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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5일

평양시간


제31회


제 3 장

탄탄대로는 없다


8


실험실창가로 비쳐드는 해빛을 받아 현미경옆에 수북이 쌓인 시험관들이 유난스레 반들거렸다.

흰 위생복을 입은 은희가 점도록 이마에 손을 받친채 까닥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여직껏 《C-1호》균연구에 전심전력을 다 바친 그였으나 이날은 더이상 그 세계에 잠길수 없었다.

웬일인지 지배인실에서 장철영에게 주라는 책벌을 위원장이 강경히 막아나서던 모습이 자꾸 뇌리에 갈마들며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실패는 도기초식품처럼 질을 높이려 하다가 발생한것이였다. 그러나 《C―1호》균은 그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너무 욕심을 부려 귀중한 원료만 자꾸 없애다가 실패하면 그 책임이 동무는 물론 종당에는 인민위원장한테까지 미친다는걸 명심하오.》

하고 지난번에 전부위원장이 하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일도 실패하자 문제가 날카롭게 섰는데 그만두라는 《C―1호》균을 생산에 도입하려다가 성공 못하면 그때는 더 심각해질것이였다.

그는 자신을 두고 두려운것은 없었다.

기초식품에서 비약할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각오도 되여있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경우 그로 인한 후과를 한숙위원장이 또 책임지려고 할것이였다. 그러면 전부위원장과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자기로 하여 피해는 한숙위원장이 받게 될것이였다.

머나먼 평양에서 실험기구들을 구해가지고 온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날이때까지 떠밀어주고 보살펴주는 위원장이 더없이 고마왔다. 또 군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일군이였다.

바로 은희는 그런 일군에게 자신으로 하여 사소한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여겼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목적한대로 연구를 계속하고싶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는다고 담보할수 없는 이상 전부위원장의 요구대로 하고 그후에 《C―1호》균을 연구하는것이 무난한 길이라고 여겨졌다.

전문태가 전화로 욕망만 앞세우면 실패한다고 한 말은 장철영이뿐아니라 은희 자기도 들으라고 한 말같았다.

얼마 안되는 개건기간에 두달나마 걸리던 기초식품생산기일을 단 7일로 줄이면서 그 맛과 질을 훨씬 높이려 한다는것이 정말 허욕이 아니겠는가? 허욕이라면 쓰디쓴 실패가 뒤따르기마련이며 한숙위원장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그런데 위원장은 기술개건기간에 아직 어디서도 만들지 못한 그런 기초식품을 내놓을것을 바라고있다.

위원장이 원하는대로 하다가 자칫 잘못하여 그에게 화를 입힐것 같고 중단하자니 꼭 죄를 짓는것 같았다.

명백한 결심을 내릴수가 없어 은희는 일어나 두팔을 가슴에다 엇건채 이윽토록 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무슨 생각에 그리 옴해있소?》

언제 들어왔는지 남편이 곁에 서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해요.》

그 대답에 의심쩍어하는 물음이 뒤따랐다.

《그런데 왜 창문만 내다보고있소?》

은희는 조군룡을 향해 돌아섰다.

《발효탕크는 어떻게 됐어요?》

《열설비들을 세심히 측정해보니 군부대기초식품에서와 차이가 있소. 다시 뜯어야겠소.》

조군룡은 심상히 대답하였으나 실상은 설비들의 기술개건을 군내 자재로 하다보니 그 고충이 말이 아니였다.

《당신의 일은 어느 정도 진척되였소?》

은희는 대답대신 한숨부터 호― 하고 내쉬였다.

《그저 그 상태예요.》

유난히 살갗이 흰 은희의 얼굴에 수심이 무겁게 드리웠다.

다른 균보다 퇴화가 빠른데다가 외부영향에 민감한 《C―1호》균은 기존방법으로 도저히 종균을 만들수 없었다.

결국 은희자신이 새롭게 탐구해야 하였다.

