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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4일

평양시간


제 8 회


8


민천산은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주인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하녀 어펑녀의 눈물젖은 얼굴이 희미하게 안겨온다. 차츰 정신이 들며 주근깨가 보숭이처럼 박혀있는 어펑녀의 두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똑똑히 보인다. 이년이 궁상맞게 눈물은 무슨 눈물이뇨?

몸을 일으키려고 움씰하는 순간 뼈마디가 쿡쿡 쑤셔나며 모진 아픔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음-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맥을 잃고 철썩 뒤로 쓰러졌다. 볼기와 두다리가 막대기처럼 뻣뻣하고 제 살같지 않다. 그제서야 곤장을 맞던 일이 생각키웠다.

《꼭 나흘만에 정신을 차리셨나이다.》

어펑녀의 갈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흘이라구? 그럼 내가 나흘동안이나 정신을 잃고있었단 말인가?

저려나는 아픔에 조용히 두눈을 감았다. 몸도 아팠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더 아프다. 선비한테 매를 드는 그런 무지한 놈이 무슨 정승이란 말인가. 자기에게 곤장을 내리고도 눈섭 하나 까딱 안하던 최정승의 족제비상이 환영으로 얼른거린다. 그 환영을 깨물어죽일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최정승이 해청도에 내려왔다는 소문이 시골에서 사는 그의 귀에까지 들려온것은 닷새전이였다. 하늘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즉시 청려장을 짚고 백발을 날리며 초가집을 나서 최정승이 류숙하고있는 감영을 찾아갔다.

비록 갈건을 쓰고 베옷을 걸친 초라한 차림이였지만 위엄있게 백발수염을 내리쓸며 파수군들에게 조정에서 내려온 정승을 만나러 왔다고 선통했다. 허나 파수군들은 궁핍이 도는 시골선비의 행색에 눈살을 쪼프리며 대문가까이로 범접도 못하게 하였다.

온갖 공상을 다하며 허위단심 달려온터라 절대로 그냥 물러설수 없었다. 민천산은 배심있게 감영대문앞에 매달아놓은 북을 두드렸다. 그 북은 백성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상소할 때 두드리는 북이라 즉시 형방비장과 병졸들이 나와 그를 관찰사앞으로 데리고 갔다.

관찰사는 자기앞에 끌려온 그를 보고 귀찮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망녕이 든 령감이로군. 또 벼슬을 달라는 청을 하러 왔느뇨?》

《아니올시다, 조정에서 내려온 정승어른을 뵈우려 왔나이다.》

관찰사의 얼굴빛이 약간 달라졌다.

《최대감과 안면이 있는가?》

《모르면 만나겠다고 하겠소이까?》

나중엔 어떻게 되든 우기고볼판이였다. 그렇지 않으면 최정승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쫓겨갈수 있었다.

즉시 대접이 달라졌다. 아전을 시켜 그를 감영의 객실로 모시게 하고 관찰사자신이 직접 최정승에게 알리러 갔다. 지금껏 그를 랭대해온 관찰사라 최정승과 안면이 있다는 말에 뒤가 켕긴 모양이였다.

얼마후 최정승이 작은 몸을 끌고 그가 있는 방에 들어섰다.

《누가 나를 찾아왔다구?》

민천산은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코를 박았다.

《대감어른께 해청도의 로선비 민천산 삼가 인사를 올리나이다.》

《민천산?!》

최정승은 생각을 짜내는지 미간을 쪼프리며 고개를 기웃거린다.

《로생은 대감님께 죄를 청하나이다.》

《무슨 죄를 청한다는거냐?》

최정승은 점점 더 얼떨떨해하였다.

《로생은 대감님께 여쭐 말이 있어 대감님과 아는 사이라고 속였나이다.》

긴장해서 두사람을 지켜보던 관찰사가 그제서야 어이없어하며 최정승에게 다가가 무엇이라고 귀띔을 하였다. 최정승은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에 놓여있는 의자에 작은 몸을 푹 묻고 코를 세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나한테 할 말이라는게 뭐냐?》

민천산은 품안에서 시 한수가 적혀있는 종이를 꺼내들었다.

《먼저 이 시를 보아주신 다음에 여쭙겠나이다.》

관찰사가 종이를 받아 최정승에게 넘겨주었다. 종이에는 《로목》이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있었다.


해청도 초야의 한그루 늙은 나무

찬서리 눈보라에 애처로이 시달려도

언제면 봄 오려나 가슴을 태우며

저 멀리 궁성만 하염없이 바라보네


아름드리 줄기는 하늘을 버티고

무성한 잎새는 천하를 덮으련만

붉은 꽃 푸른 잎 세월에 휘말려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우누나


청산아 물어보자 고금일 네 알거늘

천하영웅 몇몇이나 속절없이 갔느뇨

따스한 봄바람 언뜻 스치면

백발의 로목도 어여쁜 꽃 피우리


최정승은 시를 건숭 읽어보고 자못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주옥같은 시로다. 이만한 재간이면 얼마든지 급제를 했겠는데 어째서 지금껏 과거를 안 봤는고?》

《30년동안 계속 과거에 참가했는데 매번 초시때마다 락방을 했소이다.》

그를 대신하여 관찰사가 대답했다.

