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제 2 장


1. 력사의 상처앞에서


그것은 여러겹의 련꽃잎우에 앉아있는 거부기를 본딴 주전자였다. 거부기의 주둥이는 주전자의 부리를 대신하고있었고 주전자의 아구리부분은 거부기의 등우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련잎으로 형상되여있었다. 그런가 하면 거부기의 꼬리부분에는 련꽃대를 틀어서 만든듯 한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착상이 재미난데다가 청아하고 투명한 푸른색칠물이 고르롭게 입혀져있고 모양새와 크기, 색갈 등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있는 그 주전자는 누가 보아도 공예적가치가 뛰여난 명품이라는것을 쉬이 알아볼수가 있었다.

문성민의 눈길은 사진밑에 붙인 설명문에 가닿았다.

《청자거북모양주전자. 이또 히로부미가 일본왕에게 진상한 고려청자.》

입이 쓰거워났다. 문득 20세기 초엽의 비화 하나가 떠오른다.

《을사5조약》날조후 일제는 리왕족들의 불만을 눅잦히기 위해 창덕궁에 서양식박물관이라는것을 만들어놓았는데 어느날 진렬품들을 구경하던 고종이 고려청자들을 가리키며 《이 푸른 그릇들은 어디서 만들어진것이오?》 하고 의아해서 물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이또가 이 나라의 고려시대것이라고 설명하자 고종은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것이오.》 하며 자못 어리둥절해하더라는것이였다. 그러는 고종앞에서 이또는 더 설명을 못하고 침묵해버리고말았다.

아무리 철면피한 도적의 괴수라 할지라도 진렬대우에 올려놓은 청자들이 백주에 남의 조상묘를 파헤치고 훔쳐온 물건들이라는것을, 더우기 그러한 날강도짓을 적극 조장시킨 장본인이 다름아닌 자기라는 사실은 선뜻 털어놓기가 바빴던 모양이다.

통감자리에 들어앉은 이또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들을 마구 사들여 자기네 《천황》과 고관대작들에게 무더기로 선사하던 시기에 고려의 옛무덤들에 대한 일본인도굴군들의 만행은 절정을 이루었고 일본사회에서 고려자기수집의 대류행이 일어났다는것은 이미 력사에 생생히 기록되여있는 사실이다. 하기에 일찌기 안중근렬사도 자기의 옥중자서전에서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통분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천천히 다음 사진앞으로 걸음을 옮기느라니 이번에는 무참하게 도굴된 가야시대 옛무덤들의 참상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험상궂게 파헤쳐진 봉토, 깨여져나간채 반나마 드러나있는 돌곽, 도굴범들을 저주하는 조상들의 원혼인양 퀭하니 쳐다보는 무덤의 검은 구멍들…

비단 고려와 가야의 옛무덤들뿐이 아니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옛무덤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선조들의 백골이 왜적의 릉멸과 략탈로 말미암아 저렇듯 이 땅의 산과 들에 무주고혼으로 나딩굴었던가. 지어 일제는 움직여갈수 있는 조선의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갈취해가고도 모자라 룡강군의 쌍기둥무덤에서와 같이 움직일수 없는 고구려벽화까지 벽체채로 뜯어가는 짓거리마저 서슴지 않고 감행하지 않았던가. 설사 기적을 낳는다는 현대의 과학기술로 파괴된 유적유물들을 원상대로 복원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슴배여있던 력사의 숨결까지야 어떻게 되살릴수 있으랴.

쓰라린 아픔이 불길마냥 가슴을 지져왔다. 금시라도 터져나올것 같은 분노의 웨침을 성민은 피를 삼키듯 삼켜버렸다.

그 혼자만의 심정이 아닐것이다. 토론회끝에 사진전시회를 돌아보는 북남학자들모두의 심정도 자기와 마찬가지일거라고 성민은 생각했다. 한장한장의 사진마다에 새겨진 일제의 략탈문화재들은 한갖 도난품들이 아니였다. 그것은 침략자들에게 사정없이 물어뜯기운 우리 민족의 살점들이였고 뼈아픈 상처들이였다. 반세기가 넘은 오늘까지도 아물지 않은, 아니 먼 후날에 가서도 쉬이 아물지 못할 참담한 상처들이였다.

