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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3일

평양시간


제 10 회


10


박정승은 어제 밤도 침전에서 왕의 령구를 지켜 호상을 서며 꼬박 밤을 밝혔다. 벌써 며칠째 건밤을 새운다.

최정승과 문정승도 함께 호상을 서지만 그들은 이따금씩 몰래 집에 가서 한잠씩 자고 오군 한다. 허나 그는 대궐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물론 저세상으로 간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우러나와서가 아니다. 운봉도사가 언제 어느 시각에 궁성으로 올지 모르니 한시라도 왕궁을 비워둘수 없기때문이다. 안사인을 운봉산으로 떠나 보낸지라 마음이 한결 가볍긴 하지만 혹시 안사인과 운봉도사의 길이 서로 어긋날수도 있었기에 천근만근으로 내리누르는 눈까풀을 억지로 버티고 견디여냈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자그마한 실수라도 없게 하자면 만전지책을 강구하여야 하였다.

침전에서 나와 외전으로 오니 최정승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문정승만이 한구석에 쭈그리고앉아 끄덕끄덕 졸고있었다.

《문대감!》

도적잠을 자던 문정승은 그의 부름에 후닥닥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최대감은 어디 갔소?》

문정승은 피곤이 몰려 수수떡처럼 벌개진 눈을 비비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글쎄오이다? 새벽부터 안 보이던데…》

약바리같은 생쥐놈이 또 몸을 사렸군. 운봉도사가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지라 최정승이 계속 자리를 뜨면 여러모로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만 죽도록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천한 평백성들도 자기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착실히 령구를 지키는데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어쩌면 이럴수 있소!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몰지각한지 정말 모르겠소.》

최정승에 대한 욕에 문정승까지 슬쩍 빗대놓고 건드렸다.

지은 죄가 있어 속이 켕기는지 문정승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아닌보살하며 최정승을 걸고들었다.

《글쎄말이웨다. 상감마마께서 생존해계실 때는 저 혼자 충의가 있는것처럼 룡상주위에서 뱅뱅 돌아가더니…》

최정승이 나타난것은 그때로부터 한식경이 지나서였다.

《?!》

박정승은 눈부시게 하얀 상복을 입고 외전으로 들어서는 최정승의 모습을 보고 눈이 퀭해졌다. 한참만에야 시까스르듯이 물었다.

《그건 도대체 뭐라는거요?》

최정승은 대답에 앞서 한숨부터 길게 내쉬였다.

《상감마마께서는 일점혈육도 없으시니 누가 상주노릇을 하겠나이까. 그래서 내라도 상주가 되여 상감마마의 령혼을 위로해드리자고 생각했소이다.》

생각도 못했던 대답이라 억이 막혀 말문을 찾는데 문정승이 부들부들 떨며 대들다싶이 최정승에게 다가섰다.

《아니될 말씀이요. 처음 장의문제를 의논할 때 우리 정승들은 상복을 입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았소? 더우기 문무백관들이 모두 상제가 되여 베로 만든 상복을 입었는데 어이하여 최대감만은 왕족만이 입을수 있는 상복을 감히 걸쳤소? 나라의 례법에 어긋나는 행실이요.》

여느때는 작은 키를 돋구며 발딱발딱 맞서던 최정승이였건만 이시각에는 서글픈 표정만 돋구며 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의 례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소이까. 중전마마도 안계시고 세자마마도 안계시는데 누가 왕실의 상복을 입으며 상주가 없이 어찌 장례를 치르겠소. 지금껏 나라의 대사를 주관해온 내라도 상주가 되여야지…》

문정승은 씩씩 숨을 톺으며 최정승의 말허리를 끊었다.

《천만부당한 말씀이요. 신하가 어찌 국왕의 상주노릇을 한단 말이요. 상주는 철저히 왕족이 되여야 하오.》

노는 꼴들을 지켜보자니 눈허리가 시다. 상복을 입은 놈도 상복을 입겠다는 놈도 다 미웠다. 잘들 놀아댄다, 어디 실컷 싸워봐라. 박정승은 척 팔짱을 끼고 둘의 싱갱이질을 지켜보았다.

이때 내시들을 총괄하는 총관내시가 들어와 아뢰였다.

《백마국사신이 입궐할것을 요청한다고 하옵니다.》

문정승이 총관내시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주며 최정승에게 채 하지 못한 분풀이를 쏟아부었다.

