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5


(최정승이 온 다음에 만나겠단 말이지.)

왜서인지 박정승은 속이 께름하였다. 혹시 국왕이 최정승을 왕위계승자로 점지한건 아닐가? 십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국왕은 령토분쟁과 정복전쟁에 분투하던 젊은 시절에는 무를 중시하며 무인을 총애하였지만 말년에는 무인보다 문인을 더 중히 썼다.

《령토는 칼로 넓히지만 정사는 붓대로 하느니라.》

무인들이 문인들을 질투하여 칼자루에 손을 가져갈 때마다 국왕은 이런 말로 무인들을 눌러놓군 하였다.

국왕은 병석에 누운 후로 박정승에게는 군사일만 맡기고 이여의 정사는 거의 모두 최정승에게 위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최정승은 학식도 많았지만 천성적으로 교활하여 임금의 비위를 잘 발라맞추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박정승 자기는 피흘려 쌓은 공로덕에 국왕의 신임을 얻었다면 최정승은 아첨으로 그이상의 신임을 쟁취하였다.

불안하였다. 무거운 걱정으로 찌뿌둥한 가슴속이 통 개이질 않았고 최정승에게로 신경이 씌여질수록 국왕이 괘씸하기만 하였다. 확실히 국왕은 사람을 잘못 봐, 공신과 충신들을 제껴놓고 아첨쟁이들만 좋아했거던. 박정승은 자기가 국왕을 배신하고 신성한 왕위를 넘겨보게 된것도 다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한 국왕의 잘못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안하였다.

박정승은 자기를 충신이라고 자부하였다. 최정승은 책에서 따로 외운 글로 국왕을 현혹시키고 갖은 아첨으로 총애를 얻었지만 자기는 목숨으로 총애를 쟁취하지 않았는가. 그의 눈앞으로는 국왕의 첫 신임을 받던 때의 일이 감회깊게 흘러갔다.

어느해인가 국왕이 백마국에 다녀온적 있었다. 겉으로는 백마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지만 내심은 백마국의 형편을 내탐하기 위해서였다. 백마국황제는 땅이 넓고 나라가 큰것을 턱대고 손아래벌인 송도국을 삼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있었다.

당시 궁중시위무사였던 박정승도 국왕을 따라 백마국으로 갔다.

백마국황제는 생일연회가 끝난 다음날 두 나라 무사들간의 무술경기를 조직하였다. 대국인 자기 나라의 실력을 과시하여 야심발발한 송도국의 예기를 꺾어놓자는것이였다. 송도국왕은 백마국황제의 속심을 모르지 않았지만 주인의 청이라 손님으로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붕- 붕- 둥둥둥-

길게 울리는 나팔소리와 요란한 북소리속에 두 나라 무사들이 시합장에 나섰다. 활쏘기에 각각 10명의 무사가 선출되고 창겨루기에도 각각 10명의 무사가 선정되였다. 그는 창겨루기에 나가게 되였다.

먼저 활쏘기시합이 시작되였다.

《오늘의 시합은 이름난 무사들의 겨루기이니 목표를 백보가 아니라 3백보밖에다 세워라.》

시합을 주관하는 백마국정승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송도국무사들은 대번에 얼굴빛이 흐려졌다. 3백보이상의 거리에 목표를 세워놓고 하는 활쏘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재간겨루기가 아니라 활의 위력을 겨루는것이였다. 백마국의 속심은 불보듯 뻔하였다. 수공업이 발전하고 쟁인바치들의 기술이 뛰여난 백마국은 위력이 센 강궁을 가지고있었다. 백마국의 강궁은 이웃나라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만큼 소문난 활이였다. 허나 송도국에는 백마국의 강궁만큼 센 활이 없었다.

활쏘기시합은 시작하자마자 승부가 결정되였다. 백마국무사들의 강궁에서 날아간 화살은 어김없이 목표에 들어맞았지만 송도국무사들이 날린 화살은 목표근방에 간신히 날아갔다.

커다란 차일아래 앉아 궁녀들이 공작새깃부채로 슬슬 부쳐주는 바람을 맞으며 시합을 바라보는 백마국황제의 얼굴에는 흡족한 웃음이 피여올랐고 옆에 앉은 송도국왕은 수치와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였다.

《다음은 창겨루기 시합이다.》

백마국정승의 령에 따라 량편 무사들은 각각 좌우에 진을 치고 진앞에 세워놓은 나무울타리에 자기의 방패를 내걸었다. 창겨루기시합은 첫 무사가 나와 상대편 진에 걸려있는 방패들중 한 방패를 창으로 건드리면 그 방패의 임자가 시합을 건 무사와 꼭같은 창을 가지고나와서 겨루기를 하는 방법으로 하였다.

백마국에서 먼저 첫 무사가 나왔다. 구척장신에 얼굴이 검고 두툼한 입술과 턱주위에 밤송이처럼 총이 센 수염이 한벌 뒤덮여 보기만해도 위엄과 두려움을 자아냈다. 백마국무사는 놀랍게도 흰색, 밤색, 검은색, 회색의 털빛이 서로 다른 4필의 말을 나란히 끌고 시합장 한복판으로 나섰다.

