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제 2 장


3. 《백자》차집에서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한달쯤 지난 뒤 경식이 고서점 몇곳을 돌아보고있는데 히사꼬가 달려와 숨가삐 알려주는것이였다.

《여기 계시는걸 모르고 한참이나 찾아다녔습니다. 선생님, 가루베상이 선생님을 찾아왔었습니다.》

《누구라구?》

《니시다씨를 찾아와 향악보의 행처를 물었다는 그 대학강사 말입니다. 가루베 신조라고 알고보니 제정때 조선에서 백제고적들을 연구하시던분이더군요.》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소리에 경식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가 좀더 차근히 말해보라고 일러서야 히사꼬는 몇시간전에 가루베가 경식을 만나기 위해 협회사무실에 찾아왔었다는것과 향악보때문에 상론할 문제가 있으니 꼭 만났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향악보때문에 말이요?》

이렇게 되묻는 경식의 얼굴은 저으기 굳어져있었다.

그럴만도 하였다. 가루베 신조라면 면식은 없어도 리경식이 어느 정도 리면을 알고있는 인물이였다. 해방전 공주에서 의사노릇을 하던 가루베는 골동상인 자기 형과 함께 공주부근의 백제무덤들을 중류급에서부터 왕류급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도굴하기로 작정하고 해마다 수백기씩 도굴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라지오방송에 나와 자기가 조선에서 《백제고분 약 2천기를 발굴하였는데 수년전에 소장품들을 전문가에게 평가시켜보았더니 무려 3억 수천만엔에 이르더라.》고 자랑하던 그자의 말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파렴치한자가 《조선향악보》에 눈독을 들이고있다니 그 의도야 불보듯 뻔한것이 아니겠는가.

(그자가 왜 나와 만나자는걸가? 내가 향악보를 찾는다는걸 눈치채고 훼방을 놓자는건가? 혹시 어느새 벌써 향악보를 가로채고 흥정을 하자는 심산이라면…)

이런 생각까지 하느라니 금시 가슴에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것만 같았다. 경식은 거칠어지는 숨결을 애써 눅잦히며 히사꼬에게 물었다.

《만날 시간과 장소는 약속했소?》

《예, 가루베상은 래일 오후 4시 35분에 도꾜대학옆에 있는 〈백자〉차집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겠답니다.》

《〈 백자〉차집…》

리경식도 몇번 들린적이 있는 차집이였다. 오후 4시 35분이라. …착잡한 심경이였지만 굳이 끝자리에 5분을 붙여야만 안심하는 일본인들의 가늘고 꼬밀꼬밀한 시간관념에 은연중 혀를 털지 않을수 없었다.

다음날 경식은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앞서 히사꼬와 함께 《백자》차집에 들어섰다. 가루베는 아직 오지 않은것 같았다. 애상적인 선률이 흐르고있는 차집안에서는 퍼그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떠돌고있었다. 이 차집에서 류달리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것은 벽면에 진렬된 조선봉건왕조시대의 백자기들이다. 손님들이 그 자기들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도록 함으로써 차집의 품위를 돋구고 고객들의 인기를 끌어보려는 주인의 그럴듯한 착상이였다. 그래서 차집이름도 《백자》라고 달아놓은것이다.

《여긴 어느때 와보아도 아취가 느껴집니다.》

곁에서 히사꼬가 감흥어린 어조로 속살거린다.

《이 차집을 잘 아오?》

경식이 이렇게 묻자 히사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들리군 합니다. 와서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저 백자들을 감상하다가 일어서군 하는걸요. 그럴 때마다 저…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어떤 먼곳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해야겠는지… 하여튼 그런 감정에 마음이 이상하게 젖어들군 합니다. …》

하긴 조선의 자기들을 연구하는 히사꼬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였다. 경식은 긴 살눈섭사이로 꿈꾸듯 내다보는 처녀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벽앞으로 다가갔다.

