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제 2 장


7. 오사까의 비뿌리는 밤에


드디여 시미즈와 약속한 날이 왔다. 리경식은 오사까에 도착하는 길로 《다마무시주점》부터 찾아갔다. 해가 퍼그나 솟아오른 늦은아침무렵이였다.

주인에게 전갈을 띄우고 기다리고있느라니 접대부가 나와 그를 2층으로 데려갔다. 1층과 달리 2층은 일본식으로 꾸려져있었다. 누비돗자리를 깐 어느 한 방으로 경식을 안내한 접대부는 잠간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미닫이문을 열어놓은채 허리를 굽히고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시미즈가 허리를 갑신거리며 들어섰다.

《아, 오셨습니까. 기다리게 해서 참말로 죄송합니다.》

금방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시미즈는 유까다우에 겹옷을 걸치고 넓은 띠를 배우에 둘둘 말았는데 화장비누냄새가 풍기는 창백한 얼굴에서는 밤생활에 포만된 지친 기색이 떠돌고있었다.

참대로 만든 자그마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시미즈와 마주앉자마자 경식이 먼저 말을 뗐다.

《약속한대로 20만엔을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시미즈의 해반지르르한 얼굴이 흡족해하는 웃음속에 흐물흐물 녹아들어가는듯싶었다.

《하하… 과연 신용이 있구만요. 선생 같으신분들과라면 난 어떤 거래든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참말로 열성이 대단하십니다.》

경식은 호들갑스럽게 연방 들까불며 접대부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하는 시미즈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장인에게나 갑시다.》

그 말에 시미즈가 냉큼 고개를 조아린다.

《예 예, 어서 그래얍지요. 사나이가 인정하고 의리를 빼면 귀베고 불알뺀 하늘소나 다름없다던데 영업이고 뭐고 인제부턴 선생이 분부하시는대로만 하겠습니다.》

시미즈는 해낙낙해서 이런 말까지 늘어놓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후 그들은 구마또리로 떠났다. 시미즈의 처가에 이르니 정말로 장인이 사찰에서 내려와있었다. 하오리에 하까마(가랭이가 넓어서 치마처럼 된 일본인들의 아래옷)를 입고 굽높은 게다를 끌며 마당에 나온 장인의 태도는 자못 도고하였다.

경식이 약속대로 돈을 가져왔다고 말하자 장인은 애앰- 하고 목기침을 톺아올렸다. 다음순간 령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리경식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생각이 달라졌소. 사실 20만엔이라는게 사위가 가져간 빚의 원금에 지나지 않소. 나도 늘그막인지라 여생을 생각지 않을수 없는즉 아무래도 리자까지 가산해서 받는게 옳을상싶소.》

경식은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여 령감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령감이 물고 씹어주듯 다시한번 곱씹어 외워서야 경식은 사태를 깨달을수가 있었다. 몸안에서 뭔가 뭉클하고 올라오더니 숨이 꺽 막혀왔다. 한동안 눈길을 허공에 던진채 아연실색해있던 경식은 모욕감을 꿀꺽 삼키며 장인령감에게 항변했다.

《아니 여보시오, 말바꾸기를 해도 분수가 있지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하건만 령감은 튕기면 소리가 날듯 낯가죽이 댕댕해서 오히려 제편에서 어성을 돋구는것이였다.

《천만에, 너무한건 되려 저 사위녀석이요. 세상에 남의 돈을 빌려갔다가 리자도 안 물고 본전만 반환하는 법이 어데 있소? 돈계산에 들어선 부자지간도 남남이랬는데 그래, 내가 못할 말을 했는가요?》

시미즈가 자벌레같이 발딱발딱 뛰며 지랄발광을 피웠지만 령감은 네깟놈은 말도 말라는 식으로 사위따위는 아예 상대조차 할념을 안했다.

경식은 부르르 몸을 떨며 불이 튀는 눈으로 그자들을 노려보았다. 조상의 유산이 략탈당한것만도 원통한노릇인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속물들의 롱락물로 다시금 릉멸을 당하고있다고 생각하니 단박에 모든것을 부시여버리고 짓쳐들어가 향악보를 뺏아내오고싶은 무분별한 욕구가 사납게 꿈틀거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금이를 으깨물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난 경식은 고서를 한번 보게라도 해달라고 장인령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령감은 그마저도 도리질을 했다.