밤마다 문건들을 뒤적이며 연구하던 끝에 균의 영양상태를 극한점까지 떨구었다가 영양을 급격히 높여 침전시키면 종균을 얻을수 있는데 《C―1호》균에 적합한 사료매질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은희는 현미경곁에 무둑히 쌓인 시험관들을 맥빠진 손으로 한켠에다 밀어놓았다.

포자들이 몽실몽실 뭉쳐져야겠는데 이젠 수십차례나 바꾼 이번 영양매질로도 시험관안의 균들이 흩어져 다 죽었거나 퇴화되였던것이다.

《그래 포기할지 어쩔지 생각중이예요.》

그 소리에 조군룡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은희를 한동안 지켜보던 그는 거칠게 물었다.

《도대체 그건 무슨 말이요?》

은희는 수지통에다 시험관들을 하나하나 넣기만 하였다.

《전 무엇보다 우선 위원장동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이번에 지배인동지의 책벌을 막아나섰지만 사실은 당신을 막아주신거나 같아요.》

《그건 나도 인정하오.》 군룡은 수긍하면서도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쨌단 말이요?》

그 물음에 은희의 눈빛이 노여움을 담고 쳐들렸다.

《어쩜 그런 말을 할수 있어요? 위원장동지만 매번 우릴 도와주고 우린 위원장동지를 위할 의무가 없다는거예요? 그러지 않아도 기술개건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있는데 말이예요. 전부위원장이 반대하는 〈C―1호〉균을 생산에 도입했다가 만약 실패하면 그래 지난번처럼 무난히 지나가리라고 보세요? 천만에! 아니예요, 절대로 그렇게 안될거예요!》

《위원장동지를 위하려면 실패가 없게 해야지.》

《아니, 뭐 당신은 실패하고싶어서 이번에 그렇게 됐어요?》

조군룡은 은희의 말에 응대를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먼저 흥분을 누르고 은희를 이끌어 의자에 앉히였다. 그는 마주앉아 새침해진 안해의 얼굴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밖에서 황철나무들이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서로 만나서》 하고 조군룡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것은 아니잖소.

처녀시절에 당신이 뭐라고 했소? 과학의 길에서 한생을 참답게 살자고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귀중히 간직하고있소.》

은희의 이마가 약간 숙어졌다.

처녀시절에는 점령 못할 과학의 요새가 없을것만 같았었다.

황철나무의 설레임과 함께 은희는 지나간 그 나날로 줄달음쳐가는 자신을 어쩔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에 나가 식료공장에서 사업하던 은희는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청년과학자들의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전시회에 내놓은 《맛내기간장무살균법》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는데 알고보니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조군룡의 발명품이였다.

은희가 대학시절에 그를 알게 된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대학선생들중에 녀성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총명하고 눈썰미 있는 은희를 자기의 《조수》로 정하였다.

그후부터 은희는 수업이 끝난 후면 박사의 연구사업을 도우면서 구해보기 힘든 귀중한 책들을 많이 탐독할수 있게 되였다. 그 내막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날 같은 학급도 아닌 조군룡이 찾아왔다. 그는 필요한 책제목을 말하면서 3일간만 빌려달라고 청했다. 대학구내에서 간혹 봐서 얼굴이나 알 정도의 남학생이였으나 너무도 간절하고 수준높은 책을 요구하기에 거절하기가 딱해 박사선생의 승인을 받고 빌려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군룡은 은희한테서 적지 않은 책들을 빌려볼수 있게 되였고 그러는 과정에 그들의 관계도 어느 정도 가까와졌었는데 몇년이 지나 이렇게 우연히 평양에서 만나게 된것이였다.

《축하해요!》

은희는 군룡이가 부러웠다. 사실 그때 은희도 연구는 하고있었는데 이렇다 할 발명품을 가지고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던것이다.

《그래, 은희동무는 뭘 가지고 왔소?》

조군룡의 물음에 은희는 대답을 못했다.