감귤빛벽면우에 잔이며 접시, 주전자와 문방구 같은 조선의 옛 백자기들이 드문드문 보기 좋게 차려져있었다. 갸름한 목고개를 다소곳이 수그린채 앉아있는 자기가 있는가 하면 둥실한 어깨를 건드러지게 추스르며 서있는 자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동산에 떠오르는 달덩이마냥 온몸이 둥그스름한 항아리도 보였다. 자기들은 하나같이 흰빛을 띠고있었다. 그러나 다시금 눈여겨보면 그냥 흰빛이 아니다. 포근하게 내려쌓인 함박눈우에 맑은 새벽해살이 비친듯 깨끗한 담청기가 어려있는 흰빛도 있고 풀벌레소리 유정한 산촌의 밤에 안개발너머로 어슴푸레 돋아오는 달빛과도 같은 흰빛도 있었다. 비와 이슬에 씻기우고 바람과 먼지에 절로 바래진 빛갈, 다감하고 순후한 사람들의 인정과 체온이 얼룩져있는 아늑한 자태, 그것이 바로 조선사람들이 만든 백자의 꾸밈없는 태깔이요, 마음이 아니겠는가.

경식이 백자들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히사꼬가 듣기 좋은 고음으로 살며시 말을 붙여왔다.

《고려청자에는 귀족적인 풍모가 비껴있고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백자에는 소탈한 서민적모습이 있다고 하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단출하고 멋부린 태가 없는데도 얼마나 고고한 멋이 풍겨옵니까. 투박한 서방인들의 눈에는 백자가 처음엔 재미가 없거나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대리석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광채의 미묘한 변화에 차츰 익숙해지느라면 새로운 시각적즐거움을 느끼게 될겁니다. 간결한 모양새와 흰색만으로 빚어내는 저런 운치는 오로지 조선사람들만이 그려낼수 있는 독특한 미의 경지가 아닐가요. 게다가 하나하나의 자기들은 또 얼마나 개성적입니까. …》

경식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히사꼬를 돌아보았다. 애젊은 일본처녀가 조선의 자기들에 대해 그 정도로까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있는줄은 미처 몰랐던것이다. 아는것이 적으면 사랑하는것도 적은 법이다.

《허? 그동안 히사꼬가 퍼그나 깊이 연구했구만.》

《아이참, 선생님도…》

경식의 칭찬을 듣자 히사꼬의 얼굴에 꽃물처럼 고운 홍조가 확 피여올랐다. 경식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히사꼬의 천진한 얼굴을 미소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그가 하던 말을 받았다.

《조선의 옛 물건들은 팔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가 쓰려고 만들었기때문에 물건마다 개성이 나타날수밖에…》

리경식은 앞에 있는 차잔 하나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차잔을 좀 들여다보오. 입언저리가 약간 보로통한데다가 송편을 빚은것처럼 도공의 손자국도 그대로 남아있는걸… 정확한 계산에 의해 매끄럽게 다스려진 유럽의 옛 그릇들에 비해볼 때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이요. 그러면서도 그 자태속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변화와 리듬이 조화롭게 흐르고있소. 담백하고 소박하면서도 어딘가 익살스러운 조선봉건왕조시대 백자들의 저런 모습들을 보느라면 기계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빚은 소담한 때맛과 가식없는 진실성을 느끼게 되지.》

《과연 그렇군요.》

히사꼬가 감탄하며 공감을 표시했다.

《16세기 말엽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원인중의 하나도 조선의 우수한 도자기들에 대한 오랜 욕망때문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제 그때 일본으로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도공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산업은 비로소 획기적인 발전기에 들어설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문록, 경장의 역〉(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이르는 말)을 가리켜 〈도자기전쟁〉이라든가 〈다완(차그릇)전쟁〉이라고 부르는 리유가 십분 리해됩니다.》

《어찌 도자기뿐이겠소. 일본학자들자신도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을 가리켜 〈조선문화를 깡그리 일본에 날라간 문화략탈전쟁〉, 〈사치스러운 해외류학〉이였다고 실토하더구만.》

씁쓸히 웃으며 하는 경식의 말이였다. 불현듯 두사람사이에 거북스러운 침묵이 흐르는데 출입문쪽에서 컬컬하고 쉬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거 내가 좀 늦었는가 봅니다.》

눈길을 돌리니 목이 밭은데다가 배우에 공을 올려놓은것처럼 앞배가 불쑥 나온 대머리 하나가 상아손잡이가 달린 단장을 슬쩍슬쩍 옮겨짚으며 이리로 오고있었다. 고급세루직양복차림에 금테안경을 끼고 받쳐입은 넓은 양복조끼에 금시계줄을 늘어뜨린 그 사람의 행색은 퍼그나 호사스러워보였다.

