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제 2 장


6. 미궁속을 헤치며


다음날 아침 리경식은 우달근과 함께 약속대로 시미즈를 찾아갔다. 그들이 사무실에 들어서는것을 본 시미즈는 전날과 다름없는 갑신거리는 태도로 살이라도 떼줄것처럼 아양을 떨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

《약속은 지켰을테지?》

느긋이 주먹코를 쓸어만지며 던지는 우달근의 물음에 시미즈는 고자같이 야위고 카랑카랑한 비린청으로 수선을 피웠다.

《하하… 우상의 호령에 놀라 어제 오금에서 불이 일 정도로 뛰여다녔다니까요. 글쎄 땀을 쭐쭐 뽑으면서 처가에 갔더니만 장인령감이 사찰에 불공하러 간다고 금방 문을 나서는 참이 아니겠습니까. 그 령감이 늘그막에 보살이 되려고 작심했는지 이즈음에 와선 한달이 멀다하게 드나들군 합니다요. 조금만 걸음이 늦었어도 나무아미타불이 될번 했지요. 겨우 령감을 붙들어 앉히고 장시간 씨름질하다가 돌아오니 자정이 다 돼오더란 말입니다. 아이구, 지금도 막 온몸이 지근지근 쑤셔나는게…》

시미즈가 자기 수고를 알아달라는듯 어깨며 팔을 마구 주물러대면서 아부재기를 쳤다. 경식은 쿵당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가지고 온 돈 5만엔을 시미즈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자, 인젠 고서를 내놓으시오.》

그런데 이상한 일이였다. 한동안이 지나도록 시미즈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채 돈을 보기만 할뿐 선뜻 집으려 하지 않는것이 아닌가. 그자의 안경알에서 반사된 빛이 해석하기 어려운 도형마냥 책상우에 어른거렸다.

(입만 벌리면 돈타령을 하던 인간이 갑자기 웬 일인가?)

경식이 시미즈를 바라보며 저으기 이상쩍어하는데 곁에 있던 달근이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넨장헐, 뭘 그리 꾸물거려? 빨리 책을 내오지 않구!》

그바람에 시미즈가 손사래를 바삐 치며 우는소리를 한다.

《하, 우상, 너무 그렇게 몰아대지 마시오. 우상이 눈을 부릅뜰 때마다 오금이 저려들어서 어디 말이나 변변히 해보겠습니까.》

《말? 도대체 무슨 할 말이 또 있다는거야?》

달근이 괄괄한 목소리로 더욱 곤두세우자 시미즈는 떠듬적대며 급급히 입을 열었다.

《예 예, 인제… 인제… 말씀드립지요. 실은…》

시미즈의 말소리가 점점 기여들어갔다. 끙끙 갑자르며 두사람의 동정을 할끔할끔 살피던 시미즈는 한참만에야 시르죽은 소리로 사연을 터놓는것이였다.

《실은… 어제 장인한테 갔다가… 하, 그만 빈손으로 와놔서…》

《무엇이?》

우달근의 입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튀여나왔다. 너무도 뜻밖의 일인지라 리경식도 아연해서 돌처럼 굳어지고말았다. 그들이 뿜는 서슬푸른 기세에 질려 시미즈는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상, 제발 화부터 내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어제 장인에게 얼마가량 돈을 내놓으면서 그 책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대뜸 도리를 젓는게 아니겠습니까. 자기한테서 꾸어간 돈을 전부 갖다바치기 전엔 어떤 물건이든 찾을 생각을 말라는겁니다. 허 참, 그 두상이 로망을 하는지 돈이라면 인젠 사위고 뭐고 없다니까요. 아무리 사정사정해도 말귀에 념불외우기더란 말입니다. 령감이 사찰에 갔다가 사흘후에 내려온다기에 하는수 없어 돈을 마련해가지고 그때 다시 오마 하고 돌아서긴 했습니다마는… 아무튼 신용을 어겨서 뭐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참말로 죄송합니다.》

시미즈는 죄스럽다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바른채 두손을 모두어 잡고 연송 머리를 조아렸다. 경식의 우묵한 두눈에 침울한 불길이 이글거렸다. 배를 채우고 본능을 즐기는것을 생활의 전부로 알고있는 이런 인간들에게 있어 《조선향악보》와 같은 겨레의 문화재는 한갖 손끝에서 튕겨진 주산알에 불과할거라는 생각이 단쇠쪼각처럼 그의 마음을 지져왔다. 경식은 저도 모르게 몰숨을 터치며 시미즈에게 물었다.

