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제 2 장


5. 《다마무시주점》 주인


《여보게, 나까야마라는 사람을 찾았네.》

흥분을 누르며 알려주는 엄길호의 말을 리경식은 선뜻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누구라구요?》

《〈조선향악보〉를 가진채 행적을 감췄다던 그 사람 말일세.》

엄길호가 되풀이해서야 경식은 귀가 번쩍 뜨였다. 경식은 총련 도꾜도본부의 청사안이라는것도 잊고 엄길호의 두팔을 와락 부둥켜잡으며 소리치다싶이 물었다.

《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대관절 나까야마 모리오가 어디에 숨어있답니까? 》

너무도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우물을 통채로 들고 마실듯 덤벼치는 경식의 모습앞에 엄길호는 빙그레 웃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오사까부본부에서 알려온데 의하면 나까야마는 현재 오사까에서 살고있다고 하네. 헌데 성은 나까야마가 아니라 시미즈라고 바꿨다더구만.》

《시미즈라구요?》

경식이 허거픈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지금껏 나까야마라는 성을 가진 사람만 찾아헤맸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뿐이였다. 뒤미처 불안스러운 위구가 모든것을 지워버리며 그의 마음속에 밀려들었다.

(과연 나까야마가 아직까지 향악보를 가지고있을가? 만일 그도 니시다처럼 향악보를 누군가에게 넘겨버렸다면…)

조마조마한 생각에 가슴이 무죽해오는데 경식의 심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엄길호가 슬며시 덧붙이는것이였다.

《걱정하지 말게. 그 사람에게 분명 향악보가 있다는구만. 그걸 알려주자고 자넬 찾았네.》

《그래요?!》

리경식은 그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엄길호를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엄길호의 온 얼굴에 퍼져나가는 느긋한 웃음발을 알아보았을 때 저도 모를 흥분으로 하여 경식의 두눈구석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경식은 엄길호의 두손을 부여잡은채 고맙다는 말만 거듭거듭 외웠다. 기쁨의 파도가 피줄을 퉁기며 부풀어올랐다. 니시다를 만난 이후 넉달이 넘는 기간 나까야마의 행방을 찾느라고 겪은 그 모든 고생과 괴로움이 삽시에 씻은듯이 사라져버리는것만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는 오사까동포들에게 하게.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 총련조직에서 호소하자 오사까동포들이 제일처럼 떨쳐나서 나까야마를 찾느라고 수고가 많았네.》

희열이 번진 경식의 얼굴을 미덥게 지켜보던 엄길호가 조용히 일러주는 말이였다. 그 말은 천근같은 무게로 경식의 가슴에 실려왔다. 총련조직과 동포들이 그를 떠밀어주고있었다. 그 기대와 믿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텐데… 경식이 이런 생각으로 속을 끓이는데 넌지시 묻는 엄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인가?》

경식은 사지에 뻗쳐오르는 왕성한 힘을 의식하며 주저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하다니요?! 이제 당장 오사까에 뛰여가야지요!》

《하하하…》

벌써부터 장마철 강물처럼 서둘러대는 경식의 그 모양이 즐거웠던지 엄길호가 눈이 없어지도록 한바탕 웃었다.

도꾜도본부에서 나온 경식은 그길로 집에 달려가 대충 행장을 꿍져가지고 역전으로 나갔다.

도중에 히사꼬와 마주쳤다. 협회로 들어가던 히사꼬는 어디론가 급히 떠나는 경식을 보더니 무슨 일인가고 묻듯 살눈섭을 쳐들었다. 그간 향악보때문에 곁에서 왼심을 많이 써온 처녀를 보니 희소식을 함께 나누고싶은 충동이 뭉클 솟구쳐올랐다. 경식은 히사꼬에게 사연을 간추려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히사꼬가 손벽을 치며 탄성을 올리는것이였다.

《야, 선생님! 끝내 해내셨군요!》

금시에 해바라기처럼 환해진 처녀의 얼굴을 보니 경식의 기쁨도 곱절로 더해지는것 같았다. 허나 그러고만 있을 겨를이 없었다. 향악보를 실제 찾아오기라도 한듯 소녀애같이 좋아하는 히사꼬에게 몇가지를 부탁하고나서 경식은 바삐 달음쳐 오사까행 렬차에 올랐다.

그가 오사까에 도착한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리경식은 7월의 열기로 지글거리는 시내의 한복판에 들어섰다. 붐비는 행인들의 살김과 땀내가 배기가스냄새와 버무러져 찜가마같이 물쿠는 도시공기속에 어지러이 떠돌고있었다. 쇠울타리를 둘러친 은행들과 귀중품들이 번쩍거리는 보석상점들, 큰길가에 내다 세운 광고용인형들과 공중전화실들에 붙어있는 상품화된 녀자들의 사진들, 료리점들과 유흥업소들이 겨끔내기로 비집고 앉은 부산한 골목길들이며 진렬창마다에 만화처럼 꾸며놓은 형형색색의 초밥들과 과자들… 무더위와 매연에 찌들어 때이르게 퇴색해가는 나무잎새들을 보느라니 화려한 포장뒤에서 문드러져가는 자본주의사회의 뒤모습이 떠올라 한편 속이 거북하기도 하였다.

경식이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총련 오사까부본부였다. 미리 련락을 받았는지 본부의 젊은 일군 한명이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조동수라고 불러주십시오.》

남방샤쯔차림의 키가 껑충한 그 청년은 척 보기에도 씨원씨원해 보였다. 조동수는 대뜸 경식에게 이꾸노구의 조선시장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경식이 의아해하자 그가 설명했다.

