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22


조반을 끝내자 달천은 면으로 나갈 차비를 서둘렀다. 몇해전에 형수가 손수 천을 끊어다 지어준 밤색두루마기를 걸치고 풍뎅이를 썼다.

눈매가 어글어글하고 키가 늘씬한 그의 풍채에서는 농사군냄새보다도 유식자 비슷한 냄새가 더 풍기였다. 실농군인 달수의 얼굴이 볕에 타서 적동색으로 번들거린다면 농사일에 품을 많이 들이지 않는 달천의 얼굴은 누르끼레한 병색이여서 건강미라는것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

오늘따라 날씨도 자못 쾌청하다. 면에 나갈 때면 매양 그러듯이 달천은 들뜬 기분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는 노상 일에 지친듯 한 표정으로 노곤해서 다니다가도 면으로 행차하는 날은 면도까지 말쑥하게 하고 첫선을 보러 가는 총각처럼 수선스레 굴었다. 그런 날이면 눈에 이상한 광채까지 돌았다.

궁벽한 삼치골에서 반생을 농사로 살아온 달천에게는 면으로 가는 날이야말로 명절이였다. 술집과 도박장과 음식점에서 사귄 어중이떠중이들이지만 면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는것은 그의 둘도 없는 락이였다.

오늘은 형의 분부를 받고 움직이는 합법적인 행차였다. 형이나 형수의 눈치를 볼것도 없었고 봉순에게 리치에 잘 닿지도 않는 구실을 둘러댈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나 웅담을 높은 값으로 팔아서 간도에 가있는 딸자식과 사위때문에 속을 태우는 형과 형수를 기쁘게 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버지, 오늘은 면에 갔다가 빨리 돌아오지요?》

달천의 두루마기앞섶을 여며주던 봉순이가 아버지의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큰아버지가 기다리겠는데 인츰 돌아오겠다.》

《큰아버지가 오늘 우리 집 가을을 도와주겠다는데…》

주인이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알겠다. 며칠째 쉬지 못하고 가을걷이를 하더니 우리 봉순이 고운 얼굴이 홀쪽해졌구나.》

달천은 정겨운 눈길로 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보고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영민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딸을 대할 때면 옥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옥녀의 모습을 그려보느라면 딸에게 바치는 사랑이 부족한것 같아 늘 자책으로 시달리는 달천이였다.

면에 간 달천은 약방에 들려 웅담을 20원에 팔았다. 당초의 타산보다는 5원을 더 받았다. 결국 5원은 공짜로 생긴셈이다.

달천은 거뜬한 기분으로 약방을 나섰다. 형과 형수가 20원을 받아들고 기뻐할 모습을 그려보느라니 마음이 금시 풍선처럼 둥둥 뜨는것 같았다. 그는 면에 한번씩 드나들 때마다 형한테서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그의 면행차는 대부분 술과 도박을 위한 나들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칭찬을 듣게 되였다.

약방을 나서자 투전군들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면에 나올 때마다 뒤골방에서 만나군 하는 단골투전군들이였다. 어디서 한잔 걸쳤는지 얼굴이 다들 불그레하고 몸가짐도 비틀비틀하였다.

《달천형님, 이거 오래간만이웨다.》

《본지가 오래서 얼굴을 다 잊어먹겠수다.》

《모처럼 만났는데 한잔 해야지요.》

투전군들의 살가운 꼬드김에 달천은 대뜸 손목이 근질근질해졌다.

우수리나 다름없는 돈 5원이 두루마기 안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을 마구 든장질하였다. 《다시는》, 《다시는》하는 도박군의 절개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 더 연약하고 변덕스럽다.

아니야, 그래선 안돼! 그 돈을 허문다면 난 인간이 아니야.

달천은 끝내 자신을 다잡고 도리머리질을 하였다. 그 웅담이 어떤 웅담인가. 하지만 그의 인내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달은 주막집앞을 지날 때부터 시작되였다. 그 집 퇴마루에서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혀꼬부라진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신발을 찾아신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부터 달천의 마음속에서는 걷잡을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 참새가 방아간을 그저 못 지나가듯이 술에 인이 박힌 사람들은 일단 《주충》이 배속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참지 못하고 그 《주충》앞에 투항한다. 바람결에 실려와 코구멍을 간지럽히는 술향기는 그로 하여금 《렴치》라는 거치장스러운 《덧옷》을 홀랑 벗어내치게 하였다.

에라, 공짜돈이 생겼을 때 목이나 좀 추겨보자.

달천은 그이상 자신을 더 이겨내지 못하고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돈이 아까와 술은 마시지 못하고 탁주를 청해다 맛스럽게 마시였다.

병달이가 주막집에 나타난것은 달천이 탁주 세사발을 《요정》냈을 때였다. 병달은 마름치고는 건달마름에 속하는 《놀새》였다. 그는 작인들한테 눈을 부라리지 않으면서도 받아낼것은 다 받아내는 수완가였다. 병달에 대한 윤지주의 믿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병달은 1년 365일중 절반이상은 노름판에서 보냈다. 오늘도 노름판에 끼우려고 면으로 왔을것이다.

