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4


왕궁안에 들어서자 당직을 서던 내시가 그를 대궐의 제일 바깥채인 외전으로 인도하였다.

박정승은 대궐문앞에 서서 주저하는 안사인과 홍무관에게 따라오라고 눈짓을 하였다. 여느때 같으면 부하들을 데리고 들어갈수 없는 왕궁이였지만 오늘은 막아나서는 내시도, 궁중시위무사도 없었다.

긴 회랑을 따라 외전으로 가는 동안 황황히 오가는 내시와 궁녀들의 모습이 눈에 띄웠다. 그들의 얼굴마다에 비애의 당황함이 어려있는걸 보니 국왕이 승하한게 분명하였다. 하늘이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는구나. 마음속의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위엄있게 외전으로 들어서던 그는 가뜩이나 큰 종발눈이 아예 왕사발만 해졌다. 문정승이 벌써 와있었던것이다. 저 키다리놈이 어떻게? 역바리같은 최정승이 와있어도 이렇게까지는 놀라지 않았을것이다.

《아! 상감마마께서 별세하시다니… 망극하오이다.》

문정승은 외전의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앉아 침전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목소리는 자못 침통하게 갈리였으나 눈물은 한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문대감!》

박정승은 애써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문정승을 찾았다. 그제서야 그를 본 문정승은 흐느껴울기라도 하는것처럼 몸을 더 세차게 떨었다.

《아, 망극하오이다.》

박정승도 문정승곁에 무릎을 꿇고앉았다.

《상감마마,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도 있나이까.》

그들은 겨끔내기로 바닥을 두드리며 곡을 하였다.

얼마후 박정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정승도 일어섰다.

《문대감은 어떻게 알고 오셨수?》

그는 처음부터 품고있었던 의문을 넌지시 던지였다.

《난 운봉산성지에서 새 황금룡상이 다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받고 너무 기뻐 한달음에 대궐로 달려왔나이다. 대궐안에 까닭없이 일어난 불로 룡상이 타버린 그날부터 전하의 병세가 더 위독해지시지 않았소이까. 그래서 이 희소식을 알려드리면 상감마마께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실것 같아 한밤중에 달려왔는데… 상감마마께서 가셨으니 이젠 누가 그 룡상에 앉아 이 나라를 다스린단 말이요.》

문정승은 앞길이 막막하다는듯 자기 키처럼 삐쭉한 턱을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 그렇겠지. 그제서야 박정승은 가슴속에 드리웠던 불안과 위구가 바람맞은 연기처럼 훌훌 날아가버렸다. 자기보다 먼저 왕궁에 와있는 문정승을 보는 첫순간 이 키다리가 어리숙한체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과 위구가 찾아들었다.

지금껏 야심발발한 최정승은 경쟁의 적수로 생각했어도 문정승은 적수로 생각지 않은 그였다. 최정승은 권모술수에 능하니 자기처럼 궁중에 비밀히 박아넣은 심복을 가지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정승한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보다 한발 앞선 문정승을 보게 되자 혹시 이놈도 거적문에 돌쩌귀 달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하고 놀랐던것이다.

《상감마마께서 유서라도 남기셨는지 모르겠소? 유서를 안 남기셨으면 뒤일을 처리하기가 복잡할텐데…》

박정승은 유서에 관심을 가지는 자기의 속심을 가리우려고 국사에 빙자하여 에둘러 물었다. 문정승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글쎄요. 도승지가 침전에 있다니 그가 나오면 자연 알게 되리다.》

그러니 문정승도 아직은 유서에 대해 모르고있다. 빨리 유서부터 손에 넣어야겠는데 이년은 내 말을 귀양보냈나, 왜 얼굴도 내밀지않아? 박정승은 속으로 조상궁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이때 조상궁이 내전과 잇닿아있는 문을 통해 외전으로 들어왔다.

박정승은 문정승이 눈치 채지 못하게 뒤로 한발 물러서며 그의 어깨너머로 조상궁과 눈을 맞추었다. 그 눈길에 조상궁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젓는다.

이건 또 뭐야? 유서를 못 남겼다는거야 아니면 유서를 손에 못 넣었다는거야. 정확히 물어보고싶으나 곁에 문정승이 있는지라 그럴수도 없다. 그렇다고 한시가 급한데 그냥 이러고만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궁, 저희들을 상감마마의 령전으로 안내해주소이다.》

박정승은 조상궁을 향해 전에없이 깍듯이 례를 차렸다.

《아직은 들어가실 형편이 못되오이다.》

《그럼 침전에 들어가서 도승지에게 우리가 기다린다고 알려주사이다.》

말을 끝내며 이번 역시 문정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어서 들어가라고 종발눈을 끔뻑이며 고개짓을 했다.

《알겠소이다.》

조상궁은 즉시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조상궁이 나가자 문정승은 그의 손을 잡으며 다시 넉두리를 시작했다.

《박대감, 난 정말 슬픔을 이겨내기 힘드오이다.》

《어찌 문대감만 그러겠소. 나도 같은 심정이요.》

문정승은 그의 말에 도리머리질을 하였다.

《아니오이다. 아니오이다. 내 심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오이다. 상감마마야 우리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이시였는데… 아, 가문의 혈통을 빛내주시던 상감마마께서 가시다니… 이 망극지통을 어이 달랜단 말이웨까.》

잘 논다. 또 그 잘난 족보타령이로군. 저러니 항간에서 《족보정승》이라고 부르지. 박정승은 쓰겁게 입을 다시며 눈살을 쪼프렸다.

