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4 장


38


《나다, 〈펭긴〉! 난 날아왔어.》

《목소리를 들으니 여전한데 믿어지질 않는군요, 날아왔다니? 〈펭긴〉은 날지 못하는 새가 아닌가요?》

《역시 소옥인 감정을 나눌수 있는 상대거던.》

《호호호, 내가 련인이라도 되는것 같군요.》

《그 이상이지. 보고싶다. 만나는 장소는 극장앞. 저녁 5시 30분!》

《무슨 망책의 지령같군요.》

《어머니의 명령이라면 어떻지?》

《요즘 극장에서 중앙예술단의 공연을 하는데…》

《그 공연을 함께 보자는거야.》

《좋아요.》

동소옥은 오늘 그처럼 잊지 못해하는 옛 합숙사감의 전화를 받았다. 멀리 흑해연안의 장미계곡에서 말그대로 날아왔던것이다. 며칠내로 다시 출국해야 하는 바쁜 길에도 맺은 정을 나누려고 평양에서 예까지 찾아온것이다. 언제나 마음속에 미안함과 고마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녀자가 베푸는 호의에는 진심이 깃들어있어 그를 만나기 위해 외출복차림을 하는중이였다.

나이가 들면서 화장이나 옷차림에는 자연히 관심이 멀어져 어느 옷을 입을가 장을 열어보지만 눈에 뜨이는것이란 연록색방수천으로 지은 솜저고리와 털깃을 댄 외투 한벌뿐이다. 그래도 외교관을 만나는데 외투를 입어야지 하고 생각하던 동소옥의 손이 저도 모르는새 솜저고리를 벗겼다. 가볍고 활동에 편리한 옷이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노상 공장안에서 맴돌며 작업복을 입고 다녀서 외출옷차림이 오히려 거치장스럽게 느껴진다.

설계실 거울앞에서 제모습을 비쳐보던 동소옥은 문두드리는 소리에 무심히 대답하였다. 거울속에서 자기뒤로 나타난 려현석을 보고나서는 놀라지도 않으며 물었다.

《어때요? 촌뜨기같지요?》

《어델 가려오?》

동소옥은 창턱 화분옆에 놓인 록음기를 가리켰다.

《어려운 일이 반복될수록 심리와 정서를 조절하라, 당비서동지가 준 조언이예요. 록음기까지 가져다주시더군요. 음악을 들으라는거지요.》

《나한텐 여유가 없소. 기통가공이 애를 먹이오.》

《내 생각엔 우리가 지금 만드는 합금강의 재질이 문제라고 봐요. 그러니 합금로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거예요.》

려현석의 표정은 몹시 무거웠다. 일에서 전진이 없으니 맥이 풀릴수밖에 있는가. 지구성과 인내성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녀자들보다 못하다는 생각도 이따금씩 하게 되는 동소옥이다. 그러고보면 자기처럼 집요한 녀자도 드물리라. 지금처럼 등뒤에 선 남자에게 얼마나 오래동안 기대를 품어오는가. 이것은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감수한지도 오래다. 그렇게만 여겼다면 자기 성미로서는 벌써 잊은지도 오랬을것이다.

《전 바람을 좀 쏘이고 오겠어요. 늦어도 10시전에는 합금로에 가겠어요. 함께 용융온도를 변화시켜보자요.》

려현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나갔다.

어쩐지 허전해나는 마음을 안고 동소옥은 공장정문을 나섰다.

옛 사감은 약속한 시간에 만나자고 한 장소에서 기다리고있다가 동소옥을 따뜻이 포옹해주었다.

《시들지 않는 나의 꽃! 그새 더 세련되였구나.》

《보고싶었어요. 저한테도 자랑할만 한 일이 생겼거든요.》

《어서 말해봐.》

동소옥이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는 다시한번 열정적으로 껴안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사랑을 원리로, 질서를 기초로, 진리를 목표로, 어떻니?》

《너무 심오해요. 전 점점 단순해지는것 같아요. 보답해야 한다, 보답해야 한다, 이렇게 자기를 떠밀어요.》

《진리란 리해하면 단순한거야. 소옥이가 그걸 깨달았거던. 정말 용타. 생활의 노를 제힘으로 저어 목적한 곳에 이른다는건 결심만으로 되는게 아니지.》

동소옥은 그의 팔을 끼고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렸다.