대학시절에 제노라하던 자기가 그앞에 부끄러웠다. 그가 대답을 못하자 조군룡은 혼자소리를 했다.

《동무야 큰걸 구상하고있겠지.》

그렇게 헤여진 그들은 그후 과학기술축전에서 또다시 만났다. 여기서 은희는 2등상을 받았고 조군룡은 3등으로 당선되였다.

그들은 떠나기 전날 밤 대동강가로 나갔다. 그날 밤늦도록 강가에 앉아 자기들의 포부와 래일의 꿈을 나누었다.

별들이 총총한 밤이였다. 수양버들가지들이 흐느적이는 유보도에서 그들은 한생 과학탐구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약속하였다.

그때 은희가 바로 아까 남편이 한 말을 했던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이처럼 어려울줄은 몰랐다. 결혼후 과학기술축전에서 그들이 탄 메달이 서로 경쟁하듯 늘어나 이젠 여러개나 벽에 걸려있지만 아직 인민들에게 이렇다 할 덕을 입히지 못하고있는것이다. 《C―1호》종균을 만드는 문제도 시작에 불과하거니와 그 연구가 사람들관계에 이처럼 엉킬줄은 차마 몰랐다.

《그래서 무슨 일에서나 탄탄대로는 없다는거겠지.》

침묵속에서 울리는 남편의 말은 마치 은희의 안타까운 심정을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같았다.

《그런데 왜 오셨어요?》

그제야 은희는 군룡이 온 용무를 물었다.

《당신 하는 일이 어떻게 됐나해서…》

《…》

그때 문소리가 나며 뜻밖에도 룡일이가 실험실로 들어왔다.

단위원장인 룡일은 수업후에도 늘 학교에 있지 좀해서 부모들이 있는 공장에 찾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먼저 은희가 묻자 남편도 아들을 지켜보았다.

룡일은 볼이 잔뜩 부어가지고 씨근덕거릴뿐이였다.

《말해야 알지.》

조군룡의 한마디에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룡일의 량볼에서 눈물방울부터 굴러떨어졌다.

《난 망신만 했어요.》

아들의 대답에 은희는 놀라며 군룡을 쳐다보았다.

《망신할짓은 왜 하고 다니는거야?》 군룡이 아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아도 보지 않고 왜 아일 욱박지르기만 해요?》

은희는 군룡을 나무라며 룡일이한테로 한발 다가섰다.

《쳇- 동무들이 뭐라는줄 알아요? 아버지, 엄마가 장을 썩여 인민위원장어머니가 책벌받을번 했대요!》

《엉? …》

조군룡은 입을 벌린채 더이상 말을 못했다.

아들과 남편을 바라보는 은희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듯 가늘게 떨렸다.

부모의 과실로 아들까지 다른 사람들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했다.

만약 전문태의 의도와 달리 연구사업을 계속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지금보다 몇배 더 엄청난 일이 있을수도 있었다.

은희는 굳어져있는 남편과 볼이 부어있는 아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군룡의 성난 눈길이 피끗 들렸다.

한데 룡일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또 튕겨나왔다.

《난 이담에 대학에 안 갈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군룡은 누르고있던 화까지 아들한테 터뜨렸다.

《룡일아! 아버지, 엄마가 잘못한건 잘못한거구. 너 오늘 왜 그러니?》

은희는 쪼그리고앉아 조용한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룡일은 뭐가 그리 분한지 연신 팔소매로 눈물을 닦고있을뿐이였다.

《사내자식이 울긴, 어서 말해봐, 무엇때문에 네가 그런 맘까지 먹게 되였는지 아버지, 어머니가 알아야 할게 아니냐?》

그제서야 룡일은 눈물을 닦고 얼굴을 쳐들었다.

그리고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룡일은 평양에서 열리게 될 조선소년단 제6차대회 군대표로 추천되였다. 도청년동맹에 명단이 올라간 후 다른 소식이 없자 자기가 가는걸로 알고있었다. 오늘 룡일은 소년단지도원선생님한테 대회에 참가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지도원선생님은 웬일인지 딱해하다가 《룡일학생, 이번엔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하고 대답했다는것이다.