《대관절 장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모두 얼마인데요?》

경식의 그 물음에 시미즈는 반지르르하니 갈라붙인 가리마를 새끼손가락으로 살살 비다듬다가 슬쩍 말을 내비친다.

《한 20만엔가량…》

순간 소대가리만치나 험궂은 우달근의 주먹이 꽝-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달근은 시미즈의 조막만 한 머리를 구멍이 뚫어지도록 쏘아보며 목에 피대가 동해올라 고함을 질렀다.

《뭐가 어째! 그러니 처가집에 진 빚을 통채로 우리한테 덮어씌우겠다는 소리야?》

《그런게 아니라… 우상!》

《걷어치워!》

달근이 밸통이 뒤집혀 펄펄 뛰는데 시미즈가 잔뜩 울상을 해보이며 엄부럭을 떨었다.

《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상! 아… 아무렴 내가 우상한테 감히 그럴리 있겠습니까. 나로서야 우상과 한 약속을 조금도 드티지 않을 생각이였지만 장인령감이 그렇게까지 나올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나도 속이 빠질빠질 타서 죽을 지경이올시다.》

시미즈는 자기도 애간장이 마른다는듯 포동포동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만졌다. 분노로 맥박치는 침묵이 흘렀다. 참을수 없는 혐오감이 흉벽을 쾅쾅 두들겼지만 경식은 그 모든것을 강잉히 눌러삼키며 잠시후 시미즈에게 쓰겁게 한마디 뱉았다.

《계속 이렇게 말이 바뀌니 그쪽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시미즈가 그지없이 억울하다는 시늉을 하며 노죽을 부렸다.

《하- 이거 나로선 진심으로 애쓰느라 아득바득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참말로 섭섭합니다. 정 내가 못미더우시면 직접 곤고산 사찰에 가서 그 령감을 만나보시지요. 아마 그러면 내 말이 틀림없다는걸 믿게 될겁니다.》

《여러말할것 없어. 지금 당장 갈터이니 앞서라구!》

시미즈의 말끝을 거머채며 우달근이 결패사납게 몰아대는 소리였다. 그러자 주춤거릴줄 알았던 시미즈가 제편에서 팔을 부르걷으며 냉큼 앞장에 서는것이였다.

《에라, 좋습니다. 영업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오늘 우상한테 이 시미즈의 진정을 보여주고야말겠소이다. 자, 어서 떠납시다!》

세사람은 그 즉시로 택시를 불러타고 오사까부와 나라현의 접경에 자리잡은 곤고산으로 향했다. 가보니 과연 시미즈의 장인이 있었다. 시미즈의 말대로 늙은이의 태도는 여간만 완고불통이 아니였다.

《긴말할것 없이 사흘후에 20만엔을 사위에게 보내시오. 그럼 당장 그 책을 돌려드릴테니.》

칼로 베듯 이렇게 잘라매고 돌아서는 늙은이에게 리경식도 우달근도 다른 말을 더 붙여볼새가 없었다.

《보십시오, 우상! 내 뭐라든가. 공연히 날 의심하시면서 쯧쯧…》

돌아오는 차안에서 시미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건네오는 말이였다. 달근은 입을 꽉 다문채 험상스러운 눈길로 시미즈를 흘겨볼뿐이다. 그러는데 경식이 누구에게라 없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장인이 사흘후엔 집에 온다는거지요?》

시미즈의 꾀죄죄한 눈에서 불꽃이 방끗한다.