어느덧 1978년에 들어선것이다.

옛 사감은 자기가 주재하고있는 어느 한 동유럽나라의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명색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있는 그 나라의 청년들은 점차 창조성을 잃어가는 무기력한 존재로 변하여가고있었다. 그들에게는 현재의 누리는 향락만이 존재하는듯 했다. 어디를 가나 병적인 춤판을 보게 되고 젊은 세대의 타락풍조는 시간이 갈수록 만연되여만 가는것이였다. 일하기 싫어하는 건달군들의 대렬이 물결처럼 흐른다니 과연 그 나라 젊은이들은 어데로 가고있는것인가.…

《인간이 살아온 수천만년은 사실상 사람이 자기를 알기 위해 몸부림친 력사라고 해야 할거야. 자기를 안다는것은 세계를 인식한다는것을 의미하지. 왜냐하면 인간을 떠난 세계는 존재하지 않거던. 인류의 이목이 평양으로 쏠리는 중요한 리유는 새로운 철학을 갈망하기때문이야. 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사람을 가장 귀중한 존재로 내세우고 모든것이 인민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우리 나라, 희망과 미래가 눈부시게 찬란한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에서만 찾을수 있지. 어때?》

동소옥은 이상야릇한 기쁨을 맛보았다. 녀자독신자합숙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녀성을 알게 되였겠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걷는 인생길을 무심히 대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별치않은 상대라고 속단하여 배울수 있는 기회를 놓칠지 뉘 알랴. 머리에 든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알리지 않는 법이다.

《옳아요. 전 자기를 이제야 알기 시작한가봐요. 나를 키워준 그품에 대해서, 또 그 열화같은 사랑에 내가 뭔가 보답할수 있다는걸 알았거든요. 그러고보면 이 세상에서 내가 안겨사는 품, 우리모두가 한가정, 한식솔이 되여 행복을 누려가는 내 나라가 제일로 좋다고 생각하게 돼요.》

동소옥은 이 순간에 남계수를 생각했다. 자기를 수석지휘자라고 자칭하는 기사장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크지 않은 공장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모두가 친형제, 친부모처럼 느껴진다.

생활속에서 처음에는 오해를 했었지만 당비서도 진실하고 뜨거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까다로운것이 아니라 절제가 있는 사람이였다. 메마른 성격이라면 어떻게 자기밑의 기술자에게 음악을 감상하라고 권고하겠는가. 녀자의 마음속 대문을 열지 못하는 려현석은 또 얼마나 솔직하고 아름다운 인간인가.

생활의 어려움은 많아도 내색하지 않으며 맡겨진 일에만 한몸을 내댄다. 늙은 어머니와 철부지자식을 안고있어도 언제 한번 그 일로 시름을 드러내는 때가 없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가고 마음을 쓰게 되는것이다.

《내가 소옥일 왜 사랑하는것 같아?》

《진저리칠 고집때문이겠지요.》

《네 리상이 마음에 들어. 행복이란 무엇이겠니? 결코 향락이 아니야. 자기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거다.》

공연을 보고 헤여지면서 그는 동소옥에게 선물을 주었다. 남자들이 쓰는 겨울모자였다. 값비싼것은 아니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져있었다. 사랑을 잃지 말라, 사랑을 간직하라…

동소옥은 추운 겨울밤에 만져볼수록 따스한 온기를 주는 털모자에서 고마운 벗의 진정을 느끼면서도 생각은 어느 한사람에게로 내달리고있었다. 겨울에 모자를 쓰고 다니는 법을 모르는 려현석이였다. 너무 추워 귀바퀴를 번갈아 비벼대면서도 가릴 생각은 왜 안하는지 알수 없었다.

언젠가 귀가 시리지 않는가고 물으니 녀자들은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게 용타고 대답하여 웃고말았다. 그 머리에 씌워줘야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즐거워났다.

《소옥동무!》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자기를 찾자 동소옥은 눈길을 돌렸다. 공연이 끝난 뒤라 밤길에는 사람들이 붐비였다.

