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제 2 장


9. 쓰라린 대결


얼마후 두사람은 그곳을 떠났다.

《헌즉 시미즈의 태도가 아리숭해진게 이찌가와인지 하는 사람과 련관이 있다는 소리가 아니웨까.》

길을 좀 걷고났을 때 우달근이 혼자말처럼 외우는 소리였다. 경식은 생각에 잠겨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가 봅니다. 아무래도 시미즈한테 이찌가와의 입김이 미친것 같습니다.》

경식의 대답에 달근은 얼굴을 흐렸다.

《으음- 헌데 그 이찌가와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경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향악보를 찾아 헤매는 나날에 묘한 모퉁이마다에서 불쑥불쑥 튀여나오군 하는 이름이였지만 경식은 여직껏 그 인물에 대해 얼굴조차 모르고있지 않는가. 자기자신에게 화가 치미는것을 견딜수 없어 불한숨만 토하는데 달근의 우선우선한 목소리가 격려하듯 들려왔다.

《걱정하실거 없수다. 내 인제 가서 알만 한 연줄을 다 밟아서라두 그 이찌가와라는 사람의 정체를 꼭 발가내구야말겠수다. 시미즈한테두 단단히 오금을 박아놓구요.》

그 말을 들으니 잠시나마 마음이 개운해졌다. 이 시각 리경식에게는 달근의 그런 말 한마디도 천금맞잡이였다. 얼마쯤 걸어가던 경식은 부본부에 들렸다가겠다고 말하고 우달근과 헤여졌다.

또다시 비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풀어놓은것처럼 뿌연 하늘이 육중한 덩어리마냥 머리우를 지겹게 내려누르고있었다. 철버덕거리며 오가는 행인들, 귀따갑게 찌릉대는 자전거들, 광고용프랑카드를 치마인양 두른채 비말을 튕기며 달려가는 차량들… 포장길에 고인 탁한 물우에서 비오는 거리의 어수선산란한 정경이 뒤집힌 모습으로 비쳐온다.

경식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리에 받은 타박의 후유증이 아직 가셔지지 않아서인지 벌써부터 몸이 무거워났다. 하지만 피로에 지친 속에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향악보에 대한 생각이 떠날줄을 몰랐다.

번거로운 상념은 다시금 이찌가와에게로 모아졌다. 니시다에게 찾아가 향악보의 행처를 물었다는 이찌가와, 나까야마(시미즈)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엉뚱한 헛말로 가루베의 이목을 경식에게 쏠리게 했던 이찌가와. 그런데 시미즈로부터 향악보를 거의나 넘겨받게 되였던 이 대목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이찌가와가 또다시 찬물을 끼얹고 나선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호두속과 같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이찌가와! 이찌가와! 과연 어떤자일가?)

이찌가와에 대해 경식이 아는것이란 《동양음악을 연구하는 아마츄어전문가》라는 정도가 전부라면 전부였다. 거기에 비하면 가루베의 말을 상기해봐도 이찌가와는 이쪽을 손금보듯 꿰뚫고있는것이 분명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찌가와가 오래전부터 어둠속에 숨어 자기의 일거일동을 주시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때늦은 생각이 경식의 뇌리를 쳤다.

가슴이 써늘해졌다. 어째서 지금껏 가루베를 경계하면서도 이찌가와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서는 응당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던가? 이찌가와에게 향악보를 구입할 능력은 없는것으로 묘사하던 가루베의 소리를 저도 모르게 믿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풋낯도 모르는자이니 이쪽에서 하는 일에 대해 무얼 더 알수 있으랴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방심해왔던것은 아닌지?… 혹 이찌가와의 그 모든 행동을 가루베가 뒤에서 조종하고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식은 자신의 실책에 혀라도 깨물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후회나 하고있을 경황이 아니였다. 총련조직과 상론하여 빨리 일을 바로잡아야 했다. 시미즈에게 뻗쳐온 이찌가와의 촉수를 차단하고 한시바삐 민족의 재보를 간상배들의 손에서 되찾아야 했다.

촉급해오는 마음을 그러안고 걷던 경식은 불현듯 자기를 찾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길옆에 있는 어떤 료리점에서 접대부 하나가 쪼르르 달려나와 그에게 이르는것이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리선생님이 아니신지요?》

경식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접대부는 상글거리며 료리점을 가리켜보였다.

《안에서 손님 한분이 기다리고계십니다.》

《나를?》

경식은 의아쩍은 눈길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누굴가? 대뜸 이찌가와거나 가루베가 아닐가 하는 예감이 뇌리를 찌르고들었다. 저들이 아무리 수단을 부린다 해도 우달근과 같은 동포들이 시미즈를 든든히 압박하고있는 조건에서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지난밤의 사건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었다. 일단 저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간것만큼 어차피 한번쯤은 자기와 직접 맞서려들것이 십분 가능한 일이였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잘된셈이였다. 경식은 관자노리의 혈관이 높뛰는것을 느끼며 접대부를 따라 료리점안으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을 놓으며 어느 한 별실앞에 이른 접대부가 나부시 꿇어앉더니 《손님 모셔왔습니다.》 하고 알리면서 소리없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경식은 그러쥔 주먹처럼 긴장해서 방안에 들어섰다. 다음순간 그는 못박힌듯 그 자리에 굳어져버리고말았다.

두손으로 차잔을 움켜쥔채 식탁앞에 돌미륵마냥 앉아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박상열이 아닌가. 리경식의 입에서 놀라움에 찬 소리가 튀여나왔다.

《아니, 자네가 어찌된건가?》

어안이 벙벙한 속에서도 뭉클 반가운 생각부터 솟구쳤다. 만난지 반년이 넘었지만 이따금 마음속에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며 떠오르군 하던 상열이였다. 언제 봐도 열기가 팔팔 끓던 오달진 그의 모습이 그리웠고 총기어린 작은 눈을 깜빡이며 쉴새없이 쏟아놓던 그의 달변이 그리웠다. 어찌 그뿐이랴. 민족을 부둥켜안고 울고웃으며 고서더미속에 파묻혀 젊음을 태워가는 그의 의기와 뚝심이 문득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이 시각 뜻하지 않게 여기서 박상열을 만나게 될줄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상열이 어설프게 웃으며 다가온다. 경식은 칠칠야밤 심심산속에서 벗을 만난것만 같은 심정이 되여 상열의 손을 와락 다그어잡았다.

