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제 2 장


4. 일본《호리야》


(내가 향악보의 행처를 알아냈다구? 이건 무슨 그믐밤의 홍두깨 같은 소린가?…)

안경알속에서 탐욕스럽게 희번득이는 가루베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문뜩 이자가 자기를 떠보려 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실없는 소문이군요.》

시답지 않은 투로 이렇게 대꾸하고난 경식은 가루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루베가 짧은 눈시울로 눈망울을 덮으며 껄껄 웃었다.

《핫하하… 이래 뵈도 내가 문화재분야에선 귀가 꽤 밝은편인걸요.》

그래도 경식이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털어버리지 않자 가루베는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실토정을 하는것이였다.

《허, 이거 별수가 없구만요. 리선생이 날 믿지 못하니 진실을 말할수밖에… 딴은 이찌가와씨에게서 리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찌가와?》

리경식의 눈섭이 구붓하니 곤두섰다. 그가 알고있는 일본인동료들중에 그런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것이다. 선뜻 짚이는데가 없어 경식이 머리를 기우뚱거리는데 갑자기 히사꼬가 놀라며 소곤거렸다.

《아, 니시다씨가 말하던…》

경식은 그만 굳어져버리고말았다. 그럼 향악보때문에 니시다를 찾아왔었다던 그 이찌가와란 말인가. 아연함을 금치 못하는 두사람에게 가루베가 능글거리며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옳습니다. 그도 니시다씨를 만난적이 있다더군요. 며칠전에 난 그 이찌가와라는 사람을 찾아갔더랬지요.》

가루베는 히벌쭉이 웃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인즉 리선생이 향악보를 가지고 사라진 나까야마의 행방을 알아냈다는겁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리선생의 거처며 래력까지도 이찌가와씨에게서 얼마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인젠 내 말이 믿어지겠지요. 하하… 아무튼 리선생의 재주가 놀랍군요. 나도 나까야마를 찾자고 사처에 수소문해보았건만 아직 아무런 단서도 쥐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보매 가루베의 말은 사실인것 같았다. 경식은 뭐가 뭔지 통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대체 이찌가와란 어떤 사람인가? 얼굴 한번 마주한적 없는 생면부지의 그 사람이 어떻게 날 알고있는걸가? 게다가 내가 나까야마를 찾아냈다는 왕청같은 소리는 가루베에게 왜 했을가?… 꼬리를 물고 솟구치는 의문들을 종잡을수 없어 경식은 속으로 랭가슴을 앓았다.

사실 니시다를 만나고 온 이후 그자신도 나까야마의 행방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오고있는터였다. 총련조직과 동포들이 그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하건만 여태 신통한 소식을 듣지 못해 속을 썩이고있는데 터무니없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된것이다. 가루베와 이찌가와… 니시다를 찾아갔던 두 사나이들과 묘하게 맞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착잡하게 얼크러진 정황속에서도 한가지만은 비슷하게 넘겨짚을수 있었으니 그것은 가루베도 이찌가와도 아직까지는 나까야마의 행처를 모르고있다는것이였다. 구태여 자기의 허점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경식은 일부러 흔연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가루베에게 말을 건넸다.

《글쎄요,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가루베씨가 그 문제와 무슨 련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가루베의 눈가에 능청스러운 빛이 떠돌았다. 잠시후 가루베는 량팔을 십자형으로 가슴우에 틀어얹더니 천연히 본심을 드러내는것이였다.

《터놓고 말하면 나 역시 리선생과 마찬가지로 〈조선향악보〉에 관심이 큰 사람이니까요.》

금시 피가 머리우로 올리뻗쳤다. 하지만 가루베의 속심을 더 들여다봐야겠기에 경식은 못 알아들은체 하고 물었다.

《아니, 가루베씨도 말인가요?… 그건 어째서요?》

가루베가 흔연히 대답한다.

《거야 물론 학술연구때문이지요.》

《그럼 선생님은 고고학외에 옛 음악도 연구하십니까?》

히사꼬의 순진한 물음에 가루베는 머밀머밀하다가 어물쩍 넘어갔다.