《상감마마께서 돌아가셨는데 사신은 무슨 사신인고. 썩 돌려보내라.》

총관내시는 망설이며 최정승쪽에 눈길을 주었다.

《백마국사신의 말이 최대감께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이 있었다는데…》

순간 박정승은 눈살이 꼿꼿해졌다. 교활한 놈! 네놈이 백마국사신들앞에서 상주흉내를 내려고 이렇게 상복까지 걸치고 엉너리를 치댔구나. 더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총관내시에게 일렀다.

《백마국사신을 여기 외전으로 들여보내거라!》

최정승이 난색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박대감, 어쩌자는거요?》

그는 아닌보살하는 최정승에게 통발눈을 치떴다.

《최대감이 만나주겠다고 약조를 했다니 만나야 할게 아니요. 최정승이 혼자 만나는것보다 우리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게 더 좋을거요.》

문정승도 여전히 얼굴이 시퍼래서 툭 내쏘았다.

《상감마마께서 안계시는데 최대감이 무슨 명목으로 사신을 만나주겠다말겠다 월권을 하시우?》

잠시후 공작새깃이 꽂힌 운두높은 모자를 쓴 백마국사신이 물독처럼 나온 배를 쑥 내밀고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외전에 들어섰다. 사신은 백마국의 례법대로 오른손을 왼쪽가슴에 가져다대고 고개를 숙이였다.

《송도국국왕께서 애석하게도 별세하셨다니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바이나이다.》

이어 사신은 세 정승을 둘러보다가 상복을 입은 최정승에게 다가갔다.

《최대감께서 송도국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것 같은데 나는 백마국황제의 위임에 의하여…》

《가만!》

박정승은 오른손을 내흔들며 사신의 말허리를 끊었다. 밑도끝도없이 말을 중단시키자 사신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박정승은 어깨를 쭉 펴고 배를 내미는것으로 사신의 눈길에 대답했다.

《할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시오.》

어리벙벙해서 상복을 걸친 최정승과 그를 번갈아보던 사신이 서서히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러자 최정승이 발딱 키를 돋구었다.

《박대감, 지금껏 외국사신은 내가 어명을 받고 만나군 하였는데 왜 그러시우? 내가 처리하리다.》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막 우박을 퍼부으려는데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전에 문정승이 먼저 볼부은 소리로 대꾸했다.

《최대감, 그때는 상감마마께서 살아계실 때이고 지금은 상감마마께서 안계시니 세 정승이 함께 처리해야 할게 아니요. 사신은 할말이 있으면 우리모두에게 하시오.》

박정승은 볼편을 실룩거렸다. 꺽두룩하면 싱겁지 않은 놈 없다더니 네놈까지 끼여들겠다는거냐.

그들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사신의 얼굴에 로골적인 비웃음이 비끼였다.

《그렇다면 세분 대감께서 함께 들어주사이다. 나는 백마국황제의 위임에 의하여 송도국에 마지막으로 언명하오이다. 아시다싶이 송도국이 우리 황제페하의 노여움을 사서 지금 남쪽변경에 우리 백마국의 대군이 집결해있소이다. 송도국이 해마다 조공을 바치면 백마국의 대군은 곧 물러갈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십만대군의 말발굽이 여기 궁성에까지 닿을것이나이다.》

《뭐라구? 궁성에까지! 어림도 없다.》

박정승은 코바람을 힝 불었다.

《그럼 우리 백마국과 맞서싸우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멸시하듯 뇌까리는 사신의 말에 밸이 왈칵 솟아 큰소리를 치려는데 문정승과 최정승이 겁에 질려 떨며 뒤에서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허나 보란듯이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아무리 큰 나라의 사신이라고 해도 남의 궁성에 들어왔으면 손님의 례를 지켜야지 이 무슨 해괴망측한짓인고.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이 송도국에 그렇게도 사람이 없는줄 아는가!》

들보가 쩡쩡 울리도록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백마국의 사신과 무사들은 기가 눌리워 목을 움츠러뜨렸다. 사신이 인차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저의 언행이 불손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시오이다. 박대감의 용맹에 대해서는 우리 백마국의 남녀로소모두가 잘 알고있나이다.》

둥둥 올리추어주는 말에 박정승은 어깨가 더 으쓱해졌다.

