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37


《뭐, 실패했다구? 망할 놈!》

박정승은 홍무관한테서 최정승을 죽이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고 오만상을 찌프렸다. 거마리라는 문객놈은 확실히 재수덩어리다. 민천산을 죽이라고 했는데 아버지 박첨량을 메여오는가 하면 죽이라는 최정승은 못 죽이고 그놈의 소실을 죽였다.

《최정승을 못 죽였으면 그냥 돌아올게지 계집은 왜 죽였다더냐?》

《그놈은 일단 비수를 들면 피비린내를 맡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소인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입이 쓰거워났다. 차라리 그냥 돌아왔으면 다음번이라도 다시 기회를 노릴수 있으련만 계집을 죽였으니 교활한 최정승이 분명 눈치를 챘을것이다. 민천산이 도망쳤을 때부터 일이 꼬일것 같은 생각이 들더니 확실히 언제보나 자기의 예감이 정확하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홍무관에게 무엇인가 더 할말이 있는것 같은데 자기의 비위를 거슬릴가 저어하며 말을 못하는 모양이다. 박정승은 애써 례사로운 태도를 취하며 말을 돌렸다.

《다른 일은 더 없느냐?》

홍무관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안사인의 행처를 알아냈소이다.》

《그놈이 지금 어데 있느냐?》

《문정승한테 가서 붙었다고 하오이다.》

저도 모르게 코바람이 나갔다. 안사인은 원래 눈치가 종자닭 잡아먹을 놈이라 이붓아비 떡치는데는 가도 친아비 나무패는데는 안갈 놈이다. 허나 국왕으로 점지된 최정승한테 갔다면 리해가 되겠건만 먹을알도 없는 어리숙한 문정승을 찾아갔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홍무관의 다음말이 더 기막히다.

《문정승은 안사인을 솔개국황제한테 밀사로 파견하여 송도국왕의 인장을 받아오게 하였다고 하나이다. 아마 허장사한테서 빼앗았던 문서도 솔개국황제한테 보내는 밀서였을것이나이다.》

박정승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입을 딱 벌렸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게 머리가 뗑해졌다.

그는 한참이나 얼빠진 사람처럼 천정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수 있단말인가. 그럼 문정승이 지금껏 나를 속여 왔단 말인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여서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적실한 소리냐?》

《문정승한테 박아넣은 저의 심복이 안사인을 직접 보았다고 하나이다.》

아니야, 그럴수 없어. 내가 문정승 같은 허재비한테까지 속히을 수는 없어. 그는 착잡한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당장 알아보지 않으면 한시도 못견딜것 같았다.

《허장사가 아직 토설을 안했느냐?》

《예. 어찌나 지독한지 여적…》

홍무관은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변변히 대답도 못한다.

《그놈한테 가자. 내가 직접 문초하겠다.》

박정승은 홍무관을 데리고 즉시 뒤채로 향하였다. 뒤채에 비밀땅굴을 만들어놓은것은 정승이 된지 얼마 안되여서다. 파란만장의 벼슬세계에서 정승자리를 지키자니 치렬한 당쟁을 벌려야 하였고 적수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껏 수백명이나 되는 관료들과 벼슬아치족속들이 목숨이 붙어있는채로 이 비밀땅굴에 끌려들어갔지만 살아서 제발로 걸어나온 놈은 단 한명도 없다.

뒤채에 있는 밀실에 들어서니 몸집이 우람차고 소도적처럼 생긴 심복이 허리를 굽석이며 절을 하였다. 밀실과 땅굴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심복이다. 붙잡혀온자를 땅굴이나 밀실에 가두고 감시하는 옥졸노릇도 하고 고문을 들이대는 형리노릇도 한다. 홍무관이 눈짓하자 심복은 누구도 밀실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안으로 문을 닫아 걸었다.

이어 심복이 벽장문을 열쇠로 열자 동굴마냥 시꺼먼 입을 쩍 벌린 땅굴입구가 나졌다. 심복이 문옆에 놓여있는 홰불에 불을 달았다. 홰불이 활활 타오르며 땅속으로 향한 나무층계를 밝혔다.

《대감님, 조심하시오이다.》

홰불을 든 심복이 앞장서서 층계를 내리고 박정승은 홍무관과 함께 그뒤를 따랐다.

여름이여서 한계단 한계단 층계를 내릴수록 곰팡내와 썩은내가 섞인 습한 공기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좁은 통로를 지나니 넓다란 공간이 나졌다. 그 공간의 절반은 쇠살창으로 둘러막은 감방이고 다른 절반은 형틀과 형구들이 갖추어져있는 고문장이다. 심복이 손에 든 홰불로 고문장의 벽마다 걸어놓은 불뭉치에 불을 달자 즉시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지며 쇠살창너머 감방안에 사슬로 묶여있는 허장사가 보였다.