《에, 거 뭐라 할가… 우물을 깊이 파려면 자리를 넓게 잡으라는 말도 있지 않소. 하하…》

스님처럼 아닌보살하는 가루베의 거동을 보니 경식은 피씩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허, 학술연구라구?…)

가루베의 과거를 잘 알고있는 경식에게 그런 기만이 통할리 만무하였다. 총칼을 앞세우고 조선의 옛무덤들을 도굴할 때 저들은 《학술연구》를 운운했었다. 도자기며 돌탑을 비롯한 조선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치부의 수단으로 빼돌릴 때에도 저들은 이른바 《학술연구》를 위해서라고 떠벌이지 않았던가. 날강도들이 저들의 죄악을 가리우기 위해 내걸군 하던 《학술연구》라는 간판을 아직도 버젓이 들고다니는 가루베의 뻔뻔함에 경식은 욕지기가 치미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는데 가루베가 하나둘 너울을 벗어던지며 끈덕지게 달라붙기 시작하였다.

《리선생,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난 리선생이 향악보때문에 귀국도 미루고있다는걸 알고있습니다. 또 자기 조국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지고있다는것도 알고있고요. 헌데…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지요. 설사 리선생이 향악보를 가지고있는 사람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쉽사리 향악보를 내놓을것 같은가요?》

《…》

《모름지기 리선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값을 요구할겁니다. 〈조선향악보〉의 가치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아실테니 긴 설명은 필요없겠지요.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여기로 오기 전에 당신의 자금사정에 대해서도 대충 알아보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일본에서야 돈이 모든걸 결정하니까요. 한마디로 리선생의 현재 형편에서 향악보를 손에 넣는다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걸 이야기하고싶습니다.》

경식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없었다. 급작스레 뒤바뀐 화제에 놀랐는지 히사꼬가 불안스러운 눈길로 경식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이쯤되자 가루베는 더욱 기세를 피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리선생, 그 일을 내게 양보하는게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조선향악보〉를 사들일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실 이찌가와씨가 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은것도 그 점을 계산했기때문입니다. 대신 내가 향악보를 입수하면 자기에게 제일먼저 열람시켜달라는 조건부를 걸었지만 말입니다. 자긴 동양음악을 연구하는 아마츄어전문가라나요. 흐흐… 령리한 사람이지요. 그러니 리선생, 진심으로 부탁하건대 나에게 나까야마의 거처지를 알려주시오. 아무래도 뻔한 승부를 두고 공연한 시간과 정력을 랑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경식의 목구멍에서는 쓰거운것이 연송 치밀어오르고있었다. 그것을 꿀꺽꿀꺽 삼키며 가타부타 말을 안하는데 가루베가 그의 침묵을 제나름으로 짐작했던지 다소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이며 눙치려들었다.

《물론 리선생이 향악보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는걸 모르는바 아닙니다. 마땅히 응분의 보상이 있어야 하겠지요. 원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당신이 섭섭치 않을만큼 현금으로 사례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 이거 내가 실언을 했나보군요. 리선생 같은분이야 다른걸 바라실테지요. 소원이라면 내가 수집한 조선문화재들가운데서 몇점을 당신에게 양도할수도 있습니다. 풍문을 들으니 얼마전에 세계적인 미술품경매시장인 미국의 〈소더비〉경매장에서 고려청자 하나가 2만 5천딸라에 팔렸다더군요. 내가 소장하고있는 문화재들 역시 그만한 값은 나가고도 남으리라는걸 장담합니다. 아무튼 당신에게 조금도 손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걸 분명히 약속드리는데 어떻습니까, 리선생?》

가루베의 추근추근한 눈길이 리경식의 얼굴에 지꿎게 늘어붙어 좀처럼 떨어질줄 몰랐다.

경식은 두손으로 얼굴을 문다지며 큰숨을 내쉬였다. 인젠 가루베의 배속에 어떤 시커먼 야욕이 웅크리고있는지 알만 하였다. 참으로 낯가죽이 발바닥같은자였다. 한 인간의 량심을 어렵지 않게 돈으로 환산하려는짓도 철면피했지만 도적질해간 재부를 제것인양 내들고 주인에게 천연덕스럽게 흥정을 거는 저 뻔뻔스러운 행태야말로 얼마나 후안무치한가. 더우기 저런자가 학자의 탈까지 쓰고있다니 실로 기가 막히는 일이였다.

