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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0일

평양시간


제 13 회


13


《아버님, 그동안 옥체무강하셨나이까? 소자 문안드리나이다.》

담동이 방안에 들어서며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며칠만에 애비를 본다고 깍듯이 례를 지키는 기특한 아들이다.

문정승은 아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고 흐뭇하였다. 자기를 닮아 키꼴이 후리후리하고 안해를 닮아 몸도 건장하다. 생김새도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좋은것만 물려받아 친구들이 안방규수같다고 시기할만큼 곱살하다. 속이 깊고 공부도 많이 해서 앞날이 촉망된다.

그는 자리를 바로하고 안해에게 부러 엄엄한 눈길을 주었다.

《부인, 내 이 애와 심중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좀 피해주오.》

안해가 못마땅해하며 금시 샐쭉해진다. 문정승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안해를 부드럽게 얼렸다.

《사내들끼리 할 말이니 리해해주오.》

안해는 더 버티여야 소용없음을 알고 곱지 않게 눈을 흘기며 락태한 고양이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지문이 닫기고 방안에 부자간이 남게 되자 그는 하려던 말을 꺼냈다.

《담동아, 아버지가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자는건 네 혼사문제다.》

그는 말을 떼놓고 아들의 표정을 슬며시 살폈다. 아버지의 어조로 보아 신중한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담동은 긴장해서 귀를 기울인다.

《아비도 깊이 생각해보고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5년전부터 혼사말이 난 박정승네와 사돈을 맺어야 할가부다.》

아버지란 아들앞에서 지엄한 권위를 가지는 존재이건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명령조가 아니라 의논조였다. 애지중지 귀중히 여기는 아들에게 이 말을 하자니 부성애가 허락치 않았다. 허나 지금의 형편에서는 딴 도리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아들은 대뜸 우거지상이 되더니 무릎을 꿇고 몸가짐을 바로하며 고개를 숙이였다.

《여쭙기 황송하오나 불초한 소자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할가 하나이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안해는 평생의 지팽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런 녀자를 배필로 삼겠소이까. 박색인 인물은 둘째치고 나이도 소자의 숙모벌이나 되는 그런 녀인을 어떻게 차마…》

담동은 목소리가 점점 코소리로 변하더니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다. 어느틈에 맺혔는지 속눈섭에 매달렸던 눈물 한방울이 반짝이며 방바닥에 뚝 떨어졌다.

사내라는 자식이 못나게 그쯤한것에 울긴? 나무라우면서도 애틋한 측은함이 앞선다. 그도 이것이 아비로서 아들에게 못할짓임을 번연히 알았다. 허나 이미 마음속에 결심이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심이 선것은 국왕의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였다. 지금은 셋중에서 자기의 세력이 제일 약하니 왕위쟁탈전에서 승리자가 되자면 박정승과 최정승이 계속 맞붙어 피를 흘리게 한 다음 기운이 빠진 둘을 각개격파하여야 하였다. 최정승은 물도 씻어먹을 약은 놈이여서 그의 간계에 잘 넘어가지 않을게 분명하니 미욱하고 성급한 박정승을 리용하여 최정승을 없앤 다음 박정승을 없애면 룡상은 절로 자기한테 차례질수 있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생각을 굴리며 방도를 찾다가 떠오른것이 자기네 서남당의 군사와 최정승네 북서당군사만 주면 백마국의 침노를 막아내겠다던 박정승의 호언장담이였다.

그렇다. 우리 서남당의 군사를 주어 박정승이 궁성을 떠나 변경에 가서 백마국과 싸우게 하자. 그렇게 되면 첫째로 백마국의 침노를 막을수 있으니 좋고 둘째로 제일 세력이 강한 박정승이 궁성에 없으니 마음놓고 최정승과 겨를수 있다. 박정승은 백마국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그 기세로 최정승을 들이칠것이다. 설사 백마국과의 싸움에서 패한다 해도 죽을 때까지 최정승의 멱은 물고 놓아주지 않을것이다.

그동안 나는 운봉도사에게 족보를 보이고 왕위를 가로칠것이며 그 방안이 실패하는 경우 솔개국에 원병을 청해서 맥이 빠진 박정승과 최정승을 동시에 제거해버릴것이다.

방도는 섰지만 제일 중요한것은 박정승을 얼려넘기는것이였다. 갑자기 군사를 주겠다고 하면 아무리 욕심많은 박정승이라 해도 께름한 생각을 앞세우며 선뜻 받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박정승이 자기의 책략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 계교는 고양이목에 방울달기로 끝날수 있다. 자기를 찌글사하게 보는 박정승의 눈에 박힌 미운털을 뽑아버리고 고운털을 박아넣어야 한다. 그러자면 박정승이 아파하는 곳에 바람을 불어주어야 한다.