《물건이 진짜인지 확인해보려고 그런다면 그 점은 안심해도 되오. 사위가 그 책을 가지고 하도 수다를 떨기에 내 식자있는 사람들에게 두루 알아봤는데 당신이 찾고있는 고서가 분명하오.》

장인령감의 자신만만해하는 말은 경식을 대번에 긴장시켰다. 령감이 향악보에 대한 소리를 여기저기 늘어놓고 다닌다는것이 여간만 께름하게 들리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다가 가루베 같은자들에게 알려질수도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뒤숭숭해오는데 경식의 그런 내심을 눈치챈듯 령감이 얄궂은 미소를 흘리며 뒤말을 달았다.

《마음놓으시오. 만일 당신이 내 사위가 진 빚을 말끔히 청산해줄 의향이라면 구태여 다른 사람과 거래해서 사위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어쨌건 사위와 쨈을 해서 차후에 값을 다시 부를터이니 수락한다면 어느때건 날 찾아오시오. 허지만 명심해두시오. 그 물건을 욕심내는 고객은 당신뿐이 아니라는걸 말이요.》

령감은 제법 의기양양해서 바람을 일구며 들어가버렸다.

《퉤, 돈독이 올라도 더럽게 오른 두상태기같으니라구. 어찌다가 내 저런 두상을 장인으로 만나가지고 이런 망신을 당하는지, 하 참…》

령감이 사라진쪽에 대고 비린 목청으로 욕질을 퍼부어대던 시미즈는 무서울 정도로 이글거리는 경식의 충혈된 눈을 알아보고서야 주춤 오그라들었다.

경식은 얼굴이며 팔뚝으로 뜨겁게 내리쬐는 폭양속에 몸을 내댄채 장승인양 마당 한가운데 우뚝 버티고 서있었다. 더이상 그 어떤 흥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격노의 웨침이 턱을 치받으며 그의 가슴속에서 마구 골풀이쳤다. 허나 성급해서는 안된다는 리성의 준절한 당부를 거절할 도리가 없어 령감이 들어간 집쪽만 고집스럽게 노려보고있는데 코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차겁고 약빠른 눈길로 경식의 동정을 엿보던 시미즈가 잠시후 주섬주섬 말을 붙여왔다.

《참말 죄송하기 이를데없습니다. 령감이 저렇게 망녕을 부릴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그런걸 맡기지부터 않는건데 쯧쯧… 어찌겠습니까, 사람이 하는노릇이라는게 다 이런건데. 하고싶어도 할수 없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할수 있어도 하고싶지 않는 일이 있기마련 아닌가요.》

아리숭하게 이런 소리를 떠벌이는 시미즈의 눈가에 무언가 면밀히 저울질해보는듯 한 타산적인 표정이 떠돌고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자의 입가에서는 곰살맞은 미소가 그려붙인듯이 떠날줄을 몰랐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실건 없습니다. 내 인제 따라가 장인령감과 다시 얘기해볼테니 먼저 돌아가 기다려보시는게 어떨는지. 헤헤…》

《래일 다시 오겠으니 그리 아시오.》

경식은 시미즈의 상판을 보지도 않은채 납덩이처럼 무겁게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마당을 나와버렸다.

오사까시내로 돌아오는 그의 심신은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하였다. 단지 한껏 부풀어올랐던 꿈이 일시에 허물어진데서 오는 좌절감때문만이 아니였다. 시미즈와 대상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가는 풀 길 없는 의혹이 그의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맴돌고있었던것이다.

처음에는 5만엔으로도 감지덕지해하던 시미즈네가 20만엔을 치르겠다는 마당에 와서까지 이 피탈 저 피탈을 해가며 딴죽을 치는 까닭이 무엇일가? 그렇게 늘어진 흥정을 걸 배짱이 별안간 어디서 생겨난걸가? 시미즈가 부른 값을 너무도 쉽게 받아물었기때문인가? 그러나 그자는 빠찡꼬일로 우달근에게 고삐를 매인 처지가 아니였던가?

