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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0일

평양시간


제 24 회

제 3 장

사랑을 가꾸라

1


동이 트자 박영순은 서둘러 포전으로 나갔다.

오늘부터 모내기전투가 시작된다.

부락당비서가 어느새 먼저 나와 논뚝에 붉은기들을 꽂고있었다.

유리판처럼 고루어진 네모반듯한 논배미마다에 알맞춤하게 들어찬 물이 희푸름한 새벽하늘을 고요히 비껴담고있었다. 논두렁엔 어제 저녁 떠놓은 모들이 바구니마다 듬뿍듬뿍 담겨있다.

저 멀리 지평선에선 해돋이를 알리는 붉은 띠가 서서히 솟아오른다.

두손을 허리에 짚고 전투가 벌어질 포전들을 둘러보는 영순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마라손경기의 출발선에서 신호총소리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농사란 한해동안의 모든 공정들이 다 전투의 련속이지만 그 숱한 전투가운데서도 가장 긴장하고 격렬한, 그러면서도 가장 규모가 큰 전투가 바로 모내기이다. 모내기가 중요한 그만큼 모내기전투에서 발휘되는 모든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평가도 응당한 무게를 가지는것이다.

소재지쪽에서 방송차의 음악소리가 터져나왔다. 말그대로 방사포의 일제사격과 같은 혁명군가의 대합창이다.

좋다! 또 한번 달려보자! 나래쳐보자! 준마를 타고 기치를 들고 보란듯이 앞장에서!

뿌듯한 흥분속에 심호흡을 하고나서 영순은 출발선을 떠난 선수마냥 힘있게 걸음을 내짚었다.

탈곡장에 이르니 넉대의 모내는기계와 써레날을 단 뜨락또르가 앞머리에 붉은 삼각기발을 이고 출발명령을 기다리듯 줄을 맞춰 서있었다.

모내는기계들에는 운전석등받이우에 가스를 팽팽하니 채워넣은 비닐풍선들이 매달려있다. 직화로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기때문에 기계화반에서는 벼겨가스를 생산하여 공급해주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군에서 주는 휘발유는 얼마 되지 않으므로 요긴한 대목에 가서 타쓰게 되여있었다.

먼저 나온 1분조 운전공 김도열과 2분조 운전공 강명준이 기계정비를 하다가 인사들을 했다.

끼끗하고 준수하게 생긴 30대초의 청년 김도열은 농업대학 기계과를 나온 기사여서 언제나 믿음이 푹 갔다. 그보다 10살아래인 명준이는 동글나부죽한 얼굴에 머루알같은 두눈을 기지있게 반짝거리며 도열에게서 기술을 배우느라고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들을 미더웁게 바라보며 영순은 다짐을 두듯 말했다.

《이번 전투의 승패여부는 결정적으로 동무들에게 달려있어요. 도열동무! 명준이! 어때? 자신들 있지요?》

입이 무거운 김도열은 선뜻 대답을 못하는데 명준이가 스파나로 모자창을 올려밀면서 내쏘듯 말했다.

《말은 바른대루 운전공한테 달렸나요? 이 비닐풍선에 달려있지.》

《뭐라구?》

뜻밖의 반발에 영순은 금시 눈초리가 살아올랐다.

《명준이, 정말 첫시작부터 방정맞은 소리 하겠어?》

그러나 당돌하기 그지없는 명준이는 천연스레 웃으며 제 할 소리를 다했다.

《내가 뭐 없는 소리 지어냈나요? 사람두 밥을 먹어야 일을 하는것처럼 모내는기계두 먹구서야 굴러가지요? 그런데 이 비닐풍선이 기계를 얼마나 잘 먹여주겠는지 모르거던요.

그러니 운전공이야 이 풍선이 하자는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아요? 가자면 가구, 서자면 서구…》

영순은 그만 말문이 막혀 한숨을 내쉬였다. 운전공들의 불만이 충분히 리해되였던것이다. 그도 휘발유를 끌어다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이루 말할수 없었다. 벼겨가스주머니가 기껏 3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를 먹어야 하는 판이다.

부위원장이 체결해놓았던 기름마저 준석위원장이 거절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내심 원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부위원장이 작업반을 담당한 이상 비상시에는 휘발유를 뽑아낼수 있다는 배심으로 자신을 위안하였다.

그는 부러 엄한 기색을 짓고 히물거리는 명준을 호되게 몰아댔다.