《예 예, 그렇다니까요. 아무튼 사흘후에 가선 어떻게 해서든지 물건을 찾아와야 할텐데… 후유? 워낙 장사형편이 시원칠 않다보니 참…》

경식은 기름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시미즈의 좁은 이마를 지켜보며 묵묵히 그자의 속셈을 헤집고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5만엔을 부르던 시미즈의 입에서 어떻게 돌연 20만엔이라는 소리가 튀여나왔을가? 돈밖에 모르는 무지한 이자가 갑자기 향악보의 가치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장인과 한통속이 되여 이 기회에 더 많은 돈을 울궈보려는 걸탐사나운 욕심에서 그러는건지도 모른다. 어떻든간에 명백한것은 시미즈네가 향악보의 대가로 20만엔을 요구한다는 사실이였다. 그렇다. 20만엔을 지불하기만 하면 향악보를 찾을수 있다는 희망이 이 시각 경식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것이였다.

리경식이 이런 생각을 달리고있는데 시미즈가 그의 속마음을 떠보려는듯 살금살금 말을 걸어왔다.

《하, 지내 조급해마십시오. 설사 사흘후에 못 찾아온다 해도 내가 맡겨놓은 물건을 령감이 함부로 처분하기야 할라구요. 사흘이 아니라 석삼년이 걸리더라도 우상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최선을 다하겠으니 헤헤… 그리 아시고 얼마간 더 기다려보시는게…》

시미즈의 야살스러운 수작질에 그만 부아통이 터져오는지 우달근의 입안에서 끄으응- 하는 된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경식은 곁에 앉은 달근의 부르쥔 주먹을 슬그머니 움켜잡았다. 여하튼 지금은 모든것을 묵새겨야만 했다. 비록 제 장인에게 저당잡혔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향악보가 시미즈의 소유로 되여있는 조건에서 무난히 목적을 이루자면 어차피 시미즈를 통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는가.

경식은 마음을 도스르고나서 시미즈에게 말했다.

《사흘후에 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예?》

시미즈가 재빨리 눈알을 굴리며 되묻자 경식이 사흘후에 20만엔을 가지고 오겠다고 다시금 분명히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는 순간 시미즈의 코수염이 흥에 겨워 춤을 추는것만 같았다. 시미즈는 희색이 만면해서 몸을 촐싹대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것이였다.

《핫하하… 그렇게만 되면 걱정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거 참말 황송하기 이를데없습니다. 내가 변변치 못하다나니 우상의 친구분께 갑절로 페를 끼치게 됐습니다. 참말로 죄송합니다. …》

경식은 연신 고개를 갑삭거리는 시미즈에게 든든히 뒤를 다져두었다.

《대신 사흘후엔 나와 함께 장인을 만나야 합니다.》

《하, 그야 여부가 있습니까. 내 목을 걸고 장담하리다. 선생은 사흘후에 어김없이 책을 손에 넣을겁니다. …》

시미즈는 침방울을 튕기며 겉발림한 말들을 연방 쏟아놓았다. 너무도 흡족해서 비좁은 차안이 소란스럽게 잔망을 떨던 시미즈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달근의 노기등등한 눈길에 부딪쳐서야 그만에 목을 움츠러뜨렸다.

차에서 내려 시미즈와 갈라진 다음에도 시꺼멓게 질린 우달근의 얼굴은 좀처럼 개일줄 몰랐다. 모름지기 이번에도 시미즈에게 쉽사리 양보한것이 노여워서일거라고 생각하며 경식이 말없이 나란히 걷는데 불현듯 달근의 볼부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살이나 건사했다는게 일처리를 이 꼴루 했으니… 리선생한테 정말 볼낯이 없수다.》

그제서야 경식은 달근이 자기자신에게 화를 내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이 무더운 여름철에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나선 년장자에게 오히려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우달근은 분기를 누를수 없는지 또다시 투덜거리는것이였다.

