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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 52 회

제 5 장

순정의 열매

9


수확의 계절이였다.

선들선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구수한 낟알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땅우의 황금빛갈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처럼 새벽하늘가엔 노을이 고요히 불탄다.

박영순은 깊은 감회에 잠겨 작업반의 포전길을 걷고있었다.

봄내, 여름내 땀흘려 가꾼 곡식들이 차돌같이 여물어 논두렁이 터질듯이 넘실거리며 춤추고 총알같은 콩꼬투리들이 발목을 붙잡고 달그닥거리는 논두렁길을 걸을 때의 기쁨과 환희는 곡식을 가꾼 사람만이 맛볼수 있는 류다른 감정이다.

얼마전 수확고판정에서 계획의 120프로라는 결과치가 나왔을 때 영순은 얼마나 감격스러웠던가.

영순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어섰다. 읍농장과 경계를 이루는 작업반의 맨 마지막포전이였다.

며칠전 비바람에 군데군데 벼들이 쓰러지고 논바닥엔 물이 질쩍하였다.

영순은 논두렁에 쪼그리고앉으며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어제 벼가을전투를 앞두고 진행된 리초급일군협의회에서 준석관리위원장이 하던 말이 쟁쟁히 되살아왔다.

《우리는 이번 예상수확고판정에서 계획보다 높은 실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온 한해 우리 일군들과 농장원들이 한마음한뜻이 되여 당의 농업정책을 결사적으로 관철하여온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결과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가마안에 넣어야 짜다고 아무리 벌판에 가득한 열매가 탐스러워도 거두어들여야 제것이 되는것입니다.

벼가을을 짧은 기일내에 와닥닥 끝내는것은 실수확고를 높이는 결정적비결입니다.

현재 벼가을전투에 매우 불리한 정황이 조성되였습니다. 비바람에 벼가 쓰러지고 논에서 물이 빠지지 못하여 수확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된것입니다.

우리 농장원들이 봄내, 여름내 땀흘려 가꾼 낟알의 수확고가 바로 이제부터 벌리게 될 벼베기전투에 의해 좌우됩니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105리구간의 무수한 극한점들을 넘어온 마라손선수가 마지막결승테프를 눈앞에 두고 최대의 속도와 마력으로 질주해야 할 때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10일동안 전투를 벌리자는것입니다. 벼베기를 10일동안 와닥닥 끝내자면 하루에 매 사람이 천평씩 맡아 제껴야만 합니다.》

《천평》이란 말에 영순은 깜짝 놀랐다.

이때까지 기록된 리적인 최고실적이 천평이였다.

다른 사람들도 너무나 어망처망하여 선뜻 호응해나서지 못하고 웅성거리며 서로 눈들만 마주보았다.

사람들을 한눈에 쭉 누비며 준석은 이렇게 계속했다.

《물론 천평이라는것이 정량을 훨씬 넘는것으로서 아름찬것만은 사실입니다. 순전히 우리 농장원들의 로력만으로 벼가을을 해야 하는 조건에서 종전의 실적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그만큼 기간이 지연되고 결국은 피땀흘려 지은 한해농사가 그만큼 허실되게 됩니다.

우리가 무더기비속에서 어떻게 구원해낸 곡식들입니까?

사람은 고생속에서 철이 들고 시련속에서 강해진다고 결심하고 달라붙는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봅니다.》

방안의 소음은 잦아들고 팽팽한 긴장속에 높뛰는 숨결소리가 가득찼다.

이번에는 박정운당비서가 그 울림이 크고 저력있는 목소리로 박차를 가하듯 말했다.

《우리가 하루 천평을 하자면 그만큼 힘겨울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에겐 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가능성여부가 문제인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도가 문제로 될뿐입니다. 로케트가 수만키로메터의 고공을 날아오를수 있는 힘은 가스의 폭발력에 있듯이 오늘의 결사전에서 기적의 창조력은 바로 우리모두의 애국의 열정을 폭발시키는데 있습니다.》

《폭발》이란 말은 그대로 도화선에 달린 불과 같이 장내에 소리없이 끓던 열정의 분화구를 터쳐놓았다. 여기저기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 호응해나섰다.

영순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앉아 듣기만 했다.

이런 때면 의례히 선코를 양보하지 않던 영순인지라 그의 침묵은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냈다.

《리적으로 조건이 제일 불리한 곳이 2작업반인데 그래 반장동무, 꽤 해낼 자신이 있소?》

준석이 이렇게 물었다.

영순은 머뭇거리다가 소심한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그의 눈길이 얼핏 준석의 시선과 마주쳤는데 그 예리한 눈빛은 이렇게 묻고있었다.

《아니, 무슨 일에서나 1등을 양보하기 싫어하던 반장동무가 웬일이요?》

영순은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번 과오를 범하더니 무척 조심스러워졌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영순은 회의가 끝나자 뭇시선을 피하여 총총히 달음쳐나왔다.