온몸을 짓누르는듯 한 압박감에 성민이 저도 모르게 큰숨을 몰아쉬고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박인규가 동포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문성민이 그리로 갔더니 박인규는 앞에 있는 사진을 가리키는것이였다.

《이걸 좀 보십시오.》

사진을 들여다보니 도꾜에 있는 네즈미술관의 정원이였다. 세나라시기의 아담한 돌탑을 비롯하여 고려무덤앞에 서있었던듯싶은 돌사람과 돌짐승 그리고 고려시기의 우아한 부도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동부처며 동종 같은것들이 정원의 여기저기에 버젓이 차려져있었다. 네즈라는 일본자본가가 조선의 옛 미술품들을 많이 략탈해갔다는 사실은 이미전에 알고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제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문화재들이 이역의 한복판에 전리품마냥 즐비하게 놓여있는 광경을 대하니 자연 슬퍼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문성민이 침울한 기분으로 사진을 보고있는데 등뒤에서 동포녀인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해전에 난 저기에 가본적이 있었더랬지요. 그때 미술관 책임자에게 우리 문화재들을 소장하게 된 경위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제정시대에 골동상인에게서 구입했다고만 말할뿐 다른 대답을 더 못하더군요. 물론 미술관에는 문화재들의 원래 위치나 유래 같은것을 기록해놓은 자료도 없었습니다. 력사적가치는 안중에도 없다는거겠지요. 그런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도꾜에 오꾸라호텔이라고 있는데 그 호텔의 뒤에 가보면 왜정때 일본인들이 빼내온 고려석탑이 3개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평남도 대동군에서 가져온 8각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리천에 있던 5층석탑이라는데 일본인들은 중요문화재로 지정해놓고도 보호시설은커녕 안내판조차 세우지 않았더군요. 그런즉 우리의 문화재들이 일본에 실려가 호텔장식품으로 취급받고있는셈이지요. 참…》

녀인은 더 말하기가 괴로운지 쓴입만 다셨다. 그의 말에 수긍을 표시하며 성민은 토론회장의 사면벽에 전시된 사진들을 묵묵히 둘러보았다. 그래도 여기에 소개된 문화재들은 대부분이 소재라도 파악하고있는 유물들이다. 하건만 비할바없이 하많은 문화재들은 행방조차 알길이 없지 않은가. 왜정시대에 처참하게 도굴당한 수천기를 헤아리는 대동강류역 옛무덤들의 유물들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며 금강산 유점사의 금동불상들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들을 비롯하여 원통하게 도난당한 겨레의 재보들은 어디서 볼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일제의 야만적인 파괴로 하여 사명대사의 기적비며 전등사의 동종과 같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들은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져버렸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불을 토하듯 쏟아놓는 누군가의 거치른 목소리가 성민의 심장을 때렸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일본이 얼마나 결정적방해로 되였는가 하는건 근현대사를 대략적으로 훑어봐도 한눈에 알아볼수가 있습니다. …》

눈길을 돌려보니 저쯤에서 리경식교수를 비롯한 북과 남의 로학자들이 모여 소감을 나누고있었다. 방금 말을 뗀 사람은 근대사가 전공이라는 전남대학교의 강교수였다. 거쿨스러운 체구에 관골이 두드러진 강교수는 이따금 이마우에 엉기성기 드리워진 반백의 머리칼을 버릇처럼 쓸어넘기며 울화를 터놓는것이였다.

