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8

 

(이 녀자는 원래 이렇게 돼먹었을가?)

성북동의 어느 차집에서 연희와 마주앉은 김현철은 차를 쫄금쫄금 들이키며 처녀의 표정을 슬며시 살피고있었다. 하얀 살결, 붉은 입술, 선이 곧고 예리한 코마루, 시원하게 큰 눈, 긴속눈섭… 새하얀 오른쪽볼우에 연한 반점같은 작은 기미가 엿보였다.

그 흠밖에는 주근깨 하나 보이지 않는 청순한 살결이였다. 작고 말큰말큰한 느낌을 주는 귀도 발그레한 생기가 도는게 어느모로 보나 어여쁜 모습이였다. 흰 목도 상큼하게 쭉 뽑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얼굴에는 랭기가 씽하니 돌고 빨간 입술에서는 사람의 속을 발칵 뒤집어놓는 비수같은 언어들이 련발로 발사되는것이다.

지금 연희는 그가 권하는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웃몸을 꼿꼿하게 세운채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일종의 침묵은 대화상대에 대한 랭대이며 괄시이기도 했다. 연희의 지금의 자세는 김현철과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로골적인 표현이였다.

(무슨 말부터 시작할가?)

기자로서 이렇게 말꼭지를 떼기 힘들어보기는 처음이였다. 솔직히 연희를 찾았을 때만 해도 그가 약속장소로 나올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부르고싶어 찾은것도 아니였다. 연희를 통해 반드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있었다. 이제는 한잔의 차도 밑굽이 나기 시작한다. 차잔을 들고 얼굴의 반을 가린채 할깃할깃 연희의 표정을 살피는 동안 따가웠던 웃입술이 감각이 없는것으로 보아 아예 익어버린것 같기도 했다. 더 큰 걱정거리는 이 차잔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무슨 말인가를 먼저 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래, 무슨 말이든 시작을 떼면 돼. … 죽은 택시운전사의 가족을 만났던 얘기부터 할가?)

김현철은 큰숨을 내쉬고 꼭지를 뗐는데 긴장해서 그랬는지 왕청같은 소리가 나갔다.

《차 한잔 더하시겠습니까?》

연희는 창밖에 두고있던 시선을 돌려 마주 쳐다본다. 사람을 놀리느냐는 마뜩지 않은 눈길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김현철의 차잔은 이미 텅 비였으나 연희의 앞에는 전혀 입도 대지 않은 차가 그대로 식어가고있었던것이다.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고 불렀다면 그만 일어나겠어요.》

매정스러운 말을 던지며 연희는 정말로 일어서려고 했다. 김현철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제서야 하고싶은 말이 나갔다.

《제 기사가 잘못되였다고 인정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내놓고 인정하고나니 한짐 던듯 한 심정이였다. 금시 일어날듯이 몸을 움씰거리던 연희는 자세를 바로하며 김현철을 주시했다.

《대단한 용기시군요.》 비양기가 느껴졌다. 김현철이 말했다.

《유가족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래요?》

《연희씨가 왜 내게 화를 냈는지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병약한 녀인이 두 어린 딸을 데리고 세방살이를 하고있더군요. 살림꼴이 말이 아니여서 동정이 가고 눈물이 나오는것을 겨우 참았습니다.》

《…》

《그런 가난한 형편에서 보험에 가입하여 다달이 보험료를 지불한다는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였겠는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더 괴로웠습니다. … 그들이 보험금을 받을수 있도록 돕고싶습니다.》

《도울 방도가 영 없는게 아니지요.》 여전히 매정한 말씨였다.

《정정기사를 내세요.》

김현철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저도 그러고싶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에서 응하지를 않습니다. 더우기 그 기사가 교통사고일지에 준했기때문에 반드시 오보라고 볼수는 없답니다.》

《그럴줄 알았어. 권력앞에서는 쪽도 못쓰면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앞에서는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언론의 본태가 어딜 갈가.》

연희는 혼자말을 하는체 하면서 은근히 반말을 던졌다. 아예 김현철의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할 말이 없습니다.》

김현철은 빈 차잔을 만지작거렸다.