《나까야마를 찾아낸 동포가 바로 거기서 살고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제서야 까닭을 안 경식은 쾌히 청년을 따라나섰다. 오사까시내의 이꾸노구에는 쯔루하시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앉아있는 조선시장을 경식은 잘 알고있었다. 경식이 길을 걸으면서 찾아가는 동포에 대해 묻자 조동수는 생각을 고르는듯 하더니 벙그레 웃으며 이런 말을 들려주는것이였다.

《글쎄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우달근이라고 고향은 제주도인데 현재 지역상공회 부회장을 하시는분입니다. 오사까동포들은 흔히 그를 가리켜 〈만나면 시끄럽고 만나지 못하면 보고싶어지는 사람〉이라고들 한답니다. 고국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분이여서 동포들의 결혼식에서조차 그 례식이 조금이라도 우리 풍속과 어그러지면 큰소리로 호통을 치시군 하지요. 장사일로 일본인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도 그 사람들이 좋다고 환장하는 사시미(생선회)대신에 기어코 된장찌개를 찾아 자시는분이랍니다. 하하하…》

리경식도 소리없이 따라웃었다. 더 듣지 않아도 우달근의 됨됨을 넉넉히 알것 같았다.

어느덧 조선시장으로 들어서는 경식의 눈앞에 그전과 다름없는 낯익은 풍경들이 비쳐들었다. 시장거리를 따라가며 《평양랭면》, 《전주관》, 《고려탕약방》 같은 간판들이 즐비하게 내걸려있는데 개중에는 화려한 색갈의 치마저고리들을 진렬한 조선옷점이며 지어 조선글로 《사랑》이라는 간판을 새기고 재일조선인처녀총각들을 짝무어주는 결혼상담소까지 눈에 띄운다. 시뻘건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며 식혜, 젓갈 같은 조선음식들이 눈길을 끄는가 하면 어물전의 좌판우에서도 일본인들의 식성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조기며 칼치, 대구 같은것들이 저저마끔 싱싱함을 다투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쪽의 떡가게에서는 시루에서 금방 쪄낸듯 한 흰설기떡이 무럭무럭 김을 피워올리고있었고 다른쪽의 지짐집에서는 록두지짐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오가는 사람들의 군침을 돋구고있었다. 들려오는 말들도 하나같이 우리 말들이고 가게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 본듯 한 친숙한 모습들이니 가히 조선시장은 일본속의 조선이라 할만 하였다.

《장사가 잘되는가요?》

옆에서 걷던 조동수가 땀에 젖은 이마를 얼추 문지르며 김치가게녀인에게 무랍없이 건네는 말이다. 발깃한 방울코에 몸집이 오동보동한 녀인이 누긋한 충청도말씨로 청년의 말을 받았다.

《아유, 무더워서 그런지 김치가 놓기 바쁘게 척척 팔려나가는걸유.》

《듣자니 요즘엔 일본사람들도 김치를 만들어 판다면서요?》

《그래두 김치맛 내는디서야 우릴 당할가유. 호호호…》

조동수는 녀인과 웃음을 나누며 가던 걸음을 이어갔다. 몇걸음 걸어가니 이번에는 콩나물이며 록두나물을 차려놓은 가게가 나졌다.

인상이 푸짐해보이는 녀인 하나가 손님들에게 콩나물을 덤으로 한줌씩 더 뽑아주며 설설하게 웃고있었다. 조동수는 기분이 흥그러웠던지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념을 않고 아는체를 하는것이였다.

《아주머니, 콩나물을 참 잘 키웠습니다.》

그러자 녀인의 입에서 억양이 센 전라도사투리가 튀여나온다.

《에그마, 이 아저씨가 볼줄 안당께. 남정네들 물건은 길구 굵어야 좋다카디만 콩나물은 알맞춤히 길러야 제맛이지라오.》

녀인이 흩뿌리는 껄쭉한 롱담에 둘러섰던 사람들속에서 와그르르 웃음보가 터져올랐다. 모두가 생의 의욕에 넘치는 활기로운 모습들이다. 이역땅에서 갖은 차별과 랭대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동포들, 그들의 고단하면서도 대견스러운 모습들을 바라보느라니 경식은 절로 마음이 후더워났다.

오사까는 일본안에서 동포들이 제일 많이 사는 도시다. 거기서도 조선시장이 위치한 이꾸노구일대에 수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이 밀집해서 살게 된데는 쓰라린 사연이 깔려있는것이다. 원래 이꾸노구의 남북으로 흐르는 히라노강은 뱀처럼 꾸불꾸불해서 큰비가 올 때마다 연안의 주민들에게 홍수피해를 들씌우군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수해방지책으로 새로운 운하를 파기 시작했는데 일제는 공사를 위해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서 농토를 빼앗긴 수많은 농민들을 무리로 일본에 끌어왔다. 결국 히라노운하는 조선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로 건설되게 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도 조선사람들은 이꾸노구에 그대로 머무르게 되였고 그러한 이민1세들이 모여든 곳이 웬만한 일본인들은 저습지대여서 살기 꺼려하던 쯔루하시였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귀국하기 위해 오사까에 몰려들었다가 이런저런 사정때문에 주저앉은 동포들로 하여 쯔루하시일대의 조선인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그 시기 동포들이 연명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란 밀주나 암거래밖에 없었다. 일본경제가 완전히 파괴되였던 때인지라 물건만 있으면 부리나케 팔리워나갔지만 일단 경찰에 들키는 날에는 돈이고 물건이고 다 빼앗기고 밑천까지 송두리채 털리워야만 했다. 그런 속에서도 형편이 좀 나아진 동포들이 쯔루하시에 하나둘 구멍가게를 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번성하여 현재의 조선시장을 형성하였던것이다.