박정승이 제일 아파하는 곳은 과년한 딸자식을 로처녀로 늙히는것이다. 딸 월단이때문에 박정승은 가슴이 숯등걸로 되였다. 월단의 나이가 금년에 32살이니 로처녀가 아니라 로할미다. 여북했으면 박정승이 5년전에 자기 딸보다 11살이나 아래인 담동이와 혼사시켜줄것을 국왕에게 청원하여 어명이 내리게 하였겠는가. 그때 국왕은 정승들이 화목하기 바라서 그 혼사를 승인하는 어지를 내렸고 그는 아들의 나이가 어린것을 구실로 가시아버지 제사날 미루듯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다.

지금의 형편이야말로 그것을 효과있게 써먹을 때이다. 머리우의 강권은 받아넘겨도 옆구리 인정은 물리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돈이라 부르며 찾아가면 박정승도 당장에 흐물흐물해질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아들녀석이 찌뿌둥해하니 그것이 난사였다. 달래서 말을 안 들으면 아버지의 강권으로라도 내려먹여야 한다.

《자고로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주관하였거늘 아비가 한마디 하면 따를것이지 가당치 않게 무슨 말이 많느뇨?》

이때 장지문이 드르릉 열리며 독이 올라 시퍼래진 안해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강박할것이 따로 있지 죽기보다 싫다는 년에게 장가를 들라고 강박하나이까? 절대로 아니되오이다.》

안해는 어제날의 드살을 용기백배 휘두르며 당장 그의 턱수염이라도 뿌리채 뽑아버릴것처럼 대든다. 저 드살은 남편의 항복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드살이다. 허나 그도 그 드살을 당하기만 하던 어제날의 숙맥이 아니였다. 다 큰 아들이 보는 앞이라 더더욱 가풍을 세워야 하였다.

《정승댁 안방에서 이 무슨 해괴한짓이요? 시녀들이나 종놈들이 들으면 당장 궁성바닥에 소문이 자자할거요.》

그의 날카로운 론조와 어조에 안해는 찔끔 놀라며 굳어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다그었다.

《지체높은 대감부인이 문밖에서 말을 엿듣다니. 려염집아낙네도 그런 행실은 삼가하오. 정말 부끄럽소.》

안해는 한층 기가 죽었지만 물러설 잡도리는 아니다.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나이까. 고이 길러온 자식을 하필이면 그런데…》

《됐소, 그만하고 잠자코 듣기나 하오.》

그는 안해의 말허리를 끊으며 손을 홱홱 내저었다.

《담동이 듣거라. 네 혼사는 누가 주관한 혼사냐?》

《돌아가신 국왕께서 주관하신 혼사이오이다.》

《옳다, 너의 혼사는 국왕의 어명으로 이루어진 혼사이다. 그런즉 그 혼사를 파하려면 어명으로 파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담동은 그의 물음에 눈이 퀭해서 바라본다.

《물론 아비도 너의 행복만을 바란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너도 이젠 철부지가 아니니 요즘 나라형편이 어떤지 잘 알게다. 상감마마께서 돌아가시고 룡상이 비였으니 네가 물리고싶어하는 그 혼사를 누가 물려주겠느냐. 박정승이나 최정승이 룡상에 앉으면 절대로 파할수 없는게고…》

여기서 말을 끊고 부러 아들에게 간절한 눈길을 주었다. 아들의 총명이면 이쯤만 말해도 뒤귀가 어둡지 않을것이다.

아니나다를가 아들은 그 눈길이 안고있는 많은 의미를 제꺽 해득한 모양인지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이였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아들의 결심을 듣고 문정승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데 안해는 대경실색이다.

《아니 애야, 어쩌자고 그러느냐?》

그러는 안해에게 담동이 어른스럽게 대답한다.

《어머니, 소자는 아버님의 말을 따르는게 아니라 아버님의 뜻을 받드는것이나이다. 어머니도 장차 리해하시게 될 날이 있을줄 아오이다.》

문정승은 자기를 리해해주는 아들의 어른스러움에 눈등이 뜨거워났다. 애써 눈물을 감추며 안해에게 능을 부렸다.

《부인은 무슨 복으로 이런 아들을 낳았소? 이 애의 소견이 실로 누구도 미치지 못할만큼 범상치 않은바라 정말 기특함을 금할수 없소그려.》

안해는 무슨 영문인지 아직 깨도를 못한것 같지만 남편과 아들의 얼굴에 실린 웃음을 보고 저도 웃음을 짓는다.

《그게 어찌 첩의 복이겠나이까. 다 상공의 복이나이다.》

《허허허… 부인이 그 말 한마딘 정말 잘했소.》

문정승은 시름을 놓고 온몸을 들썩이며 통쾌하게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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