《넨장헐, 이럴줄 알았더라면 어제 그녀석을 끌구 직방 처가집에 달려가는건데…》

경식은 그러는 그에게 헌거로운 태도를 지어보이며 위안삼아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현재로선 시미즈와 교섭을 적절히 하는게 그중 나은 방법일것 같습니다. 솔직한 말로 그자가 그 정도로나마 나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 어쨌든 전 이길로 곧장 도꾜에 가겠습니다.》

《도꾜엔 왜요?》

달근이 영문을 몰라하자 경식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가서 20만엔을 가져와야 할게 아닙니까. 사흘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우달근의 얼굴이 노기로 하여 푸들푸들 뛰였다.

《돈을 가지러 도꾜에 간다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우. 그래, 리선생만 조선사람이구 우린 조선사람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오사까에 있는 조선사람들치구 제 조상의 유물을 찾겠다는데 돈을 아까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수다. 정말 섭섭하우다. 대체 오사까동포들을 어떻게 보구…》

노여운 생각에 숨이 컥 막혀 말끝도 채 맺지 못하는 그앞에서 경식은 당황한 나머지 쩔쩔매기만 했다.

《그런게 아니라… 저도 동포들의 마음을 잘 압니다.》

경식이 황황히 설명하려는데 달근이 결패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밀막았다.

《잘 안다면 더 말씀 마시우다. 20만엔이 아니라 200만엔이라두 우리가 감당하겠으니 리선생은 그대루 내 집에 머무르다가 고서를 찾은 다음에 떠나시는게 좋겠수다.》

우달근의 말은 부탁이라기보다 호령조에 가까웠다. 경식은 뜨거운 피가 울컥 목을 치받는 바람에 선뜻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얼마간 동안이 흐른 뒤 경식은 쿵덩쿵덩 가슴벽을 두드리는 심장의 뿌듯한 박동소리를 느끼며 달근에게 말했다.

《아버님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됩니다. 헌데 제 심정도 좀 리해해주십시오. 전 오래지 않아 귀국하게 됩니다. 향악보를 찾는 일은 이 일본땅에서 민족을 위해 제가 해야 하는 마지막일입니다. 제가 다문 얼마라도 더 떳떳한 마음으로 조국땅을 밟을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리경식의 호소는 절절하였다.

《사람두 참…》

우달근은 그만 말문이 막혔던지 험험 헛기침만 톺았다.

도꾜에 도착하자마자 경식은 물질문화보존협회부터 들렸다. 이미전부터 향악보를 구입하기 위해 마련은 해왔지만 20만엔을 채우자면 아직 자금이 모자라는지라 그는 자기가 수집하여 협회에 보관하고있던 일본관계서적들을 팔기로 결심하였던것이다. 히사꼬를 비롯한 회원들이 그를 도와나섰다. 회원들과 함께 고서점들과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하루낮이 기울도록 책을 팔던 경식은 늦저녁이 되여서야 마침내 돈을 다 장만할수가 있었다.

수고를 아끼지 않은 회원들에게 인사를 거듭하고나서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돌아보니 히사꼬였다. 처녀의 얼굴은 발깃하니 상기되여있었다.

《무슨 일이요, 히사꼬?》

경식이 의아해하자 히사꼬가 다가와 스스럼없이 그의 팔을 끼며 말했다.

《저도 그쪽으로 갈 일이 있어서…》

히사꼬의 두눈이 응석기를 머금고 명랑하게 반짝인다. 경식은 허허 웃고는 처녀와 함께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보니 협회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금때문에 신경쓰느라 히사꼬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새 다른 일은 없었소?》

경식의 물음에 히사꼬가 기다렸다는듯 두서없는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오사까로 떠나면서 경식이 부탁한대로 사료들을 조사한 이야기며 협회에 찾아왔던 상담객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기가 새로 써보았다는 단시에 이르기까지 처녀의 입에서는 퍼내고퍼내도 마를줄 모르는 샘물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잇달아 쏟아져나왔다. 마치 며칠이 아니라 몇년세월을 리경식과 떨어져있었던듯이.