《가루베상이 오셨습니다.》

히사꼬가 반색을 하며 그에게 경식을 소개했다.

《가루베선생님, 이분이 우리 협회의 리사선생님이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볼이 축 처진 부얼부얼한 얼굴에 한껏 웃음을 바르며 경식을 향해 고개를 갑삭이는것이였다.

《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 정말 감사합니다. 가루베 신조라고 합니다.》

《리경식입니다.》

경식도 간단히 풋인사를 건네며 가루베라는 인물을 주의깊게 여겨보았다. 경력으로 보아서는 쉰고개가 넘었겠는데도 윤택이 흐르는 불깃불깃한 얼굴이며 향수내가 물씬거리는 살집좋은 체구에서는 아직도 걸찬 정력이 느껴졌다. 수족관의 유리처럼 두터운 금테안경뒤에서 능글맞게 희번덕거리는 가루베의 퉁방울눈이 은근히 경식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헌데 두분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하시더랬나요?》

가루베가 훌렁 벗겨진 대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비위좋게 던지는 물음에 히사꼬가 벽에 전시된 백자들을 가리켜보였다.

《방금 리선생님한테서 조선의 옛 백자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던 참이였습니다.》

《오, 그래요?!》

가루베는 대뜸 호기심을 나타내며 경식에게 말을 걸어왔다.

《리선생이 문화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좋은 물건은 좋은 벗과 함께 보면서 즐길 때 그 진미가 더 각별한 법이지요. 이 기회에 나도 선생의 고견을 듣고싶군요.》

경식에게는 그러는 가루베의 과장된 겸양과 인격자연한 꾸밈이 너울처럼 느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구태여 그와 문화재에 대해 거론하고싶은 생각이 없어 경식은 에둘러 가루베의 청을 물리쳤다.

《명작에 무슨 해설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느끼고 즐거워하면 그만이지요.》

경식의 대꾸에 가루베는 둥실한 배집을 흔들며 느끼하게 껄껄거렸다.

《흐하하… 듣고보니 명담이군요. …》

조금후 세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향긋한 내가 나는 차가 나왔다. 살펴보니 따스한 록차가 담겨진 차종들도 모두 조선봉건왕조시대의 백자기들이였다. 가루베가 차종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아는체를 한다.

《허, 역시 이 차집은 간판값을 하는군요.》

가루베는 다이야몬드반지가 번쩍거리는 손으로 조그마한 차숟갈을 쥐더니 다도(차를 달이거나 마실 때의 법식과 례의)라도 행하려는듯 차종의 전을 가벼이 두드려보는것이였다.

《에도시대엔 조선에서 건너온 이런 차종 하나가 한개 성이나 쌀 1만섬과 맞바꿀 정도로 신비로운 기물이였다더군요. 하기야 지금도 조선의 옛 자기를 차그릇으로 가지고있는 일본인들은 어깨를 으쓱거리지만서도 말입니다.》

혼자소리처럼 이렇게 중얼대던 가루베는 천천히 차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본의 어느 관광지에 가든지 2평 남짓한 전통다실(차를 마시는 방)을 하나쯤은 볼수 있지요. 일본처녀들은 아직도 기모노 입는 법과 함께 다도를 열심히 배우고있구요. 무사도가 죽음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다도는 삶의 예술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차문화는 일본문화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전해져왔습니다. 헌데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 조선의 자기문화가 끼친 문화적충격은 무시할수 없는것이라 할가요. …사실 일본문화사의 갈피에 〈고려차완〉이라고 기록된 조선의 차그릇들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일본의 차문화는 개화기에 들어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오늘 여기에 들리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하하…》

차종 하나를 두고 제법 현학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 가루베는 스스로도 자기의 구변에 만족했던지 흐무러진 웃음을 지었다. 가루베를 쳐다보는 히사꼬의 맑은 두눈에도 랑만적인 불꽃이 고요히 일고있었다. 하지만 경식은 느글느글한 웃음뒤에서 탐조등처럼 자기를 뜯어보는 가루베의 엉큼한 눈길을 놓치지 않고있었다.

