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36


최정승은 국왕으로 점지된 기쁜 소식을 조상들에게 아뢰기 위해 온 가족을 거느리고 조상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갔다. 그는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항상 조상들의 사당부터 먼저 찾군 하였다.

남녀종들이 분주히 오가며 신주앞에 큰 제상을 놓고 그우에 향이 피여오르는 향로와 갖가지 제물을 정성껏 차려놓았다.

제가 시작되자 최정승은 의관을 바로하고 제상앞에 나아가 두손을 모아잡고 정중히 절을 하였다.

《조상들의 굽어보살핌이 있어 오늘 최씨가문의 이 자손이 송도국의 왕으로 점지되였나이다. 자손들이 립신양명하고 최씨문호가 오늘과 같은 영화를 입을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조상들의 덕이나이다. 조상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삼가 제를 올리나니 앞으로도 최씨문호가 계속 찬란히 빛나도록 보살펴주시오이다.》

그의 뒤를 이어 가족들도 차례로 절을 올렸다.

제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유검상이 그에게 여쭈었다.

《대감님, 오늘의 경사를 축하하여 잔치를 크게 차리고 즐기는것이 마땅한줄로 아오이다.》

그가 찬성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원래부터 속이 크지 못한 안해는 근심스러운 빛을 띄운다.

《별치 않게 차리자 해도 수천금을 써야겠는데…》

그는 안해의 공연한 걱정을 웃음으로 타일렀다.

《부인은 너무 걱정마오. 오늘같은 기쁜 날에 재물을 아껴 즐기지 아니하면 오히려 뒤따르는 근심이 있을수 있소. 재물을 아끼여 자식을 념려함은 부모로서의 살뜰한 마음이긴 하지만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일천이랑의 전답을 자손에게 전함은 한가지 재주를 가르침만 못하고 수만금의 재물을 자손에게 전함은 한권의 책을 전함만 못하다〉고 했소.》

돈과 재물을 모아두었다가 이런 때 쓰지 않으면 언제 쓰며 이런 경사를 축하하지 않으면 언제 잔치를 차리랴. 술이 강처럼 흐르고 고기를 산처럼 쌓는다 해도 아깝지 않다. 아까와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국고가 곧 내 금고이고 송도국의 모든것이 내 소유이다. 이나라 땅에서 자라는 풀 한포기, 기여다니는 개미 한마리조차도 모두 내것이다.

최정승은 즉시 부하들을 불러 잔치준비를 일일이 시켰다. 글씨를 잘 쓰는 문객을 시켜 청첩장을 만들어 북서당의 관료들을 잔치에 청하게 하고 꼼꼼하고 찬찬한 두 문객을 택하여 잔치를 주관하는 비장으로 삼아 크고작은 범절을 한결같이 지키게 하였다.

저녁녘에 잔치가 시작되였다. 술향기와 갖가지 산해진미의 향기로운 냄새가 온 정승부에 진동하였다.

최정승은 관료들과 심복들, 문객들을 거느리고 본채에 차린 큰상에 앉았다. 안채에서는 안해가 관료들과 친척친우들의 부인들을 대접하고 바깔채들에서는 아들들이 친척들과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지화자 지화자 지화지화 지화자…》

곱게 화장하고 푸른 치마와 빨간 저고리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릿다운 기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손님들에게 술을 권한다. 심복들이 어디서 저렇게 많은 기생들을 끌어왔는지 궁성안의 기생이 모두 모인것 같다.

서로서로 권커니 작커니하며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유검상이 선참으로 앵무배에 장생주를 부어들고 최정승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두손으로 술잔을 받쳐올리였다.

《옛날 어느 한 임금이 즉위하였을 때 하늘의 선녀가 술을 올리면서 천세를 축수하여 그 임금은 만복을 누릴수 있었다 하옵니다. 소신도 그 본을 따서 오늘의 이 성대한 잔치를 기회로 한잔 장생주를 상감마마께 삼가 올리옵나니 번화한 강산도 백년이오나 이 술 한잔 잡수시고 만년장수하옵소서. 천세 천세 천천세!》

유검상의 환호에 호응하여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북서당의 심복들이 무릎을 꿇으며 천세삼창을 하였다.

《상감마마, 만년장수하시오이다. 천세 천세 천천세!》

최정승은 상감마마라는 부름에 흥이 도도해져 권하는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이어 다른 심복들도 유검상의 본을 따 줄을 지어 그에게 축하의 술을 올렸다. 그는 번마다 들리는 《상감마마》소리와 《천세!》소리에 마음이 흥떠서 권하는 술을 하나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앉아서 부채질을 살살 해주며 시중을 들던 금향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만류하였다.

《상감마마, 옥체를 돌보시오이다.》

최정승은 술에 풀려 게슴츠레해진 눈에 애틋한 정을 실으며 금향의 손목을 찾아 살살 쓰다듬었다.

《걱정말아라. 과인은 이깐 술에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약속대로 과인을 시침하는 첫 영광을 너에게 주고 널 귀비로 봉하겠다.》

그의 말에 금향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상감마마, 남들이 듣는데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부끄럽소이다.》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냐. 난… 아니 과인은 이제부터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본다. 오늘 밤 너의 방에 가겠으니 과인을 시침해라.》

최정승은 기고만장해서 모두가 듣게 고함을 질렀다.