하건만 히사꼬가 이야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식의 생각은 어느결에 다른 곳으로 달리고있었다. 이 몇달어간 향악보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과정에 만났던 인물들이 그의 눈앞으로 주마등처럼 엇바뀌며 흘러갔다. 니시다의 절망에 찬 모습이 허우적대며 되살아나기도 하고 가루베의 철면피한 낯바닥이 흐물흐물 다가들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기름쥐마냥 반질거리는 시미즈며 장인의 꼴도 불안스럽게 떠올랐다.

향악보를 찾으려고 처음 나설 때만 해도 오죽이나 막연했던가. 차라리 풀숲에서 바늘을 찾는게 나을것 같았다. 더구나 니시다를 찾아갔다가 헛물을 켜고 돌아설 때에는 말그대로 앞이 캄캄하지

않았던가. 겨우 찾아쥔 한가닥 실마리마저 놓쳐버리고 끝모를 미궁속에서 허둥지둥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죽해온다. 그러던 자기가 불과 몇달만에 향악보를 눈앞에 두게 되였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꿈만 같이 여겨지기도 하였다. 생각할수록 동포들과 벗들이 고마웠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무슨 수로 자기가 첩첩난관을 뚫으며 예까지 올수 있었으랴. …

《참, 선생님이 오사까로 떠나신 뒤에 인츰 친구 한분이 찾아왔댔습니다.》

상념에 잠겨있는 경식의 귀전에 히사꼬의 청랑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경식은 생각에서 반쯤 깨여나며 중얼거렸다.

《친구?》

그러자 흥오른 히사꼬의 대답이 뒤따랐다.

《예, 박상열이라고 언젠가 선생님이 들려주시지 않았어요. 고서업을 하신다는 그 친구분…》

《박상열이라구?》

대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식은 어리둥절해서 그 이름을 외우며 히사꼬에게 눈길을 모았다. 처녀가 자신있게 되뇌였다.

《분명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박상열이라고. 그의 말이 향악보와 관련해서 선생님과 꼭 만날 일이 있다더군요. 친구분인데다 몹시 바빠하시는것 같기에 선생님이 오사까로 간 사연을 그한테 대드렸는데 혹 제가 잘못한건 아닌지…》

히사꼬는 말끝을 흐트리며 경식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가 경솔하게 처신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였다.

경식은 얼떠름한 속에 히사꼬가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박상열이 어떻게 별안간 찾아왔댔을가? 향악보와 관련해서 꼭 만날 일이란 대체 뭔데? 그렇게 바쁜 일이라면 히사꼬가 대준대로 오사까로 달려왔을텐데 거기서 그를 본적은 없지 않은가? 하긴 그 넓은 오사까에서 사람을 찾는다는게 쉬운노릇은 아니지. …

아무튼 반가웠다. 무슨 일로 찾아왔댔는지는 알수 없지만 필경 박상열이 약속을 지켜 민족의 재보를 찾는 일에 발벗고 나섰으리라는 생각에 코허리가 시큰해왔다. 경식은 반색을 감추지 못하며 처녀에게 말했다.

《그 친구에게 이야기해주길 잘했소. 그러고보니 벌써 소식을 보냈어야 하는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만.》

바야흐로 향악보를 손에 넣게 되였다는 사실을 그 불같은 친구가 안다면 얼마나 기뻐 날뛰랴. 인제 당장 그에게로 달려가고싶은 충동이 불끈 솟았지만 시미즈와 약조한 시간이 경식의 발목을 붙잡고있었다. 가슴이 설레였다. 향악보를 찾으면 박상열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그간 쌓인 회포를 실컷 풀리라 속다짐하며 경식은 걸음을 다그쳤다.

얼마쯤 더 걸어 갈래길이 나졌을 때 히사꼬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처녀는 끼였던 팔을 살며시 뽑더니 한쪽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 이리로 가야 합니다.》

《그래, 오늘 정말 수고가 많았소.》

경식은 처녀에게 진심으로 사례했다. 헌데 웬 일인지 히사꼬가 선뜻 움직일념을 안했다. 처녀는 뭔가 말할듯말듯 머무적거리다가 잠시후 들고있던 손가방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는것이였다.

