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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0일

평양시간


제 9 회


9


민천산은 며칠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매를 맞은 여독도 여독이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빨리 추서지 못했다.

《주인님, 진지 드시와요.》

어펑녀가 들여온 점심상을 보니 어디서 났는지 이빠진 밥그릇에 조밥이 덩실하니 솟아있다. 앓으면서도 계속 멀건 수수타개죽만 먹던 입이라 숟가락을 들기 전부터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허나 이 쌀을 얻으려고 삯품을 팔았을 어펑녀의 고생을 생각하니 선뜻 상을 마주하게 안되였다. 어펑녀는 말이 하녀이지 이 집안의 애옥살이살림을 버티는 기둥이다.

민천산도 한때는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전답이 있어 유족하게 살았다. 허나 수십년동안 계속해온 과거놀음과 음풍영월 술놀이에 전답은 물론 덩실한 기와집까지도 하늘로 날려보내고 지금은 구차하기로는 남부러운것 없는 살림이다.

안해라고 맞아들인년이라도 착실한 살림군이였다면 이 모양 요꼴이 안되였으련만 사내녀석 게으르니 한저울에 달아도 기울지 않을 게으름뱅이녀편네가 태웠다. 가난도 암가난, 수가난이 있다 했는데 그의 집에는 두 가난이 다 들이닥친셈이다. 그 안해마저도 집안형편이 까먹은 닭알처럼 빈껍데기신세로 전락되자 속병을 만나 저세상사람이 되였다. 보기 싫은 처도 빈방보다 낫다더니 안해가 죽자 온 집안에 때국물이 진하게 흐르고 집기둥은 점점 더 기울어져갔다.

가난이 슬며시 문안으로 들어오면 엉터리우정은 부랴부랴 창밖으로 도망치는 법이다. 그의 술을 공으로 얻어먹을 때는 살점이라도 떼줄것처럼 살갑게 놀던 친지들이였건만 어려운 그의 형편에 도움은커녕 동정도 주지 않았다. 언제 알았던가싶게 씻은듯이 발길을 끊고 등을 돌려댔다. 배를 곯게 되자 굽석거리던 종놈들마저 보짐을 싸들고 꽁무니를 사렸다.

한생 맹꽁징꽁 글만 외우며 붓대밖에 쥐여보지 못한 백면서생의 손으로 나무는 어이 하며 밥은 어이 하랴. 몸종은커녕 밥시중할 반빗아치도 둘수 없는 처지라 길거리에서 빌어먹으며 방랑하던 철부지 어펑녀를 종삼아 데려다 길렀는데 지금에 와서 그 덕을 톡톡히 보고있다.

어펑녀의 재촉으로 금시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생원님 계신가요?》

문을 열어보니 한때 그와 절친했던 리진사의 하인 망쇠이다.

《네가 어인 일로 여길 왔느뇨?》

《우리 진사어른께서 망월루에 술좌석을 마련해놓고 생원님을 청해오라 했나이다.》

민천산은 눈이 머룩머룩해서 고개를 기웃했다. 기름독에 빠졌다 나온것처럼 반질반질한 리진사의 낯짝을 그려보느라니 쑥물이 흘러든것처럼 입안이 쓰거워났다. 자기가 유족하게 살 때는 형님이라 개올리며 젖에 궁티가 든 망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지만 자기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선참으로 왼고개를 틀며 흉을 본게 바로 리진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놈이 날 다 찾노?)

발길을 끊은지 몇해 잘되는데 별안간 찾는다니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괘씸한 생각을 하면 마주서고싶지 않지만 술좌석까지 마련해놓고 청한다니 속에서 움씰하는 주충이 한번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가난하면 거지근성이 나타나는 법이다. 죄없는 자존심때문에 때오른 목이 간절히 바라는 술을 사양할손가. 무슨 속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기갈이나 면하고 오자.

그는 자리를 일어 망쇠의 뒤를 따라나섰다.

산과 강을 낀 곳에 세운 망월루는 해청도에서 명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봄날의 꽃경치, 여름날의 물경치, 가을날의 단풍경치도 각각 이채롭지만 겨울날의 달구경이 하도 볼만 하여 망월루라 이름지었다.

그의 짐작대로 망월루에는 고을에서 제노라 하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 취흥을 돋구고있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은 술상을 마주하고 질탕치듯 마셔대는 유생들의 사이로 분홍치마에 파랑저고리, 파랑치마에 분홍저고리로 단장한 예쁘장한 기생들이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술시중을 하였다.

《민생원님이 오셨나이다.》

망쇠의 선통에 좌석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민생원, 어서 올라오게. 다들 기다렸소.》

예전에는 깍듯이 례를 차리며 손우사람대접을 하던 리진사가 반말로 좌석에 청하였다. 다시금 속이 울컥했지만 얻어먹으러 온 처지라 꿈틀거리는 배알머리를 꾹 눅잦혔다.

루에 올라 자리를 정하고 앉으니 리진사의 눈짓을 받고 기생 하나가 사르륵사르륵 치마꼬리를 끌며 다가와 누런 놋잔에 술을 따랐다.

《오시느라 수고했는데 먼저 한잔 드오.》

그는 술을 권하는 리진사의 말에 사양도 없이 잔을 쥐였다. 어펑녀가 이따금 빚던 막걸리만 마셔왔는지라 향기로운 술내가 코를 찌르자 지나간 호시절에 대한 애절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눈을 감으며 잔을 쭉 비우니 술향기가 입에 가득하고 여러날 주렸던차라 독한 술기운이 찌르르 창자속으로 굽이굽이 배여들어가는게 직감적으로 알린다.

