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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4일

평양시간


제 14 회


14


박정승은 며칠째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사를 찾기 위해 운봉산으로 떠나보낸 안사인한테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그 답답함으로 속이 짓눌려서인지 푹 자지 못하고 오늘도 이른아침에 눈을 떴다. 잠은 깼으나 일어나기 싫어 그냥 잠자리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대감님, 아직 주무시오이까?》

홍무관의 목소리라 반갑게 장지문을 드르릉 열었다. 긴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안채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 홍무관의 습성을 아는지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한껏 기대가 어린 눈길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

《최정승댁에서 문안하님을 보내왔나이다.》

흥! 저도 모르게 코방귀가 나간다. 오라는 딸은 안 오고 오지 말라는 며느리가 온다더니 학수고대하던 안사인의 기별이 아니라 생뚱같은 최정승소리다.

《명절도 아닌데 갑자기 문안하님은 무슨 문안하님인고?》

《대감님께서 어제 몸이 불편하다고 조정에 못 나오셨는데 차도가 계시냐고 문안을 보내면서 오늘도 조정에 못 나오시겠는지 알려달라고 했나이다.》

흥! 다시한번 코바람이 나갔다. 고양이 쥐 생각이로군. 내가 옘병에라도 걸려 콱 죽었으면 하는 놈이 문병은 무슨 문병.

박정승은 그제 밤 기생 옥향이를 불러들여 진탕치듯 마시고 놀아대며 밤을 꼬박 새웠다. 국왕이 주관하는 어전회의도 아니고 정승들끼리 밀린 국사를 처리하는 조회여서 하루쯤 번져도 무방하기에 어제아침 몸이 불편하다는 전갈을 보내고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어제 조정에서 최정승이 어떻게 놀아댔겠는지 보지 못했어도 눈앞에 선하다. 자기가 없는 틈을 타서 맹물단지같은 문정승을 얼리면서 그놈이 독판치기로 모든 정사를 처리했을것이다.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인 자기가 없었으니 아마 최정승한테는 사람사는 세상같았을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가 안 나오길 바라며 슬쩍 문안하님을 보낸게 분명하다.

이제는 나이가 퍼그나 있어서인지 몸상태가 전같지 않다. 한창시절에는 계집을 끼고 장밤을 보내도 잠간 눈을 붙이면 몸이 거뜬했으나 지금은 그 어혈이 며칠씩이나 간다. 어제 하루동안 푹 쉬였는데도 아직 몸의 이 구석, 저 구석이 불편하다. 생각같아서는 오늘 하루 더 쉬고싶지만 국사는 둘째치고 생쥐같은 최정승이 좋아할 꼴을 그려보니 절로 이를 사려물게 된다.

《오늘은 조회에 나간다고 일러라.》

《예잇!》

홍무관이 령을 받고 돌아섰다.

박정승은 문을 다시 닫으려다가 잠옷바람으로 마루에 나와 신발을 찾아 꿰였다. 머리가 무거워서 아침공기를 마시며 산보를 하고싶었다.

스적스적 걸음을 옮겨 후원으로 갔다. 여름아침의 싱그러운 냄새가 후원에 떠돈다. 지난해에 대공사를 벌려 면모를 일신시킨 후원은 말그대로 꽃동산이다. 여기저기서 갖가지 꽃들이 벌나비를 유혹하며 요염을 뽐내고 후원 한복판에서는 금빛물고기들이 뛰여노는 자그마한 호수가 제법 물을 출렁인다. 몇백리 지방에서 날라온 기암괴석들과 진귀한 나무들이 운치를 돋구며 숲속풍치를 자아내고 맵시나는 자그마한 다리와 이어져있는 호수 한가운데는 아담한 정각이 날아갈듯 추녀를 치켜들고 어여삐 앉아있다.

그는 원래 사치를 즐기지 않는 무관이여서 후원을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꾸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최정승이 정승부에 후원을 동산처럼 꾸려놓고 흥청거리는게 배아파 보란듯이 더 요란하고 더 아름답게 꾸렸다.

시원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걷느라니 머리가 아침하늘처럼 맑아졌다. 상쾌해지는 기분에 몸을 맡기고 놀양으로 흔들흔들 걸음을 옮기던 그는 한순간 골살을 찌프렸다. 아버지가 어디서 저런 감투와 옷이 나서 걸쳤는고. 베감투를 쓰고 베두루마기를 걸친 아버지 박첨량이 갈고랑막대를 짚고 뒤대문쪽으로 비칠비칠 걸어가고있었다. 걸음을 재게 놀려 아버지의 길을 막아섰다.

《아버님, 아침부터 어디에 가시오이까?》

땅만 내려다보며 걷던 아버지가 불쾌한듯 눈을 치뜬다.