《이건?…》

경식이 영문을 몰라하자 히사꼬가 주밋거리며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 2만엔입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향악보를 찾는데 보태주십시오.》

경식은 아연해지고말았다. 히사꼬에게 있어서 2만엔은 적은 돈이 아니였다. 수입이라야 아버지가 받는 많지 않은 원고료와 히사꼬자신이 번역이며 자료조사 같은것을 위탁받아 벌어들이는것이 전부인, 게다가 병약한 어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무슨 여유가 있어 2만엔을 내놓는단 말인가. 십중팔구 살림을 위해 애써 모아온 돈이거나 애용해오던 물건이라도 팔아서 마련한 돈이 분명했다. 경식은 눈뿌리가 저려드는것을 느끼며 처녀를 나무랐다.

《히사꼬, 성의는 알겠소만 이러면 안되오.》

그러거나말거나 히사꼬는 한사코 봉투를 건네주려 한다.

《선생님, 받아주십시오.》

별수없이 경식이 어성을 높이고말았다.

《대체 날 뭘루 만들자는거요?!》

성난 그의 모습앞에 히사꼬가 한순간 주춤거렸다. 너무 몰인정하게 군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처녀의 성의를 뿌리치자니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경식은 울상이 되여 굳어진 히사꼬를 외면한채 단호히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잠시후 히사꼬가 따라와 앞을 막아나서는것이 아닌가. 고개를 가로저어 뺨에 드리운 머리칼을 다급히 걷어내며 히사꼬는 애원하듯 경식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용서하세요. 전 단지 선생님을 돕고싶어서…》

새소리처럼 맑던 처녀의 목소리가 서운함과 안타까움에 눌려서인지 저으기 흐려있었다.

경식은 우두커니 멈춰선채 히사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것 같은 처녀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선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가슴이 찌르르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좋은 처녀였다. 돈이 가장 값비싼 명함장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도금칠한 떡쇠같은 위선과 기만의 자본주의세상에서 저렇듯 의로움을 위해 진심을 쏟는다는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더우기 타민족에 대한 배타의식이 우심한 이 섬나라 땅에서 량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민족적편견의 장벽을 과감히 뛰여넘은 처녀가 마음속으로는 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처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돈까지 받을수 있단 말인가.

받아서는 안되는 돈이였지만 그렇다고 처녀의 성의에 찬물을 끼얹기도 난감해 경식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서글픔에 잠긴 히사꼬의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보잘것없는 돈인줄 압니다. 그래도 힘자라는껏 선생님을 돕고싶습니다. 선생님, 그렇게도 제 도움이 부담스러우신가요. … 선생님이 이 돈을 물리치시면 전… 다신 선생님앞에 나설 자신이 없을것 같습니다.》

불시에 처녀의 목소리가 떨려났다.

경식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본의아니게 자기가 히사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던것이다. 그는 눈길을 허둥거리며 처녀를 불렀다.

《히사꼬!》

가느다랗게 좁혀진 처녀의 깜장눈에 눈물이 가랑거렸다. 하얀 브라우스에 곤색치마를 받쳐입고 하소하듯 버티고 서있는 처녀의 모습에서는 단지 서러움만이 아닌 야속함과 오기가 내풍기고있었다.

그 모양이 똑 고집스러운 녀학생같아 경식은 그만에야 빙그레 웃고말았다. 사랑스러운 처녀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뛰여드는 처녀의 그 당돌함도 사랑스러웠고 인간의 지성과 량심을 무조건 믿는 청춘다운 그 랑만도 사랑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처녀의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었지만 경식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허나 공연한 노력이였다. 어느새 그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히사꼬가 재빨리 경식의 손에 봉투를 쥐여준것이다.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경식이 황황히 봉투를 도로 주려 했건만 처녀는 벌써 저만치로 달아나고있었다. 그러던 히사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경식을 향해 상큼 머리숙여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는 빨갛게 타는 얼굴을 감추면서 다시금 종종걸음을 놓는것이였다. 즐거운 의무를 수행한듯 통통 튀여오르며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경식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고맙다고 하던 히사꼬의 말이 별스레 귀전에서 그냥 맴돌이쳤다. 뭐가 고맙다는건가? 성의를 받아주어 고맙다는건가?… 자기가 해야 할 인사를 되려 처녀가 먼저 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허거픈 웃음이 나왔다. 처녀의 따뜻한 진정에 후더움을 느끼며 경식은 그대로 돌아서지 않을수 없었다.

