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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3일

평양시간


제 15 회


15


월단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잠간 눈을 붙였는데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있다.

《얘야, 꿀물을 좀 타오너라.》

문밖에 서있는 어린 시녀에게 분부했다. 시녀는 오침시간마다 문밖에 지키고 서있다가 그가 깨여나면 바삐 시중을 들군 한다.

월단은 몸만 쑥 빠져나온 이불우를 네발로 엉금엉금 지나 방안에 놓여있는 청동거울앞에 가서 마주앉았다. 그가 하는 일이란 하루세끼 밥을 먹고 오침을 하고 지금처럼 거울앞에 마주앉는것뿐이다.

오침을 너무 오래 해서 부어올랐는지 오늘은 별로 얼굴이 더 퉁퉁해보인다. 그의 마음속 고충인양 눈가의 여기저기에 가는 잔주름이 거미가 둥지를 틀기라도 한것처럼 나날이 늘어간다. 손가락으로 주름이 생긴 부위를 꾹 누르며 애써 비벼보았지만 없어지는것은 그때뿐이지 다시 생겨난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새여나오군 하는 한숨이 다시금 흘러나온다.

그의 나이 올해 서른둘이다. 녀자나이 서른둘이면 빨리 시집간 녀자들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할머니소리를 들을 때건만 그는 아직 머리에 비녀조차 꽂아보지 못한 처녀이다. 다른 처녀들은 잘만 가는 시집을 자기는 왜 여적 못 가고있는지 스스로도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 처녀들뿐이 아니다. 아직 소녀티도 벗지 못한 어린것들이 결혼식가마에 올라앉아 달래각시가 된다.

요즘세월에는 남자들이 권세있고 돈많은 집의 딸이라면 사족을 못쓴다는데 그가 보기에는 그런것 같지 않다. 권세가 있다 하면 정승인 그의 아버지만큼 권세있는 사람이 있고 돈이 있다면 궁궐같은 정승부만큼 돈많은 집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의 집 대문앞에서는 총각집의 청혼을 안고 찾아오는 매파를 그림자조차 볼수 없다.

할아버지는 그의 얼굴이 너무 박색이여서 시집을 못 간다고 말끝마다 핀잔이지만 그 말도 역시 모를 말이다. 두눈이 비록 밤알처럼 크지 못하고 버들잎처럼 가늘긴 하지만 까만 눈동자에 기름기가 돌아 영민함과 슬기가 엿보인다. 얼굴도 사내들이 좋아한다는 갸름한 닭알형이 못되고 호박처럼 둥글넙적하긴 하지만 분치장을 계속 해서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훤하다. 재잘거리며 방정을 떠는 입헤픈 아낙네처럼 입술이 얄팍하지 않고 두툼해서 인품이 현숙해보이고 여기에다 엄지손가락의 손톱만큼한 버덩이 한개가 재롱스럽게 뾰족이 나와있어 두툼한 입술사이로 남들이 부러워할 상아처럼 하얀 이발이 항상 드러나보인다. 억지로 흠이라고 한다면 손바닥 두개를 합친것만큼 큰 이마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것이지만 예로부터 이마가 넓으면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너그럽다 했으니 남편공대는 물론 남편의 친우들도 섭섭치 않게 대해줄 착한 마음의 표시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버지를 닮아 사내 못지 않게 키가 크고 가정의 무거운 부담을 넉넉히 걸머질수 있게 두어깨가 실팍하다. 치마에 가리워 드러나보이지는 않지만 두다리가 절간의 아름드리기둥처럼 미출하고 어릴적부터 실한 엉치는 아이낳이를 꽝꽝 잘할수 있다는걸 보여준다.

남편공대면 남편공대, 시부모공대면 시부모공대, 아이낳이면 아이낳이를 비롯해서 그 어떤 녀자구실도 남들보다 기막히게 더 잘할수 있건만 동서남북 그 어느쪽에서도 청혼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혼사말이 영 없은것은 아니다. 27살나던 해에 국왕의 주선으로 문정승의 16살난 아들 담동과 혼사말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부풀어올랐고 밤마다 설레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얼마나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가. 하지만 매정한 도련님때문인지 아니면 야속한 문정승때문인지 혼사말은 온데간데없이 달아나고 아름다운 꿈도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그의 머리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꿀물을 가져왔나이다.》

시녀의 부름에 월단은 상념에서 깨여나 거울앞에서 물러났다.