허나 그 기고만장은 얼마 못 가서 술기운에 지고말았다. 심복들이 련이어 권하는 술에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그는 유검상의 등에 업혀 자기의 침방으로 실려갔으며 금향이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유검상이 세차게 흔들어깨워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상감마마, 일이 생겼소이다.》

그는 자리에 누운채 흐리멍텅한 눈길로 유검상의 고석배기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유검상은 당황한 얼굴로 어쩔바를 몰라한다.

《아침부터 왜 그러느냐?》

《둘째마님이 그만…》

유검상은 얼굴이 컴컴해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금향이가 어찌되였다는거냐?》

《둘째마님이 죽었소이다.》

뭐라구? 금향이가 죽다니? 정신이 버쩍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자기곁에 앉아 고운 얼굴에 교태를 담고 술시중을 들던 금향이가 왜 죽는단 말인가.

《그게… 사… 사실이냐?》

《사실이나이다. 어제 밤에 누군가가 비수로 마님의 목을 잘랐소이다.》

심장이 덜컥 멎는것만 같다. 어느놈이 죽였을가? 시앗싸움인가? 아니, 시앗싸움은 아니다. 그는 안해를 잘 안다. 비록 사내처럼 드세차긴 하지만 모질지도 못하며 더구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악하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놈의 소행인가?

《가보자!》

최정승은 잠옷바람으로 침방을 나섰다. 유검상이 뒤를 따라왔다.

금향의 방문앞에 안해와 하녀들이 겁질린 표정으로 서있다. 망할 년들! 무슨 구경거리라고 모여있어. 성이 나서 먼발치에서부터 고함을 질렀다.

《다들 썩 헤여지지 못할고!》

그의 고함소리에 하녀들은 꽁지가 빳빳해서 달아나고 안해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문앞에 이르니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정말 죽었구나. 금향의 방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기연가미연가 하였는데 피비린내가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했는지 금향은 이불우에 누워있고 주변이 온통 피로 질벅하다. 죽을 때 못내 고통스러웠는지 곱던 얼굴이 무섭게 이지러졌다.

그는 처참한 광경을 보기가 끔찍해 눈을 감고 돌아섰다.

어느놈일가? 왜 죽였을가?

련이어 떠오르는 의문을 놓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한순간 소름이 오싹 끼치며 가슴이 싸늘해났다. 그렇다. 살인자는 금향이를 노린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노렸다. 금향이 같은 한갖 아녀자를 죽이겠다고 정승부의 소슬히 높은 담장을 뛰여넘으면서까지 모험을 할 우둔도깨비는 세상에 없다. 두말할것없이 나를 노린 자객질이다.

최정승의 눈앞으로는 박정승의 심술궂은 얼굴이 서서히 떠올랐다.

틀림없이 그놈의 소행이다. 왕위를 빼앗긴 분풀이로 날 죽이자는거다. 아니, 왕위를 빼앗자는거다. 그놈이 아니고는 왕위계승자로 점지된 나를, 미래의 왕을 죽이려고 덤벼들 미욱한 놈이 없다. 어리무던한 문정승은 감히 이런짓을 못한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밤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금향의 방에 가지 않았길래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금향의 신세로 될번 하였다. 이상하다. 내가 어제밤 금향의 방에 가려고 한걸 자객놈이 어떻게 알았을가?

어제 술좌석에서 자기가 금향이한테 희떱게 웨쳐댄 말이 생각났다.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냐. 난… 아니, 과인은 이제부터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본다. 오늘 밤 너의 방에 가겠으니 과인을 시침해라.》

분명 누군가 이 말을 박정승에게 고해바쳤다. 그렇다면 내 주위에 박정승의 눈이 박혀있다는게 아닌가? 다시금 소름이 오싹 끼쳤다. 박정승의 여마리군이 도대체 누구일가? 그놈을 잡아내지 못하면 항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을것이다. 허나 아무러한 단서도 없으니 당장 잡아내기는 곤난하다.

최정승은 대궐을 해청도로 옮기려던 초지를 더 굳게 다졌다. 박정승이 있는 한 궁성안은 물론이고 대궐도 위험하다. 이제 박정승이 어느 시각에 또 무슨 우둔한짓을 할지 모르며 자칫하다가는 왕위에 올라도 못 보고 지옥사자밥이 될수 있다. 당장 해청도로 궁궐을 옮기고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자.

해청도에 가면 우선 백마국의 위험에서 벗어날수 있어 좋고 둘째로 박정승의 위험에서 벗어날수 있어서 좋으며 셋째로 궁성과 대궐의 지반을 새로 다질수 있으니 좋다. 그의 몸가까이에 숨어있는 박정승의 여마리군도 해청도에서는 서뿔리 움직이지 못할것이다. 해청도에 가서 즉위식을 한 다음 인차 어지를 내려 박정승의 병권을 빼앗고 천천히 제거해버리자.

결심이 서자 그는 손짓으로 유검상을 불렀다.

《장례는 후날 하기로 하고 금향이의 시신을 빨리 묻어버리게 해라. 오늘 밤중으로 여길 떠나 해청도로 가야겠다.》

《?!》

유검상은 영문을 몰라 눈알을 데룩거렸다.

《대궐을 해청도로 옮기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긴 불안하다.》

그제서야 유검상은 말귀를 알아차리고 즉시 행동에 착수하였다.

최정승은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더 방안을 들여다보며 금향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을 나눈 시일은 짧았지만 자기의 정을 깡그리 기울였던 녀인이다.

금향아, 내 해청도에 간 다음 너의 묘를 옮겨다 장례를 잘 지내주마. 그리고 사내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너의 원쑤를 기어이 갚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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