잠시 말이 없는 가운데 세사람은 제가끔 차맛을 음미해보았다.

《차맛이 깊습니다.》

선량한 미소를 머금으며 히사꼬가 터놓는 느낌이였다. 혼기가 다된 지금까지도 소녀시절처럼 생활에 대한 서정적태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는 처녀여선지 호젓이 차를 마시며 문화재이야기를 듣는 이 자리가 사뭇 즐겁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가루베가 느근한 웃음을 입가에 문채 히사꼬의 말을 받았다.

《인연이 깊으면 차맛도 깊은 법이지요.》

가루베는 차 한모금을 더 마시고나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동호인들과 마주앉아서 그런지 이 자리가 별로 서먹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차를 마시며 삶의 여유와 향기를 함께 나누게 된것도 연분이라면 연분이겠지요. 불가에서 말하기를 옷깃 한번 스치는것도 전생에 삼천년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은즉 아마 우린 삼만년의 인연쯤은 될것 같습니다. 하하하…》

가루베의 너스레웃음에 히사꼬가 따라웃으며 명랑하게 수긍했다.

《저도 〈백제고고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가루베선생님을 뵙게 되여 기쁩니다. 저, 제가 듣기에 선생님은 조선에 계실 때 의업에 종사하셨다는데 어떻게 돼서 고고학에 관심을 돌리게 되셨습니까?》

처녀의 흥이 오른 깜장눈에 그다운 호기심이 한가득 떠돌고있었다. 가루베는 지나친 찬사는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히사꼬의 태도가 싫지 않았던지 흠흠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처녀에게 대답하는것이였다.

《실은 내 고고학연구라는게 골동품을 수집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해야 할것 같소. 이전부터 골동품수집에 취미를 붙인 사람들중에 의사나 판검사가 많은데 그게 다 리유가 있는거요. 히사꼬양은 잘 모를테지만 의사란 직업은 참 단조롭다 하지 않을수 없소. 하루종일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상대하다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던. 또 그런 점에선 판검사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머리를 식히려고 골동품수집에 열을 올리는거지. 나도 처음엔 스트레스나 해소해보려고 골동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노릇이 나중엔 이렇게 고고학자가 돼버리고말았구려. 허허…》

경식은 쓴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스트레스나 취미라는 말로 자기의 흑심을 분칠하는 가루베의 넉적은 소리가 역스럽게 들려왔던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면박이라도 한방 먹이고싶었지만 아직까지 가루베의 속내를 알수가 없어 궁글게 헛기침만 하였다.

(대관절 이자가 무슨 소릴 하려고 이다지 뜸을 들이는걸가? 내가 향악보에 대한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심산인가?…)

아무리 보아도 능갈친자가 틀림없어 경식이 단단히 마음을 다 조이는데 가루베는 의자등받이에 젖버듬히 기대앉아 경식을 건너다 보며 계속 딴전을 부리고있었다.

《그 시절에 난 저런 백자기들도 적지 않게 수집했더랬지요. 에, 기억해보건대 그게 공주의 어느 골동포에서였을겝니다. 내가 조선에서 옛 백자를 처음으로 접하던 곳이 말입니다. 그때 먼지를 뒤집어쓴채 진렬장 한구석에 놓여있던 옛 자기의 희부연 빛갈에서 난 이름할수 없는 애수를 느꼈습니다. 사라져가고있는것의 슬픈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할지, 퇴색한 동양문명의 마지막여광을 보았다고 할지… 아마도 15세기이후 활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의 옛 백자들의 흰 빛갈은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쌓여온 슬픔과 한의 무의식적인 표현이 아닌가 봅니다. 어떤지요, 리선생의 생각은?》

가루베가 명상에 잠긴 철학가같은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말자루를 경식에게 밀어던졌다. 경식을 화제에 끌어들여 분위기를 눙치면서 그의 됨됨이를 타진해보겠다는 속구구같았다.