《대체 웬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나타났나? 참, 요전날 날 만나러 협회에 찾아왔댔다면서. 하하하…》

여느때없이 연신 벙글거리며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 경식에게 박상열은 어딘가 당황해하면서도 애써 반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됐네. 창밖을 내다보느라니 자네가 눈에 뜨이더군. 아무튼 만나니 반갑구만.》

대모테안경을 추스르며 이렇게 얼버무리고난 상열은 서둘러 경식을 식탁으로 이끌었다. 두사람은 식탁앞에 마주앉았다. 잠시 경식의 수척해진 모습을 훑어보던 상열은 이윽해서야 눈길을 떨구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던게구만.》

경식이 대답대신 빙그레 웃기만 하는데 이미 주문을 했었는지 접대부가 들어와 안주가 담긴 접시들을 식탁우에 차려놓았다. 상열이 경식에게 물었다.

《날씨도 으쓸한데 우리 배갈이나 하는게 어떤가?》

아닌게 아니라 이런 때 박상열을 마주하고보니 이전처럼 그와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싶은 충동이 리경식의 마음속에서 불끈 솟구쳐올랐다. 경식이 선선히 동의하자 상열은 짐짓 기세를 올리며 접대부에게 배갈을 내오라고 일렀다. 그러는 그에게 경식이 궁금한 물음을 던졌다.

《헌데 오사까엔 온지 오랜가?》

상열은 어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며칠 됐네.》

믿음어린 경식의 눈길이 친구를 더듬었다. 문득 박상열이 향악보와 관련해서 급히 만날 일이 있다고 했다던 히사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관절 무슨 일일가? 무슨 급한 일이기에 여기 오사까에까지 찾아왔을가? 혹시 가루베나 이찌가와의 움직임과 관계되는 소식은 아닐가? 수수께끼의 열쇠를 박상열이 가져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온몸이 긴장되여왔다.

어떻든 고마운 친구였다. 겨레의 유산을 되찾는 일이라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뛰여다니는 상열의 모습에 약해졌던 마음이 다 강해지는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찾아 여러날째 헤맸을 친구의 고생을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이 뒤따르는것도 어쩔수가 없었다.

접대부가 배갈을 가져왔다. 상열은 경식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가득 부으며 말했다.

《자, 골치 아픈 일들은 일단 접어두고 지금은 나와 마시기나 하세. 살다가 보면 가끔 술힘으로 괴로움을 이겨내야 할 그런 때도 있지 않나. 허허…》

진정이 담겨진 그의 말을 들으니 훈훈한 온기가 가슴속에 미쳐왔다. 경식이 그의 손에서 술병을 넘겨받으려고 하는데 상열이 거절했다.

《아니, 내 술은 내가 부어 마시겠네. 왜 그런지 오늘은 자네가 부어주는 술을 받을 용기가 나지 않는구만.》

뜻모를 소리로 웅얼거리는 박상열의 얼굴에 자신을 비웃는듯 한 회의적인 미소가 떠돌았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이전같지 않은 모습이다. 목소리도 여느때의 그 챙챙하던 어조가 아니였고 금방 튀여오른 고무공처럼 압축된 힘이 넘쳐나던 몸도 왜서인지 지금은 김빠진 공마냥 후줄근해있었다.

(이 친구 오늘은 웬 일인가?)

경식은 별스럽게 의기소침해있는 상열의 모습을 의아스레 살펴보다가 그를 따라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한모금을 들이키는 순간 목줄기를 태우는듯 한 독한 술기운이 서서히 사지의 끝까지 퍼져나갔다. 워낙 배갈인데다가 좀전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했던탓인지 인츰 취기가 느껴졌다. 밖에서는 비방울들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있었다.

《향악보는 아직 찾지 못했나?》

한동안이 지난 뒤 상열이 머뭇거리며 물어오는 말이였다. 경식은 기다렸던듯 그간의 사연들을 상열에게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니시다와 가루베를 만나던 일이며 오사까에 와서 시미즈와 상대하던 일들을 거쳐 이찌가와에 대한 소리가 나왔을 때 경식의 어조는 은연중 달아올랐다.

《정말 모를 일이야. 생면부지의 그 사람이 어떻게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알고있는걸가? 실지로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처신이 바르겠는데 뒤골목에서 야꾸자들이나 부추기는걸 보면 분명 뒤가 떳떳치 못한자같네. 어떤가? 자넨 이찌가와라는 이름을 들은적이 있나?》

박상열은 들고있는 술잔을 대번에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담배 한대를 꺼내물더니 성냥을 득- 그었다. 불이 잘 달리지 않았다. 탁탁 성냥을 그어대는 그의 손끝에 짜증기가 묻어났다. 성냥개비를 몇개나 분지르고서야 상열은 겨우 담배불을 붙일수가 있었다. 아마도 경식의 말에 어지간히 흥분한것 같았다.

연거퍼 담배만 들이빨던 상열의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튀여나왔다.

《자네 지금 그 이찌가와라는 작자가 두드려패고싶도록 증오스럽겠구만.》

담배연기속에 휩싸인 그의 동그란 얼굴은 퍼그나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경식은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찌가와만 아니였더라면 모름지기 향악보를 손에 넣고도 남았을것이였다. 모든것이 그 유령같은 이찌가와때문이였다. 대관절 어떤자이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도 여태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걸가?

경식이 식도를 따라 번져가는 열기를 묵새기며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상열은 비여있는 술잔에 다시금 술을 쏟아부었다. 또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굳어져버린다. 다음 순간 상열은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식탁우에 내려놓으며 누구에겐지 모를 화를 벌컥 터뜨렸다.

《에익, 졸렬한 같으니!》

해쓱해진 그의 입술이 열병환자마냥 떨리고있었다. 경식은 영문을 알수가 없어 상열의 별스러운 거동을 어리둥절해서 지켜보았다.