불현듯 향악보를 욕심내는 고객이 한사람뿐이 아니라고 못박던 장인령감의 소리가 경식의 뇌리를 때렸다. 금시 혈관의 피가 얼어버리는것만 같았다. 령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태는 훨씬 심각한것이였다. 과연 그 소리가 진실일가? 아니면 저들에게 유리하게 흥정을 몰아가려고 령감이 짐짓 꾸며낸 허튼소리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착잡하게 갈마드는 불안과 위구들을 시끄러운 파리마냥 애써 물리치면서 경식은 그달음으로 우달근을 찾아갔다.

경식에게서 이야기를 듣고난 달근은 낯빛이 시뻘개지다 못해 꺼멓게 질려버려 버럭 고함을 치는것이였다.

《그래, 그런 뻔뻔스러운자들을 그냥 놔뒀단 말이웨까? 대체 그놈들이 조선사람을 뭘루 보는가 말이우다!》

경식은 당장에 결딴내겠다고 일어나는 달근을 겨우 붙들어 앉혔다.

《사실 제 심정도 부회장아버님과 다를바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긴 일본땅이 아닙니까. 우리 문화재가 뻐젓이 시미즈의 사유재산으로 법의 인정을 받고있는 세상에서 향악보를 되찾자면 신중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그자들이 우리와 거래를 하자는걸 봐선 좀더 흥정해보려는 심산 같은데…》

무겁게 꺼내는 경식의 말에 달근은 다른 말을 못하고 황소숨만 몰아쉬였다.

이튿날 경식은 우달근과 함께 또다시 시미즈의 장인을 찾아갔다. 장인령감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달근이 도대체 얼마를 더 달라느냐고 눈을 부릅뜨며 다우쳐묻자 령감은 그 문제는 사위가 잘 아니 사위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애매하게 발뺌을 하는것이였다.

《시미즈 그 작자가 맞대놓구 나한테 그러질 못하겠으니까 제 장인을 내세워 야바위를 치는거우다. 넨장헐, 내 그 야시꼬운 놈팽일 가만 놔두지 않겠수다!》

헛물만 켜고 돌아오는 길에서 달근이 분기를 누르지 못해하는 소리였다. 그의 말에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리경식도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의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우달근과 동업하지 못해 그처럼 안달복달하던 시미즈가 아니였던가. 그러던 그자가 향악보문제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배심좋게 나오는데는 필경 곡절이 있는것이 분명하였다. 경식은 자기가 직접 시미즈를 만나 따져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경식은 시미즈를 찾아나섰다. 우달근이 함께 가자고 따라섰지만 쇠도끼같은 그의 성미에 시미즈를 만나면 무슨 일이라도 낼듯싶어 경식은 겨우 달근을 떼여놓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해는 이미 서쪽하늘가너머로 힘겨웁게 넘어갔는데 오사까만쪽에서 밀려든 거먹구름이 락조의 검붉은 잔광을 삼키며 때이르게 침울한 어둠을 공중에 드리우고있었다. 비라도 쏟아지려는지 대기는 찌는듯이 물쿠었다.

도시의 거리들에 부산스러운 밤풍경이 하나둘 떠올랐다. 끊임없이 도섭을 피우는 네온등들과 우줄우줄 춤을 추는 광고장식등들, 화려한 기모노로 단장한 기녀들이 공작어처럼 하느작거리는 유곽거리며 집없는 사람들이 신문지쪼박을 깔고 밤잠차비를 하는 지하도의 어둑컴컴한 구석구석…

어느덧 경식은 시미즈의 주점이 있는 요도가와구의 골목에 이르렀다. 《다마무시주점》이라고 씌여진 네온간판이 알라꿍달라꿍 둔갑을 피워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홀리고있었다. 어째서인지 지금따라 《다마무시》라는 간판이름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경식의 눈을 찔렀다.

《다마무시》는 비단벌레를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딱장벌레의 한 종류인 이 벌레는 예로부터 《살아있는 보석》으로 불리울만큼 아름다운 빛갈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명치유신이후까지도 일본인들속에서는 비단벌레를 옷장에 넣어두면 새 옥이 생긴다는 미신이 퍼져있었고 일본 법륭사에는 비단벌레 1 200마리의 날개를 박아넣은 《다마무시즈시》라는 궤가 신주를 놓아두는 국보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있다. 비단벌레의 날개빛처럼 광선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빛갈을 일본인들은 《다마무시이로》(비단벌레색)라고 하는가 하면 어느쪽으로든 적당히 해석할수 있는 애매한 답변을 가리켜서도 《다마무시이로 답변》이라고들 말한다.