리경식은 한동안 아무 대꾸도 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으려니 문화재에 스며있는 겨레의 얼을 제멋대로 외곡하는 가루베의 횡설수설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더우기 자기를 쳐다보는 히사꼬의 단순하고 선명한 눈길을 의식하는 순간 경식은 가루베앞에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이윽고 경식은 가루베를 지그시 바라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그런 견해는 식민주의적인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일본제국주의에 충실하였던 어용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적재보들을 어둡고 우울하게 묘사하군 했지요. 그래야만 자고로 조선민족이 불행많고 슬픔많은 초라한 약소민족이였다는 저들의 주장을 안받침할수 있었으니까요.》

한순간 가루베의 얼굴에 당황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거나말거나 경식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사실 도자기만큼 한 민족의 생활과 밀착되여 거기서 우러나오는 미감을 순수하게 나타내는것은 없을겁니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흰색을 숭상해왔습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있듯이 옷도 흰옷을 즐겨 입어왔지요. 한데 흰옷은 조금만 때가 묻어도 볼모양이 없는지라 입자면 많은 품을 들여야 합니다. 어지러워지면 빨아서 말리고 정성껏 풀을 먹여 다시 말립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반드럽게 윤기가 나도록 다듬이질까지 해야 합니다. 사나흘이 지나면 그런 일을 또 반복하고요. 일제때 총독부관리들의 눈에는 이러한 우리 겨레의 흰옷이 아마도 무언의 항거로 비쳤던가 봅니다. 얼마나 비위에 거슬렸으면 시골 장터의 입구마다 검정물을 담은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흰옷에 검정물까지 끼얹으면서 못되게 굴었겠습니까. 허나 수백수천년을 이어온 조선사람들의 〈번거롭고 불편한〉 전통을 끝끝내 허물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그건 깨끗함과 순박함을 좋아하는 조선사람들의 생활정서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흰빛과 어울려 하나의 민족성으로 자리잡았기때문입니다. 조선봉건왕조시대 백자의 흰 빛갈에도 바로 우리 겨레의 그와 같은 정결한 미의식이 담겨져있습니다. 조선봉건왕조시대의 실학자였던 리규경이 우리의 자기를 가리켜 〈깨끗함에 그 장점이 있고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오히려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것이라든가 왕실에서는 물론이고 사대부와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채색자기가 아니라 색택이 우아한 순백자를 제일로 여겼다는 사실을 놓고서도 우리 민족의 독특한 미감을 여실히 느낄수 있지 않을가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보니 순백의 아름다움을 류달리 사랑한 조선사람들의 고상한 뜻을 리해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에 흥분했는지 히사꼬가 기꺼운 어조로 화답하는 소리였다. 언제 보나 감수성이 빠르고 배우려는 의욕이 강한 처녀의 솔직한 태도에 경식의 마음이 훗훗해지는데 가루베도 리해가 간다는듯 짐짓 머리를 끄덕거린다.

《〈순백의 아름다움〉이라… 허, 꿈보다 해몽이라고 역시 문화재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격이 천양지차로 오르내리는가 봅니다. 흐흐…》

가루베의 내리깐 눈길이 비웃는것처럼 보였다. 경식은 속이 울컥했으나 애써 눌렀다. 더이상 가루베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직방 본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 만나자고 한 용건은 뭔데요?》

경식의 돌연한 질문에 가루베는 굳어지는듯 하더니 인츰 느글느글한 웃음을 또다시 얼굴에 그리며 차를 몇모금 들이키는것이였다. 식탁우에 놓여있는 상수건을 들어 느릿느릿 입을 문지르고난 가루베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내놓았다.

《실은 리선생과 긴요하게 상론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겠지.)

경식은 온몸이 바싹 긴장해졌다. 그의 그런 속마음을 꿰뚫어보고있는지 가루베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가루베는 다음 말을 이을 대신 상대방의 초조감을 한껏 간질일 속셈인양 흥클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채 손가락에 낀 다이야몬드반지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얼마간이 지나서야 비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상반신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쑥덕거렸다.

《듣자니 리선생이 〈조선향악보〉의 행처를 알아냈다면서요?》

경식은 졸지에 뻥뻥해지고말았다. 너무도 예상밖의 소리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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