새삼스럽게 조선시장의 래력을 더듬어보던 경식은 문득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오늘날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이 이꾸노구일대는 중세기 전기간 《구다라벌》, 《구다라군》으로 불리우던 고장이였다. 그뿐인가. 왜정시대에 조선사람들의 피땀으로 개수된 히라노강도 원래는 《구다라강》이라고 부르던 강이 아니였던가.

돌이켜보면 오사까는 조선해협과 잇닿은 세또안바다의 동쪽기슭에 자리잡고있는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일본에 건너오는 조선사람들의 중요상륙지점으로, 조선문화의 주되는 류입구의 하나로 되여왔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이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쳐주기 위해 와닿은 곳도 지금의 오사까였고 에도막부시절 문예부흥의 원동력이 되였다는 선진문물을 가지고 조선통신사(일본에 보내던 조선봉건정부의 사신)일행이 당도하군 하던 곳도 다름아닌 오사까의 옛 나루터였다. 이꾸노구일대가 그전에 《구다라》로 불리워온것도 먼 옛날 백제인들이 여기서 집단적으로 살고있었다는데서 유래된것이라 한다.

한때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고 그후 에도시대에는 일본최대의 상업도시로 번창했던 오사까, 오늘도 이 나라에서 도꾜 다음가는 도시로 일러주는 오사까의 발전력사는 그러고보면 일찍부터 이 땅에 흘러들어온 조선문화를 밑거름으로 하여 시작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조상들이 개간하고 문명의 씨앗을 뿌려가던 오사까의 이 구다라들판우에서 천수백여년이 지난 오늘에는 그 후손들이 삶을 이어가고있으니 실로 력사의 기묘한 인연이라고 경식은 생각했다.

《인젠 다 왔습니다.》

조동수가 알려주는 소리에 경식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청년은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단 2층집으로 경식을 안내했다. 들어가보니 빠찡꼬를 운영하는 점포였다. 주인에게 전갈을 보내고난 그들은 백여대의 빠찡꼬기계들이 탁탁 메마른 쇠소리를 내고있는 1층에서 잠시 주인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호기스럽고 꺽지게 생긴 50대의 사나이가 웃층에서 내려왔다. 조동수가 경식을 소개하자 사나이는 대뜸 반색을 하며 괄괄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는것이였다.

《오신다는 련락을 받구 기다렸수다. 우달근이라고 하우다.》

짧게 깎아올린 네모진 머리와 툭 불거져나온 동가슴, 귀밑에서부터 턱밑까지 성글고 뻣뻣한 수염터가 잡힌것이 성미가 보통 아닐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익살기가 어린듯 한 부리부리한 눈이며 주눅좋아보이는 넙적한 코집에서는 어딘가 후더분한 맛이 느껴지기도 하는 모습이였다.

우달근과 마주서자 경식은 저도 모르게 고맙다는 인사부터 나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할 일을 대신해주셨으니 무슨 말로 인사를 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식의 진정어린 인사에 달근은 제편에서 펄쩍 뛰였다.

《그게 무슨 당치않은 말씀이시우. 그래 조상의 유산을 되찾는 일이 리선생 혼자만의 일이란 말씀인가요.》

달근은 노여워하는 빛을 숨기지 못하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경식이 난감해서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우달근은 손을 내저으며 그루를 박아 말했다.

《그런 섭섭한 소린 두번다시 하지 마시우다. 말이야 바른대루 경우를 따지문야 인사는 내가 아니라 리선생이 받아야 합지요. 그래도 우리야 장사라두 하면서 살아가지만 선생은 애국사업에 모든걸 바치구있다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부회장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동수까지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바람에 경식은 속이 뭉클해와 더 말을 할수가 없었다. 얼마후 청년이 분위기를 바꾸려는듯 달근에게 묻는다.

《참, 이번에 교육회 부회장사업도 겸임하셨다면서요?》

그러자 우달근은 게면쩍게 웃으며 넙적한 주먹코를 쓸어만졌다.

《허, 그리됐수다.》

《정말 중요한 일을 맡으셨습니다.》

경식이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자 달근이 성큼 말을 받았다.

《그래서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걸요. 터놓구 말해서 학교운영자금을 보태는 일 같은건 상공인들이 합심해서 그럭저럭 해나갈수 있겠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동포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게 과연 조련치 않구만요. 글쎄 내 안 그런다 하면서도 어제 한 동포네 집에 가서 또 큰소리를 치구말았수다. 나하군 그전부터 거래관계가 있어 잘 아는 사람인데 요즘에 와서 이 량반이 만나면 날더러 한탄이우다. 자식들에게 죄를 지었다는거지요. 하긴 그런 소리가 나올만두 하겠습데다. 그 집에선 아이들을 모두 일본학교에 보냈는데 중학교에 다닌다는 맏이녀석만 봐두 아부지라는 말만 내놓구는 제대로 번지는 우리 말이 없다는게 아니웨까. 그것두 애비라는 사람이 아이가 어렸을적부터 아부지라 해야 10엔이라도 쥐여줬다니 그 정도지요. 허 참, 그래 내 어제 그 집에 찾아가서 자식들을 모두 우리 학교에 보내라구 하니까 부모란 사람들이 한다는 소리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취직도 그렇구 애들의 장래를 봐서 별수없이 일본학교에 그대로 다니게 해야 할것 같다는게 아니겠수. 그 말에 그만 부아통이 터져서 나도 모르게 호통이 나갔수다. 허허허…》

우달근은 짐짓 웃어보였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가슴이 아픈 이야기였다. 다른 나라들에서 사는 해외동포청소년들보다 재일동포청소년들이 류별나게 모국어에 서툰 리유도 따지고보면 일본사회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민족차별근성때문이라고 경식은 생각했다. 중국이나 유럽에서 사는 동포들은 자기가 조선사람임을 떳떳이 드러내놓고 살고있지만 재일동포들의 경우에는 조선사람이라면 덮어놓고 천시하려드는 일본사회의 분위기에 눌려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숨기고 일본사람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자식들의 대에 와서는 조선사람도 아니고 일본사람도 아닌 얼치기가 되여버리고마는것이다.