《그래서 어쩌자는거예요? 미국놈들이 우릴 고립압살하겠다구 봉쇄요 제재요 하구 날뛰는데 그놈들 바라는대루 앉아죽길 기다리겠어요? 그렇게 신심없는 소릴 하겠거들랑 저레 썩 물러가요!》

《챠 이거, 반장누님 진짜 성났나요? 나두 사실은 미국놈들 깔아뭉개는 심정으루 기계를 힘차게 몰아가자니까 그러는거지요 뭐, 헤헤… 내가 아무렴…》

명준은 비위좋게 웃으며 눈을 찡긋하고《누님》의 눈치를 살피였다.

영순은 그만 웃지 않을수 없었다. 명준이하고는 늘 이렇다. 할 소리 다 하면서도 제 할 일은 다 하니까.

이윽고 운전공들이 다 나오고 뜨락또르운전수 호영이도 나왔다.

영순은 엄숙하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기계화소대가 일제히 동음을 울리며 종대를 지어 전투현장으로 향했다. 지축을 흔들며 나아가는 그 기세는 자못 위엄차고 장쾌했다.

한편 방풍장을 벗긴 모판들에는 벌써 농장원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승벽내기로 모를 떠나가고있었다. 모뜨기경기는 그야말로 한순간의 손놀림에도 순위가 달라지는 치렬한 단거리전이다.

각기 자기 분조포전을 차지한 모내는기계들이 거울같은 논판들을 누비기 시작했다.

공급수들이 부지런히 모춤을 추려 모칸에 넣으면 10개의 기계손가락들이 나란히 찰칵찰칵 돌아가며 모포기들을 연방 물어내린다. 마치도 천을 짜는 방직기계마냥 순식간에 푸른 주단을 쭉쭉 펼쳐나가는 모양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써레질을 하는 뜨락또르운전수와 농장원들도, 모를 뜨고 나르는 농장원들도, 가래질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그 모습에서 기쁨을 느끼고 힘을 얻으며 흥에 겨워 일손을 다그치고있었다.

허나 그 기쁨과 흥겨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발동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덜컥 기계가 멎어버렸다.

영순은 마치도 자기의 심장이 박동을 멈춘것만 같았다. 예견했던바이지만 맥이 탁 풀려나갔다.

운전공은 가스를 받으려 기계화반에 갔다와야 했다.

그러니 모뜨기와 모내기의 속도균형을 도저히 맞추어낼수가 없다. 떠놓은 모를 제때에 내지 못하면 모살이가 잘 안되여 시시각각으로 수확고감소를 보는것이다.

영순은 할수없이 모뜨기로력을 손모내기에 돌렸다.

이 넓으나넓은 규격배미들을 기계로 쭉쭉 왔다갔다했으면 얼마나 시원하랴만 수십명의 농장원들이 오구구 달라붙었대야 언제 끝날가싶다.

그사이 운전공들은 가스주머니를 타가지고 와서 발동을 살리느라 씩딱거렸다.

얼마쯤 논판을 누벼나가다가 기계는 또 멎어섰다.

《야― 이거야 사기 떨어져서 어디?》

명준은 맥이 풀려 논뚝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말아문다.

멀리서 그 모양을 보고 영순이 변나게 달려왔다.

《명준이! 또 이러구있으면 어떡해?》

《글쎄 말입니다. 정말 야단났어요. 이 철없는 기계가 강낭밥은 싫구 흰쌀밥만 달라구 하니 어쩌면 좋아요? 소화가 안된다나요?》

《희떠운 소리 작작하구 빨리 가스나 타러 갔다와! 어서 일어 못 서겠니?》

영순의 맵짠 추궁에 못이기는척 하고 일어난 명준은 엉뎅이를 툭툭 털고 기계화반으로 가면서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헹, 이따위 비닐풍선이나 달구다니면서 어느 세월에 모내기를 하겠어?》

영순은 호― 한숨을 내쉬였다. 어깨가 처져 돌아서던 그는 문뜩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는 안되겠어. 무슨 대책이 있어야지 멍청해서 벼겨가스나 바라보다가는 1등은 고사하구 제기일도 보장 못하겠는데.)

때마침 민영태가 큰길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논두렁으로 걸어왔다.

영순은 무작정 그의 손에 매달렸다.

《부위원장동지! 안되겠어요, 휘발유가 있어야지.》

《내 그러잖아두 지금 기계화반에서 오는 길인데 판이 틀렸더라구. 사방에서 아우성이야.