누가 나를 찾을가? 가로등불빛으로는 자기를 찾을만 한 사람을 가려볼수 없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웬 남자가 곁으로 다가서는것이였다.

《어마나!…》

《왜? 공장으로 가겠지?》

동소옥은 놀라움과 의혹을 겹쳐안은채 고개만 끄덕였다. 자주 만난적이 있는 낯익은 안전원이였다.

이것이 우연일가, 그가 공연관람을 온걸 아는 사람은 려현석뿐이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나이지숙한 안전원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였다.


북행렬차는 도시에 들어서고있었다. 성에가 내불린 차창밖으로 그것을 확인한 려객들은 벌써부터 짐을 찾아들며 부산을 피웠다.

검은색수건으로 머리를 싸서 외투깃속에 밀어넣은 채련은 등받이에 기댄채 눈을 감고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렬차의 단조로운 진동에 몸을 맡긴채 그는 집요한 사색에 매달려있었다. 이따금 입귀를 찡그리며 무엇인가를 경멸하는 표정을 그렸다가는 인차 지워버렸다.

《모를 일이야.…》

채련은 신음소리같은 말을 나직이 흘리고는 머리를 저었다.

눈앞으로 눈덮인 함주벌의 농촌마을이 다가섰다. 가없는 벌은 흰눈의 광야같이 보였다. 이따금 그 벌로 뜨락또르들이 두엄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나타나는게 전부다.

마을길로 개털모자를 쓴 늙은이 하나가 무던히 큰 새끼퉁구리를 메고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눈밑에는 얼음판이여서 잘못 짚으면 넘어지기 쉬웠다.

농장선전실에서 나온 처녀들이 호들갑을 떨어대다 늙은이를 보고는 소리쳐 부르며 달려왔다.

《할아버지-》

《계환할아버지다야, 쉬라는데두 저렇게…》

《할아버지, 우리가 갑니다.》

새끼퉁구리를 멘 늙은이의 주위에 몰려든 처녀들이 짐을 받아 저마다 메겠다고 야단을 친다. 한 처녀는 늙은이의 팔을 끼고 걸으며 무슨 이야긴가 새처럼 지저귀였다.

겨울 한철은 명의 아닌 명의로 자처하며 농촌마을들을 돌아다니던 채련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앞으로 마주 오는 농장원처녀들속에 묻힌 늙은이가 바로 류계환이였던것이다. 이름이 귀에 익어 선전실마당에 서있는 속보판의 사진을 보니 옳았다. 한때나마 권력의 힘으로 환락을 누리던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수 있었던것이다.

평양에서 여기 농촌에 굴러내려온 사람이 일할 나이를 넘기고도 농사일을 하고있는것이 놀라왔다. 그마저도 자기의 잘못된 지난날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산다는 말을 얻어듣고는 아연해났다. 자기가 참을수 없는 오욕을 감수하며 한 《사냥》이였는데 영영 죽어버린줄 알았던 《메돼지》가 재생을 바라며 아득바득 애쓰는 현실앞에서 채련은 너무도 악에 받쳐 입술을 물어뜯었다.…

렬차가 홈에 멈춰서자 눈을 뜬 채련은 중얼거렸다.

그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입술을 나불거렸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난 죽는 순간까지 승냥이로 남을테다.》

승객들속에 묻혀 개찰구를 나선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님, 나와서 기다린지 오랬어요.》

고깔이 달린 솜저고리를 입은 젊은 남자가 곁으로 다가들며 내키지 않는 인사말을 하자 채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시키는 일이나 바로해라.》

《그 해라에 어디 기를 펴겠나요. 오늘은 어째보는가 했는데 일이 꼬인다니까요. 그러니 낸들…》

《집은?》

금시 사나와지며 채련이 묻는 말에 남자는 눈이 묻은 발을 굴러대고나서 대답했다.