상열은 머리를 직수그린채 화끈한 입김만 연방 내뿜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고개를 버쩍 쳐들며 넉두리같은 소리를 쏟아놓는것이였다.

《제길할, 뭘 더 숨기겠나. 자네 이찌가와를 보겠다는거지. 그러이, 지금 자네앞에 앉아있는 놈팽이가 바로 이찌가와네. 자네가 서슬이 퍼래서 찾고있는 그 이찌가와란 말일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경식이 망연한 눈길로 상열을 바라보는데 열에 뜬 그의 목소리가 거듭하여 귀전에 후려쳐왔다.

《내 말을 못 들었나? 야꾸자들까지 부추겨서 자네를 욕보인 이찌가와가 바로 나란 말이야!》

《?》

난데없이 머리에 물벼락을 맞은것만 같았다. 얼굴의 피가 한시에 빠져버린듯 창백하게 질려있던 경식은 그만에야 허거프게 웃고말았다.

《허허… 이보게, 난 지금 롱담을 나눌 경황이 없네.》

상열은 경식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무룩한 미소를 지었다. 하건만 그 미소는 알지 못할 내심의 아픔으로 인해서인지 이내 이지러지고말았다. 그는 맥없이 중얼댔다.

《하기야 쉽게 믿어지지 않을테지. 그렇지만… 내 말은 진실이네.》

그 어떤 어두운 사연이 방금 쏟아져내릴 소낙구름처럼 엉켜있는 상열의 흐릿한 눈을 알아보는 순간 경식은 저도 모르게 취기가 사라지는것을 느꼈다. 금시 방안이 써늘하게 얼어들었다. 비바람에 창문이 가늘게 삐걱거리는데 얼마후 상열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다 말하지. 자네한테 모든걸 털어놓기로 결심했으니까. 자네에게서 〈조선향악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난 뒤 난 어떻게 해서든지 자넬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네. 민족문화재에 쏟아붓는 자네의 진정과 겨레를 위해 정성을 바쳐가는 자네의 의로움에 나 역시 열백번 공감을 느꼈거던. 난 향악보의 행처를 찾기 위해 내나름으로 사방에 수소문을 해보았네. 일본전국은 물론이고 서울에까지 줄을 놓았더랬지. 그러던중 서울의 문교부에 있는 친구한테서 회답편지가 날아왔더구만. 해방전 리왕직아악부에서 향악관계자료를 조사하던 니시다라는 사람을 찾아보라는 권고였네. 그 소식을 읽는 순간 난 막 환성이라도 올리고싶은 심정이였네. 희소식을 받고 기뻐할 자네의 모습이 눈앞에 방불하더란 말일세. 하지만 그런 감정이 일순간에 불과할줄이야. …

편지를 계속 읽어내려가느라니 차츰 마음이 무거워졌네. 그 친구는 뒤이어 쓰기를 그처럼 귀중한 민족의 유산을 어떻게 이북에 넘겨줄수 있는가,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겠거든 향악보를 먼저 찾아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평생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할거라고 일장 열변을 토하지 않았겠나. 바다건너에서 서뿔리 가르치려드는 친구의 훈시가 비위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 편지는 들떠있던 나의 가슴을 무거운 돌처럼 지지눌렀네. 난 자기가 하려는 일을 두고 깊이 고민해보지 않을수 없었네.

이보게 친구, 난 자네가 지금껏 향악보를 찾기 위해 고심참담한 노력을 해왔다는걸 모르지 않네. 자네의 속되지 않은 뜻과 거짓없는 사람됨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고… 그러나 민족을 생각하는 자네의 마음이 아무리 진국이라 할지라도 종당에 자네가 향악보를 찾아가지고 가야 할 곳은 다름아닌 이북이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가 자네를 좋아하는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북의 체제와 리념까지 용납할만 한 용기는 나지 않더구만. 자네를 도와 향악보를 북에 보내는게 정녕 민족을 위한 옳은 일인가고 스스로 물어봤을 때 허… 난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고말았네. 그때 내 마음 한쪽에선 자네를 도와야 한다는 의리감이 세차게 꿈틀거렸지만 다른 한쪽에선 인정에 눈이 멀어 대의를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꾸짖음이 호되게 온몸을 채찍질하고있었네.

난 서울에서 온 편지를 곱씹어 읽어보며 번민을 거듭했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을 내렸네. 내가 직접 향악보를 찾아나서기로 말일세. 결국 니시다에 대한 소식을 자네에게 전해주려던 생각은 포기하고말았지. 일본땅에서 나보다 먼저 향악보를 찾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서도 내게 처음으로 이야기해준 자네에겐 참말 못할짓을 하는 심정이더구만.

제발 부탁인데 그 점만은 오해말라구. 난 결코 명성을 탐하거나 견물생심에서 그런 마음을 먹은게 아닐세. 단지 자네에게 원망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을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뿐이네. 물론 자네 역시 나름대로 민족을 위해 많은 애를 쓰고있다는걸 아네. 그렇지만 어쩌겠나. 자네나 나나 한피줄을 물려받은 동족이건만 선택한 정견과 제도는 엄연히 상극이 아닌가. 아무리 피가 통하는 친구지간일지라도 이데올로기가 다르면 결국엔 갈라설수밖에 없는 분단의 랭혹한 현실이 그때처럼 내 마음을 아프게 후벼파본적은 없었더랬네. 어쨌든 인간이 현실을 초월해서 살수야 없지 않나. 난 달리는 할수가 없었네.》

리경식의 입은 비통하게 꽉 다물려있었다. 그는 텅 빈 시선으로 컴컴하게 죽은 상열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듯 박상열의 모습이 멀고 낯설게 여겨졌다. 이 인간이 이렇듯 우매하고 협애한 소인이였던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스스로 자기를 《구다라징》이라고 부르며 왜놈들의 민족차별에 맞서 항거하던 도고한 그 자존심도 그리고 불의를 보면 화약처럼 분노를 터뜨리군 하던 불같은 그 정의감도 《반공》이라는 타성앞에서는 한갖 물거품에 불과한것이였단 말인가. …