석빙고에 건사해두는 얼음을 쪼각내여 둥둥 띄워서 사발겉면까지 차겁다. 사발을 받아 단숨에 쭉 들이키니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후련해지는것 같았다.

시녀가 물러가자 그는 이불짬에 깊숙이 간수해두었던 병서를 꺼내들었다. 아버지가 소중히 건사해오는 책인데 아버지의 주의가 미치지 않는 기회를 리용하여 몰래 훔쳐냈다. 근래에 와서는 이 병서를 꺼내들고 혼자서 병법을 익히면서 공상을 하는것이 하나의 새로운 일과로 되였다.

병서를 펼쳐드니 날마다 해오는 공상이 또다시 찾아들며 온몸을 무아경에로 이끌어간다.…

변방에서 소란을 피우던 백마국군사들이 끝내 송도국지경에 쳐들어와 궁성까지 파죽지세로 쳐들어온다. 당황망조한 국왕은 황황히 만조백관들을 궁궐로 부른다. 국왕이 죽은걸 모르지 않았지만 국왕이 등장해야 공상이 재미있어 아직까지 살아있는것으로 해두었다.

《아무래도 병법에 능하고 군사를 잘 쓰는 박정승밖에는 백마국의 침입을 막을 사람이 없을것 같소.》

국왕의 이 말에 문무백관모두가 《옳소이다. 박정승밖에는 인재가 없소이다.》 하며 아버지를 적극 천거한다.

아버지는 위엄을 뽐내며 룡상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신은 기어이 백마국의 대군을 쓸어눕히고 승전고를 올려 상감마마의 걱정을 덜어드리겠나이다.》

룡봉투구에 룡린갑을 입고 칠성검을 찬 아버지는 천하준마인 적토마에 름름히 올라 삼군을 거느리고 기세좋게 궁성을 떠난다.

그러나 며칠후 전장에서 송도국의 군사가 크게 패하고 그의 아버지도 백마국놈들한테 붙잡혔다는 급보가 올라온다.

패전보고를 받은 국왕은 대경실색한다.

《아, 박정승까지 패하였다니 이 송도국의 운명은 오늘로써 끝장이구나.》

그사이 백마국의 대군이 궁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매일같이 투항을 권고한다. 하는수없이 항복을 결심한 국왕은 스스로 자기를 포승으로 결박하고 신하들에게 옥새를 들리워 궁성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이때 문정승이 헐레벌떡 달려와 국왕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기 월단이가 변성명하여 올린 출사표를 드린다. 국왕은 씩씩한 용기와 슬기가 드러나보이는 출사표를 받아보고 무릎을 철썩 친다.

《하늘이 우리 송도국을 위하여 천하의 영웅을 내셨구나.》

즉시 그를 부르는 어명이 내리고 그는 왕궁으로 들어간다. 물론 남복을 하였다. 국왕은 그의 팔소매를 붙어잡고 그냥 울기만 한다.

《이 나라의 천리강토와 사직이 오직 경에게 달려있으니 경은 부디 수고를 아끼지 말아주오.》

《나라의 운명이 칼도마에 오른 이때 신하된자로 어찌 몸을 아끼오리까. 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한번 북을 울려 외적을 물리치고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그는 국왕이 하사한 백화단전포를 걸치고 철총마에 올라 얼마 안되는 군사와 함께 성문을 열고 적진을 향해 내달린다.

백마국진영에서도 북이 울리며 무예가 뛰여나기로 소문난 적장이 말을 달려 마주 나온다. 하지만 짬짬이 무예를 익히고 병법을 배워온 그에게는 상대도 안된다. 맞붙은지 몇합도 안되여 적장의 머리가 떨어지고 순간에 적진이 와해된다. 그 기세를 리용하여 적진을 어지러이 들이치는데 그의 칼날아래 달아난 목만도 수백급이나 된다.

마침내 싸움이 끝나고 그는 포로가 되였던 아버지를 모시고 궁성으로 개선한다. 송도국의 백성들이 모두 떨쳐나와 개선장군인 그를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국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문밖까지 그를 마중한다.