경식이 느닷없이 찾아든 우울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달근은 살림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며 그들을 잡아이끌었다. 하지만 경식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도 지금 당장 나까야마부터 만날수 없을가요?》

금시 떠날 잡도리로 서둘러대는 경식을 보고 달근이 만류했다.

《만나더라두 올라가 땀이나 좀 들이구 떠나는게 어떠시우? 나까야마에 대해서 해줄 소리도 있는데…》

그래도 경식은 여전히 고집이다.

《가면서 들려주십시오.》

《하하…》

우달근은 어쩔수 없다는듯 두손을 들었다.

《거 성미가 나랑 같아서 좋수다. 아무렴,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구 이길로 떠납시다! 대신 일을 보구선 꼭 우리 집에 와야 하우다.》

《그러겠습니다.》

경식이 선선히 동의하는데 조동수가 슬며시 끼여든다.

《될수록 부회장아버님과 밤에는 마주앉지 마십시오.》

《어째서요?》

조동수는 영문을 몰라하는 경식에게 능청스럽게 귀띔해주었다.

《부회장아바인 다 좋은데 술만 마신다 하면 끝을 모르는분이랍니다.》

《하하하…》

폭소가 터졌다. 잠시후 청년이 자못 미안해하며 경식에게 말했다.

《저도 함께 가면 좋겠지만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도와드릴 일이 생기면 아무때건 알려주십시오.》

경식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청년과 헤여졌다. 달근이 부채 두개를 들고나와 그중 하나를 경식에게 쥐여주는데 조금후 택시가 도착했다. 두사람은 시미즈를 찾아 떠났다.

《헌데 나까야마를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참, 시미즈라고 성을 바꿨다면서요?》

차안에서 경식이 이렇게 묻자 우달근은 벌씬 웃으며 사연을 말하는것이였다.

《전쟁이 끝나서 몇해동안 내가 오사까교외의 토목공사장에서 일한적이 있었는데 어느해인가 하루는 동포인부들이 날 찾아와 하소연을 합데다. 그들의 말인즉 자기네 함바주인이 나까야마라구 몇달전에 도꾜쪽에서 왔다는자인데 인부들의 품삯을 가지구 어찌나 롱간을 부리는지 언제 한번 임금을 제대로 쥐여본적이 없다는것이였수다. 더구나 조선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습게 보구 더 그런다는거우다. 하는짓이 괘씸해서 동포인부들이 사리를 따지며 들이댔더니 그자는 되려 깡패들을 부추겨 폭행을 가했다는게 아니웨까. 그 말을 들으니 부아통이 터져옵데다. 난 동포인부들에게 당장 함바를 옮기라구 이르고는 그길로 동료들과 함께 달려가 나까야마와 깡패놈들을 되게 혼내주었수다. 그러구나서 나까야마에게 두번다시 공사장근처에 얼씬했다간 뼈도 못 추릴줄 알라고 을러멨구요. 그때 난 한창시절이였던지라 완력이 괜찮았수다. 인부들속에서 어지간히 신망도 있던 까닭에 공사장의 감독들도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 형편이였지요. 그만에야 함바문을 닫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된 나까야마는 다음날부터 매일같이 나한테 찾아와 손이야 발이야 빌더군요. 난 다신 인부들에게 못된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거듭 받구서야 그자를 용서해줬수다. 그뒤로 나까야마는 퍼그나 조심스러워졌구 더우기 동포인부들과 관계되는 일들은 나한테 꼭꼭 물어보구야 처리하군 했다우.》

달근은 그 시절을 돌이켜보며 껄껄 웃더니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해쯤 지나서 나까야마는 시내의 한 려관주인네 집에 데릴사위루 들어갔수다. 그 집에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원체 약아빠진 작자였던지라 장인의 려관을 탐내 들어간거우다. 그때 나까야마는 장인의 성을 따서 시미즈라구 변성했지요. 그후 장인이 려관을 물려주구 교외로 옮겨가자 시미즈는 려관을 술집으로 바꿔 지금까지 운영해오구있수다. 얼마전에 본부일군에게서 사람을 찾아보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대뜸 시미즈가 짚이더군요. 그래 슬그머니 그자의 리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더니 리선생이 찾는 나까야마가 틀림없습데다.》

《그렇게 됐군요.》

리경식은 알만 하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결국 나까야마가 성을 바꾼것은 데릴사위는 처가집 성을 따라야 한다는 일본풍습에 따른것이였다. 뿌리와 성씨에 대한 집착이 류달리 강해서 《성을 갈겠다.》는 말을 제일 드팀없는 장담의 표시로 여기는 조선사람들의 관념에서 볼 때 일본인들의 성씨관념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실례로 력대 일본《천황》은 성조차 없는가 하면 도요또미 히데요시도 본래의 성이 《기노시따》였지만 상전인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신하중의 신하라는 의미의 《도요또미》라는 성을 하사받았다는것이다. 전후 7년 남짓이 총리로 집권해있은 요시다 시게루 역시 성이 《다께우찌》였지만 남의 집안의 양자가 되면서 《요시다》로 변성하였다 한다. 하기야 귀족이나 무사들을 제외한 절대다 수의 서민들이 명치유신이후에야 비로소 국가의 불호령에 못이겨 벼락치기로 수다한 성들을 만들어 달았으니 자기네들의 성에 애착이 있을리는 만무한것이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내키는대로 성을 바꿔버리는 일본인들이고보면 지난날 조선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황당한 짓거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리해가 가는 일이였다.