군청년동맹에서는 추천했으나 도청년동맹에서 룡일이를 기각시킨것이였다.

아들의 말을 들은 군룡의 부부는 침묵을 지켰다.

학습은 물론 소년단조직생활에서도 군적으로 모범인 아들이 도에 올라가 기각되였다는 사실은 그들한테도 천만뜻밖이였다.

《그건 할수 없다치고 대학에 안 가겠다는건 무슨 소리냐?》

은희는 전신의 맥이 쫙 빠지는듯 하였다.

《씨, 공부는 암만 잘해도 필요없어요.》

《뭐라구?》 군룡이 다시 소리치자 은희가 남편을 눈짓으로 나무랬다.

《룡일아.》 은희는 아들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도에서 사정이 있어 그럴수도 있지 않니? 이번에 못 가면 다음번에 꼭 가게 돼. 그러니 공부를 더 잘해야 해. 알겠니?》

룡일은 어머니의 말이 리해가 안된다는듯 제 소리를 서슴없이 했다.

《그때는 내가 청년동맹원이 되겠는데 가요? 흥.》

《대회에 꼭 가야만 하는건 아니야. 그리구 대학에는 꼭 가야 한다. 아버지가 이야기한것처럼 사람은 많이 배워야 조국과 인민을 위해 큰일을 할수 있단다. 배고프겠는데 어서 집에 가서 밥을 먹어라. 네가 좋아하는 도라지채는 찬장안에 있다, 어서. 어머니도 인차 들어가마.》

은희가 아무리 얼려도 룡일은 어린 가슴속에 맺힌것이 풀리지 않는지 그냥 서있다.

씨근덕거리던 룡일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또 튕겨나왔다.

《다른 집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열성이 대단해요. 쳇, 그것두 못하면서 무슨… 내 망신만 시키면서…》

그 소리에 군룡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이녀석, 뭐라구?》

조군룡의 주먹이 어느새 아들의 머리를 쥐여박았다.

《어디서 그따위 소릴 해?》

《그만하세요. 남이 들으면 싸우는줄 알겠어요.》

은희는 남편을 막아서며 룡일의 등을 떠밀었다.

룡일은 사나운 눈찌를 피끗 들더니 문을 차고 달아났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은희가 속이 좋지 않아 남편을 탓하였다.

《아직 철모르는 어린것한테 주먹질은 왜 하세요? 타일러서 일깨워줘야지. 전들 얼마나 밸이 나면 그러겠어요.》

《당신이 그렇게 어루만지기만 하기때문에 애녀석이 밸통머리만 세진단 말이요.》

조군룡이 곁에서 언성을 높였다.

《그녀석 이자 눈 좀 봤소? 벌써 제 어머니, 아버지와 맞서려 한단 말이요. 덜된 녀석같으니.》

《당신두 참, 우리 잘못은 뭐 없어요?》 은희도 발끈했다.

《칭찬만 받던 애가 놀림받구 글쎄 이게 뭐예요. 저도 정말 그만둬야겠어요.》

《뭘 그만둔다는거요?》

《몰라서 물어요? 나한테도 결심할 권리가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간섭하지 마세요.》

《위원장동지를 위한다는게 그래 고작 연구를 그만두겠다는거란 말이요? 정말 코막고 답답한 맹추군그래!》

《당신은 전부위원장이 나한테 한 소릴 몰라서 그러는거예요.》

《무슨 말을 하든 할거야 해야지.》

《아이참.》

그들부부가 아웅다웅하는판에 장철영이 들어섰다.

《의좋던 부부가 오늘은 왜 이러오?》

반롱삼아 하는 말이였으나 그들은 어색해하였다.