《잡았지요. 아마 마음에 들거예요. 방은 하나지만 세면장에 욕조까지 있는걸요. 그러니 여기에 다시 와서 살 잡도린가요?》

《오늘 그 처녀를 봤다는거냐?》

《극장구경을 왔더군요. 독신자합숙의 이전 사감하구요.》

《외교관이라는 녀자말이니?》

《그 로친네가 늙으면서 더 멋쟁이가 되더라니까요.》

채련은 고개를 쳐든채 걸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재미있어.》

《뭐가요?》

《외교관이라는 그 인물이 말이야.》

《평양에서 사는걸요.》

《그래, 그게 좋아. 각별한 그사이가 말이야.》

《뭐가 좋은지 내 머리를 가지군 알지 못하겠수다.》

채련은 걸음을 멈추고 운전사인 남자를 빗질하듯 바라보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운 꽃을 제것으로 만들지 못할바엔 꺾어버려야 해.》

《오늘은 하마트면…》

채련의 차거운 눈길이 다가들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댔다.

《글쎄 내가 만난적이 있는 안전원이 나타날줄이야…》

멎어섰던 걸음을 옮기며 채련은 남자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댔다.

《내 방도를 가르쳐주지.… 그래, 집 욕조에 더운물을 채워놓았겠지?》

시큰둥한 대답이 나왔다.

《내가 뭐 화부요. 그런 일까지 시키면서…》

《기분전환을 해야지, 그렇지 않아?》

채련이 투덜대는 사내의 얼굴을 차가운 손으로 살뜰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설계실에 돌아온 동소옥은 선물받은 털모자를 생각없이 옷걸이에 걸어놓고 작업복을 갈아입었다. 합금로에서 려현석과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때 누군가가 문기척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정시홍이였다.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하루동안의 사업정형을 알아보는것이다.

《공연관람을 했다면서?》

《예, 중앙예술단의 공연이였습니다.》

《소옥기사가 탕고춤도 잘 춘다지?》

정시홍이 눈귀를 찡그려보이며 물었다. 그쯤한 롱담엔 익숙된지라 동소옥은 어렵지 않게 응대했다.

《바라신다면 기사장동지의 짝패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나야 이젠 늙었지.》

그들이 즐겁게 웃는데 강치명이 들어왔다.

《이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니 좋구만.》

《어서 들어오십시오. 우린 방금 예술에 대하여 론의하던중입니다. 당비서동무가 그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것을 잘 압니다.》

노래를 제일 힘들어하는 사람이 강치명이라는것을 잘 아는 정시홍이 동소옥이에게 눈을 끔뻑하며 말하자 그편에서 손을 내젓는다. 며칠전 가공직장에서 저녁에 오락회를 열었는데 강치명이 걸려들어 된탕을 겪었다. 다행히 남계수가 나서서 2중창을 해주었기망정이지 음치망신을 단단히 할번 하였던것이다.

설계실안을 둘러보던 강치명의 눈길이 옷걸이에 걸린 털모자에 멎었다.

《이 방에 신사풍의 남자가 드나드는게 아니요?》

동소옥은 당비서가 롱담을 하는줄로만 여기며 눈길을 돌리다가 자기가 무심결에 걸어놓은 털모자를 발견하자 입을 서둘러 막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두사람에게 흥미있는 화제거리를 만들어준것이다.

아닐세라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정시홍이 모자를 벗겨오기까지 한다.

《이게 이래뵈도 보통털모자가 아닙니다. 무슨 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공을 잘했는데요. 털이 세가지 색갈을 내는군요.》

《기사장동문 모피장사도 해본게 아닙니까?》

정시홍은 모자의 털을 만지고 쓸어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말했다.

《일본에 있을 땝니다. 오물장을 뒤지며 사는 신세라 꼴이 사람이라 하기가 어려웠지요. 어느날 그 오물속에서 어느 잘사는 녀자가 내버린게 분명한 모피외투 한벌을 얻어내는 횡재를 했습니다. 잘만 손질하면 중고품으로 팔수 있다고 여겼지요. 살자니 별 궁냥을 다해보는거지요. 오리오리 손질하고 빗질을 해도 잘되지 않아 화학시약을 써보았는데 소경이 문고리를 잡은 격이 되였지요. 그때부터 자습으로 화학공부를 시작했구 그 모피외투가 책을 구입하는데 쓰일 돈을 해결해주었지요. 그 덕에 이래뵈두 모피감정은 어느 정도 할줄 알거든요.》

대수롭지 않게 하는 정시홍의 말속에도 그가 이국땅에서 피눈물속에 겪은 가난과 굴욕으로 엮어진 최하층의 인생살이가 어려있는것이였다.