가슴속에서 검붉은 화염이 피여오르는것을 누르며 경식은 곁에서 가슴을 조이는 히사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어떻소, 히사꼬. 방금 가루베씨가 응분의 보상을 하시겠다고 했는데 고작해서 문화재 몇점정도로 향악보를 양보한다면 내가 너무 밑지는게 아니요?》

히사꼬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가루베는 뜻밖이라는듯 입을 쩍 벌렸다.

《허? 인제 보니 리선생 욕심도 여간 아니군요. 좋습니다. 당신의 요구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도록 힘써보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내겐 당신의 구미를 돋굴만 한 진품들이 적지 않답니다. 흐흐…》

그래도 경식은 도리질만 할뿐이다. 은근히 초조해났는지 가루베가 다우쳐물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아직도 부족하신게 있는가요?》

안경알너머로 흰 눈자위를 디룩거리는 가루베에게 경식은 히죽이 웃어보였다.

《글쎄요, 내 생각엔 가루베씨가 소장하고있는 조선문화재들을 통채로 내놓는다 해도 부족할것 같은데요.》

잠시 멍해있던 가루베가 배꼽이 하품할 소리라는듯 밭은 목을 제끼고 껄껄거렸다.

《흐하하… 익살이 여간 아니신데요. 리선생은 아직 이 가루베 신조를 잘 모르시는것 같군요. 흐하하…》

기가 등등해서 너털거리는 가루베를 보느라니 관자노리로 피가 세차고도 아프게 뿜어올랐다. 그렇지만 경식은 내색함이 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왜 모르겠습니까. 가루베씨가 가지고있는 조선문화재들을 다 합치면 남들이 깜짝 놀랄만큼 엄청난 액수라는것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가루베씨, 그 모든것들이 실지로 당신의 합법적소유물이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는가요?》

《그, 그건 무슨 뜻인지요?》

《당신이 주인들에게서 정정당당하게 넘겨받은 문화재들인가 하는겁니다. 내 알기에 당신이 자랑하는 문화재들은 대개가 식민지시절 조선의 옛묘들을 파헤치고 꺼낸 부장품들이라던데요. 그렇다면 당신은 남의 무덤을 팔 때 자손들의 허락이라도 받았는가요?》

《…》

그처럼 너스레를 부리던 가루베의 입이 대번에 얼어붙고말았다. 경식은 얼나간 모양으로 멍청해있는 가루베를 드립다 조겨댔다.

《대답을 못하는걸 보니 주인 몰래 부장품들을 빼내왔다는건데 그렇게 모아들인 물건들을 가지고 과연 자기것처럼 행세할수가 있을가요? 경우를 따지면야 가루베씨로선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골백번 사죄를 해도 모자랄것 같은데요. 그리고 가지고있는 조선문화재들은 전부 주인에게 되돌려주는게 당연한 도리가 아닐가요?》

가루베의 살찐 볼따귀가 팽팽해지고 불거져나온 눈망울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간뿐이였다. 가루베는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빈정대듯 선하품을 집어삼키며 자기 손을 배우에 얹었다. 그리고는 건방진 조소를 입가에 담고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흠,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인데요. 〈아름다움은 그것을 발견한 자의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고려자기 하나만 봐도 그렇게 말할수 있는걸요. 에, 솔직한 말로 우리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전에야 조선인들은 고려자기의 존재조차 모르고있지 않았던가요. 비록 도자기를 만든 사람들은 조선인들이였지만 그 가치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였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조선속담도 있듯이 조선문화재에 대한 애정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당신네보다 결코 못하진 않을것 같은데요.》