허기증이 쓰리도록 빈속을 쥐여뜯었다. 그제서야 경식은 자기가 점심도 건너뛰며 정신없이 돌아쳤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인제는 시미즈가 두말 못하고 향악보를 내놓게 되였다는 생각에 가슴은 흐뭇해서 마냥 높뛰기만 하였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한달음에 아버지한테 안겨드는데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순분이 물기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총총히 올라왔다. 경식은 조바심어린 눈빛으로 남편의 기색을 살피는 안해에게 벙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여보, 인젠 귀국신청을 해도 될것 같소.》

경식의 말에 안해의 얼굴이 금시 환해졌다.

《그러니 그 책을 찾게 되였다는 말씀이세요?》

경식은 헌헌히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나서 홰치는 수닭의 울음처럼 기운차게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우리도 인젠 조국으로 돌아가자!》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이들이 좋아라 다랑귀를 뛰며 어쩔줄 몰라한다. 맏딸 수영이가 대뜸 조국에 가면 자기도 피아노를 배울수 있는가고 물었다. 길을 가다가도 어디서 피아노소리가 들려오면 부러움과 호기심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귀를 기울이군 하는 딸애였다. 경식은 봄무지개마냥 아롱다롱한 꿈들로 가득찬 딸애의 령롱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기꺼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구말구. 조국에 가면 돈 한푼 내지 않고 마음껏 공부도 하고 피아노도 배울수 있단다.》

《야!-》

수영이는 너무 좋아 손벽까지 짜락짜락 치는데 누나의 그 모습에 승벽이 동했던지 막내인 수남이녀석도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칭얼대기 시작했다. 자식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경식은 오래간만에 시름을 잊고 마음껏 껄껄거렸다. 안해도 한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즐겁게 웃었다. 그러는 부모들을 더 기쁘게 해주고싶었던지 수영이가 쪼르르 방 한가운데 나서더니 봄시내물처럼 숫되고 랑랑한 목소리로 학교에서 배운 시를 외우는것이였다.


그 돈을 보세요

누가 보내주셨나

우리 말을 배우라고

아버지원수님께서

보내주신거랍니다


이역에 핀 꽃망울이

마음에 걸려

바다너머 조국에서 보내온

교육원조비랍니다


아 잊지 않을래요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여도 잊지 않을래요

귀한 돈을 보내주신

원수님의 그 사랑을

꿈결에도 꿈결에도

잊지 않을래요


언젠가 조선학교 새 교사건설장에 연예활동을 나왔던 소녀애가 작은 가슴을 들먹이며 저 시를 읊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소녀의 울먹거리는 시랑송을 들으며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눈시울을 적셨던가. 조국이 준엄한 전쟁을 치르고있을 때 피 한방울도 바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였다. 재더미를 가시고 사회주의공업국가를 일떠세우느라 아직은 한푼한푼의 돈이 천금같이 귀한 조국이였다. 그런데 그렇듯 어려운 속에서도 이역만리의 자식들을 조선사람으로 당당히 키우라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마련한 돈을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아낌없이 보내주군 하니 정녕 어머니조국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헌신을 생각이나 할수 있으랴.

뜨거운 사명감으로 하여 경식의 심장은 온몸에 피를 뿜어내며 더욱 힘차게 고동쳤다. 그는 자식들을 가슴에 껴안고 안해에게 후덥게 말했다.

《여보, 우리 조국에 가서 힘껏 일하기요.》

《예.》

남편을 바라보는 순분의 눈길속에 따스한 애정과 소망이 노을처럼 소리없이 일렁이고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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