《경은 정말 천하의 영웅이요. 과인은 그대를 대원수로 임명하고 과인의 부마로 삼을가 하오.》

더이상 신분을 감출수 없게 된 그는 그제서야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다. 국왕도 아버지도 놀라움과 감격을 금치 못한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아녀자된 몸으로 이토록 출중한 공을 세운 례는 없노라. 그래서 과인은 경이 비록 녀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병권을 경에게 맡길가 하니 부디 사양말라.》

하지만 그는 국왕의 은총을 굳이 사양한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녀의 소원은 평범한 녀인으로 사는것이니 내리신 벼슬을 거두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자기 아들과의 혼사를 미루어온것을 자책하며 후회의 빛을 띄우고있던 문정승이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국왕한테 청을 드린다.

《신이 지금껏 눈이 어두워 온 세상을 뒤져도 찾을수 없는 현숙한 며느리감을 놓치고있었사오니 신의 죄를 아량있게 용서하시고 박정승과 혼사를 다시 맺도록 주선해주시기 바라오이다.》

《그대의 아들은 박정승의 딸과 대비하면 저 하늘의 해와 달처럼 너무도 짝이 기우는데 박정승이 그 혼사를 쾌히 받아들이겠는지 모르겠노라.》

국왕의 이 말을 듣고 문정승은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건만 원래 무뚝뚝한 아버지는 그전날의 괘씸한 감정을 앞세우며 결단코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 월단이 자기도 분함이 없지 않으나 예로부터 렬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한번 혼사말이 있은 담동이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할수 없어 아량있게 용서한다. 하여 왕의 주관하에 왕궁에서 그와 담동이의 결혼식이 국가의식으로 성대히 거행된다.…

눈을 감고 황홀의 극치를 이룬 결혼식장면을 그려보던 월단은 자기를 찾는 부름소리에 눈을 버쩍 떴다.

《또 그 책을 꺼내들었느냐?》

언제 왔는지 어머니가 곁에 서서 질책어린 눈길로 내려다본다.

《아버지가 네 꼴을 봤단 그 성미에 당장 매를 드실게다. 아버지가 들어오셨으니 아버지눈에 띄지 않게 당장 책을 거두어라. 계집년이 할 지랄이 없어 병서공부냐. 처녀가 나이차면 변덕을 부린다고해서 무슨 소린가 했더니 정말 옳긴 옳구나.》

월단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는 말에 무서워서 얼른 책을 거두면서도 어머니의 말이 내려가지 않아 꽁알거렸다.

《미거한 소녀가 병서공부를 하는건 변덕이 아니라 위급한 때를 당하면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나이다.》

아직도 꿈에 취해있는 그의 말에 어머니는 왈칵 성을 낸다.

《동정 못 다는 년 맹물발라 머리를 빗는다더니 계집년의 치마폭이 얼마나 커서 나라요 뭐요 하는거냐. 정말 나라를 구원해보겠으면 이제부터라도 활쏘기도 배우고 말타기도 부지런히 배우거라. 아마 온 궁성바닥이 허릴 부여안고 웃을게다.》

어머니는 혀를 차며 돌아서서 나갔다.

월단은 그러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야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왜 이 딸의 깊은 속마음을 그렇게도 몰라주시오이까.)

정말이지 활쏘기와 말타기까지 배워 어머니를 깜짝 놀래우고싶은 반발심이 불쑥 솟구쳤다. 하지만 평생 활을 다루어서 곰배팔이 된 아버지의 팔과 젊은 시절을 말우에서 보내다싶이 하여 물독처럼 휘여진 아버지의 두다리가 떠올라 인차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의 분김으로 하여 언제인가는 지아비를 섬겨야 할 자기의 고운 몸매를 망칠수 없었다. 무예는 못 닦아도 병법만 잘 익히면 얼마든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할수 있었다.

어머니, 불초한 녀식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가슴에 재가 쌓였음을 소녀도 아나이다. 하지만 어머니도 언제인가는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딸을 두었는가를 꼭 아시게 될 때가 있을거예요.

월단의 버들눈에는 원망의 눈물이 소리없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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