《허허허…》

경식은 그만 억이 막혀 궁글은 소리로 웃고말았다. 정말 저런자들에게는 력사의 진실을 리해할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되여있는것인가. 사물현상의 본말을 저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자꾸 흐트러뜨리기때문에 과거를 외곡하는 망언을 떡먹듯이 되풀이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경식은 랭소를 지으며 가루베의 말을 받았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이 하는 가장 심한 욕이 무언지 아는가요? 〈굴총할 놈〉이라는 소립니다. 조상숭배가 고유종교라고 할 정도로 선조에 대한 공경심이 남달리 깊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상의 묘에 손을 댄다는건 꿈에서라도 절대로 용납될수 없는 제일 못된짓이였거든요. 이자 당신의 말대로 일본의 침략이 미치기 이전에 조선의 땅우에서는 단 한점의 고려자기도 구경조차 할수 없었던 리유가 다름아닌 그때문이 아니였던가요. 그런데 19세기 말엽이 되자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편승해서 〈굴총할 놈〉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굴총하는 놈〉들이 바다를 건너 떼지어 밀려들기 시작했지요. 가만, 거 일본말로 그런 놈팽이들을 뭐라고 하던가요? 아, 〈호리야〉(〈도굴쟁이〉라는 일본말)라고 부르지요. 바로 그 일본〈호리야〉들이 조선의 방방곡곡을 돌아치면서 우리 조상들의 령혼이 잠들고있는 옛묘들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지요.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평양에서만 봐도 당시 평양에 살던 일본인치고 고분에서 파낸 옛 거울이나 그릇 같은것을 갖고있지 않으면 머저리취급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으니까요. 고려자기를 비롯한 조선의 유구한 문화재들이 그때부터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는건 당신이 말한

그대로라 할수 있습니다.

하다면 가루베씨, 정녕 당신은 그때 일본인들이 조선문화재에 대한 애정때문에 그런짓들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까? 백주에 다이나마이트까지 터뜨리면서 남의 왕릉을 도굴해간 강도짓을 두고 애정에 못이겨서였다고 변명한다면 삶은 소대가리도 웃지 않을가요? 남의 조상묘를 굴총해서 벼락부자가 된 인간들을 가리켜 조선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자들이라고 부른다면 세살 난 애도 얼굴을 붉힐겁니다. 명백히 그 모든 짓거리들은 탐욕이 낳은 만행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전기회사의 우두머리로 조선에 건너와있던 오구라 다께노스께의 경우만 상기해봐도 충분하겠지요. 조선의 옛무덤들을 얼마나 파헤치고 다녔는지 두더지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리운 그자도 패전후 도꾜에 돌아와서 조선문화재들을 팔아먹으면서 여생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기가 막힌건 그자가 파낸 대다수의 조선문화재들에 〈출처불명〉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는겁니다. 그러한자들에게 있어서 옛묘들과 사찰들을 비롯한 우리 나라 각처의 유적지들은 오로지 노다지금광과도 같은 략취와 치부의 대상일따름이였지요. 본국에서는 가진것이 없어 알몸으로 건너왔지만 조선문화재들을 훔쳐내고 팔아먹은 덕에 밑천 한푼 안 들인채 일확천금을 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는거야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텐데요? 당신이 말하는 기른 정이라는게 바로 그런걸 념두에 두는건가요?》

가루베의 목덜미가 노기로 부풀어올랐다. 가루베는 성난듯이 벌름거리는 코구멍으로 킁킁 코그루를 박더니 간신히 얼굴에 웃음을 바르느라 입귀를 실룩거렸다. 얼마후 그자의 입에서 또다시 궤변이 흘러나왔다.

《조선의 문화재들을 발굴하는 과정에 이러저러한 페단들이 있었다는건 나 역시 부정하지 않습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일본인들의 소행에 불과한것이고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에 대한 구일본의 문화재보호정책은 좋은것이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가요? 데라우찌 초대총독이 조선에서 해놓은 일만 놓고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흔히 조선인들은 데라우찌라고 하면 가혹했던 무단통치부터 떠올리지만 문화재분야에서는 그도 조선을 위해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겼습니다.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공포한것도 그렇고 총독부박물관을 세워 훌륭한 출토품들은 현지에 보관토록 한것도 그렇지요.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진상받은 진귀한 소장품들중 일부를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하였다는 한가지 일화를 통해서도 일본이 일관하게 견지했던 조선문화재보호정책의 진정성을 여실히 엿볼수 있습니다. 에, 물론 조선의 문화재들중 많은 부분이 일본으로 반입된것은 사실이지만 워낙 발굴비용을 대체로 일본사람들이 대주었다는 사정도 있었거니와 세계를 둘러보면 그러루한 사례야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지요. 대표적인 실례로 지난 시기 영국 같은 나라는 식민지였던 인디아나 에짚트에서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을 본국으로 날라갔습니까. 설사 경위에서 다소 유감한 점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그 모든것이 학술연구를 추동하고 해당 나라들의 력사와 문화를 널리 소개하는데 이바지하지 않았던가요. 그런 점들을 생각할 때 과거 우리 일본인들이 한 일들을 두고 굳이 비난만 해야 할 리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가루베는 비둥비둥 살찐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입을 삐쭉거렸다.