부장이 며칠전에 한 당부가 떠올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보험재판의 증인석에 나서면 안된다던 충고였다. 그러나 피해자가족이 살아나가자면 보험금이 반드시 필요했다. 한편 연희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차잔만 어루만지는 김현철을 살피고있었다. 가엾은 모습이였다. 사실 알고보면 그로서는 오보를 낼수밖에 없는 정황이기도 했다. 그가 신문사의 련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사건현장이 모두 정리된 상태였고 경찰측의 조작극도 끝나 사고일지가 작성된 이후였다는것은 연희도 잘 알고있었다. 그가 자료로 리용한것이 바로 그 일지였다. 누구라도 현장을 목격하지 않고서는 그 교통사고에 의견을 제기할수가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기자라면 반드시 확인을 하고 기사를 썼어야 하지 않는가. 그의 기사가 나감으로써 피해자의 가족이 보험금을 받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이 중중첩첩으로 늘어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보를 낸 당사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처녀를 불러다놓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느니, 피해자의 가족측에 련민을 느꼈다느니 하며 위안이나 하고있는것이였다.

《심정을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날게요.》

연희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고 일어서려는데 김현철의 목소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요구하신다면 증인으로 보험재판에 참석하겠습니다.》

연희는 터무니없어 웃고말았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게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인가싶었다.

《누가 재판이 있답니까?》

《그럼 보험금은 어떻겁니까?》

《남의 회사일에 왜 그리 관심이세요?》

《내가 관심하고싶어서가 아닙니다. 나도 이 사건에서 빠지고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형편이 못되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게 자신만만한 어조로 물었다.

연희는 화가 났다.

《누가 붙잡아요? 보험금문제는 제가 해결합니다.》

《어떻게요?》

김현철이 눈을 바로 뜨고 물었다. 연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김현철은 연희의 얼굴에 언뜻 스치는 착잡한 심리를 포착했다. 흔히 부정당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사람들이 겪게 되는 번뇌같은것이였다.

《설마?!》 김현철의 눈빛이 순간에 예리해졌다. 연희는 속이 뜨끔했다.

(기자라서 그렇나? 촉감 하나만은 귀신 한가지네.)속으로 토달거리며 톡 내쏘았다.

《그래요. 충돌사고를 낸 녀인의 변호인과 합의중이예요.》

《어떤 합의입니까?》

《보험금에 해당되는 전액을 받는 대신에 사고조사자료를 넘겨주는걸로요.》

《연희씨가 요구했습니까?》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날 찾아왔어요.》 잠시 말이 없던 김현철은 머리를 저었다.

《안됩니다. 그건 옳은 일이 못됩니다.》

《예?》

《이 교통사고의 진상은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의 명예문제도 걸려있습니다.》

《나에겐 잘못이 없어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걸 바로잡자고 내가 연희씨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까.》

김현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옆탁의 손님들이 흘끔흘끔 쳐다본다. 연희의 소리도 높아졌다.

《그 조사자료는 보험금때문에 필요했어요. 보험금전액을 넘겨받게 되면 그 조사자료는 가치가 없어져요.》

《돈이 문젠게 아니라 진상을 밝히고 보험금도 떳떳하게 받아야 할게 아닙니까?》

《그런다고 달라지는게 뭐 있어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옵니까? 보험재판을 하는 동안에 피해자의 가족들이 또다시 굶어죽게요? 피해자가 왜 보험에 들었겠어요? 자기가 사고를 당했을 때 가족들이 보험금을 제때에 받아 생계를 이으라고 든게 아니겠어요? 난 자기 책임을 다했어요.》

화가 동한 연희는 식은 차를 쭉 들이켰다.

아침에 충돌사고를 낸 녀인의 변호인이 찾아와 보험금전액을 내놓는 대신에 조사자료를 없애는것으로 합의를 하자고 하였을 때 연희는 이것이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지방검사장과 밀접한 관계이고 보험금을 한순간에 척척 내놓을 정도라면 보험재판이 쉽사리 결속되지 않을것이다. 어쩌면 상고를 거듭해야 할지도 몰랐다. 원체 보험분쟁이라는것이 하루이틀새에 끝나지 않는다는건 이미 과거의 보험재판들이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다.