《어디 나도 좀 봅시다. 이거 상표가 요란하구만.》

강치명이 받아쥐더니 들여다보고나서 써보기까지 한다. 동소옥은 숨을 딱 죽이고 다른 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이 모자는 나한테도 잘 어울리는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마치 자기의 소유물이라도 된듯이 흡족해하는 강치명에게 정시홍이 슬쩍 말했다.

《아, 그거야 주인이 정해진 모잘텐데 공연히 욕심을 내십니다.》

《그렇지. 내가 실수를 하는군.》

강치명이 어색한 웃음을 동소옥에게 보냈다. 좀해서 웃을줄 모르고 표정이 굳어서 그러지 당비서도 보통 능청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동소옥은 털모자를 받게 된 사실을 실토했다. 주니 받았지 줄 사람은 없으며 쓰고싶으면 쓰라고 말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솔직한것 같으면서도 솔직하지 않은게 녀자들이라는 말이 있던데…》

강치명이 이렇게 말을 늘어놓자 정시홍이 만담배우나 된듯 재치있게 받아넘겼다.

《물론입니다. 녀자속엔 줄이 긴 드레박을 던져넣어야 소리가 나지요.》

동소옥이 얼굴을 활딱 붉히자 강치명이 모자를 돌려주며 일어섰다.

《너무 알자고 하는것도 실례되는 일입니다.》

《더 알자구 할것도 없지요.》

정시홍이 따라일어나며 말했다. 두사람이 나가자 동소옥은 고개를 숙이고 혼자서 한참이나 웃어댔다.

너무 속을 빤히 드러내보인것 같아서였다. 경솔한데서는 누가 나를 당하겠는가. 색다른 물건인데도 제자리에 건사할줄 모르니 말이다.

《에이, 오늘은 기어이 씌워줄테야.》

동소옥은 장안에 털모자를 넣고나서 합금로에 가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늦어져 서둘러 설계실을 나섰다.

가공한 기통머리를 놓고 남계수와 정시홍, 려현석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소옥이 나타나자 고개를 돌리였다.

《이게 우리가 만든 합금소재로 가공한거예요?》

한손에 기통머리를 든 려현석이 대답했다.

《그렇소.》

동소옥은 가공한 제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쓸어만져보고나서 말했다.

《절삭공구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봐요. 이 합금재료가 부서지는 성질을 가진것 같아요. 그러니 합금재료의 혼합비률을 검토하고 다시 녹여보는게 어떤가요?》

남계수가 듣고있다가 말했다.

《합금소재란 말이지? 그 말도 일리는 있어. 어떻소? 기사장동무!》

《배합비률은 측정기구를 가지고 정확히 진행했지요.》

정시홍이 기술문건을 작업대우에 올려놓았다.

《제가 잘못 생각한것이 있습니다.》

동소옥의 침착한 말에 세사람의 눈길이 쳐들렸다.

《합금강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견해를 앞세우다나니 필요이상의 비률로 원료배합을 진행하게 하였어요. 확실히 이건 모순이예요. 로보트의 기통과 기통머리는 높은 압력을 받지 않으므로 그리 높지 않은 압력을 이겨내면 되거든요. 그런만큼 산소와의 친화력이 좋은 알루미니움합금첨가물을 용융된 상태에서 섞는 방법을 적용해보면 어떨가요?》

남계수가 주의깊게 듣고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해줄노릇이지. 기사장동무!》

《내가 검토를 잘못한탓입니다. 이 머리가 문제지요.》

동소옥이 두손을 잡으며 소심하게 말했다.

《저도 도면을 놓고 오늘까지 생각해본거예요.》

려현석이 돌아서더니 대기하고있던 돌격대원들에게 원료투입을 하라고 지시했다.

송풍기가 돌아가면서 로의 온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주철의 녹음점까지는 두시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려현석이 동소옥에게 눈길로 물었다. 로의 온도를 측정해보던 동소옥의 눈빛이 긴장해지더니 한손을 쳐들어보였다. 그는 막대기같은 봉을 가지고 용해로안의 소리를 잠시 듣고나서 려현석을 찾았다.