그가 눈짓하자 홍무관은 심복에게 령을 내렸다.

《대감님께서 문초하시겠으니 저놈을 끌어내라.》

심복이 허장사를 끌어내여 형틀에 비끄러매놓자 홍무관은 그가 앉을수 있게 형틀앞에 의자를 가져다놓았다.

박정승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허장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찌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의 여기저기가 험상궂게 째지고 꺼멓게 죽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찬찬히 뜯어보았으나 눈앞에 있는 이놈이 정말 허장사가 옳긴 옳은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 성한 곳이 없다. 매를 맞아서 입고있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니 연약한 살은 더 말해 무엇하랴. 너덜너덜해진 옷처럼 몸도 너덜너덜하다. 매를 맞은 곳은 터져서 피가 꺼멓게 말라붙고 불로 지져댄 곳들은 뼈가 들여다보일것처럼 구멍이 숭숭하다.

박정승은 부러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위로하는척 하였다.

《미욱한 놈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허장사, 우리 애들이 너무 지나치게 대해준것 같은데 리해하게.》

허장사는 고개를 외로 돌리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박정승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로에 위협을 섞어갔다.

《허나 계속 뻗대면 이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걸세. 내 미리 말해두는데 아직 이 땅굴에서 그냥 살아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네. 자네보다 힘이 몇갑절 더 센 천하장사들도 여기에선 무릎을 꿇지 않고 못 견디였지.》

그러나 허장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목대를 뻣뻣이 세웠다. 흥! 그래도 사내놈이라고 뼈대를 세우는데 네가 아직 이 박정승을 잘 모르는구나.

《여봐라! 이 허장사어른의 손톱을 좀 다듬어올려라.》

《예잇!》

심복이 집게를 찾아들고 허장사앞에 다가섰다. 허장사가 고리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노려보았으나 죄인들의 분노와 절규에 익숙될대로 익숙된 심복은 히죽이 웃으며 침착하게 제할바를 하였다.

《아!-》

심복이 집게로 손톱을 하나 뽑았는지 꾹 다물려있던 허장사의 입에서 모진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박정승은 허장사가 듣게끔 심복에게 훈시를 하였다.

《너무 빨리 뽑지 말고 천천히 잡아당기며 뽑아라. 그래야 허장사어른이 더 시원해서 더 크게 소리를 칠게다.》

《알았소이다.》

심복은 그가 시킨대로 단숨에 손톱을 뽑지 않고 집게에 물린 손톱을 천천히 당기였다. 그때마다 손톱이 살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천을 찢는 소리처럼 으쓸하게 들려왔다.

《아!- 아!-》

허장사는 손톱을 뽑을 때마다 아픔을 견디기 힘든지 눈을 꾹 감고 얼굴을 이그러뜨리며 사납게 몸부림쳤다. 허나 사슬로 든든히 결박당한 몸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고 사슬소리만 절거덕거렸다.

마침내 심복이 허장사의 솥뚜껑같은 손에서 손톱을 모조리 뽑아내였다.

박정승은 피로 물든 허장사의 두손을 건너다보며 다시 물었다.

《아직도 말을 안할테냐?》

허장사가 불이 펄펄 이는 눈길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제 우리 문대감님께서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게다!》

《하하하.…》

박정승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땅굴이 떠나갈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문정승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단 말이지. 그거 정말 듣기 좋구나. 문정승이 감히 나를 어쩔것 같으냐? 어리석은 놈!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제 발톱까지 뽑아버리겠으니 어디 더 견디여봐라. 너도 손톱을 뽑아버리면 물건을 쥘 때마다 손끝이 아프고 저려서 손으로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발톱을 뽑아버리면 발끝이 아프고 저려서 걸어다니지 못한다는걸 알게다. 그렇게 될 네 모습을 한번 상상해봐라. 손발을 쓰지 못해서 벌레새끼처럼 기여다닐게다. 여봐라,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으니 깎은 손톱을 좀 다스려올리고 그다음 발톱까지 마저 뽑아라!》

심복이 돗바늘만 한 참대꼬쟁이들을 찾아쥐고 손톱을 뽑은 자리마다 참대꼬쟁이들을 하나씩 쿡쿡 박기 시작하였다.

《아!-》

허장사는 손톱을 뽑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며 상처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박정승은 심복이 허장사의 오른손 다섯손가락에 참대꼬챙이를 다 박고 왼손에까지 박으려 할 때 손짓으로 잠간 멈춰세웠다.