뻑뻑한 경련이 경식의 목굽으로 치받쳐올랐다. 불쑥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들이 본국의 법정에서 무죄석방되였을 때 일본전국이 환호를 지르며 살인괴수 미우라를 일약 《국민적영웅》으로 떠받들었다던 지난 세기의 암울한 일화가 떠올랐다. 지금 가루베가 하듯이 자기들 일방의 리익에 부합되는것이라면 저질러놓은 죄악도 스스럼없이 분칠하고 망각하는 도덕적철면피속에서만 일본민족의 생존은 보장되는것인가.

다음순간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에 질려 두사람의 동정만 숨죽인채 살피고있는 히사꼬의 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경식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순진한 저 처녀는 아직 가루베와 같은자들에 대해 모르는것이 너무도 많을것이다. 그렇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이러한 대결이 결코 조선민족과 일본민족간의 대결이 아니라는것을,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고 량심과 파렴치의 대결이라는것을 똑바로 알려주어야 한다.

리경식은 심장의 둔탁한 웨침소리를 들으며 준절한 어조로 가루베의 허울을 발가놓았다.

《가루베씨의 말을 들으니 〈거짓말도 방편〉이라는 일본속담이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력사라는게 마음에 안 들면 아무때고 갈아입을수 있는 옷가지가 아니지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위해 그렇게도 가상한 일들을 많이 했다는 데라우찌가 조선에서 빼돌린 수많은 문화재들로 자기 고향인 야마구찌에 〈조선관〉이라는 진렬관까지 세워놓은 사실은 왜 함구무언하는가요? 게다가 데라우찌의 그 진렬관이라는게 서울의 경복궁을 야금야금 헐어다가 지은 건물이라는 사실은 력사에서 얼마든지 생략할수 있는 한갖 사말사에 불과한것인가요? 비단 데라우찌뿐이 아니지요. 권력과 돈으로 우리의 문화재들을 송두리채 갈취해가려던 일본제국주의통치배들의 죄행을 꼽자면 몇백날이 걸려도 모자랄겁니다.

당신은 과거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들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정책을 베푼것처럼 묘사하는데 저들의 비위에 거슬린다 해서 애국명장들을 칭송한 옛 비돌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것이 과연 좋은 정책인가요? 침략전쟁에 쓸 총포탄을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 전해져오던 전국의 종들과 지어는 사원의 불상이며 불기들까지 닥치는대로 용해로에 처넣은 정책이 어떻게 좋은 정책일수 있는가요? 가루베씨,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지요. 단군관계서적을 포함한 고대사부문의 력사책들을 수십만부나 불살라버리고 우리 겨레에게서 조상마저 없애버리려고 한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을 좋은 정책이였다고 강변한다면 조선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것 같은가요? 반만년의 력사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그처럼 야비한짓을 다하면서도 겉으로는 선전을 위해 조선민족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비용의 극히 보잘것없는 몫을 떼서 박물관을 차려준다, 보수를 해준다 하고 위선을 부렸으니 일제의 조선문화재정책이라는것이야말로 실로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정책의 극치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방금 세계를 둘러보면 그런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 일본이 조선사람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고 한것처럼 영국이 인디아인들을 영국인으로 만들려고 했었는가요? 영국이 인디아인들에게 성과 이름마저 영국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했는가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 세계사를 훑어봐도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일본식민주의의 악랄성이 있는거지요. 단순히 남의 재보를 략탈하는데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깡그리 거세해버리자는것이 일본이 감행한 조선문화재정책의 궁극적목적이 아니였던가요?!》

가루베의 퉁방울눈이 충혈되여 부어올랐다. 그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려고 했지만 웃음은 그의 목안에서 걸리고말았다. 경식의 목소리가 더더욱 강개해졌다.