《개화기의 동학혁명을 철저히 분쇄한것도 일본이였고 조선봉건정부에 처음으로 불평등조약을 강요한것도 일본이 아니였던가요. 일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식민지시대도, 남북분단시대도 없었을것입니다. 국토분단이야말로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남겨놓은 최악의 유산이라고 말할수 있지요. 따라서 이 최악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이 필요한데 오늘날 일본이 우리의 통일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살펴보면 그 또한 한심하기 그지없을뿐입니다. 실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만신창으로 만들고 국토까지 강탈했던 일본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것입니다. 문화재문제도 그래요. 여기에 전시된 자료들이야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거지요. 남과 북을 통털어서 고분들이건 사찰이나 석물들이건 변변하게 남아있는게 과연 몇이나 됩니까. 알려진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여지없이 도둑맞히고 파괴당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기가 막힌건 타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듯 꺼리낌없는 일본이 대조적으로 자국의 전통과 력사보존에는 광적일 정도로 집착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보세요. 교또 같은 경우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여있지 않습니까. …》

강교수는 억이 막히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머리를 수굿한채 듣고있던 리경식교수가 무거운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문제는 일제의 조선문화재략탈행위가 유럽이나 아메리카주의 력사에서와 같은 개별적사람들의 일반적인 재산략탈과는 다르다는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탐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을 영영 없애버리려는 중세기적인 인종멸살사상과 〈야마또민족〉관에 기초한 철저한 문명파괴행위였고 타민족말살국가범죄였습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파괴와 략탈이 구일본의 국가적정책으로 강행되였던만큼 그에 대한 국가적사죄와 배상을 다하는건 일본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함께 뼈저린 민족수난을 통해 얻은 피눈물의 교훈을 후손들이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것 또한 우리모두의 막중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숨을 고루며 조용히 하는 말이였어도 리교수의 궁근 음성에서는 강쇠를 두드리는것 같은 서리찬 기운이 느껴졌다. 성민은 교수의 말에 공감이 갔다.

어찌 지나간 세월의 자랑거리들만이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력사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시대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발굽밑에 치욕당했던 식민지노예시대 역시 민족사의 한페지가 아닐수 없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는자는 과거를 되풀이할 벌을 받는다는 말도 있듯이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였던 쓰디쓴 과거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겨레의 가슴속에 피멍으로 남아있는 수난과 오욕의 상처는 결코 망각하여서는 안될, 대를 물려가며 후손들에게 거짓없이 새겨주어야 할 력사의 값비싼 교훈이 아니겠는가.

성민이 이런 생각을 달리는데 이번에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전에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토론회에서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실태에 대해 발표했던 성균관대학교의 최교수였다. 표정이 적고 선이 곧은 얼굴의 최교수는 말도 수판알을 다루듯 깐깐스럽게 따져가며 하는 학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1965년의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중대한 문제점들을 야기시켰습니다. 흔히 〈한일문화재협정〉으로 불리우는 이 협정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식민지시기의 문화재반출이 불법적행위라는 선언을 협정에 쪼아박지 않은 점입니다. 우리 문화재를 점유하고있는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당시의 〈총독부 법령〉에 따라 등록된것이라는 리유로 저들의 소유를 합법화해나서고있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줍니까. 일본의 식민지통치자체가 불법의 침략행위에 근거한것이고 이러한 불법적인 식민지지배를 법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협정이라면 당연히 모든것에 앞서 식민지지배하에서의 일제의 문화재반출행위를 불법행위로 선언했어야 할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일본에 략탈문화재들에 대한 사죄와 반환의무를 완전하게, 전면적으로 지우지 못한것입니다. 〈한일문화재협정〉은 일본으로 하여금 략탈해간 수십만점의 문화재가운데서 불과 1 400여점만 인도하는것으로서 과거의 범죄를 불문에 붙이고 반환의 책임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주었지요. 그 얼마 안되는 반환문화재를 뽑는데서도 일본은 국가소유품에만 한정하고 공유품이나 개인소유품은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개인소유나 공공단체소유의 문화재가 국가소유의 문화재보다 수량적으로 훨씬 많고 가치에 있어서도 릉가하는것이 많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일본정부는 국유품가운데서도 국보는 물론이고 국보보다 한급 떨어지는 중요문화재지정품조차 제외시켰는가 하면 지어 그 나머지중에서도 같은 종류가 2개이상 있는것들만 반환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결국 반환된 문화재들이라야 태반이 웬만한 일본학교의 유물진렬장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그런것들일수밖에요.