잠시 동안이 흐른 뒤 경식이 또다시 달근에게 물었다.

《정말로 시미즈가 여적 향악보를 가지고있을가요?》

《그자가 직접 나한테 말했는걸요.》

달근의 거침없는 대답이였지만 그래도 경식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달근의 얼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속마음을 넘겨다봤는지 우달근은 경식의 어깨를 허물없이 두드리며 호방하게 웃는것이였다.

《하하하… 걱정마시우다. 시미즈가 어떻게 쉽사리 그런걸 털어놨는가싶어 미심쩍어하시는가본데 그럴 연고가 있수다. 이전부터 그자가 하는 술집이 신통치 않았수다. 결손을 보는게 례상사인데다 어쩌다가 흑자를 낸다 해도 워낙 주색을 밝히는 시미즈인지라 남아나는게 별루 없었으니까요. 장인령감은 자기가 긁어모은 재산을 사위놈이 다 날려버린다구 늘쌍 야단을 쳤다질 않수. 언제부터던지 시미즈는 보잘것없는 싸구려술집을 걷어치우구 빠찡꼬기업을 해보겠다구 무던히도 안달아했수다. 아닌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신경쓸것 없이 그저 기계하구 1대1로 대하면 되는 빠찡꼬야말로 섬나라근성이 센 일본사람들의 성미에 그중 알맞는 노름놀이지요. 오사까의 적지 않은 우리 동포들이 빠찡꼬 같은 유기업으로 한밑천을 잡을수 있은것두 기본은 그 점을 적절히 리용했기때문이우다. 시미즈도 그 흉내를 내보려구 작년에 빠찡꼬점이라는걸 하나 차려놓았더랬지요. 헌데 밑천두 못 찾구 쫄딱 녹아나는통에 빚더미만 걸머졌수다. 그도 그럴것이 빠찡꼬운영이라는게 보기엔 그러루해보여도 상당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빠찡꼬장사를 거덜내구나서 시미즈가 불쑥 날 찾아와 한다는 말이 몇달동안 우리 빠찡꼬점의 운영비중 얼마를 자기가 부담할터이니 나와 동업을 하게 해달라는거우다. 그자의 속셈인즉 동업이라는 간판을 걸고는 내게서 빠찡꼬영업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뽑아내자는거였지요. 난 대번에 걷어차버렸수다. 눈꼽자기만 한 돈을 내밀구 남의 염통을 빼먹겠다는 심보두 얄미웠거니와 평소부터 제 뼈땀은 흘리지 않구 남을 등쳐먹을 궁리만 하는 그자를 탐탁치 않게 보아왔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나오니까 찰거마리같은 그자는 문돌쩌귀가 닳도록 우리 집에 드나들면서 그전날의 인연을 봐서 찾아왔으니 다문 한달만이라도 동업을 하게 해달라구 애걸복걸하더군요. 그러겠으문 그러구 그깐 소린 들은체두 않구 지내오는데 시미즈가 리선생이 찾는 나까야마라는걸 안 다음에는 생각이 달라집데다. 며칠전에 시미즈가 또 찾아왔기에 난 그자에게 〈조선향악보〉란 책을 가지고있다는게 사실인가고 직방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그자는 어떻게 그걸 아는가구 눈이 퀭해하는거우다. 난 속으로 됐다 하구 무릎을 치구나서 내 친구 한사람이 요구해서 그러니 그 책을 넘겨주면 그쪽의 부탁을 생각해볼거구 그러지 않으면 아예 말도 말라는 식으로 들이댔수다. 시미즈는 웬 떡이냐구 좋아하면서 그 자리에서 내 제의를 답삭 받아물었지요. 허허… 돈만 알구 머리에 든건 쥐뿔도 없는자이니 그럴수밖에요. 그러면서두 얼마간의 사례금은 받아야겠다고 잊지 않구 뒤를 달더군요. 처음엔 그자가 요구하는 사례금을 즉석에서 찔러주구 향악보를 찾아오려구 했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했수다. 원체 내가 고서물계를 잘 모르는데다가 까나리도 밸을 따구 먹을 좀상스런 그자가 무슨 잔꾀를 부릴지 모르겠더란 말이우다. 그래 시미즈에게 인차 내가 친구를 데리고 갈터이니 그때까지 책간수를 잘 하라구 든든히 오금을 박아놨지요. 여하튼 나한테 붙지 못해 달이 뜬자이니 약속을 어기진 못할거우다.》

그제서야 경식은 안도의 숨이 나갔다. 우달근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더우기 깊어져 그는 궂은일에 장알이 박힌 달근의 손을 잡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가슴이 달아올랐다. 이런 미더운 동포들이 일본땅 곳곳에 있는데 두려울게 무엇이랴 하는 생각에 경식의 심장은 북처럼 쿵쿵거리고있었다.

요도강을 건너 요도가와구에 얼마쯤 들어섰을 때 우달근은 차를 세우게 했다. 차에서 내린 경식은 우달근을 따라 어느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대기는 쏟아지는 땡볕속에 여전히 찌물쿠고있었다. 종이등과 작은 기발들을 내건 점포들과 포장마차들을 지나 휴지와 담배꽁초들이 행인들의 발길에 채워 나딩구는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불현듯 달근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가리켜보이는것이였다.

