악취가 난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문을 뜯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김녀인은 옷을 입고 반듯이 누운채로 숨져있었다. 얼굴은 베개잇으로 덮여있었다. … 홍콩경찰은 녀인의 사체가 너무 부패해있어 사체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데 실패했다. … 홍콩경찰은 화장대에서 김녀인의 려권을 찾아냈고 또 그가 홍콩을 떠난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전에 미처 못 보았던 신문자료들도 있었다.

《랍북미수사건의 주요관계자 김춘옥녀인이 홍콩에서 변사체로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 홍콩경찰은 김춘옥의 남편 문태석이 랍북상태에서 극적인 탈출을 한 사실을 주목하고있다. … 홍콩경찰은 재일조총련은 물론이고 김녀인과 채무관계가 있는 사람, 김녀인과 평소에 친분이 있는 남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릴 예정이다. … 홍콩경찰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해 특별수사국과 강력수사국을 수사에 참여시켰다.》

김현철은 다시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사색에 잠겼다.

문태석의 진술대로라면 김춘옥은 홍콩을 떠났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김춘옥은 자신의 려권과 함께 이미 살던 아빠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였다. 과연 북의 《공작조직》이 문태석이 안해를 찾아 싱가포르로 출발한 후에 김춘옥을 죽여 아빠트에 옮겨놓았단 말인가? 아니면 문태석이 홍콩을 떠난 후에 집으로 돌아온 김춘옥이 그곳에서 살해당한것일가? 김춘옥을 살해한자들은 누구일가? 만일 여기 신문들의 주장대로 북의 《공작원》들이 녀인을 죽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그렇게 해야 했던 리유는 무엇일가?

비밀엄수를 위해 지금까지 주요임무를 수행해온 자기 사람까지 가차없이 죽여야 할 리유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으로 하여 더욱 치명적인 흔적을 남긴다는것을 북의 《공작조직》은 과연 모른단 말인가?

의문이 계속 꼬리를 이었다. 경찰당국은 응당 홍콩경찰과 협조해 김춘옥의 죽음에 대해 수사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동수사가 진행되였다는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신문기자라도 추적에 나섰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그런데 후속기사도 종무소식이다. 이때문에 문태석의 《랍북미수》와 김춘옥의 죽음이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까맣게 잊혀진게 아닐가? 왜 이런 현실이 생겨나게 된걸가? 이마살을 찌프리고 추리를 하고있는데 최세진이 다가와 그의 앞에 들고 온 신문을 펼쳐놓았다.

《자, 이게 마지막기사인것 같애. 당시 기자들이 밝힌 이 사건의 진상이며 자네가 찾는 후속보도기사! 간신히 찾아냈다니까.》

《그렇습니까? 끝내 찾아냈군요!》 하고 탄성을 지르며 기사에 눈길을 박던 김현철은 대뜸 눈살이 꼿꼿해졌다.

《이건 또 뭡니까?》

그 기사에는 홍콩경찰이 김춘옥의 집에서 무전기의 일부 부속품과 홍콩교민들의 사상동향을 수집한 자료들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김춘옥의 변사체와 관련한 사실과는 상관이 없이 당국이 장려하는 반공영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판에 박은 증거물들을 루루이 라렬한 이런 후속기사를 쓴 기자는 대체 누굴가?

이마살을 찡그리며 필자의 이름을 찾던 김현철의 눈은 퀭해졌다. 장필성이라는 이름이 총알처럼 두눈으로 날아들었다. 김현철은 갑자기 허상이라고 생겼는가싶어 잠시 눈을 끔벅거려보았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런데 장필성이라는 이름은 더욱 또렷해졌다.

《이럴수가?!》

잠시 아연했던 그는 다급히 신문무지를 뒤적거렸다.

김춘옥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에 의문을 제시한 첫 기사의 필자를 찾았다. 거기에도 장필성이라는 이름이 찍혀있었다. 이번에는 문태석의 기자회견내용이 담긴 기사를 끄집어냈다. 아니나다를가 거기에도 장선배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결국 장필성은 이 사건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깊이 관여한셈이였다. 처음에는 앞장에 서서 김춘옥의 죽음을 통해 문태석의 진술에 의문을 제시했지만 인차 자기가 제기했던 문제점들은 죄다 무시해버리고 《녀간첩》의 진상을 밝혀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혹시 이름이 같은 기자가 또 있는것은 아닌가? 만일 아니라면 장선배님이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불꺼진 화산의 재를 모으지 말라던 장필성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가에 쟁쟁했다. 문체로 미루어보면 분명 이 기사를 쓴 사람은 그가 틀림없다! 하다면 정말 장선배님은 이 사건을 잊어버린걸가? 아침과 저녁으로 색갈이 바뀌는 칠면조와도 같이 론조가 뒤바뀐 기사들을 이렇게 연방 써낸 장선배님이 과연 그때의 일들을 까맣게 잊을수 있단 말인가?

김현철은 어쩔수없이 3년간의 자기와 장필성의 관계 그리고 그가 자기에게 했던 말들을 다시금 곰곰히 돌이켜보았다.

《난 력사를 공부한데다 글쓰기를 좋아하다보니 기자직업을 택하게 되였소. 취재기자들은 대부분 유명인사들을 만나 이들로부터 신속한 정보를 빼내 특종기사를 내는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개 아첨이나 비난으로 그치고말지. 때문에 난 사건을 중시하오. 사건추적이야말로 탐방기자에게 있어서 가장 매력적인 일이요. 탐방기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호기심이요. 호기심이 없다면 그는 벌써 기자가 아니요. 그 호기심으로 하여 기자라는 직업은 결코 지겹지 않소. 령혼이 항상 새로운것을 찾아 떠돌게 되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이런 말도 했었다.

《밖에 나가서 취재하는것보다는 안에서 여러 자료들을 분석종합해 기사를 쓰거나 편집하는 업무가 내게 맞소.》

어딘가 모순적으로 들려오기도 하지만 나이많은 그이고보면 리해가 되기도 했던 말이였다. 그러나 이 순간 김현철은 자기가 신뢰하였던 장필성의 진모습을 그려보려고 애썼다.

앞에 놓인 여러편의 기사들은 며칠사이에 극에서 다른 극으로 넘어간 참으로 이상한 기사였다. 왜 장선배님은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자기가 쓴 기사내용을 뒤집어야만 했을가? 그리고 이제 와서는 자기가 쓴 기사마저 기억하지 못하고있는가? 10여년세월이 흘렀으니 기억이 삭막해질수도 있겠지만 기자생활 근 40년에 몇번이나 있을가말가 한 이런 사건기사가 정말 기억나지 않을가? 과연 그럴수 있을가? …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도서련재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6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5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4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3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2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1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0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9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8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7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6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5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4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3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2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1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0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9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8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7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6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5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4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3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2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1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0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9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8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7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6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5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4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3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2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1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0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9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8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7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6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5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4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3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2회 두견새는 잠들지 않는다 제1회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