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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3일

평양시간


제 32 회


32


《이놈!》

박정승은 최정승과 문정승이 돌아가기 바쁘게 성이 독같이 나서 길길이 뛰였다. 육중한 몸을 구를 때마다 못속의 정자가 지진을 만나기라도 한것처럼 드르릉 떨며 수면우에 동그란 파문을 그렸다.

《이놈아, 그렇게 훈련을 주었는데도 이름 석자를 삭갈리느냐? 오늘 아침에 까마귀고기를 먹었느냐?》

그가 어찌나 사납게 소리를 질렀는지 못가에 서서 상이 내리기를 기다리던 기생들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줄행랑을 놓았다.

《이놈! 당장 쳐죽여도 시원치 않겠다.》

게거품을 물고 고아대며 두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한순간 민천산이 왕위계승자를 지정하려는 순간에 잔기침을 깇던 최정승의 모습이 피뜩 떠올랐다. 그때는 무심히 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서로 기미를 통하는 무언의 약속이였다. 그럼 이 늙다리가 최정승이 내 가슴에 박아넣은 비수였단 말인가?

그는 눈에서 시퍼런 불을 펄펄 내뿜으며 한걸음두걸음 다가가 와락 민천산의 턱수염을 한손에 거머쥐였다.

《바른대로 토설해라. 네놈은 원래부터 최정승의 패당이지?》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 수염발이 통채로 붙잡힌 민천산은 목매달린 개새끼처럼 버둥거렸다.

《아니올시다. 절대로 그렇지 않소이다.》

박정승은 손을 더 세괃게 그러쥐며 따지고들었다.

《그럼 왜 그랬느냐?》

《저… 최정승이 고을원님보다 더 높은 판서벼슬을 주겠다길래…》

뭐라구? 최정승이? 놀라서 눈이 굳어졌다.

《언제 최정승을 만났느냐?》

《어제 밤에… 최정승의 부하들이 로생을 붙들어갔댔나이다.…》

박정승은 너무 기가 막혀 민천산을 한옆으로 콱 밀쳐버리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니 그 생쥐놈이 선손을 썼구나. 어제 밤에 있었을 일들이 눈앞으로 환영처럼 흘러갔다.

아! 그는 골이 빠개지는것 같이 쑤셔나서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였다. 약삭바른 생쥐놈이 그런 수를 꾸민걸 모르고 이 우둔한 놈은 온밤 잠도 못 자면서 부질없는 공상만 했구나.

《네놈이 가짜도사라는걸 최정승이 아느냐?》

《예, 알고있나이다.》

부들부들 떠는 민천산은 목소리까지 덜덜 떨었다.

박정승은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길디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런 얼뜨기같은 령감태기한테 기대를 걸고 왕위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하면서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속을 박박 긁어댔다.

《이놈아, 내가 시킨대로 했으면 난 판서보다도 더 높은 정승벼슬을 주겠는데 그놈한테 얼리운단 말이냐?》

고양이앞의 쥐처럼 겁에 질려 덜덜 떨던 민천산은 정승벼슬이라는 말을 듣자 흐리터분하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령감은 체면도 없이 그의 앞으로 벌렁벌렁 다가왔다. 그 모양이 정말 개잘량이다.

《정승벼슬을 주겠다는게 사실이나이까? 그럼 로생이 다시한번 말해보겠소이다.》

《뭐라구?》

박정승은 너무도 어이가 없고 억이 막혀 아연한 눈길로 민천산을 내려다보았다.

《로생이 다시 고쳐서 말하겠나이다.》

민천산은 벌떡 일어나더니 온 후원을 빙 둘러보며 큰소리로 고아대기 시작하였다.

《다들 들으시오. 아까는 내가 틀리게 말했는데 송도국의 룡상에 앉을 사람은 박정승이로다!- 잘 들으시오. 송도국의 룡상에 앉을 사람은 박정승이로다!-》

박정승은 령감의 목덜미를 붙잡아 땅바닥에 꾹 눌러앉혔다.

《야 이놈아, 이제 와서 백번 소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왜서인지 어깨가 처지며 실성한 사람처럼 입에서 허거픈 탄식이 흘러나왔다. 울음과 웃음이 반반씩 섞인 탄식이다.

《대감님, 진정하십시오.》

홍무관이 다가와 그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귀찮다는듯 손을 내저으며 분부를 내렸다.

《저 령감을 별당에 가두어넣어라!》

《예잇!》

홍무관이 민천산을 끌고간 후 박정승은 사랑채까지 터벌터벌 걸어왔다.

한참이나 방안에 들어앉아 찢어지는것 같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는데 문이 슬며시 열리며 안사인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나타났다. 상전이 성이 난걸 보고 벼락을 맞을가봐 어디론가 몸을 사렸다가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모양이다.

안사인은 조심조심 박정승의 앞으로 다가왔다.

《대감님, 이제라도 그놈을 다시 내세워서 사태를 바로잡으면…》

《닥쳐라!》

박정승은 대번에 천둥소리를 내며 안사인의 말허리를 끊었다. 허나 안사인은 헤식은 미소를 지으며 진드기처럼 달라붙었다.