아닌게 아니라 적지 않은 일본인들은 《다마무시이로 답변》에 능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겉과 속을 분간하기 힘든 애매성과 은페성이 일반적인 자기 표현방식으로 굳어져있는 그들 특유의 습성에서 오는 현상일것이다. 그렇다면 늘쌍 겉발린 웃음을 짓고 살이라도 떼줄것처럼 설레발을 치는 시미즈의 수선뒤에는 어떤 본심이 도사리고있는것일가? 경식은 착잡하게 뒤엉킨 의혹의 실타래를 풀려고 애쓰며 주점안으로 들어갔다.

퇴근시간이 지나서인지 술군들로 꽤 붐비는 주점안은 질탕거리는 쟈즈음악과 술냄새, 담배연기로 하여 틉틉하고 후덥지근했다. 여기저기 식탁들에서 혀꼬부라진 소리들과 추저분한 롱지거리들, 쥐여박을듯 으르대는 성난 소리들이 어지러이 들려오는데 술집 한켠의 불그스레한 조명아래서는 귀청을 째듯 쿵쾅거리는 쟈즈의 폭음에 휘둘리며 한 무리의 남녀들이 뒤엉켜 롱탕을 쳐대고있었다. 뿌잇하니 서려도는 먼지,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들, 저마끔 흔들어대는 팔다리들과 야하게 휘둘러대는 엉덩이들… 자극적인 탄성을 연방 내지르며 원시적인 열정에 미쳐나있는 취객들의 광란을 보느라니 패전후 급속도로 밀려든 쟈즈문화의 홍수속에서 자기의 고유문화를 잃은채 허우적대는 그들의 얼빠진 모양이 저으기 볼성사납게 여겨지기만 하였다.

경식이 접대부를 불러 주인을 찾으니 주인이 없다는것이였다. 어디에 갔느냐고 다시 물으니 영업관계일로 밖에 나갔는데 오늘 밤 들어오지 못할것 같다는것이 아닌가. 경식의 얼굴에 미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시미즈가 인젠 나를 피하자는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시미즈를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경식이 제잡담 웃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려는데 기모노차림의 웬 중년녀인이 찬바람을 일구며 내려오는것이였다.

《아무튼 주인에게 똑똑히 이르세요! 〈아라이스시〉에 진 부채를 월말까지 청산 못하면 법에 고소해서 술집을 차압할테니 그리 아시라고요!》

뒤따르는 접대부에게 서슬차게 쏘아붙이는 녀인의 말이였다. 우달근의 말대로 시미즈가 빚군들한테 여간 시달리는것 같지 않았다. 경식이 올라가보니 사무실에는 정말로 쇠가 채워져있었다.

차가운 외면의 기운이 서린채 굳게 닫겨있는 문을 보느라니 경식의 심장은 돌처럼 무겁고 써늘해왔다. 차압이라는 소리까지 날 정도로 빚독촉에 쫓기우는 시미즈가 어째서 향악보를 놓고 요리조리 시간을 끌고있는걸가? 분명 그자가 오그랑수를 쓰고있다는 확신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가슴을 후벼파고들었다. 과연 그자의 꿍꿍이가 무엇일가? 한시바삐 시미즈의 속셈을 간파하고 그자가 옴짝달싹 못하게 새로운 방책을 마련해야 할 시각이였다. 그래서 마음을 도사려먹고 왔건만 어느새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시미즈가 기름쥐마냥 매끄럽게 빠져달아났으니 실로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일이였다.

리경식이 초조감에 휩싸여 웃층에서 내려오는데 느닷없이 그를 찾는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일전에 〈아리랑〉주인님과 함께 오셨던분이 아니세요?》

눈길을 돌려보니 춤군들쪽에서 20대의 웬 녀자가 그에게로 걸어오고있었다. 금방 춤을 추다가 나왔는지 그 녀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수내와 얼버무려진 녀인의 땀냄새가 풍겨왔다. 뒤늦게야 경식은 주점에 처음 왔을 때 차를 내왔던 그 작부를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요?》

어리둥절해서 경식이 이렇게 묻자 녀인은 반가움에 눈꼬리를 치며 대답했다.