보험회사에서는 직원들을 매일 거리로 내몰아 한건의 보험예약이라도 더 성사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여있다가도 일단 보험금을 지불해야 하는 사건이 생기면 조사원을 여러차례 내보내여 꼼꼼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래서 꼬투리만 한 허점만 잡아도 그것을 빌미로 보험금의 지불을 금지시켰다. 보험재판이 열리면 터무니없는 증거들을 연방 제시하거나 배심원들을 매수하고 공판기일을 끌게 하여 소송을 건 당사자가 종당에는 제풀에 재판을 포기하게 하는것도 하나의 수법이였다. 결국 보험회사라고 하면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해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푼돈까지 말끔히 뜯어내는 돈벌이수단으로 생존하는것이 이 땅에서는 순리로 통하고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있는 연희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의 계약대상자들과의 약속만은 반드시 지켜낸다는 나름대로의 지조를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이번 교통사고와 관련한 보험금문제는 연희로서도 해결하기가 참으로 힘에 부쳤다. 우선 경찰청을 움직일 정도의 강력한 권력이 숨어있는데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현철의 오보기사가 나가는통에 연희는 홀로 권력에 언론계까지 야합한 부정과 맞서는 처지에 놓인것이였다. 그가 피해자가족측과 함께 상고를 거듭하여도 제대로 된 판결을 받아낼 때까지는 한해가 걸릴지 아니면 몇년이 걸릴지 그리고 이길수 있는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변호사도 채용해야 하는데 여러해를 이어갈지도 모를 재판의 변호비를 무엇으로 충당하는가. 자칫하면 후날 재판에서 이겨도 받게 될 보험금전액이 변호비로 지불되여야 할지도 모른다. 약자필패라는데 황금만능의 이 사회에서는 돈많은자가 강자이고 돈이 없는자가 약자인것이다. 그래서 연희는 충돌사고를 낸 녀인의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합의금을 넘겨받고 조사자료를 불태워버리는 방향으로 결심을 정하고있었다. 그것을 오보기사를 내여 오히려 사죄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뻔뻔스럽게 비난하는것이다.

(거짓기사나 낸 주제에 뭘 떳떳하게 따질것이 있다고? 재판정에 불러세우지 않은 나를 고맙게 생각할 대신 뭐 진실을 밝히고 보험금을 떳떳하게 받아야 한다고?)

그러거나말거나 김현철은 사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 조사자료를 내게 넘겨주십시오.》 연희는 눈이 커졌다.

《그걸로 뭘 하려는건가요?》

《어떻게든 정정기사를 내도록 해보겠습니다. 그 기사가 나가면 법정에까지 가지 않고도 보험금이 해결될수 있습니다.》

《그럴수도 있겠군요.》

연희는 가락이 희고 가느다란 두손을 올려 볼을 귀엽게 감싸고 김현철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러실수 있어요?》

《반드시 정정기사를 내겠습니다.》

김현철은 어깨를 쭉 폈다. 연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주보며 어느 순간부터인지 부장의 충고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만만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조사자료는 언제 넘겨주겠습니까?》

연희는 귀여운 볼우에 잔미소를 찰랑거리며 나직이 되물었다. 《내가 언제 조사자료를 넘겨주겠다고 했어요?》

《예?!》

연희의 얼굴에 비꼈던 웃음기가 바람에 날려가듯 싹 사라졌다.

《난 오보기사를 쓰는 사람과는 그 어떤 협조도 안합니다.》 연희는 딱 잘라맸다. 김현철은 당황했다.