얼음같이 차고 휑뎅그렁한 공허가 가슴속으로 허전하게 퍼져갔다. 경식은 쓰려오는 심정을 지그시 누르며 상열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난 곧 니시다의 행처를 탐문하기 시작했네. 얼마 안 있어 주소를 알아낸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이찌가와라는 가명으로 니시다를 만났더랬지. 후날에라도 자네와 얼굴뜨겁게 부딪치는게 제일로 두려웠으니까. 하건만 자네도 아다싶이 그에겐 향악보가 없더구만. 첫걸음부터 헛탕이였지. 그래도 다행히 실머리만은 끊어지지 않았네. 니시다에게서 향악보를 넘겨받은 인물이 나까야마라는 사실을 알아냈거던. 난 눈에 등불을 켜달고 나까야마를 찾아 돌아쳤네. 알만 한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부탁을 했구 행여 어디서 비슷한 소리라도 들려오면 만사를 제치고 직접 달려가보군 했네. 지어는 수천리 혹가이도에까지 찾아갔더랬지. 그렇게 극성을 부렸는데도 나까야마의 행방은 좀처럼 알길이 없더구만.

혹시나 그동안에 다른 소식은 없는가 해서 난 니시다를 다시 찾아갔었네. 그런데 니시다의 말이 내가 왔다간 뒤로 두사람이 또 향악보때문에 다녀갔다는게 아닌가. 한사람은 어느 대학 강사이고 또 한사람은 오구라라고 자기를 소개했다는것이였네. 난 자네가 왔었다는걸 알았네. 그때의 불안하던 심정이란 참… 향악보를 손에 넣기 전엔 절대로 자네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걸 난 조금도 의심치 않았네. 아라기의 별장에 다닐 때부터 자네의 끈질긴 성미를 너무도 잘 알고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자네뒤엔 조총련이라는 든든한 세력이 있지 않나. 십중팔구 나까야마를 자네가 먼저 찾아낼거라는 예감에 난 안절부절을 못했네.

그렇게 골을 썩이는데 어느날 내앞에 불쑥 대학 강사라는자가 나타나질 않았겠나. 내가 자기보다 한발 앞서 니시다를 만났다는걸 알고 찾아왔다는거였네. 소개를 들어보니 가루베라고 해방전 공주에서 백제고분들을 전문으로 도굴했다는 그자더구만. 자네도 상대해봤으니 잘 알테지만 정말 낯판대기에 철갑을 두른자였네. 어찌된건지 그자는 나뿐아니라 자네에 대해서랑 그리구 우리가 아라기의 장서를 정리한 사실까지도 이미 알고있더군. 그자가 찾아온 목적인즉 우리가 향악보의 행방을 어느 정도로 추적했는지 타진해보자는거였네. 가루베 같은자가 향악보를 손에 넣으려구 기승을 부리는 꼴을 보니 어떻게나 밸굽이 요동치던지… 그런 속에서도 위구심은 더욱 커졌네. 자네만 상대하기도 버거운데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날도적까지 덤벼드는 판국이 되였으니 왜 안 그러겠나.

생각다 못해 난 변통수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네. 난 가루베에게 실은 나도 향악보에 흥미가 동해서 리경식이란 사람을 얼마간 따라다녔는데 오늘 당신이 나선걸 보니 승부가 명백해졌다, 이후부턴 당신을 은밀히 도울테니 향악보를 입수하거들랑 선참으로 열람이나 할수 있게 해달라고 둘러쳤네. 처음에 그자는 내 말을 넙적 받아물려 하지 않더구만. 아마 내가 자네와 한통속이라고만 여겨왔던 모양이야. 무슨 수를 써서든 가루베의 이목을 따돌려야겠기에 난 그자에게 자네와는 거래과정에 우연히 알게 됐을뿐이라고 루루이 설명했지. 그제서야 그자는 구미가 동했던지 나한테 달라붙기 시작하더군. 난 가루베에게 자네의 형편을 알려주면서 자네가 나까야마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소문도 있으니 한시바삐 직접 만나서 흥정을 해보라고 부추겼네.

물론 자네가 그런자의 흥정에 말려들거라고 생각한건 결코 아닐세. 무엇보다 난 가루베를 통해서라도 자네가 나까야마에게 어느만큼 접근했는지 꼭 알고싶었네. 그런데다가 가루베를 내세워 자네와 그자가 서로 견제하게 하면 나로선 두사람의 주목에서 벗어나기가 쉽고 또 유리한 기회도 먼저 차지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던. 이를테면 두 경쟁자가 겨루는 틈에 어부지리를 얻자는 속셈이였다 할가. …

자넨 지금 쳐죽이고싶도록 내가 증오스러울테지.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가루베 같은자까지 꺼들이면서 자넬 따돌릴 생각을 할수 있었는지 나로서도 놀랍기만 하네. 터놓고 말해 그때 내 마음속에서 이여의 감정은 이미 뒤전에 밀려나있었네. 어떻게 하나 자네보다 먼저 향악보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민족의 귀중한 자산을 이북에 뺏겨서는 안된다는 그 한가지 승벽심만이 걷잡을수 없는 행동에로 날 떠밀었지. 그렇네, 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수없이 위안삼아 외우면서 날마다 자네와 보이지 않는 결투를 벌렸네. 그리고 그때마다 괴로운 심정으로 자네에게 용서를 빌었구.》

갑자기 창문에서 시퍼런 번개불이 날았다. 창유리에 뿌려진 비방울들이 서슬푸른 빛의 파편들인양 작렬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하늘을 뒤마는듯 한 우뢰소리가 구울러온다.