《무슨 창으로 겨루겠는가?》

《나무창으로 겨루겠나이다.》

백마국무사는 옆에서 넘겨주는 나무창을 받아들고 말을 곧추 달려 송도국 진앞에 걸려있는 방패중 제일 첫번째 방패를 창끝으로 건드렸다.

방패임자인 송도국의 무사도 나무창을 쥐고 말우에 올랐다. 송도국에서는 창겨루기에서 손꼽히는 무사였다.

두 무사는 자기 진앞까지 물러갔다가 신호에 따라 나무창을 꼬나들고 상대방을 향해 말을 때려몰았다. 상대방이 가까와오자 송도국무사는 고함을 지르며 창을 힘껏 내질렀다. 순간 백마국무사는 몸을 훌쩍 날리며 옆말로 옮겨앉았다. 송도국무사가 말고삐를 잡아채며 재차 중심을 잡고 다시 창을 휘둘렀으나 백마국무사는 이번에도 몸을 날려 다른 말로 옮겨탔다. 백마국무사의 뛰여난 기마술에 구경군들이 혀를 차며 감탄했다.

백마국무사는 말우에 앉아 옆말들의 고삐를 당겨 자기의 말들이 송도국무사의 말을 에워싸게 하였다. 네필의 말들에 둘러싸인 송도국무사의 말은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백마국무사는 연방 말을 바꾸어타며 창끝으로 허둥대는 송도국무사의 빈틈을 기습하였다. 백마국무사는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놀듯 송도국무사를 희롱하였고 송도국무사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끝을 피하느라 쩔쩔매였다. 백마국무사는 비웃음을 띄고 한창 장난질을 하다가 몽둥이로 후려갈기듯 창자루로 송도국무사의 잔등을 힘껏 내리쳤다. 한순간 비칠거리던 송도국무사는 강한 타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이겼다! 우리 백마국이 이겼다!》

백마국의 구경군들이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환호소리에 기고만장한 백마국무사는 다시 송도국 진으로 가서 두번째 방패를 건드렸다. 시합규정에 따라 한 무사가 두번까지는 겨루기를 할수 있었다.

송도국에서 두번째 무사가 출전하였으나 그의 운명도 첫번째 무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마가 깨여져 피를 쏟으며 땅에 코를 박은것이다.

《또 이겼다!》

백마국무사는 환호에 답례하며 의기양양해서 진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송도국에서 백마국에 도전을 걸 차례였다. 그러나 첫 순서로 나가게 되여있는 무사는 기가 질려 일어설념을 못했고 다른 무사들도 서로 눈치만 봤다. 송도국국왕의 얼굴색은 무사들의 얼굴색보다 더 컴컴하였다.

먹장구름이 드리운 국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정승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천성적으로 담이 큰 그는 겁을 먹은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담력을 시위하여 국왕의 눈에 들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말에 올라 시합장 한복판으로 나서며 재빨리 생각을 굴리였다. 시합도 진짜싸움처럼 담력으로 이겨야 한다. 재주는 절대 담력을 이기지 못한다.

《무슨 창으로 하겠는가?》

《쇠창으로 하겠소이다.》

그의 대답에 백마국정승은 흠칫 놀랐다. 친선시합에서는 누구나 쇠창을 쓰기 저어하는게 관례였다.

《뭉툭한 창으로 하겠는가, 뾰족한 창으로 하겠는가?》

《뾰족한 창으로 하겠나이다.》

순간 장내가 술렁이며 비명과 감탄이 터져나왔다. 뾰족한 창을 택한다는것은 결국 목숨을 걸겠다는것이다.

그는 섬겨주는 쇠창을 받아들고 백마국 진을 향해 말을 달리였다. 그러면서도 국왕에게 눈길을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국왕은 긴장과 기대가 한껏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국왕의 간절한 눈길이 자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이 그의 온몸을 달아오르게 하였다. 그는 상대편 진지에 가서 10개의 방패를 모두 건드렸다. 다시금 장내에 감탄이 터져나왔다.

모든것이 그의 예견대로 되였다. 단번에 10명에게 도전을 걸자 백마국무사들은 하나같이 긴장해서 재주를 변변히 발휘하지 못했고 처음에 나왔던 백마국의 첫째가는 무사도 저희편 무사들의 말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복새통이라 뛰여난 기마술을 변변히 발휘할수 없었다. 한명, 한명, 또 한명… 백마국무사들이 차례로 모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창겨루기시합은 송도국의 승리로 끝났고 국왕의 얼굴에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과 휘황한 출세를 담보해주는 기쁨의 꽃이 활짝 피여났다…

그 시절을 회고하니 절로 감개무량해지고 그럴수록 최정승에 대한 증오가 갑절 더해진다.

박정승은 한옆에서 코를 골며 쿨쿨 자는 문정승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문정승은 아무 야심도 없으니 셈평좋게 자지만 그는 등이 달아 잠을 이룰수 없었다. 문정승은 남쪽변경에 가있는 최정승이 국왕의 별세소식을 받고 궁성까지 오자면 이틀후에야 당도할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심복들을 통해 최정승이 지금 남쪽변경이 아니라 동쪽의 해청도에 가있다는걸 알고있었던것이다. 최정승은 왕궁에 줄을 가지고있으니 파발이 가닿기 전에 심복들한테서 먼저 소식을 받고 떠날것이다. 그러니 틀림없이 새벽녘이나 오전중에는 당도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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