얼마후 은희한테서 사연을 듣고난 장철영이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아이일이 부부간 다툼질로 변했군그래. 내 잘못도 크오. 그게 생활이지. 도에 올라가는 길인데 조동무, 나 좀 보기요.》 하며 다시 은희한테 눈길을 돌렸다.

《실장동문 부탁할게 없소?》

《없습니다.》

혼자 남게 된 은희는 아들일로 해서 일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닮아 밸통이 센 룡일이가 화김에 무슨짓을 하겠는지 알수 없었다.

실험실을 비우고 갈수 없어 안절부절 못하고있는데 마침 조수처녀가 들어왔다. 그한테 검사한 실험관들을 깨끗이 씻어 고압멸균기에 넣도록 하고 종곡실에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는 사이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였다.

은희는 종종걸음을 쳤다. 룡일이가 집에 가지 않고 점심도 안 먹고 어디로 달아난것만 같았다. 집마당에 들어선 은희는 부엌과 잇달린 아래방부터 들어갔다. 점심밥을 먹은 흔적은 없으나 방구석에 팽개친듯 자빠진 책가방이 있었다.

가방을 보니 가벼운 안도의 숨이 나갔다.

웃방으로 올라가려고 사이문을 열던 은희는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멎어서고말았다.

룡일이가 웃방벽에 정성껏 걸어놓은 우승메달들을 와락와락 잡아벗기고있었던것이다.

그것은 은희부부가 과학기술축전들에서 받은것이였다.

《너 정신나갔니?》

은희가 참다못해 소리치자 룡일은 어머니를 울분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손아래서 람홍색줄에 매달린 메달들이 흔들리였다.

《다시 걸어 못 놓겠니?》

은희가 정색해서 소리를 지르자 룡일은 모아쥔 손을 내밀며 불만에 찬 목소리를 터쳤다.

《내가 도에서 떨어져도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이런건 왜 걸어두나요?》

대번에 은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들이 웨친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 부모들이 남긴 자취에 대한 경멸과 함께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항변이였다. 일심전력을 다 바쳐온 아들에 대한 기대가 졸지에 무너지는듯 했다.

룡일에게 박힌 그의 눈에서 순간 린광같은것이 일었다. 전신의 맥이 빠진 그는 간신히 물었다.

《그래,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네가 바라는것이 도대체 뭐냐?》

《군위원장인 혜옥이 어머니같으면 왜 못 가는지 도에 벌써 알아봤을거예요.》

《뭐… 뭐라구? 정말 이 애가?》

은희는 너무 억이 막혀 어쨌으면 좋을지 몰랐다.

《빨리 걸어놓지 못할가?》

은희는 의분이 머리끝까지 치받쳐 소리쳤다.

어린것의 말이지만 그의 가슴을 모질게 찔렀던것이다.

《못 들었어? 어머니가 도에 올라가겠단 말이다.》

심장이 터지는듯 한 그의 웨침에 룡일은 메달들을 다시 벽에 하나, 둘 걸기 시작하였다.

그 모양을 지켜보는 은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룡일이가 마지막메달을 걸어놓자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울분을 걷잡지 못한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점심참이라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사앞 뻐스정류소를 향해 사람들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는 비오듯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놀랍게 지켜보건만 그한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거리를 쏜살같이 지나치는 승용차도, 길가의 키높이 자란 수삼나무들도… 모든것이 분별할수없이 뿌연 안개속에 잠겨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자기와 남편의 온넋이 깃들어있다고도 할수 있는 메달들을 무시하듯 한손에 모아쥐고 불만에 찬 눈으로 쳐다보던 룡일의 모습만이 가슴을 란도질하였다. 아들은 그들이 고생속에서도 오직 기쁨을 찾으며 걸어온 지나간 생을 무자비하게 부정해버린것이다. 은희는 분통했다. 지금 그는 끼니를 건네는 한이 있어도 책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기들의 과거를 되찾아 아들한테 보여줘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였다. 달려가는 그의 눈앞으로 뻐스정류소가 각일각 다가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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