《매번 락방을 했단 말이지. 이런 재주를 초야에서 썩게 하는걸 보면 시험관들이 눈뜬 소경이야. 그런데 그대의 조상은 무슨 벼슬을 했는고?》

민천산은 이마로 흘러내리는 백발을 훔치며 애써 름름히 앉았다.

《로생의 조상들중에는 높은 벼슬을 지낸분이 없나이다. 로생은 문벌을 많이 따지는 지금의 시속때문에 나라의 인재를 바로 등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재주를 중시하지 않고 문벌을 위주로 등용한다면 머리에 든것이 없어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자리지킴이나 하면서 공밥만 먹나이다.》

최정승의 입가에 의미를 알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론어에 〈부재기위면 불모기정〉 이란 말이 있는데 그 지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사를 론하지 말라는 뜻이지.》

그는 최정승의 말에 잠시 망설이였으나 인차 자기의 생각을 계속 피력하였다.

《이 세상에 존경할만 한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재주이고 다른 하나는 덕이나이다. 재주는 하늘이 준것이지만 덕은 사람이 가지는것이오이다. 덕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뜻이 너무 깊고 크며 그 체계가 지극히 중하여 한두마디로 다할수 없지만 명백한것은 지니고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지닐수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이나이다. 어진 사람들만이 자기의 성품을 단정히 하면서 그 덕을 닦게 되나이다.》

《그대는 자기가 덕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오?》

최정승의 어조에 비양조가 흘렀다.

《로생은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착한 일은 녀색을 좋아하는것처럼 즐겨 시행하고 악한것은 악취를 싫어하는것처럼 미워하였소이다.》

《하하하…》

최정승의 입에서 별안간 폭소가 터져나왔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기껏 웃어대다가 정색해서 소리쳤다.

《자고로 군자는 남의 덕에 대해서는 즐겨말하지만 자기 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법이니라. 자기에게 재주가 있고 덕이 있다고 말하는것은 곧 재주가 없고 덕이 없다는 소리다. 기껏 살았으면 관을 짜놓고 수의나 장만해놓을것이지 국록을 타먹겠다고 미친 지랄을 하느냐.》

민천산은 너무 격분해서 조정의 대신인 정승앞에 있다는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준렬히 꾸짖었다.

《선비를 욕되게 하는자는 천벌을 면치 못하나이다.》

최정승의 반질반질한 눈이 즉시 독기를 내뿜었다.

《관속에 들어가도 막말을 말라 했다. 누가 벌을 면하지 못하는가는 이제 알게 될게다. 여봐라! 저 로망한 늙다리를 끌어내다가 제정신이 들 때까지 곤장을 안겨라.》

《예잇-!》

정승의 엄명이라 형리들은 사정을 보지 않고 매를 내렸다.

《한대요!》

철썩-

《두대요!》

철써덕-

독한 매라 셈을 세는 아전이 열도 세기 전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때 내려지던 매를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난생처음 똥줄이 빠지게 맞아본 곤장이고 늙은 몸에 맞은 매라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청하는 벼슬은 주지 않고 청하지도 않은 매를 주다니. 정말 각박한 세상이고 몰인정한 관원들이다. 저런 놈들이 관직을 차지하고 인재를 배척하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 아닌가.

더우기 지금은 구름아래 밭갈고 달빛아래 고기를 낚는 태평세월이 아니다. 변방이 소란하고 백성들은 입에 풀칠도 못하건만 벼슬아치들은 경치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며 뚱땅거리고있다. 간악한 신하들이 개떼처럼 설치며 협박과 위협으로 착한 일을 하는듯이 꾸며대고있다.

(아, 불우한 민천산이여! 너는 왜 이토록 불우한 시절에 태여나 불우한 인생을 사는거냐.)

팔자좋은 놈들은 높은 벼슬에 앉아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며 금의옥식에 싸여있건만 이 몸은 팔자가 어이 이리 곤궁한가. 지붕마루로 별이 보이는 되박만 한 오막살이에 한몸을 겨우 담그고산다. 문밖에서 가랑비내리면 방안에는 굵은 비요, 앞문은 살이 없고 뒤문은 형체만 남아 동지섣달이면 눈바람이 화살처럼 비발치듯 날아든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물론 개인의 부귀빈천도 물레바퀴 돌듯 한다고 했건만 이 내 인생에는 어이하여 따스한 해볕이 들지 않는고.

늙음과 고생으로 주름이 억세게 잡힌 두눈귀를 따라 눈물이 줄을 지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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