《전 여기서 일하는 하나꼬라고 합니다. 실은 선생님에게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서…》

경식은 의아해서 그 녀자를 바라보았다. 하나꼬의 얼굴에 어수선한 주위를 경계하는듯 한 빛이 엿보였다. 경식은 말없이 녀인을 따라 구석진 곳의 외딴 식탁에 가 마주앉았다. 그제서야 그는 하나꼬를 유심히 살펴볼수가 있었다.

그 녀자는 팔이며 어깨살을 농염하게 드러내놓은 연분홍빛달린옷을 입고있었다. 긴 머리칼은 뒤로 묶어 한쪽어깨앞으로 늘어뜨리고있었는데 퍼르스름한 눈확언저리며 풀어진 입귀에서는 도색에 지친 피로와 공허가 떠돌고있었다. 경식은 나직이 녀인을 재촉했다.

《어서 말하시오.》

그러자 하나꼬는 긴장에서 오는 오한인듯 가볍게 몸을 한번 옹송그리고나서 망설이는 어조로 묻는것이였다.

《저, 우리 주인님을 만나러 오셨는가요?》

경식이 대답대신 머리를 끄덕이자 왜서인지 하나꼬의 봉긋한 입술사이로 엷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갑자기 하나꼬가 애원에 찬 눈길로 경식을 쳐다보며 속삭이듯 간청한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다시는 여기로 찾아오지 마세요.》

경식의 두눈섭이 찌붓해졌다. 묻는듯 한 그의 눈길이 하나꼬의 눈길을 붙들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하나꼬는 얼굴을 약간 붉힌채 고개를 떨구더니 잠시후 조심조심 소리를 죽여가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선생님께 전하라고 이르더군요. 우리 주인님을 계속 찾아다니시면 저… 선생님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거라고…》

륵골밑에서 심장이 흠칠 높뛰였다. 경식은 창졸간에 어안이 벙벙해져 하나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내가 시미즈를 찾아다니는건 오로지 향악보때문이 아닌가. 하다면 내 신상을 위협해야 할 정도로 향악보에 눈독을 들이고있는자들이 있단 말인가?)

가슴이 조여드는 불안감을 애써 숨기며 경식은 하나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렇게 말했다는 사람들이 누구요?》

허나 하나꼬는 당황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건…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전 다만 선생님께 그 말을 전하라는 분부만 받았을뿐인걸요.》

(분부를 받았다고? 대관절 이 녀자에게 그런 분부를 할만 한자가 누군가? 시미즈인가? 아니면?…)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보아도 선뜻 짚이는데가 없어 경식이 이리저리 궁싯거리는데 하나꼬의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선생님, 그 사람들은 인정사정을 모른답니다. 혹 선생님이 불상사라도 당하시면 주인님의 립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나요. 제 말을 믿으시고 다신 우리 주인님을 만나지 마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경식은 도무지 알아들을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는 하나꼬를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어쩐지 진정이 비낀듯 한 그 녀자의 눈길뒤에 무엇인가 알지 못할 어둑시그레한 심연이 도사리고있는것 같은감이 들었다.

(날더러 시미즈를 다신 만나지 말라구?)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말했다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왜서 그걸 원하는지 아직은 알길없어도 한가지만은 명백했다. 리경식에게 있어서 시미즈를 만나지 말라는것은 결국 향악보를 포기하라는 말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는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경식의 이마우에 혈관이 부풀어올랐다. 그는 세차게 푸닥거리는 맥박을 가다듬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공연히 녀자뒤에 숨어서 그러지 말고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와서 하라고 말이요. 그리고 내가 여기로 다니건 어쨌건간에 그건 내 일이니 쓸데없는 상관은 하지 말라고 이르시오.》

살가워보이던 하나꼬의 눈꼬리가 한순간 까부장해졌다. 그러나 녀인은 이내 찰찰 넘치도록 눈가에 교태를 실으며 감동조로 속살거렸다.