《이리 좀 오세요.》

동소옥은 손에 든 봉을 넘겨주며 말했다.

《들어봐요. 이전 온도때하구 소리가 같은가요?》

《매미우는 소리같은게 더 소란스럽소.》

《탄소가 맹렬하게 반응하는거예요. 그 소리가 잠잠해져야 해요. 용융점에서 10분이상 유지해보는게 어때요?》

수많은 시선들이 두사람을 싸안고 긴장하게 바라보았다. 정시홍이 담배를 꺼내여 남계수에게 한대 권했다. 불까지 붙여주는 담배를 연거퍼 빨아대며 남계수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작업장에 들어선 강치명이 분위기를 알아차린듯 조용히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됐소.》

려현석의 말에 동소옥은 눈을 감았다 떠보였다. 그는 남계수에게 시작하겠다고 신호를 하고나서 손을 쳐들었다. 공정을 맡은 돌격대원들이 자기 위치를 차지한것을 확인한 려현석이 쳐든 손을 내리그었다. 한사람이 용해로의 출구에서 넘어가는 쇠물의 온도를 측정하여 알려주자 동소옥이 제비처럼 날아가 확인하고나서 분말상태인 알루미니움첨가물을 투입할 준비를 하였다.

주형에 담기는 쇠물빛을 들여다보며 정시홍이 말했다.

《역시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거던.》

《리치란 언제나 단순한거요.》

남계수가 허리를 두드리며 동소옥을 대견하게 바라봤다.

동소옥이 려현석에게 나직이 말했다.

《나 좀 봐요. 아무래도 좀 기다려야 하니 함께 실험실에 갔다오자요. 잠간이면 돼요.》

합금소재를 놓고 이야기하자는것으로 알고 려현석은 머리를 끄덕였다. 두사람이 걸음을 옮기는데 남계수가 어느새 보고 찾았다.

《현석기산 어델 가나?》

동소옥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잠간 갔다온다는 손짓을 해보이자 강치명은 심상한 어조로 남계수에게 말했다.

《놔두십시오. 저 동무들에겐 바쁜 일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자 정시홍이 제 말을 곁들이는것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 나이엔 눈이 어두워서 좋을 때도 있는거지요.》

퉁을 주는 그 소리에 남계수는 입만 다시였다.

려현석은 동소옥에게 이끌려 설계실에 들어서면서도 기술문제를 놓고 이야기하자는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동소옥의 움직임이 이전같지 않았다. 약간 당황해하는가 하면 동작이 부자연스러운데다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게 더듬거리는것이였다.

《이건 말이예요. 제가 오늘 누구를 만났는데… 극장에서… 그가 기념으로 주기에… 할수없이 받았는데… 한번 맞나 써보세요.》

동소옥이 난데없는 털모자를 씌워주는 바람에 려현석은 어리둥절하여 시키는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한걸음 물러서서 두손을 맞잡고 바라보는 동소옥의 눈빛에서 기쁨이 찰랑거렸다.

《맞아요. 멋있어요.… 제가 드리는거예요. 이를테면 선물이라고 해두자요.》

려현석은 현훈증을 느끼며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이거야…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건데…》

《일없어요. 잘 어울려요. 거절할 생각은 말아요.》

려현석은 심장이 이상하게 높뛰면서 숨이 차오르자 서둘러 모자를 벗어들더니 동소옥의 눈길을 피하며 떨려나는 소리로 말했다.

《난 나를 대담한 사람으로 알고있었소. 헌데… 소심해지는구만. 그건 뭐라고 해야 할지…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되는가. 허허.》

동소옥은 흐려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는 알아요, 다 안다니까요 하는 말을 하고있었으나 온몸은 그와 다른 무엇인가를 바랬다.

《고맙소. 내 쓰겠소. 지금은 건사해두오. 그리구…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가지 않겠소?》

《그래야지요. 옳아요. 고마운건 저예요.》

동소옥이 털모자를 장에 도로 넣고나서 려현석을 바라보다가 앞서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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