《내 묘자리를 돌아보러 간다.》

《이런 차림으로 나다니시면 남들이 로망을 한다고 흉을 보나이다. 어서 안에 들어가 누워계시오이다.》

그는 다짜고짜 갈고랑막대를 빼앗아들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박첨량은 그의 힘에 못이겨 따라오면서 방울단 황소처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걸 놓아라. 묘자리를 보러 가는데 이런 차림으로 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떨쳐입고 가겠느냐.》

잠자코 따라왔으면 좋으련만 끌려오면서도 계속 푸념질이다.

《이걸 놓지 못하겠느냐. 놓지 않으면 당장 죽고말겠다.》

박정승은 억지다짐으로 아버지를 끌고들어가 방바닥에 눌러앉혔다.

《제발 좀 망신을 시키지 말고 집안에 꾹 앉아계시오이다.》

아버지는 손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영탄조로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구! 내가 이런 괄세를 받자고 이렇게도 질기게 산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괄세를 한다고 그러시오이까?》

《누군 누구야, 바로 네놈이지. 아비없는 후레자식같은 놈, 아이구!》

아버지는 다시금 방바닥을 두들겨댔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후레자식타령에 박정승은 쓰겁게 입을 다셨다. 이제는 너무 들어서 돌림병에 까마귀소리만치나 듣기 싫다. 아버지의 입에서 후레자식소리가 나오기 시작한것은 그가 무예에 뜻을 둔 때부터였다.

《힘써 글을 배우고 일찍 등과하여 가문의 영화나 보일것이거늘 구태여 하지 말라는 말타기와 칼부림만 기를 쓰고 좋아하느냐. 이 후레자식같은 놈, 불효막심도 정도가 있지 아비의 말을 그렇게까지 귀등으로도 안 듣느냐.》

그가 무술닦기에 전심할수록 아버지의 욕은 더 늘어갔다. 그전까지는 《우리 문호를 일으킬 사람은 이 아이로다.》하며 그토록 그를 사랑하고 귀애하던 아버지였다. 허나 그가 가문의 전통을 배반하는 길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사랑도 그를 배반하였다.

장가를 들어 딸 월단을 낳았을 때 아버지의 욕은 분노로 바뀌였다.

《네놈이 끝내 박씨가문의 혈통을 끊어놓는구나. 귀신도 빌면 듣는다는데 네놈은 어떻게 된 후레자식이기에 아비의 말을 안 듣고 가문을 망치느냐.》

아버지의 이 말에 그는 배심있게 대꾸했었다.

《첫아이인데 뭘 그다지나 노여워하시나이까. 내 이제 아버님께 꼭 손주를 안겨드리겠나이다.》

《뭐, 네가 아들을 낳아? 조상을 박대하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 네가 딸을 낳은건 하늘이 밉게 여김이라 어이 달리되겠느냐.》

정말 하늘이 밉게 여겼는지 아버지의 말대로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 옛날에 박씨가문의 대를 끊어지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는 저주가 자기 대에 들렸는지 아무리 숱한 계집들과 모지름을 써봐도 아들은커녕 딸도 더이상 생기지 않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후레자식타령은 어깨가 귀를 넘게 사는 오늘날까지도 끊기지 않고 계속되였다. 아버지한테 죄스러움과 민망함이 없지 않아 지극히 효도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건 후레자식 소리뿐이다. 효자노릇을 하려고 해도 부모가 받아줘야 한다더니 정말 옛말 그른데 없다.

아버지는 여전히 방바닥을 두드리며 타령을 했다.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지 말고 인차 죽어야겠는데 왜 남의 나이까지 먹으며 이다지도 오래 사노, 아이구!》

늙은이의 한갖 넉두리이지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 따져물었다.

《아버님, 가문이 망한다는건 무슨 말씀이오이까?》

《예로부터 일군을 박대하면 당일에 집안이 망하고 조상을 박대하면 삼년에 가문이 망한다고 했다. 네놈이 조상을 박대했는데 박씨가문이 안 망할수 있느냐? 이제 망해도 쫄딱 망할게다.》

가슴이 섬찍해서 다시 물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네가 하는짓을 네가 몰라서 미주알고주알 캐묻는거냐? 네놈의 몸에서 지금 막 피비린내가 풍긴다. 이제 그 피비린내때문에 네놈이 삭탈관직당하는건 둘째치고 우리 박씨가문에 오라바람이 일어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게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발 마음을 돌려먹어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왜 〈무양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는줄 아느냐. 사람의 마음을 먹는 벌레가 양인데 그 양이 없는가고 물어보는 말이다. 네놈의 마음속엔 지금 그 양이 가득하니 이제라도 빨리 그 벌레를 내쫓아라.》

늙으면 반귀신이 된다더니 자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말에 더 할말이 없어 돌아서고말았다. 등뒤에서 아버지의 타령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엄부시하에서 자란 아들만이 사람질을 한다고 했는데 내가 저놈을 후레자식으로 키웠으니 달리될수가 없지. 도적의 때는 벗어도 자식의 때는 벗지 못한다고 했거늘 내 이제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만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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