문정승이 하루아침에 정승감투를 뒤집어쓸수 있은것은 순수 족보덕이였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송도국에는 정승이 박정승과 최정승 두명뿐이였다. 박정승의 검은 손길이 닿아 왕실성원들과 공주들이 련이어 죽어나고 나중에는 왕위를 이을 세자마저 불귀객이 되자 국왕은 우울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최정승이 어전회의에서 국왕에게 뜻밖의 말을 아뢰였다.

《상감마마, 지금 례부의 한 하급관료가 자기를 상감마마의 혈통이라고 하늘 무서운줄 모르는 망발을 줴치고있다 하나이다. 지엄한 왕실을 모독한 이놈을 형부에서 크게 다스릴가 하나이다.》

《뭐라구? 과인과 한혈통이라구?》

대노할줄 알았던 국왕이 뜻밖에도 호기심과 흥미를 나타냈다.

《그놈을 불러들여라. 과인이 직접 국문을 하겠다.》

다음날 대전에서 국왕의 참석하에 국문이 진행되였다. 문씨성을 가진 키가 꺽두룩한 하급관료가 어전앞에 끌려나왔다. 그 관료가 바로 지금의 문정승이였다.

《네놈이 과인과 한혈통이라는데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나이다. 신은 상감마마의 피줄이나이다.》

키다리 문씨는 어마어마한 대전안의 분위기에 기가 질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한번 설명해보아라.》

국왕의 말이 너무 뜻밖이여서 잘 믿어지지 않는지 키다리는 슬며시 머리를 쳐들었다. 허나 감히 룡상은 바라보지 못하고 도움을 청하는 안타까운 눈길로 좌우의 관료들을 바라보았다. 관료들의 얼굴에 비낀 웃음과 국왕의 어조로 보아 죽을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인차 두툼한 족보책을 무려 두개씩이나 꺼내놓았다. 처음에는 관청에 온 촌닭처럼 얼쳐서 혀가 굳어져 말이 떡떡 끊겼으나 차츰 긴장이 풀리며 흥타령을 하듯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송도국의 15대왕이였던 문종왕은 소신의 14대 할아버지의 조카와 이쪽 줄기로 쭉 이어져서 6촌형제간이 되고… 이 해보왕은 우리 고조할아버지의 외삼촌의 증조할아버지와 4촌형제간으로서 력대 왕족에 속하옵고…》

거의 한식경이나 계속되는 족보설명에 관료들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연방 터져나오는 고달픈 하품을 가까스로 참았지만 국왕은 인내성있게 마지막까지 귀담아들었다.

《그러니 촌수로 따지면 어떻게 되느냐?》

마침내 빨래줄처럼 긴 설명이 끝나자 국왕이 물었다.

《문종왕은 소신과 이십팔촌이 돼옵고 해보왕은 삼십사촌이 돼옵니다.》

순간 관료들은 키득거리며 국왕의 태도를 곁눈질하였다. 허나 국왕의 얼굴에는 웃음기란 그림자조차 없었다. 진지하면서도 심사숙고하는 사색만이 흘렀다.

누구라없이 흠칫하며 긴장해서 자라목을 하였다. 임금의 비위를 거슬리면 아무리 자라목을 해도 목건사를 할수 없다.

마침내 국왕의 입이 서서히 열리였다.

《경이 과인과 한혈통임에 분명하도다.》

《놈》자가 대번에 《경》자로 바뀌고 며칠후에는 정승으로 임명한다는 어지가 내렸다.

국왕은 문정승을 보기만 하면 《과인의 친족정승》이라고 부르며 각별히 총애하였다. 그때마다 박정승은 막 최정승의 족제비빰을 철썩 후려갈기고싶었다. 생쥐같은 최정승이 왕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보이려고 역빠른 꾀로 아첨을 하려다가 국왕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정승이 한명 더 생기는 결과를 가져와서이다. 필경 국왕은 세자와 공주, 왕족들을 잃은 슬픔을 문정승에게서 잊고 또 자기 박정승과 최정승을 경계하느라고 먼 뼈다귀인 문씨를 정승자리에 앉힌게 분명하였다.

《아! 우리 가문의 자랑찬 혈통이 끊어져선 안되겠는데…》

계속되는 문정승의 넉두리에 박정승은 다시금 바싹 긴장되였다. 이 족보정승이 계속 족보타령만 하는걸 보니 정말 딴 생각을 하는게 아니야?

잠시후 도승지가 외전에 들어섰다. 승정원의 기본사명이 어지를 처리하는 일이니 유서는 필경 승정원의 책임자인 도승지가 받았을게 분명하였다.

박정승은 만일을 생각하여 커다란 종발눈에 힘을 주며 도승지에게 물었다.

《도승지, 상감마마께서 유서를 남기셨는고?》

도승지는 그의 눈길에 위압되여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상감마마께서는 유서를 남기지 못하셨나이다.》

행여나 했던 가슴속의 기대가 물먹은 담벽처럼 와르르 허물어졌으나 인차 그만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의 유서는 곧 법이라 왕위계승자로 자기가 지정되여있으면 별일 없지만 다른 그 누군가의 이름으로 되여있으면 야단도 큰 야단이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유서가 없는 편이 나았다.

《아무 유언도 남기신것이 없는고?》

이번에는 문정승이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옵선 세 정승중에 왕권을 넘겨 줄만 한 충신이 과연 어느 정승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시며 새 임금을 점지할 무슨 말씀인가를 부원군님한테 남기셨나이다.》

《그럼 어서 부원군님을 만나야겠다.》

박정승은 등이 달아 헤덤볐다.

《부원군님께서는 최대감이 온 다음에 세 대감님을 함께 만나시겠다고 했나이다.》

《뭐라구? 최대감이 온 다음에 만나겠다구?》

그는 대뜸 눈살이 꼿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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