《저게 시미즈의 술집이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제정때 흔하던 구식의 벽돌건물이 알락달락한 색유리로 《다마무시주점》이라고 새긴 간판을 달고 서있었다. 경식은 우달근과 함께 그리로 다가갔다. 허나 온 정신이 시미즈에게만 쏠려있던 나머지 그 시각까지도 경식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었다. 오사까에 들어선 첫 순간부터 줄창 뒤를 밟고있는 누군가의 지꿎은 눈초리를…

골목길과 면한 주점의 입구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두개의 류선화화분이 문지기마냥 놓여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접대부 하나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다가와 물었다.

《어디로 안내해드릴가요?》

우달근이 쥘부채를 꺼내여 주르르 펼쳐들며 위엄있게 말했다.

《안내할건 없구, 거 주인한테 가서 〈아리랑〉주인이 왔다구 이르게.》

《예.》

접대부는 공손히 대답하더니 사뿐사뿐 잔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식은 훌훌 부채질을 하며 주점안을 둘러보았다.

주점은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오밀조밀하게 꾸며져있었다. 축음기에서 인생을 영탄하는 남성가수의 노래소리가 지루히 흘러나오고있었는데 실내 한켠에는 캬바레를 본딴듯 무도장 비슷한 공간까지 차려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탁에만 손님들이 있을뿐 주점안은 퍼그나 한적해보였다. 어디선가 남녀의 축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나는쪽을 바라보니 술집 작부인듯싶은 녀자가 여드름투성이의 새파란 녀석을 끼고 나무계단을 따라 2층에서 내려오고있었다.

《웃층에도 방들이 있는게지요?》

경식이 이렇게 묻자 달근은 입가에 쓴웃음을 실으며 대답했다.

《영업이 시원치 않으니까 저렇게 녀자들까지 팔아가면서 고객들을 끌어보려는거지요. 2층에 그런 별실들이 여러개 되우다.》

《경찰에서 가만 놔두는가요?》

《경찰두 한통속인걸요. 이런 색주가가 어디 한두개라구요. 시미즈가 한다는 장사라는게 전부 이러루한거우다.》

달근의 말을 들으니 한때 적산물자를 빼내기 위해 미군장교들에게 전처까지 섬겨바쳤다는 시미즈의 구저분한 과거가 떠올랐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로 수단을 가리지 않는자이니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겠다고 경식이 마음을 공그르고있는데 저쪽에서 비린청으로 반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굴러왔다.

《핫하하…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게 아닙니까. 우상이 이렇게 나를 다 찾아오실줄이야…》

조막만 한 머리에 반들반들 기름을 발라 가리마를 탄 일본인이 작달막한 몸을 경망스럽게 달랑거리며 이리로 오고있었다. 그자가 다름아닌 시미즈 모리오라는것을 경식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미즈는 와이샤쯔바람에 나비넥타이를 조여매고 가슴에 란초꽃을 꽂고있었는데 녀자용같이 사치한 은테안경을 걸친 해반지르르한 얼굴에서는 짧은 코수염이 달싹대고있었다.

《내 그러지 않던가, 인차 오겠다구.》

시미즈가 가까이 왔을 때 우달근은 거드름스레 한마디 던지고나서 경식을 소개했다.

《인사하게. 전번에 이야기한 내 친구네. 도꾜의 중요한데서 리사를 하시는분이지.》

달근이 그럴듯하게 소개하자 시미즈는 목구멍에서 짜낸듯 한 웃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갑삭거리는것이였다.

《하하… 우상의 친구분이시라니 참말로 반갑습니다. 마시기 좋기는 묵은 술이요 믿기 좋기는 오랜 친구라던데 실은 저도 우상과는 오래전부터 연분이 두터운 친구올시다. 그렇지 않소이까, 우상?》

시미즈의 낯간지러운 소리에 우달근은 고개를 외로 틀며 이마살을 찡그렸다. 하건만 시미즈는 오뉴월 쉬파리 찜쪄먹을 비위살로 달근의 팔을 잡아이끌었다.

《자, 모처럼 이렇게들 오셨는데 어서 웃층으로 올라갑시다. 어서요.》

달근이 그러는 시미즈를 제지시켰다.

《가만, 우린 바쁘네. 여기서 잠간 용건을 얘기하지.》

《뭘 그러시오, 우상!》

《글쎄 그렇게 하자니까.》

달근의 태도가 단호한것을 본 시미즈는 별수없다는듯 두사람을 구석진 곳의 식탁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좀전에 사내를 바래주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작부에게 분부조로 이르는것이였다.

《오이, 하나꼬. 여기 차를 좀 내오라구.》

그러거나말거나 우달근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활활 부채질을 하며 시미즈를 다몰아댔다.

《일전에 나와 약조한건 잊지 않았을테지.》

《아, 그 고서 말인가요. 아무렴, 우상의 부탁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미즈는 연신 웃음을 남실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너무도 일이 순조롭게 돼가는 바람에 경식은 저으기 얼떨떨할 지경이였다. 우달근과 거의 비슷한 년배 같은데도 《우상, 우상!》 하며 상전이나 섬기듯 갑신거리는 시미즈를 보니 한편으로는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는데 시미즈가 넌짓 경식에게 묻는다.

《그 책이 퍽 희귀한 물건인가 봅니다. 우상이 이다지도 관심하시는걸 보니…》

엑스광선마냥 훑어보는 시미즈의 약빠른 눈길에 리경식은 버쩍 정신을 차리지 않을수 없었다. 달근의 퉁명스러운 대꾸가 그를 도와주었다.