《봉순 애비, 어떻게 된 일인가. 요즈음은 얼굴을 통 볼수가 없으니.》

그가 접대부에게 탁주 한사발을 청하면서 걸치는 말이다. 만날 때마다 매번 느끼군 하는바이지만 달천을 대하는 병달의 태도는 여간만 곰살궂지 않았다.

《가을을 좀 하느라구…》

《아무리 바빠도 이따금씩 얼굴이야 보여야지.》

《바쁘기도 하지만 손에 쥔게 없어서…》

달천은 스스로도 비굴한감을 느끼며 헤식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정을 잊으면야 안되지. 그렇지 않은가?》

《예.》

달천은 말끝마다 고개를 조아리는 자기자신을 의식하자 입에서 열물이 배여나오는것 같아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였다. 자기보다 나이가 6살인가 7살인가 아래인 병달을 매번 굽신거리면서 존대해야 하는 굴종의식은 작인들이 달갑지 않아하면서도 숙명처럼 걸머지고 가야 하는 어쩔수 없는 처세술이였다. 달천은 아직 이 놀랑패같은 마름한테 적의를 느껴본적이 한번도 없다. 적의는커녕 오히려 미미하게나마 호감까지 가지였다.

그가 그런 호감을 가지게 된것은 투전군들을 통하여 병달이가 겪어온 희극적인 경력의 일단을 얻어들은 후부터였다.

병달은 일상생활에서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모사형의 인간이였지만 학문을 닦는데서는 아무런 의욕도 열정도 없는 천성적인 돌대가리였다. 그는 고등학교입학시험을 두번이나 쳤지만 두번 다 미끄러졌다.

병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번째 시험에서까지 떨어지면 집재산을 하나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병달은 세번째 입학시험에서도 불합격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비상한 협잡기가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총독》의 인장까지 찍힌 입학증명서를 위조하여 아버지에게 보이고 광주에 올라가 고향친구의 하숙집에 거처를 정하고 몇달동안 학교를 다니는척 하다가 들장이 나서 《조선총독인장위조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석달이나 류치장신세를 진 후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왔다.

달천은 모사군인 병달이가 그처럼 지독한 돌대가리이고 재미나는 협잡군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이 희비극은 병달에 대한 종전의 인상을 달리하게 하였다. 병달은 달천의 마음속에서 지주의 앞잡이라는 판에 박힌 인간으로부터 《재미있는 협잡군》으로 변신하였다. 《조선총독》의 인장까지 위조하여 왜놈들의 눈을 속인다는거야 사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이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달천은 마름에 대한 경계감을 늦추었다.

《하, 혼자서 주막집 출입을 하는걸 보니 봉순 애비한테 오늘은 돈이 좀 생긴 모양이다.》

병달은 달천의 뒤를 밟아 삼치골을 떠날 때 벌써 그가 면에 웅담을 팔러 나간다는 말을 듣고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변죽만 슬슬 긁어댔다. 달천은 기분이 좀 뜬김에 방금전에 약방에서 웅담을 20원에 팔아넘긴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였다.

《확실히 봉순 애비는 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같으면 그걸 15원에도 못 팔았을거네.》

달천은 지금 병달이가 자기를 잔뜩 춰올리는것도 모르고 황감한 심정으로 마름의 칭찬을 받아들이였다. 달천이가 기분이 떠서 싱글벙글 하는것을 보자 병달은 슬쩍 말을 돌렸다.

《봉순 애비, 내 지금 투전판에 가는 길인데 거 돈이 생겼을 때 전번날 나한테 빚진 돈 2원을 물어주지 않겠나.》

《빚진 돈》이라는 말에 달천은 정신을 번쩍 차리였다.

《무슨 돈 말인가요?》

《며칠전에 투전판에서 나한테 꾼 돈 있지 않나.》

《그거야 아무때든 돈이 생기면 물어주기로 하지 않았나요.》

《웅담을 팔아 생긴 돈은 돈이 아니고 뭔가.》

《그거야… 형수의 로자로 쓸 돈인데 어떻게…》

달천이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움츠러들자 병달은 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봉순 애비, 이 병달이가 아무렴 그 잘난 돈 2원이 없어서 그러겠나. 그저 투전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지 않았던 돈을 받으면 신수가 틀것 같아서 그러는거지. 내 노름을 끝내는 즉시 돌려주겠네.》

《정말 끝나면 돌려주겠나요?》

《정말 아니믄, 일구이언하겠나. 그러니 함께 가세나. 오늘 투전목을 잡기만 하면 뭉치돈을 벌지도 몰라.》

그 말에 달천은 귀가 솔깃해졌다.

마름의 말이 옳아. 웅담을 팔아 5원을 더 번걸 보면 확실히 오늘은 운이 좋아. 이런날 투전을 하면 생돈을 벌수 있어. 형수의 로자도 더 보태고… 운이 트이면 엄지소 한마리값이 생길지도 모르지.

달천은 이런 생각을 하며 병달을 따라 투전판으로 갔다. 그는 그 투전판이 자기를 곤경에 밀어넣기 위한 함정이라는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더더구나 윤치홍이 봉순이를 자기 집 부엌녀로 만들려는 흉심을 품고 병달이를 내세워 자기를 막다른 골목에 밀어넣으려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날 달천은 투전판에서 웅담값 20원을 몽땅 하늘로 날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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