《가루베씨, 지금 우리앞에는 일본의 전후세대가 앉아있습니다. 그릇이 더러우면 무엇을 담아도 변해버리기마련이지요. 당신이 진정으로 일본의 건전한 미래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죄많은 지난날과 단연히 결별하도록 새 세대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마땅히 당신들은 후대들앞에서 싫든좋든 과거의 진실을 숨김없이 털어놔야 한다고 봅니다.》

《건방진 소리!》

가루베가 광포해진 눈을 부릅뜨며 버럭 거쉰소리를 내질렀다.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당신이 극언을 퍼부어도 조선에서 내가 진행한 모든 발굴은 철저히 학자로서의 진지한 연구적태도로 일관된 과학적발굴이였다고 나는 떳떳하게 말하는바요! 내가 가지고있는 조선문화재들도 법에 의해 인정된 당당한 내 재산들이구! 이게 바로 과거의 진실이요! 당신은 이걸 인정해야 해!》

받으려는 황소마냥 머리를 수굿한채 길길이 날뛰는 가루베를 보자 경식의 부르쥔 주먹이 참을수 없이 찡찡 울었다. 꽝! 경식은 식탁을 내려치며 그자를 향해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불길처럼 내뿜었다.

《무엇이 어쨌다구? 당신 같은자가 감히 과학적발굴을 운운할 체면이나 있는가! 실지로 과학적발굴을 했다면 응당 실측도와 사진들로 안받침된 상세한 발굴보고서들을 세상에 내놨어야 할게 아닌가! 헌데 당신은 무려 2천기에 달하는 백제무덤들을 파헤치면서 똑똑한 보고서 하나 내놓은게 있는가 말이요! 결국 당신이 참혹하게 파헤친 그 많은 옛무덤들은 본래의 모습을 두번다시 볼수 없게 되였으니 다름아닌 그런게 도굴이지 뭐가 도굴인가! 그러고도 훔쳐낸 부장품들이 법에 의해 인정된 당신 개인의 재산이라구? 도대체 그 법이라는게 어떤것이였소? 강탈을 하든 매수를 하든 일단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빼내간 문화재에 대해서는 종류나 수량, 경위를 불문하고 그들의 소유권을 보호해준 침략자들의 날강도법이 아니였는가! 그렇게 정정당당한 재산이라면 무엇때문에 당신은 략취한 우리 문화재들을 후꾸오까현의 모처에 감추어두고있는거요? 가루베씨, 말이야 바른대로 당신 같은자들은 학자가 아니라 〈호리야〉라고 불러야 제격이 아니겠소. 그렇소! 당신이야말로 전형적인 일본〈호리야〉요!》

《으음-》

가루베의 악물린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듯 일그러졌다. 경식은 풀길 없는 앙심이 꿈틀거리는 가루베의 면상을 가차없는 눈매로 찍어보며 꾸짖었다.

《아직도 우리를 무력하고 어질어빠진 약소민족으로 아는 모양인데 천만에! 오늘의 조선사람들은 어제날의 조선사람들이 아니라는걸 똑똑히 명심하는게 좋을거요!》

경식은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가루베씨, 아무래도 우린 서로 인연이 닿지 않는것 같소. 가기요, 히사꼬!》

마지막말을 뱉고나서 그가 히사꼬와 함께 얼마쯤 걸어나오는데 뒤에서 가루베의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거야 두고봐야지. 당신이 별의별 모지름을 다 써봤댔자 어차피 〈조선향악보〉는 내 손에 들어오고야말걸. 흐하하핫…》

돌아보니 가루베가 입술을 비틀며 악의에 차 웃고있었다. 경식은 불이 펄펄 타는 눈길로 가루베를 노려보다가 차집을 나왔다.

거리에 나서자 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해질녘의 선기가 미쳐왔다. 경식은 허우대큰 몸을 꿋꿋이 펴고 활개짓을 하며 씨엉씨엉 걸어갔다. 지은 죄를 정당화하며 마지막까지 기승을 부리던 가루베의 가증맞은 상통이 눈앞에서 좀처럼 사라질줄 몰랐다.

얼마나 뻔뻔스럽기 그지없는자인가. 그자도 일본인이니 대부분의 일본인가정들에서 다 그러하듯이 《남에게 페를 끼치지 말라.》는 훈계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났을것이다. 흔히 일본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제일먼저 《오아시스》를 가르친다지 않는가. 《오하요 고자이마스》(편히 주무셨습니까),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시쯔레이 시마스》(실례합니다),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의 첫 글자를 딴 《오아시스》는 남에게 제대로 인사할줄 알고 고마워할줄 알고 사과할줄 알면 인간세상이 오아시스가 된다는 의미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철부지적부터 그렇게 주입받아온 인간들이 어떻게 지난날 숱한 나라와 민족들에게 몸서리치는 재난을 들씌우고서도 《조선을 침략한것이 아니다!》, 《남경대학살은 날조다!》 하는따위의 망언을 아무 거리낌없이 줴쳐댈수 있는것일가. 가루베와 같은자들에게 있어서 《오아시스》는 한갖 남을 얼려넘기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건가, 아니면 속통좁은 자국일변도의 배타주의에 빠진 나머지 타민족에게는 그런 도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건 아닌지… 그런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대로를 뻐젓이 활보하고있기에 아직까지도 일본은 아시아의 고아로, 도덕적미숙아로 남아있는것이 아닌가.