《난 원래 우리를 해치려는 놈들과는 조금도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요.》

《우리는 송도국을 해치자는게 아니라 지켜주자는겁니다. 지금 서쪽의 솔개국이 송도국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송도국의 혼자힘으로 솔개국을 당하지 못할거야 불보듯 뻔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우리 백마국황제페하께서는 송도국이 조공만 착실히 바치면 솔개국의 침략으로부터 송도국을 지켜주시겠다는것이나이다.》

뭐, 조공을 바치라구? 이놈아, 그런 어림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박정승은 사신앞에 배를 쑥 내밀었다.

《송도국은 우리 힘으로 지킬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사신의 어조가 다시 달라졌다.

《그렇다면 한번 두고볼가요?》

《두고보자는건 무섭지 않소.》

그의 뻣뻣한 기세로 보아 도무지 이가 들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사신은 타협조로 나왔다.

《정 그렇다면 전 물러가겠소이다. 궁성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기다릴테니 세분께서 잘 의논을 해서 답변을 주시기 바라나이다.》

백마국사신은 처음 들어올 때처럼 깍듯이 례의를 차리고나서 돌아갔다. 백마국사신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기 바쁘게 최정승이 그한테 달려들었다.

《아니, 박대감이 뭐길래 중뿔나게 혼자 나서서 그러시는거요?》

박정승은 최정승의 작은 키를 눈아래로 굽어보며 배심있게 마주섰다.

《일국의 정승이라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사신에게 기가 눌리여 고양이앞의 쥐처럼 부들부들 떨며 잔뜩 주눅이 들었는데 내라도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서 나라의 체면을 지키겠소?》

《누군 뭐 큰소리 칠줄 몰라서 그러는줄 아시우? 외교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란 말이요.》

최정승은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간에 붙었다 섶에 붙었다하는 문정승이 이번에는 최정승의 편역을 든다.

《최대감의 말처럼 이 문제는 큰소리를 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백마국의 대군에 비하면 우리의 군사력이 보잘것 있나이까? 백마국과 맞서 큰소리를 치자면 솔개국에 원병을 청해야 하나이다.》

비겁한 놈들! 국록을 타먹었으면 나라를 위해 한몸을 내대야지 놀란 자라새끼처럼 목을 움츠러뜨려. 하긴 하는 일없이 문벌이나 팔아먹고 사는 문정승 네놈이나 공자왈, 맹자왈만 아는 최정승 네놈이나 그 손에 언제 칼이란걸 들어봤겠느냐. 박정승은 로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시까슬렀다.

《자고로 군자는 불의와 위력앞에서 굴하지 않는다 했소. 학식이 많은 최공이 이 말을 모를리 없겠는데.》

언변좋은 최정승에게 말이 모자라랴. 즉시 대꾸질이다.

《누가 굴한다는거요. 동서고금의 력사를 둘러봐도 그래 적아간의 강약이 부동일 때는 한발 물러서는게 상책이요. 그래서 난 아예 백마국군사를 멀리 피해 해청도로 이 대궐을 옮겨다놓고 실력배양을 하자는거요.》

박정승은 그 말을 듣고 소리까지 내며 껄껄 웃었다.

《눈섭에 불이 달렸는데 언제 실력배양을 할새가 있소. 이제라도 우리 동남당에 최공네 북서당과 문공네 서남당의 군사까지 넘겨준다면 난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를 지켜내겠소.》

당장 내놓으라는듯 두손을 펼쳐드는 그의 행동에 둘다 난색을 짓는다. 네놈들도 수중에 군사가 없으면 끝장이라는걸 알긴 아는구나. 고금진퇴 (북을 울리면 전진하고 징을 울리면 퇴각하는 초보적인 군사교련법) 도 모르는 저런 놈들한테 군사를 나누어주었으니 나라꼴이 어찌 달리되겠는가.

생각할수록 군사의 통솔권을 분산시켜놓은 국왕의 처사가 원망스러웠다. 한때 그에게 병권을 주고 나라안의 모든 군사를 전적으로 맡겼던 국왕은 그의 권력이 나날이 커가는데 불안을 느끼고 최정승과 문정승에게도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아마 꼬리가 비대해지면 휘젓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과 그의 세력이 커지는것은 견제하였지만 지금처럼 나라의 군사력은 약화되였다.

(확실히 국왕은 어리석었어.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했거던.)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저세상에 간 국왕을 끝없이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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