《친구의 부탁이라서 그런다질 않아. 그새 혹 마음이 달라졌다면 더 긴말할것 없네. 여기 아니라도 우린 가볼데가 또 있으니까.》

우달근이 부채를 접으며 몸을 움쭉하자 시미즈가 황급히 만류했다.

《아, 우상! 이거 왜 이러시오. 이 시미즈가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나이라는거야 우상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 때 작부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시미즈는 다소 긴장된 공기를 눅잦혀보려는지 터져나갈듯이 풍만한 작부의 육체를 할끔거리며 딴전을 부렸다.

《오늘은 하나꼬가 차를 자주 끓이는구나.》

주인의 은근한 수작질에 그 녀자는 습관처럼 방긋이 웃음의 분칠을 해보이고는 소리없이 들어가버렸다.

《자, 차라도 좀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시미즈는 곰살가운 어조로 두사람에게 차를 권하더니 자기가 먼저 차 몇모금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리고는 해말쑥한 얼굴에 반지럽게 다스려진 미소를 그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것이였다.

《기실 그쪽에서 요구하는 책으로 말하면 이전에 내가 빚을 준 대신 저당으로 잡아놓았던 물건입니다. 그때 본 손해가 워낙 약차해놔서 쉬이 내놓고싶지 않지만 하하… 우상과의 남다른 연분도 있고 해서…》

《얼마면 되겠나?》

시미즈의 잔사설을 무질러버리며 달근이 데설궂게 내뱉는 물음이였다. 순간 작고 동그란 은테안경속에서 시미즈의 눈알이 팔팔 돌아갔다. 잔머리를 굴리는지 얼마동안 코수염만 만지작거리던 시미즈는 이윽고 얄망스러운 표정을 띠우며 선심이라도 쓰듯 대답한다.

《에라,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우상의 친구분에게 5만엔이상이야 부를수 없지요.》

《5만엔?》

달근의 한쪽눈이 찌붓해졌다. 그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월급쟁이의 첫 임금이 대체로 1만엔안팎이였으니 5만엔이라면 적은 돈이 아니였다. 우달근은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뚜부럭거리며 시미즈를 향해 어성을 높였다.

《허, 사람을 뭘루 보구 그래. 5만엔이면 웬간한 빠찡꼬가게 하나를 차릴수 있는 돈이야!》

그러는 달근에게 시미즈가 또다시 설레발을 치며 수다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 우상, 아무러면 내가 우상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리까. 실제 5만엔이라는게 내가 입은 손실액의 1할도 못되는 액수올시다. 마음 같아선 우상의 친구분에게 거저 드리고싶지만 내 처지에서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거야 우상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로선 우상의 체면을 봐서 최대한 헐값으로 부른겁니다.》

그때였다. 리경식의 웅글은 목소리가 시미즈의 줄사설을 누르며 들려왔다.

《5만엔을 내겠습니다.》

너무도 성큼 튀여나온 대답에 우달근도 시미즈도 어리둥절해서 경식을 바라보았다.

사실 오사까에 오면서 경식은 그 정도의 차비는 해가지고 떠났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도 5만엔이라는 돈은 결코 보잘것없는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민족의 소중한 문화재가 시미즈같이 천박한 시정배들의 입에 흥정거리로 오르내리는것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수 없었던것이다. 경식은 주저없이 자기가 한 말을 다시한번 힘주어 되뇌였다.

《우리가 찾는 고서가 틀림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5만엔을 내놓겠습니다.》

시미즈의 얼굴에 금시 희색이 떠올랐다. 시미즈는 입가에 차오르는 쾌심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경식에게 침발린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우상의 친구분이 다릅니다. 늘 이런분들과만 거래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핫하하…》

하긴 5천엔 대신 잡아두었던 저당물을 앉은자리에서 5만엔에 팔게 되였으니 시미즈로서는 횡재라고 생각할만도 할 일이였다. 시미즈의 그런 꼴이 얄미웠던지 우달근이 버럭 역정을 냈다.

《거 호들갑은 그만 떨구 빨리 책을 내오지 못할가!》

《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이자 말을 못 들었어? 틀림이 없으면 당장에 값을 치르겠다질 않아!》

어찌된 영문인지 시미즈가 선뜻 움직일념을 못하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달근이 거듭 재촉해서야 시미즈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사정을 터놓는것이였다.

《하? 아무래도 오늘 당장은 곤난할것 같습니다. 실은 현재 그 물건을 장인에게 맡겨놔서…》

《무어라구!》

달근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시미즈는 급해맞아 허둥지둥 설명했다.

《그런게 아니라 우상,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우상도 아다싶이 내가 이래저래 장인의 돈을 얻어쓰느라 별수없이 적지 않은 물건들을 처가에 담보로 맡겨놓지 않았습니까. 내 장인이란 두상이 제가 싼 똥도 남주기 싫어하는 성미올시다. 당신네 하고 이렇게 간단히 말이 끝날줄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그 책을 찾아오는건데 참말로 죄송하게 되였습니다.》

시미즈는 연송 고개를 갑신갑신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련발했다. 경식의 심정은 여간만 뒤숭숭하지 않았다. 기름쥐마냥 반지러운 이 인간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좀처럼 가늠할수가 없었다. 경식은 의혹과 불신이 가득찬 눈길로 시미즈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그자에게 물었다.

《처가가 어데 있는가요?》

시미즈가 교외의 구마또리에 있다고 대답했다. 구마또리라면 예서 퍼그나 떨어진 곳이다. 경식은 며칠후 다시 와줄수 없겠느냐고 간청하는 시미즈에게 쇠빛이 번쩍이는 눈길을 던지며 단호히 말했다.