경식의 심장은 살에 맞은 새처럼 푸들거리고있었다. 욕지기마냥 치미는 쓰디쓴 배신감을 씻어버리고싶어 그는 힘겹게 술잔을 비웠다. 상열은 금시라도 폭발할듯싶은 경식의 모습을 불안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다가 마른침을 모아 삼키고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후 일은 내가 생각한대로 비슷하니 번져가더구만. 자네에게 면박을 당하고 온 뒤 가루베는 지독스런 앙심을 품고 달려들었네. 어찌나 기승스러운지 마치 향악보가 아니라 자기를 모욕한 조선사람한테 분풀이를 하는게 목적인것 같더라니까. 그자는 향악보를 찾느라 눈이 시뻘개서 싸돌아쳤네. 그러면서 날더런 후하게 사례할테니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구 살펴서 알려달라더구만. 자네에게서 향악보와 관련한 사소한 기미라도 포착되면 선손을 쓰겠다는 심산이였지. 물론 난 쾌히 응했네. 가루베의 경계밖에서 그자의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장악할수 있었으니까. 역시 제일 근심스러운건 자네였네. 난 나까야마의 행방을 내나름으로 계속 추적하면서 자넬 주시했네. 거래하고있던 동업자들까지 끌어들여서 말일세.

그러고있는데 얼마전에 한 동료한테서 소식이 날아오질 않았겠나. 급작스레 자네가 만사를 제쳐놓구 역전으로 뛰여갔다는거였네. 대뜸 나까야마의 행처를 알아냈을거라는 직감이 머리를 후려쳤네. 한발 뒤졌다는 생각에 눈앞이 새까매지더군. 앞뒤를 잴 사이가 없었네. 혹여나 실낱같은 단서라도 잡히지 않을가 해서 난 무작정 자네의 그 협회로 달려갔더랬지. 거기서 난 한 처녀를 만났네. 히사꼬라고 했던가. … 헌데 내가 자기소개를 하니 뜻밖에도 처녀가 반색을 하는게 아니겠나. 자네한테서 박상열이라는 친구얘길 들었다는것이였네. 그 순간의 심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꼭 못할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식은땀이 났지만 별수가 없었네. 난 처녀에게 향악보일로 자네와 급히 만날 일이 있어 왔다고 말했지. 거짓으로 대하기엔 낯이 뜨거울만치 순진한 처녀더군. 날 자네처럼 믿었던지 처녀는 선뜻 내게 모든걸 알려주었네. 처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난 나까야마가 시미즈로 성을 바꾸고 오사까에서 산다는것과 자네가 오사까로 달려갔다는걸 비로소 알게 됐네. 위기가 기회라더니 곤경속에서 그런 행운을 만날줄이야… 히사꼬라는 그 처녀에겐 언제건 꼭 사과할 생각이네만…》

상열은 말끝을 흐트러뜨리고말았다. 경식의 얼굴에 서려도는 쓰거운 환멸의 빛을 알아보았던것이다. 하기야 천진스러운 처녀를 기만하면서까지 벗을 유린한 위선에 누군들 혐오를 느끼지 않으랴. 얼마후 박상열은 처져내리는 어깨죽지를 애써 살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회를 나서자바람으로 난 오사까에 있는 동업자 한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네. 그는 나와 한고향내기인데다 워낙 거래관계가 깊어놔서 믿을만 한 친구였지. 더구나 몇달전 우리 집에 들렸다가 자네와 내가 고마무라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았던지라 자네의 얼굴도 알고있었거던. 난 그에게 자네가 오사까에 도착해서 누구를 만나는지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네. 그리고는 부리나케 자네의 뒤를 쫓아갔지. 물론 가루베한테 그 모든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건 더 말할 필요가 없구…

오사까로 가는 도중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하더구만. 혹 한발 앞서간 자네가 향악보를 먼저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는 위구때문이였네. 그러나 난 길고짧은건 대봐야 한다고 자신을 격려했네. 가루베의 말마따나 향악보의 가치로 봐서 쉽사리 흥정이 이루어지긴 힘들거라고 믿고있었으니까.

난 오사까에 당도하자마자 고향친구부터 만났네. 그 친구가 무던히 애를 썼더랬지. 그를 통해 난 자네가 몇시간전에 〈다마무시주점〉이라는 술집에 들렸댔다는것과 술집주인의 성이 시미즈라는걸 알았네. 여태껏 찾던 나까야마가 바로 〈다마무시주점〉의 그 시미즈라는걸 난 조금도 의심치 않았네. 드디여 목표를 확정했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리더구만. 난 초조한 마음을 부여안구 시미즈를 찾아갔네. 내가 〈다마무시주점〉에 이르니 그자는 금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참이더구만. 난 시미즈를 붙들어 앉히고 단도직입으로 들이댔네. 〈조선향악보〉를 나한테 넘기라고 말일세. 그자는 덴겁을 해서 나자빠지더군. 이미 5만엔을 받고 넘겨주기로 자네와 약조가 돼있다는것이였네. 허나 그쯤은 이미 각오하고 들어갔던지라 난 일도량단하고 그 자리에서 10만엔을 불렀네. 그러자 시미즈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는게 아니겠나. 하긴 뭔지 모를 옛날 물건때문에 하루사이에 두사람씩이나 뛰여들었으니 무식한 그자로서야 대경실색할수밖에. 어리뻥뻥해있던 시미즈의 얼굴에 차츰 묘한 미소가 떠올랐네. 그자는 약아빠진 눈길로 나를 훑어보다가 마침내 다음날 저녁녘에 와보라고 귀띔하더구만. 자네한테 이렇게 말하긴 뭣하네만 그 순간 난 속으로 장훈을 불렀네. 바라는게 너무도 빨리 이루어지는것 같아 선뜻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였지. 헌데 그날 밤은 왜 그리도 마음이 뒤숭숭하던지…

막상 향악보를 손에 넣는다고 생각하니 그때껏 가슴속 밑바닥에 눌려있던 자네에 대한 죄의식이 무섭게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네. 이북에 갈번 했던 문화재를 빼내서 서울로 보낸다면 거기선 날 애국자라고 추어주겠지. 하지만 자네한테 난 비렬한 배신자임이 틀림없었네. 너무도 가혹하게 자넬 우롱했다는 자책감에 속이 떨려왔네. 그래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네. 민족앞에 지닌 대의명분을 다하고 국민된 본분을 지키자니 싫든좋든 감수해야 할 숙명이라 할수밖에. 난 온밤 자신과 끝없이 싸웠네.