《어마,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전 선생님같이 사내다운분들과 마주앉아있느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군 해요.》

그 녀자의 음성이 어느새 비를 맞은듯이 축축해지고있었다. 하나꼬가 깍지낀 두손우에 얼굴을 올려놓더니 애틋하게 상글거리며 이쪽을 바라본다. 혀끝으로 가벼이 입술을 추기며 흐릿한 눈길로 쳐다보는 하나꼬의 표정에서 경식은 이성을 꼬드기는 매소부의 불꽃을 느꼈다.

문뜩 무덥고 소란스러운 술집의 분위기가 지겨워났다. 경식은 좀더 앉아있어달라고 매달리는 하나꼬의 청을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어두워진 밖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비가 내리고있었다. 가로세로 비스듬히 뿌려치는 비발을 보며 경식이 잠시 서성거리는데 하나꼬가 우산을 들고 따라나와 그를 찾았다.

《선생님, 비가 오는데 우산을 쓰고 가십시오.》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경식이 한사코 마다했지만 하나꼬는 울상을 해보이며 그예 우산을 들려주고야말았다.

《주인님을 찾아오셨던분이여서 이럴뿐이니 달리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혹시나 기회가 생기면 저도 힘자라는껏 선생님을 돕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하나꼬는 이런 말을 남긴채 미처 어쩔새도 없이 바람처럼 들어가버렸다. 경식은 별수없이 우산을 들고 길에 나섰다.

멀리서 번개불의 여광이 구름속을 파헤치며 소리없이 펀뜩거렸다. 빨갛고 푸른 네온등불빛의 차거운 무늬가 비내리는 골목길을 얼른얼른 비쳐댄다.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경식의 마음속에서도 종잡기 어려운 그림자가 번거롭게 얼른거리고있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불안했다. 돈이라면 지옥길도 마다하지 않을 시미즈가 까닭없이 피하는것도 그렇고 돌연히 이상한자들이 협박을 가해오는것도 그렇고 무엇인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이 암암리에 리면에서 벌어지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혹시 가루베가 어떻게 눈치를 채고 여기까지 따라온것은 아닐가? 하건만 그런 경우까지 예상하면서 여태 이 일을 심중하게 처리해오지 않았던가. 어떻든 이런 형편에서 돌파구를 찾자면 시급히 총련조직의 도움을 받는외에 다른 길은 없을것 같았다.

우뢰질소리가 차츰 가까와졌다. 굵어진 비방울들이 점점 더 앙칼스럽게 우산을 두드려댔다. 경식은 이밤으로 당장 총련 오사까부본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다우쳤다.

리경식이 골목길을 얼마쯤 지나왔을 때였다. 난데없이 앞에서 불퉁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것이였다.

《오-이!》

눈길을 쳐드니 검정색유까다를 걸친 네댓명의 무리들이 어느 가게의 처마밑에 우르르 몰켜서서 이쪽을 노려보고있었다. 두어놈의 손에 야구방망이가 들려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우리랑 말 좀 하자구.》

무리가운데서 담배를 피우던자가 건방지게 턱짓을 하며 반말조로 던져오는 수작이였다. 껌뻑거리는 네온등불빛에 그자의 자태가 언뜻언뜻 비쳐왔다. 그자는 몸집이 앙바틈한 땅딸보였는데 활짝 열어제낀 옷섶사이로 털이 부수수한 앞가슴에 입묵한 《메 산》자가 퍼렇게 두드러져보였다. 경식이 의아해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러자 땅딸보는 시꺼먼 입에 늘어지게 담배가치를 꼬나문채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뇌까리는것이 아닌가.

《이봐, 당신 하나꼬와 무슨 관계야?》

《하나꼬?》

경식은 아연해진 낯빛으로 술집 작부의 이름을 되뇌였다. 그야말로 아닌밤중에 홍두깨였던것이다. 경식이 어리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있는데 이번에는 땅딸보의 옆에 서있던 키다리가 불량스럽게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말곁을 달았다.

《오이, 어째서 그 녀자를 건드리는가? 그 녀잔 우리 오야붕(두목)의 녀자란 말이다!》

너무도 황당한 소리에 경식은 어이가 없어 웃고말았다.