그가 잔을 놓기 바쁘게 리진사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인건 민생원이 정승대감을 만나뵈왔다기에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서요.》

순간 속으로 편히 젖어들던 술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네놈들이 날 놀리자고 찾았구나, 하긴 남의 말이라면 쌍지팽이를 짚고 나서는 네놈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지. 흰 장미가 수북한 눈이 서서히 쪼프려지며 모가 서고 허연 수염이 바람에 날리듯 떨렸다.

허나 좌석의 유생들은 그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진사의 말에 저마끔 동을 달았다.

《우리같은 시골선비들이야 정승대감의 얼굴을 구경이나 하나요.》

《누구에게나 차례지는 영광이 아니지요.》

민천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반응도 안 보였다. 술냄새에 홀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괜히 왔다는 후회만이 뼈저리게 찾아들었다.

뒤늦은 후회이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선비의 존엄을 지켜야 하였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련꽃은 더러운 개천에 피여도 꽃빛이 변치 않고 군자는 란리판을 만나도 굳은 절개를 지킨다고 하지 않았는가.

묵묵부답의 태도에 재미가 덜한지 리진사가 꼬집어물었다.

《듣자니 정승대감께 벼슬을 청했다는데 벼슬을 받으셨수?》

이번에도 침묵을 지키니 한 유생이 제가 대신 대답한다.

《민생원이 벼슬을 받은걸 다들 모르시우? 무슨 벼슬을 받았는고 하니 곤장벼슬을 받았수다. 곤장벼슬에 넙치가 되였지요.》

《하하하…》

좌석에 폭소가 터졌다. 유생들의 미친듯 한 웃음소리에 기생들의 깔깔소리까지 합쳐져 망월루가 웃음소리에 통채로 흔들거렸다.

웃음이 끊기자 리진사가 계속 화제를 끌고나갔다.

《민생원이 정승대감께 〈로목〉이라는 시를 지어올렸다는데 우리도 그 제목으로 시를 한수씩 짓는게 어떻소? 그럼 내가 먼저 지으리다. 》


민망한 늙음에 정신이 홀리워

천하디 천한 청 조정에 아룄더니

산천의 푸른 나무 창피를 못이겨

껍질을 벗고 곤장목이 되였네


다른 유생들도 뒤를 이었다.


민한 놈 날개 달고 하늘높이 날으려다

천벌에 다리 꺾여 걸음조차 못 옮기네

산송장과 다름없는 가련한 저 몰골

력사책에 남기여 후세에 전하리


민심을 잃으면

천대를 받거늘

산정이 높은줄

매질에 깨달았네


민천산이라는 자기의 이름자를 따서 시아닌 시를 제꺽제꺽 읊조리는 꼴을 보니 흉측한 놈들이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해둔 모양이다.

나많은 사람을 놀려대는 네놈들도 먹물을 먹은 선비냐? 하는짓이 랑인배와 뭐가 다르냐. 더이상 참고 들을수가 없어 마침내 침묵을 깼다.

《고상한 선비들이 한시나 지을게지 평백성이 쓰는 언문으로 시를 지어서야 꼴이 되겠수?》

가시돋힌 그의 말에 리진사가 막힘없이 응대한다.

《량반의 고상한 처신이면 고상한 한시에 담을터이지만 막놈의 상스러운짓을 어찌 한시에 담으리까. 언문시에 담음이 제격이리다.》

《하하하…》

다시금 폭소가 터졌다.

민천산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혼이 움직이고 시상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으나 숨소리가 거칠어 말이 잘 나가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언문시에 정통한줄 내 여적 모르고있었소그려. 그럼 나도 언문시로 화답하리다.》


민간에 숨은 룡

천상에 오르면

산기슭의 망월루

눈물에 잠기리


우뢰를 터치듯 시를 쏟아놓고나니 한결 속이 후련해졌다. 팔소매를 떨치며 좌석을 떠나는 그의 등뒤로 유생들의 귀너머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군.》

《량반냄새도 안 나는 주제에 숨은 룡이라.》

《80살까지 살면 질긴 목숨덕에 로인직벼슬이나 받을거웨다.》

《하하하…》

그날 밤 민천산은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머리에 백발을 이고 한갖 선비따위들의 놀림가마리가 될바에야 살아서 무엇하리오. 분을 삭이지 못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덧없는 초로인생을 여기서 끝내자.

허나 오늘 당한 멸시와 모욕을 생각하면 그냥 죽고싶지 않았다.

아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수치를 씻고 내가 당했던것만큼 분풀이를 해야 한다. 그러자면 하늘이 열쪼각나더라도 기어이 원님벼슬쯤은 따내야 한다. 그것도 이 고을의 원님이 되여야 한다.

머리속에 공상이 펼쳐지며 당장 원님이 된것 같은 기분이다. 이놈들, 이 민천산이 원님이 되여 내려올제 네놈들의 보잘것 없는 필부의 용맹이 얼마나 가나 보자. 네놈들이 보란듯이 망월루에서 곤장을 내릴테다. 아니, 한놈한놈 주리를 틀테다!

가자, 궁성으로 가자. 여기 시골구석에 엎드려있다가는 죽을 때까지 벼슬임명장을 구경도 못한다.

허나 궁성에 간다 해도 먹고살 일이 막막하였다. 제집이 있는 여기 해청도에서도 입에 겨우 풀칠을 하는 형편인데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신세라 백사지나 다름없는 궁성바닥에서 잠은 어디서 자고 먹는것은 어쩐단 말인가?

이 궁리, 저 궁리 하는데 한순간 10여년전에 궁성에서부터 해청도까지 자기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던 7촌조카사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살림에 보태라고 돈푼이나 쥐여줬으니 그녀석이 나를 박대하지는 못할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는 어펑녀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나 궁성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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