《왜요?》

연희는 찬 기운이 쌩 도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한 외과의사가 첫 환자의 심장판막수술을 하였을 때였어요.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한 기자가 수술도중 환자가 죽었다는 오보를 냈어요. 그 의사는 정정기사를 요구하거나 다른 신문사에서 항의기사를 낼수도 있었으나 구태여 그렇게 하지를 않았어요. 그는 기자의 집주소를 알아내가지고 찾아가던 도중 길에서 만난 순경에게 사건신고를 하겠으니 따라오라고 했어요. 기자의 집으로 간 의사는 그와 마주서기 바쁘게 다짜고짜로 따귀를 후려갈겼어요. 그리고는 순경에게 자기를 현장구속하라고 요구했지요. 의사는 구속되고 곧 재판이 열렸어요. 재판에서는 의사가 따귀를 얻어맞은 기자에게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지요. 어딘가 왕청같고 엉뚱한 사건이라 많은 신문들이 그 사건과 관련한 기사를 게재하였어요. 그러면서 의사가 기자를 때린 리유도 요란스레 떠들었지요. 의사가 살린 첫 환자를 기사에서 죽여놓았기때문에 그 울분에 의사가 기자의 따귀를 쳤다고요. 그후 그 의사는 더 유명해져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김현철은 마치 썩은 도마도를 씹은것처럼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게 조사자료를 넘겨주지 못하는 리유입니까?》

《그럼요.》

《어쩌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탄식조로 말하자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고 계속하라는 눈치로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장선배님의 따님이 우리 기자들에게 그리도 몰인정할수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를 잘 아시나봐요?》

《무척 존경합니다.》

《그 존경심이 오래가기를 바래요.》 연희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전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런 협조도 안합니다. 내가 신뢰할수 없는 리유는 단 두가지뿐이예요. 첫째로는 오보기사를 낸것, 둘째로는 술에 만취하여 남의 집 대문앞에서 조는것이예요. 아니, 어떻게 술을 마시길래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낯선 호텔방으로 짐짝처럼 실려가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하세요? 그게 이 조사자료를 줄수 없는 리유예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전 이만 가겠어요.》

연희는 찬바람을 씽 날리며 떠나갔다.

처음에는 힐끔힐끔 훔쳐보던 옆탁의 사람들이 이제는 아예 로골적으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는듯싶었다. 연희의 뒤모습을 멍히 쳐다보던 김현철은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겋게 달았다. 간이술집에서 쓰러진 이후부터 새벽까지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낯선 호텔이여서 뭐라 변명을 할수도 없었던것이다.

(어쩌면 꼭 망측한 꼴만 저 처녀의 눈에 뜨인걸가? 전생에 저 처녀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게지?) 탄식이 흘러나왔다.

연희가 사라지자 곁의 손님들은 더이상 흥미가 없는지 저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접대원을 불러 차 한잔을 더 청하고난 김현철은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하긴 밖을 보자고 고개를 돌리고있는것이 아니였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앉아있는것도 아니였다. 단지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고싶어서였다. 까닭모르게 자꾸만 화가 동했다. 다름아닌 자기에 대한 짜증이였다. 며칠새에 그의 인격과 자존심은 그야말로 오물통에 구겨던져지고말았다.

오보?! 그래, 사람이 만능이 아닌 이상 실수라는것을 범할수 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화불단행이라고 오보 하나로 끝날것이지 자기의 추태를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장연희라는 촉새같은 처녀에게 거퍼 드러내보인단 말인가! 김현철은 너무 속이 상해 손가락으로 자기의 앞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이젠 어떻게 하지?)

불쑥 그의 내심에서 장필성의 굵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자식, 기자란 언제나 기사로 말을 해야 한다! 네가 무엇인가를 주장하고싶다면 올곧은 기사를 내놓으란 말이다.》

첫 기사가 기각되여 앙앙불락하고있을 때 그의 머리를 가볍게 쥐여박으며 장필성이 준 충고였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것이다. 오보기사를 냈으니 정정기사를 내는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당연한것이 실현불가능하다. 신문사가 반대하고 경찰서의 교통일지가 번연히 존재하여 사회적물의를 일으킬것이며 게다가 유일한 증거인 보험회사의 조사자료는 연희가 넘겨주지 않을것이다. 만일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나선다면? … 물론 다른 신문사에서 정정기사가 나갈수는 있다. 그러나 김현철이 정정하려는것은 기사내용만이 아니라 바로 쓰레기기사를 만들어낸 자기자신이였다.