그런데두 위원장은 잡관목인지 뭔지 하는데 붙어서 뜯었다맞췄다 하고있질 않아?》

《야, 위원장동지가 왜 그럴가? 부위원장동지가 이런 때 자기 역할을 해야지 이러다가 농사 망하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모내기기일이 늦어지면 소출이 그만큼 떨어진다는걸 귀에 못이 배기두룩 강조하던 사람이… 좌우간 어쨌든 모내기야 제때에 해놓구봐야지. 위원장처분 기다릴거 없이 내가 움직이겠어.》

《예, 무조건 끌어와야 해요. 오면 잊지 말구 우리 작업반에부터!》

《암, 여부 있나?》

민영태가 자전거를 타고 급히 떠난 뒤 영순은 다시 모뜨기에 로력을 돌리였다.

한편 진퇴량난에 빠진 김준석의 심중은 복잡했다. 새로 제작한 직화로시험에서 또다시 실패하고 나왔는데 가스를 타러 온 운전공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는소리들을 했다. 작업반포전들에 나가니 반장들은 또 그들대로 떠놓은 모가 시들어간다고 하소연들을 했다.

옥수천동뚝을 거닐며 준석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것인가?

어차피 올해모내기는 직화로에 기대를 걸수 없게 되였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불합리한 벼겨가스에 매달려 계속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하는가.

아니, 모내기속도를 보장하는것이 알곡소출을 높이는 근본담보가 아닌가?

지원로력을 받지 않은 조건에서 손모내기도 안된다.

방도는 오직 휘발유를 끌어오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여 우에다 손을 내밀고 특혜를 요구하기에는 차마 량심이 허락치 않는다.

사실 그가 처음 내려올 때 농업위원회의 어느 일군도 말했었다.

《준석동무, 앞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찾아오오, 전화도 하구. 아무리 어려운들 우리 위원회에서 동무네 농장 하나 생각해줄 여유가 없겠소?》

도움을 받자꾸나 하면 그뿐이 아니다. 농업대학시절과 인민경제대학시절친구들이 중앙, 도, 군의 곳곳에 있다. 김대일경영위원장도 이미 휘발유를 약속해주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짓는 농사가 무엇에 필요한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구? 량심을 떠난 의리가 있을수 있는가?

아니, 그렇다면? 또 다른 생각이 번쩍 뇌리를 친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으로 농사를 망쳐놓는것은 량심에 맞는 일인가? 아니, 이것은 더더욱 엄중한 배은망덕이다. 농사는 지어놓고봐야 한다.

휘발유를 끌어다 모내기를 하면서 보자.

부위원장에게 지시를 주려고 2작업반으로 간 그는 모판에서 영순이를 만났다.

《어쩌자고 이렇게 밀려쌓이도록 모를 뜨고있소? 다른 반들은 떠놓은 모가 시든다고 걱정들인데.》

《위원장동지, 사실…》

영순은 차마 숨길수가 없어 실토하였다.

《뭐라구? 부위원장이 휘발유 실러?!…》

준석은 심장을 뜯기우는듯 한 아픔에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어째서 사전토의도 없이… 이제는 이 관리위원장을 믿을바가 못된다는건가? 그런 중요한 문제도 토의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것인가?

자존심을 칼질당한 분격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영순이 죄를 지은듯 고개를 숙이였다.

《용서하세요. 사실 제가 너무 급해서 사정했어요.위원장동지가 리해하실줄 알구…》

준석은 분노의 덩어리를 가까스로 삼켜버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탓하지 않는다. 다 내 불찰이지. 내가 관리위원장으로서 일을 쓰게 못했기때문이다.》

그리고는 맥없이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기계화반에 들어서는데 마침 휘발유가 실린 화물차가 당도하였다.

운전칸에서 민영태의 얼굴이 나타났다.

《경영위원장동지가 보내줘서 기름을 싣고왔수다.》

《어째서 사전토의없이 움직였습니까?》

《토의한대야 위원장동무가 승낙할리 만무하구.

또 이런 일엔 위원장자신이 전면에 나서는것보다 이 부위원장이 나서는게 낫지요. 다 위원장동물 생각해서 그랬으니 널리 리해하우다.》

영태의 천연스런 대답에 준석은 불끈한것을 삼키였다. 허나 긴말은 하고싶지 않았다.

《좌우간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영태는 헌헌히 대답했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직화로문제를 결단내게 된것이 다행스러웠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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