《괜히 성을 내셔야 몸만 상하시니 진정하시오이다.》

《이놈아, 일이 망쳐졌는데 진정하게 됐느냐?》

《소인에게 이 일을 수습할 수가 있사오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이다.》

뭐라구? 수가 있다구? 쑥물이 흘러든것처럼 입이 쓰겁다. 내가 이놈이 내놓는 알량한 수에 귀가 버룩했던게 잘못이다. 세치밖에 안되는 저놈의 혀바닥에 놀아난게 잘못이다.

《다 깨진 사발인데 바로잡긴 뭘 바로잡아! 네놈의 장단에 춤을 추다가 일을 망쳤다!》

《대감님, 소인을 믿으시오이다. 소인이 이제…》

《듣기 싫다!》

뭐 네놈을 믿으라구? 천만에, 다시는 네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난 원래부터 말공부쟁이들을 좋아 안한다.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고 말 잘한다고 현인이 아니라 했다.

이전같으면 안사인도 그의 심기를 눈치채고 조용히 물러갔겠건만 지금은 주인의 총애를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감님, 소인의 말을 좀 들어보시오이다.》

절절히 청을 드리는 안사인의 비굴한 태도가 그의 비위를 더 거슬리게 하였다. 망할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방안을 휙 둘러보던 그의 눈에 벽에 걸려있는 일광검이 띄웠다. 그는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칼집에서 보검을 쑥 뽑아들었다.

《이놈! 내 오늘은 네놈을 죽여버리고말테다.》

《대감님, 왜… 왜 이러시나이까?》

사색이 되여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던 안사인은 홱 몸을 돌리며 문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죽여주십사 하고 가만있었으면 혹 용서해주었을는지 모르겠으나 꽁무니를 빼니 더 부아통이 터졌다.

《이놈, 게 서지 못할고!》

목에 피대를 세우고 울부짖듯 웨치며 칼을 들고 안사인의 뒤를 쫓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마루까지 달려나왔으나 어느새 내뺐는지 안사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박정승은 가슴속에 쌓이고쌓였던 울화를 터뜨리며 온 정승부가 떠나가게 고함을 내질렀다.

《안사인 이놈, 어디 숨었느냐. 당장 죽여버릴테니 냉큼 나와라!》

고래고래 소리를 기껏 지르고나니 가슴이 조금 후련하였다. 손에 쥔 일광검이 해빛을 받아 번쩍이며 아프게 눈을 찔렀다. 그 아픔이 가슴을 더 못 견디게 허비였다. 아, 한생 이 칼만 믿어온 내가 무슨 망녕이 들어 칼을 믿지 않고 저놈의 말에 귀가 솔깃했단 말인가.

이 시각 그의 가슴속에서는 칼에 대한 믿음이 더 깊이 자리잡았다. 그렇다. 칼이 곧 힘이고 정의이다. 정의란 강자의 리익에 지나지 않는다. 자그마한 실패앞에 맥을 놓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약한자의 장애물은 강자의 디딤돌이라 했거늘 이 실패를 디디고 올라서야 한다. 이 칼이 그것을 해줄것이다!

그는 칼을 마루바닥에 곧추 세워박고 칼자루에 두손을 얹었다. 전장에서 령을 내릴 때마다 습관적으로 취하던 동작이라 금시 몸에 힘이 뻗친다.

《여봐라! 홍무관을 불러라!》

즉시 홍무관이 나타났다.

《소인 대령했소이다.》

《오늘일이 지금쯤은 온 궁성에 알려졌을게다. 하지만 그건 두려울것이 없다. 지금 당장 중요한건 그 소문이 궁성밖까지 퍼지지 않게 하는것이다. 궁성밖으로 퍼지면 고을들에 있는 우리 동남당패의 사기가 저락될수 있고 최정승의 북서당패가 승이 나서 지방의 모든 세력을 장악할수 있다. 그러니 동문, 북문, 남문 삼문의 경비를 철통같이 해서 궁성밖으로 개미 한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동문은 우리 동남당이 맡았으니 별일없지만 최정승이 관할하는 북문과 문정승이 관할하는 남문이 문제다.》

《북문과 남문에 우리 군사를 파하겠소이다.》

홍무관이 결패있게 대답했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벌써부터 군사를 움직이면 상대가 눈치를 채고 방비를 갖출수 있다. 거사를 할 때까지는 절대로 군사를 움직이면 안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정승은 즉시 령을 내렸다.

《우리 정승부의 문객들을 북문과 남문에 각각 백명씩 파하도록 해라. 이제는 그들을 써먹을 때가 되였다. 당장 떠나보내되 최정승과 문정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궁성밖 멀리에 진을 치고 궁성안에서 나오는 놈을 한놈도 놓치지 말라고 이르거라. 령을 소홀히 대하는 놈은 가차없이 목을 치겠다.》

《알겠소이다.》

홍무관이 령을 받고 물러가자 그는 다시 칼을 뽑아들고 손가락으로 칼날을 어루쓸었다. 예리한 칼날이 선뜩한 느낌을 온몸에 휘몰아왔다.

(이놈들! 진짜싸움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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