(나의 존재가치가 언제 이 수준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니다. 이렇게 주저앉아 번민이나 해서 무슨 소용이랴. 나의 실책을 만회할 올곧은 기사,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기사, 정의와 진리를 일깨워주는 기사로 나는 다시 솟아나야 한다. 그러자면 그런 기사감을 찾아쥐여야 한다. 그렇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머리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가고있는 말마디들을 부지런히 쫓고있느라니 별안간 신문기사의 활자들이 확대되여왔다.

《랍북탈출 문태석씨 어제 귀국》

《홍콩에서 발견된 변사체-누가 김춘옥을 죽였나?》 S대학 도서관에서 본 1987년의 신문기사들이였다. 갑자기 이 기사제목들이 왜 떠오른지는 김현철자신도 알수 없었다.

(매수된 간첩인 안해에 의해 남편이 랍치되였다?! 부부는 한깍지속에 든 두알의 밤알같은 운명이라는데 어떤 인생관을 가졌기에 안해가 남편을 랍치하는 말세기적인 일이 가능할가?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천번중에 한번이나 될가말가 한 극적인 탈출을 하였고 그 《랍치》사건을 주도한 녀인은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였다. 어째서 《랍치》주범인 녀인이 자기 집에서 죽은걸가? 혹시 자살일가?)

참으로 이상야릇했다. 상영중인 영화필림을 중간에서 뚝 잘라버린것처럼 녀인의 시체가 나타났다는 기사가 있은 뒤로는 그 《랍북미수》에 관한 기사들을 신문지상에서 더이상 찾아볼수 없는것도 괴이쩍게 여겨졌다.

(1987년이라…)

지꿎게 머리속으로 겹쳐드는 의혹에 파묻혀있는 그의 귀가에 최세진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말이지 이 땅엔 이런 이상한 사건, 종잡을수 없는 수수께끼들이 수다하네. 그것들은 그 성격과 본질에 관계없이 독재권력을 절대적으로 유지, 비호하고 동족을 적대시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해왔지. 이제는 이 의문의 수수께끼들을 하나하나 풀어 력사의 진실을 밝힐 때가 되였다고보네. 지금 시민단체들이 과거독재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비극적인 공안사건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해나서고있는 사실도 결코 이와 무관하다고 볼수 없네. 이것은 자기자신과 직접적으로 련관이 있든없든 다시는 그러한 암흑의 시대를 용납할수 없고 또 용납해서도 안되는 우리 민중에게 있어서 오늘날 더는 미룰수 없는 력사적과제가 아니겠나. 여기서는 자네나 나나 례외가 될수 없는거지.》

최세진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김현철의 판단에 의하더라도 분명 심상치 않은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더우기 사건의 전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한참 떠들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것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후속기사들이 나타나면 알려주겠다고 하던 최세진에게서는 여러날이 지나도록 다른 소식이 없었다. 별로 시원한 결과가 없는 모양이였다. 김현철은 오래동안 신문기자로 활약한 장필성이 혹시 그 사건에 대해 알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장선배님!》

《응, 김기자인가? 어떻게 전화를 하나?》

《1987년초에 말입니다. 흥미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계십니까?》

《87년이면 10년도 훨씬 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무슨 랍북미수사건이던데 선배님은 잘 모르시겠습니까?》

기억을 더듬는듯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어 장필성의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너무 오래전의 일이여서인지 잘 모르겠네. 아마 내 기억에 없는걸 보니 별치않은 사건일게요.》

《그렇습니까?》

《헌데 갑자기 불꺼진 화산의 재를 모으는 재주가 생겼소? 지금 사람들은 옛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해야지.》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난 김현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 이후에 나온 기사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혹시 최선배가 제 일이 바쁘다나니 아직까지 찾지 못한것은 아닐가? 전화기를 다시 쥔 김현철은 최세진을 찾았다. 마침 그는 S대학 도서관에 있었다.

《최형, 내가 얼마전에 최형을 만나러 도서관에 갔을 때 본 자료말입니다. 예, 1987년에 있었다는 랍북미수사건… 아니, 괜찮습니다. 오늘은 제가 시간이 좀 있으니 직접 찾아보겠습니다.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김현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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