《허장사, 계속 뻗대야 소용이 없어. 네가 문정승의 밀서를 가지고 솔개국황제를 찾아가댔다는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게 아니야. 너에게 귀한 목숨을 살릴 기회를 주자는거다.》

밀서이야기를 꺼내자 허장사의 눈에 순간적으로 절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계속 낭떠러지로 몰아세웠다.

《그래 네가 이 땅굴에서 비밀을 지키고 죽었다는걸 문정승이 알아줄것 같으냐? 천만에, 문정승은 네가 여기에 갇혀있다는것도 모르고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네가 토설을 안했다고는 믿지 않을게다. 공연히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먹어라. 너도 알다싶이 난 인재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다. 마음을 돌리면 내 너를 중히 써주겠다. 새도 나무가지를 보고 깃을 들이는데 섬길 주인이 없어서 문정승 같은 위인을 섬기는 네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

궁지에 몰아넣고 부른 장훈이라 통장훈이였다. 허장사는 끝끝내 맥없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대감님, 다 말하겠으니 살려주시겠다는걸 약속하시오이다.》

《난 무관이야. 문정승 같은 서생처럼 한입으로 두말 할줄 몰라. 여봐라, 허장사를 풀어줘라!》

심복이 허장사의 몸에서 사슬을 벗기고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허장사는 의자우에 쓰러지다싶이 주저앉아 토설을 시작하였다.

《대감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소인은 문정승의 밀서를 가지고 솔개국황제한테 가던 길이였소이다. 전번에 송도국의 옥새를 솔개국 황제한테 보내면서 이번에 새 옥새를 받기로 약조가 되여있었나이다.》

박정승은 너무도 억이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문정승 그놈이 오래전부터 룡상을 차지할 생각을 하고있었다는것이 아닌가. 옥새가 없어진것도 그놈의짓인줄 모르고 괜히 최정승과만 다투었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니 모든게 새롭게 다시 안겨왔다.

확실히 자기의 예감이 정확하다. 국왕이 운명하던 날 제일 선참으로 궁궐에 나타난 문정승을 보았을 때 혹시나 하는 예감이 찾아들었었다. 그때 그 예감을 믿었어야 했다. 지금껏 문정승이 왜 어리숙한체 하였는지 리해가 갔다. 어리숙한체 하며 자기와 최정승이 싸우게 하고 그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하였다. 아니, 어부지리를 얻었다. 자기와 최정승사이의 세력다툼을 리용하여 정승이 된지 얼마안되는 기간에 지반을 닦고 서남당까지 내왔다. 그뿐아니라 이제는 어벌뚝지가 크게 룡상까지 넘보게 되였다.

《역적같은 놈! 앞에서는 사돈이요, 뭐요 하면서 아부재기를 치고 뒤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을 꿍꿍이를 꾸미고있었구나.》

그가 참지 못하고 문정승을 욕질하자 허장사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설명하였다.

《문정승이 대감님과 사돈을 맺으려고 한것도 다 계책이였나이다. 대감님을 얼려서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그동안에 룡상을 타고앉자는 타산으로 제편에서 먼저 혼사말을 꺼냈소이다.》

박정승은 속으로 가슴을 두드려대며 통탄하였다. 아, 내가 눈이 멀었댔구나. 옛 원쑤를 갚으려는데 새 원쑤가 생긴셈이다. 아니, 새 원쑤가 아니라 숨어있은 원쑤였다. 눈에 보이는 원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쑤가 더 무섭다는 말이 백번 옳다. 이 키다리 문정승놈아! 어디 두고보자.

박정승은 분을 삭일길없어 자리를 차고일어나 땅굴을 나왔다.

홍무관이 밀실에 따라나와 조용히 물었다.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라나이까?》

박정승은 그 물음에 입귀를 씰룩거렸다.

《난 한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다. 내 입으로 안 죽이겠다고 했는데 내 손으로야 못죽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놈이 죽어서도 나를 원망할게다.》

이어 그는 홍무관의 귀에 대고 이리이리 하라고 분부를 내린 다음 혼자서 밀실을 떠났다.

얼마후 홍무관이 나타나 결과를 보고했다.

《대감님의 분부대로 거마리를 문정승이 파견한 자객으로 가장시켜 먼저 허장사를 죽이게 한 다음 거마리에게 독주를 상으로 하사했나이다. 그런데 거마리는 왜 죽이라고 하셨소이까?》

《그 단순한 리치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뒤를 깨끗이 씻지 않으면 후날 엉치가 끄는 법이다.》

박정승의 두눈에서는 여느때없이 살기가 번쩍거렸다. 그는 확고한 결심이 어린 눈빛으로 홍무관에게 지시하였다.

《고을원으로 파견하기로 한 무관들을 모두 불러라. 그리고 훈련원도감과 군영장도 함께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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