《이제 곧바로 구마또리에 갑시다.》

《그게 좋겠수다.》

달근이 대뜸 호응해나섰다. 그러자 시미즈가 황겁해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우상, 이렇게까지 서두를거야 있습니까. 지금은 한창 영업중이여서 참말로 내가 움직이기 곤난한데요.》

《그럼 우리끼리라두 가야지.》

우달근의 이그러진 대꾸에 시미즈는 더욱 바빠하며 통사정을 했다.

《당신네끼리 가봐야 장인하고 말이 통하지 않을겁니다. 아아, 좋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중으로 련락을 취해 가져다놓겠으니 래일 아침에 다시 와주십시오.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소이다.》

시미즈가 애원하다싶이 매여달리는 바람에 경식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시미즈의 말대로 자기들끼리 가봤댔자 사위가 맡겨놓은 물건을 낯모를 사람들에게 닁큼 내주지 않으리라는것은 뻔한 일이였다. 경식이 난감한 눈빛으로 달근을 바라보았다.

우달근도 같은 생각인지 뚫어지게 시미즈를 노려보다가 부채질을 활활 하며 감때스러운 어조로 따져묻는것이였다.

《분명 오늘안으로 가져다놓겠단 말이지?》

《예 예, 물론입지요, 물론입지요. …》

시미즈는 거퍼 장담을 쏟아놓으며 시설을 떨었다. 달근의 묻는듯한 눈길이 경식에게로 향해졌다. 한동안 생각을 해보던 경식은 시미즈에게 일렀다.

《좋습니다. 돈을 가지고 래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순간 시미즈의 얼굴에 언제 그랬냐싶게 다시금 해사한 웃음발이 감돌았다. 시미즈는 입이 벌어져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꼽작거렸다.

《고맙습니다, 그리해주신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부탁합니다.》

눈치를 보니 정말로 시미즈는 5만엔이라는 돈을 놓치기 싫은 모양이였다. 경식이 어느 정도 안심을 하는데 달근이 눈을 부릅뜨고 시미즈에게 오금을 박았다.

《래일 아침에 또 헛소릴 하면 나하구 인연은 그것으루 끝인줄 알게!》

《원 그럴리 있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래일 아침엔 어김없이 물건을 보게 될겁니다.》

두사람은 시미즈의 알랑거리는 소리를 등뒤에 남긴채 주점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안에서 날쌔게 한마디 덧붙이는 시미즈의 비린청이 들려온다.

《우상, 나하고 동업하기로 한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달근은 대답대신 쾅하고 문을 후려닫았다.

《저런 작자가 부른 값을 그대로 성큼 받아들이다니요. 리선생두 참 고지식하시우다.》

밖에 나서자마자 달근이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리경식은 허허 하고 웃기만 했다. 달근은 속이 내려가지 않는지 푸념을 그치지 않았다.

《내 5만엔이 아까와서 그러는게 아니우다. 리선생이 찾자는 그 책인즉 왜놈들이 우리 나라에서 도둑질해간 재물이 아니웨까. 그깟놈들 귀통을 한바탕 후려갈기구 뺏어와도 시원찮을 일인데 달라는대루 돈까지 치러줘야 하니 허 참…》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노릇에 우달근은 씩씩 황소숨을 몰아쉬였다. 그의 기분이 리해되였다. 경식은 서근서근한 어조로 달근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 심정은 저도 마찬가지지만 어쩌겠습니까. 잃어버렸던 보물들을 되찾자니 그만한 대가는 각오할수밖에요. 그나저나 부회장아버님이 애써주신 덕에 예상외로 이번 일이 순탄하게 풀려가는것 같습니다.》

《그런 말 마시우.》

우달근의 뚝한 대꾸다. 경식은 그러는 그에게 의문스러운 점을 물었다.

《헌데 향악보를 처가집에 저당잡혔다는 시미즈의 말이 정말일가요?》

경식의 물음에 달근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럴수 있수다. 번번이 처가집을 등쳐먹자니 그런 식으루 이것저것 수중의 물건을 억지루 떠맡기구는 돈을 뜯어내군 했다니까요.》

《그래요? 헌데 우리끼리 처가에 가겠다니까 왜 그리도 바빠나했을가요?》

《허, 거야 불보듯 뻔하지요. 제 장인앞에선 항상 우는소리를 하는자인지라 처가에 돈냄새를 피우기 싫은데다가 거래를 제가 독차지하려구 그러는거겠지요. 그 정도루 좀상스런 녀석이여서 지금에 와선 시미즈의 장인도 사위를 쓴외 보듯 한답데다.》

《…》

경식은 고개를 지수굿한채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데 우달근이 그의 속마음을 짐작한듯 주먹코를 어루쓸며 헌헌히 말하는것이였다.

《거 내 생각 같아선 별루 근심할게 없어보이우다. 원체 시미즈가 돈이라문 체면이구 뭐구 다 구겨박는 위인인데다 노상 빚군들한테 시달리는 형편인지라 다른 생각을 할리 있나요. 아마 오늘중으로 책을 가져다놓으려구 벌써부터 눈에 황달이 떴을거우다. 게다가 이 틈을 타서 나와 동업까지 성사시키려는 작자가 아닌가요. 허허허…》

달근의 우선우선한 소리를 들으니 경식의 마음도 얼마간 개운해졌다. 달근은 그길로 경식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조동수의 말대로 우달근은 여간한 대주가가 아니였다. 그날 경식은 달근에게 붙잡혀 밤이 지새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지만 향악보를 찾게 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경식은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쉬기에는 너무도 흥분되여있어 그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우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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