치밀어오르는 분기를 누를길 없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처 걷기만 하던 리경식은 뒤늦게야 함께 왔던 히사꼬에게 생각이 미쳤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떨군채 따라오는 히사꼬가 눈에 띄였다. 생기를 잃은 처녀의 창백해진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경식의 마음속에 한줄기 련민의 정이 스며들었다.

걸음을 늦추고 히사꼬를 지켜보던 경식은 그가 다가오자 다소 누그러든 어조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하오?》

히사꼬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일뿐 대답이 없었다. 순진한 기대와 랑만을 머금고 즐겁게 반짝이던 처녀의 두눈이 재빛하늘아래 누워있는 텅 빈 호수마냥 공허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처녀의 눈가에 어려있는 슬픈 그늘이 경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두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걷기 시작하였다.

행인들로 붐비는 거리를 걷던 그들은 인적이 뜸한 간다강기슭으로 들어섰다. 석양녘의 적막한 봄볕이 강물우에 일렁이고있었다. 강바람에 실려온 심정화의 진한 향기가 물비린내와 어울려 페부를 적셔왔다. 목가적인 정경이 심금을 건드렸던지 이윽해서 히사꼬가 혼자말을 하듯 쓸쓸하게 속삭인다.

《좀전에 본 그런 사람들은 추하고 볼꼴없는데 자연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경식은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의 가지마다에 고즈넉이 내려앉는 석양빛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만 옮기고있었다. 그러는데 비애에 잠긴 히사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는것이였다.

《진리는 좋은것이지만 어떤 때는 너무도 쓰디쓴가 봅니다. 조선사람들은 영원히 일본의 존재를 식민지기억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겠지요?》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다 자기자신에게 하는 대답 같았다. 경식은 처녀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용히 말했다.

《억지로 잊는다는건 기억하는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괴롭게 새여나오는 히사꼬의 한숨섞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전 지금 일생의 십자가를 걸머진 심정입니다. 다 우리 일본인들의 자업자득이지요.》

리경식은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걷는 히사꼬를 물끄러미 눈여겨보았다. 전세대가 지어놓은 죄의 그늘에 갇혀 넓디넓은 하늘을 마음껏 쳐다보지 못하는 한 일본처녀를 보니 절로 마음이 서글퍼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처녀에게 겉발린 소리를 하고싶지는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히사꼬에게로 돌아선 경식은 처녀를 마주보며 진심을 터놓았다.

《지나간 일들가운데는 자랑스러운것들도 있지만 부끄러운것들도 있기마련이지. 그렇다고 과거를 단물만 빨아먹고 뱉아버리는 껌처럼 대한다면 그건 자신을 속이는거라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자기라는 존재의 일부이니까. 진정으로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신으로 미래를 열어나가려면 우선 히사꼬 같은 청년들부터가 과감히 어지러웠던 과거를 돌이켜볼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게 중요하지 않겠소.》

어디선가 새크무레한 풀냄새가 풍겨왔다. 경식은 연두빛순이 아련하게 돋아나고있을 봄날의 새 생명을 그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히사꼬가 조선사람들에 대해 옳게 인식하기 바라오. 우리가 혐오하는자들은 가루베 같은 철면피한들이지 결코 일본인민이 아니요. 우리 두 나라 인민이 진정한 화해와 우애를 도모해나갈 때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은 가까운 이웃으로서 래일을 함께 나누게 될거요. 히사꼬,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길이 시작된다고 난 믿소.》

경식은 처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히사꼬의 두눈에 석양의 뜨거운 반사광이 비껴돌았다. 가슴속에서 훈훈한 희망이 솟아나는것을 느끼며 경식은 처녀를 믿음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