이튿날 저녁무렵이 되자 난 시미즈를 찾아갔네. 그런데 그자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올줄이야… 자네가 향악보를 넘겨받는 대가로 20만엔을 지불하겠다고 했다는것이였네. 눈앞이 아찔했네. 사실 고서점이나 운영하는 내 형편에서 20만엔이라는 돈은 어지간히 힘에 부치는 액수였거던. 그렇지만 물러앉고싶지는 않았네. 난 시미즈에게 그렇다면 30만엔을 내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네. 졸지에 그 많은 돈을 마련할 뾰족한 방책이 있었던건 아닐세. 단지 젖먹은 힘까지 다 내서라도 자네를 앞서야만 한다는 무분별한 승부심때문이였지. 시미즈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구만. 난 그자에게 수일내로 돈을 가져올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도꾜로 돌아왔네. 말은 그렇게 쉽게 뱉았지만 정작 그 많은 돈을 갑자기 취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땀으로 미역을 감으면서 허둥지둥 돌아치던 난 사흘만에야 겨우 고서점을 담보로 삼고 돈을 얻을수가 있었네.》

경식은 무언가 목에 걸린듯 하여 질식할것만 같았다. 당장에 고함이라도 치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허거픈 웃음이라도 터뜨려야 속이 후련할상싶었다. 우롱당한것은 자기만이 아니였다. 상열이 역시 시미즈의 잔꾀에 넘어가 바보노릇을 하지 않았는가. 우달근의 환심을 사보려고 그리도 안달아하던 시미즈가 어째서 돌연 배부른 흥정을 걸어올수 있었는지 경식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을수 있었다.

실로 기막힌 일이였다. 벼락처럼 터져나오는 울분을 간신히 눌러 삼키느라 경식은 머리를 지르숙인채 어금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는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내가 돈을 구해가지고 시미즈앞에 다시 나타난건 어제 아침이였네. 난 보란듯이 그자앞에 30만엔을 내놓았네. 그랬더니만 글쎄 그자가 한다는 소리가 허 참… 자네쪽과 아직 흥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좀더 기다려보라는게 아닌가. 결국은 값을 더 올리겠다는 암시였네. 난 그만 밸이 불끈 치밀어서 한바탕 그자에게 욕설을 퍼부었구만. 그러자 그자는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제편에서 목을 빼들고 나오는것이였네. 그때에야 비로소 난 자네와 나사이에 경쟁을 부채질해서 한껏 폭리를 얻으려는 시미즈의 간계를 알아차렸네. 그야말로 〈나의 살점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추리라.〉는 사무라이속담 그대로인셈이지. 그자의 얄미운 꼴에 복통이 터져와 죽을 지경이였지만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더구만. 난 시미즈에게 다시 오겠다는 맥빠진 소리를 남긴채 일단 자리를 뜨고말았네.

빈손으로 되돌아오자니 어찌나 발길이 무겁던지…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점점 불리해지리라는건 불보듯 뻔한 일이였네. 다행히 그때까진 자네가 가루베에게만 신경을 쓰고 이찌가와라는 인물에 대해선 관심밖이였기에 무난히 일을 벌려올수 있었지. 하지만 그런 상태가 줄곧 지속될수야 없지 않은가. 또 가루베도 언제 낌새를 채고 덤벼들는지 모르는 일이고. 그럴바엔 차라리 자네를 찾아가 흉금을 터놓는게 어떨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네만 이내 난 머리를 흔들고말았네. 너무도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거던. 속이 타들었네. 난 속수무책으로 멍해있는 자신에게 갖은 욕을 다 퍼부으면서 오사까의 거리를 향방없이 헤매다녔네.

그러던 난 어느 골목길에서 낯익은 한 동포와 맞다들렸네. 시내에서 유술구락부를 경영한다는 권회장이라고 언젠가 친구의 집에 들렸다가 면식을 익힌 사람이였네. 처음 대면했을 때 어딘가 우직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처럼 괴롭던 시각엔 이역의 길가에서 느닷없이 만난 구면동포가 왜 그다지도 반가웁던지… 이 오사까에 친지들이 없는것도 아니였지만 난 마치 무인도에서 혈육을 만난것만 같은 심정이 돼서 그에게 답답한 사연을 하소연했네. 권회장은 내 말을 듣더니만 대번에 성난 황소 영각하듯 기염을 토하더구만. 그런 보물을 두눈이 시퍼래가지고 이북사람들에게 뺏긴다는게 대관절 말이나 되느냐는걸세. 권회장이 〈민단〉관계일로 남쪽에도 자주 드나든다는 말을 들었더랬는데 그래서인지 이북에 대한 그의 배타심은 여간 격렬해보이지 않았네. 어떻든 나로선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고 난 권회장에게 무슨 용빼는 수가 없겠느냐고 매달렸더랬지. 권회장은 있는 힘을 다해 날 돕겠노라고 다짐을 곱씹는것이였네. 그러는 그가 어찌나 고맙던지… 난 권회장에게 내가 머물러있는 숙소를 알려주고 그와 헤여졌네.

헌데 오늘 아침에 권회장이 날 찾아왔더구만. 범잡은 포수마냥 의기양양해서 그가 하는 소리가 간밤에 시미즈를 만나 단단히 오금을 박아놓았다는걸세. 게다가 글쎄… 야꾸자패거리를 시켜 〈다마무시주점〉에 찾아갔던 자네한테까지 손을 봤다는게 아니겠나. …》

상열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해쓱하니 질린 그의 얼굴에 경련의 파도가 여울처럼 일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해도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거네. 난 그만에야 속이 한줌만해서 자네가 어떻게 됐느냐고 다그어댔네. 그랬더니 권회장은 지금쯤 자네가 얼혼이 빠져서 병원에 누워있을거라고, 이 틈을 타서 기어코 향악보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침을 튕기면서 력설하지 않겠나. 너무도 억이 질려 말이 나오질 않았네. … 내가 자네에게 도의를 지키지 못한건 사실이네. 그렇지만 향악보를 차지하고싶은 생각이 아무리 지독했다 할지라도 내 마음속에서 자넨 아무튼 친구였고 동족이였네. 난 왜놈들의 손을 빌어 동족에게 테로를 가하면서까지 욕심을 채우는 비렬한은 아니란 말일세! 저도 모르게 난 권회장에게 그건 졸렬한짓이라고 고함을 질렀네. 그러자 그 사람은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되려 날 시까스르더구만. 반공의식이 그렇게 어정쩡하니까 여직껏 조총련계사람의 뒤꽁무니나 쫓고있다나. 이북과의 대결에서 이기자면 동족관념따윈 일찌감치 줴버려야 한다는것이였네.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었겠나. 권회장의 머리속엔 온통 서리찬 반공구호들만 들어차있는것 같았네. 반공을 위해서라면 동족을 물어뜯어도 무방하다는 무지하게 단순한 그 론리앞에 난 등골이 서늘해지는걸 어쩔수가 없었네.