《허허허… 이것 보오. 뭔가 오해한것 같은데 난 그 녀자와 우연히 만났을뿐이요.》

경식의 대답에 땅딸보는 빈정거리듯 담배연기로 동그라미를 뱉아 보였다. 그러더니 조롱조로 이죽거린다.

《신수는 멀쩡해보이는데 속은 여간만 구리지 않군그래. 이자 방금 그 녀자와 지분거리는걸 다 봤는데도 거짓말인가. 당신이 쓰고있는 그 우산도 하나꼬의것 같은데…》

비로소 경식의 눈길이 물방울무늬가 어룽어룽한 하나꼬의 우산에 가 미쳤다. 잘못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머리를 치는데 위협하듯 박아지르는 땅딸보의 목소리가 거칠게 뒤를 이었다.

《긴소린 제쳐놓고 이후로 하나꼬가 있는 술집에 다신 발길을 안하겠다는것만 이 자리에서 맹세하라구. 그럼 곱게 놓아줄테니…》

경식은 억이 막혀 그자에게 어성을 높였다.

《여보시오, 내가 거기에 드나드는건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지 그 녀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요. 좋소, 당신들이 정 그렇게 마음놓지 못하겠다면 앞으로 거기에 드나들어도 그 녀자와는 마주 서지 않겠다는걸 약속하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땅딸보는 여전히 코웃음만 칠뿐이였다.

《흥, 영 알아먹지 못하는군그래. 녀자를 보러 가든 주인을 보러 가든 〈다마무시주점〉엔 아예 얼씬도 하지 말란 말야! 어떻나, 그렇게 하겠나?》

불시에 호흡이 가빠왔다. 그제서야 경식은 하나꼬를 통해 자기에게 협박을 가해온자들이 다름아닌 이자들이라는것을 직감했다. 도대체 어디서 별안간 굴러온자들이기에 시미즈와 만나는것을 그리도 기를 쓰고 막아나서는건가? 지그시 괴한들을 노려보는 경식의 두눈에 서늘한 기운이 떠돌았다. 그는 하나꼬에게서 받은 우산을 내동댕이치며 땅딸보에게 결연히 대답했다.

《걷어치우오! 당신들의 진속이 무언지는 모르겠소만 난 볼장을 다 보기 전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물러서지 않겠다?》

땅딸보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사납게 내뱉더니 처마밑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여나왔다. 그자에게서 풍겨오는 살기띤 호흡과 독한 술냄새로 하여 경식은 팽팽 소리가 나도록 긴장해졌다. 험상궂은 분위기에 질겁한 행인들이 슬금슬금 비켜가는데 어느새 땅딸보가 비물을 훔치며 경식의 앞에 바싹 다가섰다. 매몰스러워보이는 그자의 꼬부장한 눈에서 잔인한 불꽃이 방끗방끗 튀는듯 하였다.

《그럼 사등뼈를 분질러놓을수밖에…》

앙다문 입술새로 내뱉는 땅딸보의 소리였다. 다음순간 바람을 가르며 그자의 매서운 손이 경식의 볼을 강타했다. 련이어 두번째, 세번째 타격이 복부며 가슴에 사정없이 날아든다. 그만에야 경식은 중심을 잃고 비칠거렸다.

《어때? 아직도 물러서지 않겠나?》

땅딸보가 시까스르는 소리였다. 시꺼매지고 비에 젖은 경식의 볼편이 분노로 하여 경련을 일으켰다. 명치끝이 막혀드는 아픔에 한동안 배를 그러쥐고있던 경식은 억제할길 없는 격렬한 힘이 온몸을 휘감아버리는것을 느끼며 불끈 치솟아 땅딸보의 동가슴을 어깨박죽으로 냅다 떠다박질렀다. 뜻밖의 타격을 받은 땅딸보가 허궁 들리워 길바닥에 개처럼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패거리들이 살기를 뿜어대며 달려들었다. 비발치는 어둠속에서 어지러운 란투가 벌어졌다. 경식은 으르렁거리며 덤벼드는 놈팽이들을 치고 받아넘기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던 그는 둔중하게 머리를 후려치는 야구방망이세례에 그만 정신을 잃고 거꾸러지고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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