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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1일

평양시간


제 7 회


7


박정승은 앙앙불락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동안 교자안에서 어찌나 태질을 했는지 풍랑만난 쪽배처럼 기우뚱거리는 가마를 바로 잡느라고 교군들이 진땀을 뺐다.

그는 집에 당도하는 길로 장지문을 꾹 닫고 안방에 들어박혔다.

생각할수록 국왕의 장인인 부원군을 미리 해치우지 못한게 분했다. 왕실의 기둥뿌리를 빼려고 서캐잡이하듯 왕실성원들을 하나하나 골라가며 모조리 없애치웠으나 늙다리 부원군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어 그냥 놔두었다. 그런데 귀신같지 않은게 사람을 잡는다고 그 산 송장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그 두상만 없었다면 국왕은 꿈이요, 운봉도사요 하는 유언을 남기지 못했을것이다. 설사 남긴다 해도 도승지한테나 남겼을것이고 도승지는 내 눈치를 보며 유언을 전달하지 않았을것이다. 아니, 이 박정승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전달했을것이다. 너무 분해 신음소리를 내며 골통을 싸쥐였다. 피가 마르는것처럼 속이 타고 부아가 상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퇴기둥에 머리를 짓쪼아야 직성이 조금이나마 풀릴것 같았다.

그는 벽에 걸려있는 일광검이 눈에 띄우자 저도 모르게 이를 사려물었다. 백마국무술시합에서 세운 공을 표창하여 국왕이 하사한 보검이다. 일광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섬광처럼 눈부신 빛이 번쩍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목을 베여도 칼날에 피가 묻지 않는 보검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집에 꽂혀있는 보검을 쭉 뽑아들었다. 순간 칼날에서 발산하는 싸늘한 흰빛이 눈을 쿡 찔렀다. 왼손을 들어 칼날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수많은 적수들을 목없는 귀신으로 만든 칼이건만 날은 조금도 무디지 않았다.

칼자루를 쥐니 본능적으로 온몸의 근육들이 푸들푸들 떨고 피가 와글와글 소리를 내며 끓는다. 서서히 발을 벌려디디고 수평으로 눕힌 왼팔우에 칼을 수직으로 세우며 기본검술자세를 취했다.

얏! 하고 손에 힘을 주며 허공에 대고 칼을 한번 휘둘렀다. 휙-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기분좋은 소리를 냈다. 귀에 익은 그 소리를 들으니 오래동안 맡아보지 못한 피비린내를 맡고싶었다. 눈앞에 환영들이 떠올랐다. 부원군, 최정승, 문정승… 얏! 얏! 진짜 목을 베는것처럼 힘을 주어가며 그 환영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칼을 휘두를수록 몸에 열이 떴다. 이 길로 곧장 달려나가 그들의 목을 베버리고싶었다. 룡상으로 가는 길을 막아나서는 모든 장애물들을 단칼에 요정내고싶었다.

《경의 담력에 이 보검이 짝을 이루면 천하에 맞설자가 없을것이다. 과인이 사랑하던 보검을 하사하거늘 과인이 팔다리처럼 믿는 고굉지신이 되고 나라를 버티는 기둥인 동량지신이 될지어다.》

국왕이 보검을 하사하며 한 말이다. 국왕의 말이 옳았다. 박정승 자기의 담력에 이 보검을 드니 누구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아직 입에서 젖비린내나는 아이놈이 감히 이 송도국땅을 침범하느뇨. 빨리 나와 내 칼을 받든지 아니면 항복을 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하고 말을 달리며 보검을 뽑아들면 외적의 머리가 추풍락엽처럼 땅에 떨어졌고 《이 알량한 선비나부랭이들아, 너희들 목에는 내 칼이 안들줄 아느냐!》 하고 눈을 부라리며 보검을 뽑아들면 조정안의 적수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벌레처럼 그의 발밑에서 설설기였다.

지금껏 칼로 자기를 지켜왔으며 칼로 공을 세우고 칼로 적수들을 무찔러왔다. 그래서 문정승은 족보정승이라 하고 박정승 자기를 칼정승이라고 한다. 칼부림을 잘하고 칼부림밖에 모른다는 소리지만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나는 몸에 배이고 굳어진것이 칼부림이다, 칼로 정승이 된것처럼 칼로 왕이 될테다, 온 궁성을 피바다에 잠그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룡상을 차지할테다,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왕관을 빼앗기지 않을테다!

결심이 굳어질수록 몸이 홧홧 달아올랐다. 드르릉 장지문을 열어제끼고 마루에 나섰다. 시원한 밤공기가 목덜미와 팔소매로 스며들며 달아오른 몸을 식혀준다. 허나 마음만은 식혀주지 못했다. 그는 손에 쥔 칼을 부들부들 떨며 컴컴한 밤하늘을 우러러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테다!》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바깥채와 안채의 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며 손에 홰불을 추켜든 하인들과 하녀들이 마당으로 우르르 쓸어나왔다.

《대감님, 무슨 일이오이까?》

안사인이 조심히 옆으로 다가왔다.

박정승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두볼로 쩝쩔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하들과 종놈들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허나 부끄럽지 않았다. 슬픔의 눈물, 패배의 눈물이 아니라 맹세의 눈물이여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대감님,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오이다. 우리가 먼저 운봉도사를 마중가면 모든 일이 얼음에 박밀듯 순조롭게 풀려나갈것이나이다.》

귀가 버쩍 틔는 소리에 눈을 버쩍 떴다. 안사인이 이마의 지혜주머니를 슬슬 문지르며 히죽이 웃고있었다.

《래일 아침에 운봉산쪽으로 사람을 파하겠나이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가.

박정승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늘 밤중으로 당장 떠나야 한다. 그리고 다른 놈을 보낼것이 아니라 네가 직접 가야겠다.》

그는 차비를 끝낸 안사인이 여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대문을 나서는걸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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