난 마음속으로 미친듯이 부르짖었네. 그건 내가 한짓이 아니라고 말일세! 하건만 다른 일들에 대해선 죄다 변명을 한다 해도 이 일만은 도저히 변명할 도리가 없더구만. 비록 내가 모르게 저질러진 짓이라 해도 권회장 같은 사람에게 그런 빌미를 준건 결국 나였으니까. 그렇네, 자네에게 그런짓을 한건 권회장이 아니라 바로 나였네. 나야말로 자네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놈이란 말일세!》

상열은 주먹을 부르쥐고 자기의 가슴팍을 쾅쾅 두들겼다. 자신을 모질게 학대하려는 욕구가 그의 마음속에서 미친듯이 날뛰고있는것 같았다.

《난 허둥지둥 자네를 찾아나섰네. 자네에게 용서라도 빌지 않으면 평생 머리를 쳐들고 살것 같지 못했네. 오전내껏 여기저기를 헤매다니다가 점심무렵에야 겨우 자네가 들었던 병원을 찾았네. 헌데 자넨 거기 없더구만. 맥이 풀려 되돌아나오는데 웬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로 자넬 찾는가고 묻지 않겠나. 알고보니 자네때문에 병원에 왔던 조총련간부였네. 보건대 이 일을 잘 알고있는 사람 같아서 난 그에게 향악보때문에 찾아왔다고,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아무쪼록 좀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네. 그 사람은 한참동안 날 유심히 살펴보더니만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자네가 간 곳을 대주는것이였네. 그렇게 돼서 이리로 와 자넬 기다리고있던 참이였네. …

부탁이네. 이 자리에서 속이 후련하게 내 면상이라도 후려갈기라구. 설사 자네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난 할 말이 없는 놈일세. 그렇지만 여보게, 이것만은 믿어주게. 난 결코 권회장 같은자는 아니네. 아무리 내가 이북에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제 동족의 뒤잔등에 칼을 박으면서까지 반공을 부르짖는 미치광이는 아니란 말이야!》

숨도 돌리지 않은채 이런 말을 뱉아버리고난 상열은 짜증스럽게 독한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창대같은 비발이 유리창에 어룽어룽 파도무늬를 그리며 좔좔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암울하게 흐려진 경식의 눈길이 창밖에 붙박혀 움직일줄을 모른다. 이 시각 그에게 들려오는것은 을씨년스러운 비소리도, 위협하듯 울부짖는 우뢰소리며 바람소리도 아니였다. 다만 울분에 찬 심장의 박동소리만이, 혈관을 찢어던질듯 온몸의 피가 아프도록 맥박치는 소리만이 귀전을 사납게 두드려대고있을뿐이였다.

쓰디쓴 고배였다. 동족간의 대결이 낳은 쓰라린 비극이였다. 차라리 가루베 같은자에게 당한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통분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여태껏 그림자처럼 맴돌면서 향악보를 찾는 일에 음으로 양으로 헤살을 놓은 장본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박상열이라는 억에 받치는 사실앞에서 경식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지는것만 같았다.

《지금 내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박상열이 아니라 정말로 이찌가와였다면 이렇게까지 분하진 않을거네.》

리경식의 입에서 신음소리마냥 새여나온 소리였다.

박상열은 고개를 짓숙인채 묵묵히 안주를 씹고있었다. 울근불근 씰룩거리는 그의 볼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쳐있었다. 또다시 상열이 술병을 거머잡았다. 괴로운듯 낯을 찡그리며 두사람의 잔에 술을 붓고난 그는 자기의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더니 다시금 빈 잔에 술을 붓는것이였다. 마치 술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번열을 쏟아붓는것 같았다. 잔에서 넘쳐난 술이 식탁우에 어지러이 번져흘렀다. 얼마후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상열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

《자네 심정을 리해하네. 나 같은 놈과 마주하고있기가 무척 고통스러울테지. 옳네, 난 우정을 배신한 놈일세. 허나… 허나 민족을 배신하진 않았네. 자네앞에선 내가 낯뜨거운 죄인임이 분명하네만 민족앞에선 떳떳하단 말일세!… 여보게, 간밤의 일에 대해선 자네한테 무슨 말로 죄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껏 자넬 속여야만 했던 일들을 두고 말한다면 나로선 정말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네. 숨김없이 말하건대 두번다시 이런 일에 맞다들린다 해도 난 민족을 위해서라면 같은 선택을 할거네. 굳이 내가 치욕감을 무릅쓰구 자넬 만나러 온것도 실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네에게 내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마음이 좀 편안할것 같더구만. 달리는 말하지 못하는 날 용서하라구. 나 역시 괴롭네. 이렇게 자네앞에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슬프기 그지없단 말일세!》

창유리에 얼비치는 번개불의 백광이 상열의 안경알에 부딪쳐 세차게 펀뜩거렸다.