그때를 생각하는 영순의 입에서는 또다시 호― 한숨이 새여나왔다.

그자신도 자기의 성격적인 변화가 이상하리만큼 놀라왔다. 욕망을 앞세우기 전에 능력타산부터 해보고 실천보다 말을 앞세우기 주저하는 이 심중성은 확실히 그전날의 담대하고 야심만만하던 박영순이에게서는 찾아볼수 없었던 성격이였다.

사실 영순은 자기의 명예욕이 또다시 구름처럼 둥둥 떠오를가봐 의식적으로 자기를 경계하고 자제하고있었다. 말부터 앞세우는것이 허영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우기 준석의 말처럼 영순이네 2작업반은 벼가을조건이 제일 불리한 형편에 처해있었다. 농장적으로도 지대가 제일 낮아 물이 벙벙하게 차있는데다 수천평에 달하는 옥수천개답틀은 마을로부터 10리나 떨어져있어 포전으로 오가는 시간만 해도 왕복 2시간씩 잡아먹는다. 이런 조건에서 하루 천평을 해낸다는것은 너무나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영순은 허공에 뜬 연설을 피하고 그대신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홀로 조용히 포전에 나온 길이였다.

정작 물창우에 쓰러진 벼들을 보느라니 절로 한숨이 새여나갔다. 어차피 1등은 바라볼수 없는것이고 리적으로 그어놓은 10일이라는 기한내에 벼가을을 끝낼수 있겠는지가 문제였다.

《영순이! 여기서 뭘해?》

등뒤에서 날아오는 목소리에 영순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뒤를 돌아보니 농립모를 쓴 준석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다가오고있었다.

《아이, 오빠가 여기까지 어떻게?》

《래일 벼베기 첫 전투를 여기서 하자는거다.》

준석의 단도직입적인 대답은 영순을 과히 놀라게 했다.

《여기서요?》

《그래, 천평베기의 시범을 보여주자는건데 어때? 자신있지?》

준석은 두손을 허리에 얹으며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영순은 리해되지 않는 눈길로 그를 마주보았다.

《하필이면 제일 한심한 악조건에서 시작할 필요가…》

《그러니까 여기선 천평이 불가능하다는거냐?》

《다른데선 된다 해도 여기서만은 힘들거예요. 충분히 타산해보았지만… 거리, 조건, 시간… 모든게 불합리해요.》

《여기서 안되면 2반은 리일정계획에 맞추지 못한다는건데, 그럴수 있니?》

영순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노을빛에 물들었던 벼바다는 어느덧 어스름속에 잦아들고있었다.

《여기 좀 앉자.》

준석은 포전머리에 먼저 앉으며 영순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준석이곁에 조금 떨어져앉은 영순은 풀대를 뽑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난 네가 이렇게까지 심장이 작아진줄은 몰랐구나.》

《…》

《솔직히 말해보아라. 이제는 날개를 접고 땅바닥걸음을 하며 적당하게 살아보자는거냐? 돌다리도 두드려보구 건느면서 편하고 안전한 길만 골라 걷자는거야?》

《아니, 오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저를 그렇게 너절한 녀자로 보는가요?》

영순은 대뜸 눈물이 글썽해서 항변했다.

《그럼 어째서 애초부터 신심없는 소릴 하는거냐? 누구보다 앞장에서 기치를 들고나가야 할 박영순이가? 좀스럽게 타산을 하구 한숨을 쉬구 뒤전에 물러앉아 눈치나 보구… 이게 과연 일군의 자세란 말이냐?》

준석의 랭철한 타이름에 영순은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친 소심성으로 또다시 과오를 범할번 했던 자신이 더없이 저주스러웠다.

《영순이, 이걸 알아야 해. 공명주의나 보신주의나 다같이 우리의 적이라는걸. 오직 당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면 되는거야.

난 이번 벼가을전투기간에 영순이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1등반장〉박영순이라는걸 보여주었으면 한다.》

《고마워요, 오빠! 변함없는 믿음에 꼭 보답하겠어요.》

영순은 두눈을 빛내이며 굳게 다짐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두사람은 나란히 포전길을 걸어나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런 악조건에서 천평베기가 힘겨울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머리를 써서 조직사업을 잘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일이란 원래 시작할 때의 힘으로 와닥닥제낄 때 제일 능률이 나는 법이지. 하루이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힘이 진해지고 탕개가 풀리기마련이거던. 그러니 제일 힘겨운 구간을 출발계선으로 정하구 폭발적인 첫 힘을 리용해서 어려운 고비를 돌파해야 한다. 그다음엔 그 기세로 냅다밀고나가는 수지.》

《알겠어요. 제일 첫전투로 여기 개답틀을 완전히 제끼겠어요.》

영순은 신심이 북받쳐 말했다.

계속하여 두사람은 천평베기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와 실질적인 대책문제를 토의하였다.

어느덧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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