문화재반환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국보급문화재들은 여전히 일본땅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례컨대 일제시대에 헤아릴수 없이 많은 석탑이며 석등 같은것들이 일본으로 실려나갔건만 〈한일문화재협정〉에 따른 반환문화재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되여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개인소유로 되여있다는것이 일본정부가 내건 리유였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량산부부총에서 나온 수백여점의 진귀한 유물들은 반환대상에서 송두리채 빠진채 아직도 도꾜국립박물관에 속절없이 머물러있고 이등박문이 규장각에서 빼내간 문헌들도 도꾜 궁내청 서릉부(일본황실의 족보와 도서, 묘의 관리를 맡은 부서)에 소장되여있는것으로 알려졌지만 반환문화재들속에는 한권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세인들의 눈길이 곱지 않음을 느꼈던지 일본정부는 일본국민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있는 략탈문화재를 자발적으로 기증하는것은 권장할것이라고 협정에 덧붙여놓기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지로 그런 일이 발생될 경우에는 문화재의 국외반출을 엄금하고있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처리한다고 말하고있으니 이 얼마나 겉과 속이 판이한 위선입니까. 과연 일본의 이런 태도를 두고 과거죄행에 대한 속죄의식이 조금이나마 있다고 누가 말할수 있겠습니까. …》

《외교단절각오로 대처해야 합니다!…》

머리로 피가 뻗치는듯 강교수가 다시금 기염을 내뿜는다.

《일본의 후안무치가 계속된다면 남쪽으로선 외교단절도 불사해야 합니다.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배짱을 못 내미는가 하는겁니다.전체 조선민족이 등뒤에 산악처럼 서있지 않습니까. … 〈한일국교정상화〉때를 떠올리면 절로 부아가 치밀어오릅니다. 일제 36년의 대가라는게 고작 3억딸라였지 않아요. 왜 36년만이겠습니까. 〈을사5조약〉때부터 치면 자그만치 40여년입니다. 그 세월 얼마나 많은 겨레들이 죽음을 당하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부원과 문화재가 략탈당했습니까. 헌데 그 값이 기껏해서 3억딸라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애당초 출발부터가 잘못되였던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지금까지도 일본은 걸핏하면 력사를 외곡하고 독도를 제땅이라고 우겨대지 않습니까. …》

강교수는 벌어진 어깨를 들먹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였다. 최교수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한일협정〉때 졸속으로 처리된 일본의 략탈문화재반환문제는 앞으로 있게 될 조일수교과정에서 반드시 응당한 해결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때 가서 반환대상의 범위는 비단 일제시대의것만이 아니라 임진왜란때 략탈당한 무수한 문화재들까지도 포함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일본에 있는 국가소유의 우리 문화재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소장의 략탈문화재들도 전부 반환목록에 올려야 마땅하겠지요.》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깔끔해보이던 최교수의 어조도 저으기 달아있었다.

《그러자면 온 민족의 지략과 힘을 하나로 모으는게 무엇보다 긴절한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그루를 박듯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리경식교수였다. 모여선 학자들이 찬동하듯 고개들을 끄덕였다. 자기들의 어깨마다에 지워진 민족적사명을 가늠해보듯 좌중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데 얼마후 리교수가 자신과 이야기하듯 조용히 뇌이는것이였다.

《잃기는 쉬워도 되찾기는 어려운게 민족의 문화재인가 봅니다.》

흘러간 인생을 지긋이 음미해보는듯 멀리를 둘러보던 리교수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이르러 우뚝 굳어져버렸다. 교수의 눈길이 못박힌 곳에 다름아닌 서만옥이 서있었다. 추억을 더듬는 두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고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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