경식은 시꺼멓게 질린 얼굴을 돌려 상열을 바라보았다. 아연함과 경악, 울분과 고통으로 뒤엉킨 격렬한 빛이 리경식의 우묵한 두눈에서 거세게 튀여나왔다. 무지와 편견이 이렇게까지 인간을 눈뜬 소경으로 만들수 있단 말인가. 숨막히는 압박감에 심장이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거칠어지는 숨결을 가까스로 고루며 경식은 상열에게 대고 거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뭐 민족앞에 떳떳하다구? 자네 말끝마다 민족을 운운하는데 자기와 정견이 다르다 해서 동족을 멀리하고 반목하는것도 민족을 위해서라는건가? 그렇게 해서 얻어진게 대체 뭔가? 동족사이에 원한만 불거지고 시미즈 같은자에게 어부지리를 준것밖에 뭐가 더 있는가 말일세. 그러고도 민족앞에 떳떳하다구? 민족공동의 리익이 왜놈간상배들에게 롱락당하는것도 가려보지 못하는 자네가, 타성에 포로돼서 제 동족부터 따돌리려드는 자네가 그런 소리를 입에 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자네의 그 바보스러움에 몸서리가 쳐지네. 동족대결에 환장한자들한테 속아 청맹과니노릇을 하는 자네가 불쌍하기 짝이 없단 말이네!》

박상열의 목언저리에 퍼런 동맥이 무섭게 드러났다. 얼어붙은듯 굳어져버린 그의 온몸은 깨지기 쉬운 질동이마냥 잘못 건드리면 단박에 산산쪼각이 나버릴것만 같았다. 치미는 부아를 삭이기 힘든지 상열이 또 술을 들이킨다. 그러던 그는 배갈을 입에 머금은채 음울하게 웃었다. 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되박이마에 간신히 억누르고있는 고집과 승벽심이 내비치고있었다.

《흠, 내가 불쌍한 청맹과니라…》

상열은 침울한 야유조로 이렇게 중얼대더니 이윽고 심술궂은 미소를 띠우며 뒤를 잇는것이였다.

《속단이 너무 지나친것 같구만. 하긴 성급했던 나머지 내가 바보처럼 시미즈에게 얼리운건 사실이네. 또 자네에게 화를 끼친것도 사실이구. 그렇긴 해도 난 덮어놓고 남의 장단에 춤추는 얼뜨기는 아닐세. 내게도 내나름의 주견이 있어. 구태여 이 자리에서 자네와 언쟁할 생각은 없었네만 이왕 소리가 나왔으니 내 성깔에 숨김없이 터놓겠네. 여보게, 난 겨레에게 바치는 자네의 충정이 헛되이 되는게 두렵네. 물론 이북도 내 민족이 살고있는 땅인건 분명하지. 하건만 그곳엔 민족보다 계급을 더 우에 놓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겨레의 유산이나 전통보다 혁명이니, 투쟁이니, 청산이니 하는 말들을 더 즐겨하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에게 향악보를 가져다 바치는게 정말로 민족을 위한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눈이 먼건 내가 아니라 자넬세. 민족을 위한다면서 민족의 귀한 재부를 서슴없이 평양으로 가져가려는 자네야말로 경솔한 청맹과니가 아니고 뭔가?!》

《닥치라구!》

경식이 노성을 터치며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상열을 노려보는 그의 두눈이 격노로 이글거렸다. 경식은 흉벽을 치받으며 솟구치는 폭풍같은 힘을 걷잡을수가 없어 상열을 향해 불을 뿜듯 웨쳤다.

《쥐뿔두 모르면서 감히 우리 공화국을 삿대질해! 똑똑히 말해주지. 내가 공화국을 조국으로 받들게 된 리유를 설명하는데 긴말이 필요없네. 그건 바로 왜놈들을 쳐무찌르고 민족을 해방시켜주신 절세의 애국자가 세우고 이끄시는 나라가 우리 공화국이기때문일세. 겨레의 진정한 어버이품이 그곳에 있기때문이란 말이야! 헌데 이남땅은 어떤가? 외세가 주인행세를 하구 민족을 반역한 친일파들이 살판치고있는 꼴을 자넨 보지 못하나? 거기에 무슨 민족의 얼이 살아있고 희망이 있다는건가? 억이 막히는노릇일세. 그런 곳을 조국이라고 믿고 의지하려는 자네가 서글프기 그지없네.》

《뭣이?》

튀여난 용수철마냥 부르르 떨며 상열이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수치와 곤욕을 견디기 어려운듯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이지러져있었다. 벼락불빛이 번쩍했다. 비수같은 섬광이 금시 멱살이라도 잡아쥘것처럼 마주 노려보는 두 사나이의 모습을 처절하니 비쳐주었다. 온 하늘이 통채로 무너져내리는듯 무시무시한 굉음이 메아리친다.

《으음- 결국 우리사이의 인연은 여기까지가 끝인가보군.》

한참만에야 상열이 모지름을 쓰며 내뱉는 말이였다. 차디차게 울리는 그 말은 그대로 서리발같이 랭혹한 결별의 선언이였다. 상열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네. 허나 명심하라구. 난 향악보만은 절대로 포기할수가 없어! 왜냐구? 자네와 기어코 엇서자고 해서가 아닐세. 자네에겐 자네의 길이 있듯이 내게도 내 길이 있기때문이네. 누가 진정 겨레를 위하는 참다운 길을 걸었는가 하는건 후세들이 심판해줄걸세!》

관자노리가 뻐근하도록 아파났다. 리경식은 가슴속에서 타번지는 분노의 불길을 그러모아 상열에게 채찍을 내리치듯 부르짖었다.

《부디 겨레앞에 죄인이 되지 말길 바라네!》

시뻘겋게 충혈진 상열의 두눈이 독을 발산하며 불꽃을 튕기였다. 상열은 험악한 기세로 숨을 다그어쉬다가 사납게 미닫이문을 열어제치고 나가버렸다.

갑자기 피로와 두통이 덮쳐들었다. 짓타는 눈길로 상열이 나간 쪽을 바라보던 경식은 잠시후 허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료리점을 나섰다.

밖에서는 비가 한창 내려붓고있었다. 얼음쪼각처럼 차거운 비줄기들이 사정없이 뺨을 갈겨댔다. 경식의 온몸은 삽시에 흠뻑 젖어버렸다. 비단 몸만 젖은것이 아니였다. 억수로 쏟아져내리는 찬비에 가슴속까지 온통 젖어드는것만 같았다. 저 멀리 비발속으로 데굴데굴 구르듯이 멀어져가는 박상열의 모습이 보였다. 왜서인지 무작정 울고만싶어졌다. 경식은 저도 모르게 흐느껴우는 심장을 그러안고 이역의 비오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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