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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4일

평양시간


제 29 회


제 3 장


29


옛 사감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명확한 대답은 주지 않았지만 마음의 저울추는 기울기 시작했다. 《동의해요.》라는 대답을 하면 평양에서 그 녀자는 외교관과 함께 여기로 내려오게 약속되여있었다.

이제는 물러서기 어려운 운명의 갈림길에 선 동소옥이다. 번민속에서 모대기던 그는 마침내 외로움에서 벗어날수 있는 생활에 기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래일은 로보트제작과 관련한 최종기술협의회가 진행된다. 그 회의에서는 흥성철제일용품공장 로동계급이 공화국창건 서른돐을 맞으며 내놓게 될 로보트에 《흥성-1》호라는 자호를 달게 될것이다.

《흥성-1》호, 마음속으로 외워보기만 해도 흥분과 감격으로 설레게 하는 명칭이다. 그 보람차고 영예로운 전투에 자기는 참가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죄스러움이 조수마냥 차올랐다.

래일 있게 될 협의회에 참가하기는 하겠지만 자기의 넋은 새가 되여 다른 하늘을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소옥은 마음을 진정 못하며 저녁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래일 협의회문건준비는 다 갖춰놨소. 무척 피곤한것 같은데 일찍 들어가 쉬오.》

《애는 어때요? 그냥 앓는가요?》

《감기요. 어머니가 끼고있으니 약을 먹고 땀을 내면 일없겠지.》

《일없겠지? 현석동지의 그 〈일없겠지.〉가 난 불만이예요.》

《나야 그렇게 생겨먹은걸 어찌겠소. 크롬합금강이 우리가 제작하려는 〈흥성-1〉호의 기본재료로 될수도 있소. 전로에 가서 가동정형을 확인하겠소.》

려현석이 나가자 동소옥은 머리를 싸쥐며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오늘 밤이 지나가면 자기는 한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을 깨끗이 버려야 했다. 한갖 미련으로 마음속에 안고 살기에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사랑이였다. 누가 들으면 조소를 면치 못할 사랑이 자기를 얼마나 오래동안 괴롭혀왔는가. 이제는 그만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금속재료와 인연을 맺고 10여년간 무수히 실험해온 결과들이 다 적혀있는 일지를 려현석에게 정식으로 넘겨주고싶지만 감히 행동으로 옮길수 없었다.

동소옥은 그것을 어디에 놓을가 한동안 망설이였다. 자기와 려현석의 책상은 마주 닿아있었어도 마음은 종시 가닿지 못했던것이다. 그는 선자리에서 생각하고 또 해서야 일지가 놓여야 할 위치를 찾아냈다. 책상모서리가 마주 붙은 곳에 일직선의 금이 그어져있었다. 마치도 넘어설수 없는 경계선처럼… 동소옥은 그 경계선우에 실험일지를 놓았다.

이것이 정녕 잊어서는 안될 한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마주앉아 진정을 털어놓자니 자기가 먹은 마음이 흔들릴가봐 두려워났다. 제일 어려운 때 비겁한 행위를 한다면 배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취급되는것은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할수 있는것은 다했다. 나도 인간이 아닌가. 나에게도 생활을 찾아갈 권리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동소옥은 독신자합숙으로 왔다. 옷이나 갈아입고 체신소에 가서 장거리전화로 옛 사감을 만날 결심이지만 몸이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가. 그는 거울앞에 다가가 그속에 비친 자기를 들여다보았다.

동소옥, 결심했지? 잊으라, 찾으라. 누구도 너를 대신해줄수 없다는걸 알테지?

인간은 인간이고 녀자는 녀자인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단순히 정리해볼수록 명백한것은 자기로서는 선택의 기회를 잃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는 놀란 소리를 냈다.

《큰아버지가?…》

문가에 나타난 남계수를 보는 순간 동소옥은 자기의 마음속을 알고 찾아오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들뛰는것을 느꼈다.

《너 어델 가려던 참이 아니냐?》

《저… 좀…》

동소옥은 얼른 거울에서 물러나며 남계수에게 앉도록 의자를 가져다놓아주었다. 일요일의 합숙은 이 시간이면 조용하다. 합숙생처녀들은 겨울이지만 추위를 잊고 영화관이며 식당출입에 여념이 없다.

《바쁜 일이 아니면 미루고 나하구 집으로 가자.》

《예?》

자리를 잡고 앉은 남계수가 동소옥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이 네 생일이 아니냐. 큰어머니가 기다린다. 오빠들도…》

동소옥은 스르르 침대우에 주저앉았다. 목메임이 잔물결처럼 가슴을 휩쓸었다. 혈육의 사랑을 잃은지 오래지만 그 사랑을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던것이다.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하는 자기에게 기울이는 이 정은 얼마나 뜨거운것인가.

《고맙습니다.…》

《네가 오늘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걸 봐선 딴 생각을 하던것 같구나.》

남계수가 의아해하자 동소옥은 서둘러 눈길을 피했다. 딸자식처럼 여기며 잔정을 기울이는 부모같은분이 아닌가. 어린 나이에 홀로 남은 자기를 데려왔고 제 집에서 키워주며 사회생활의 첫걸음마를 떼여준 은인앞에서 거짓을 범하면 죄로 되리라.

《큰아버지, 전… 사실… 어떤 대상자가 나섰는데…》

남계수의 얼굴은 금시 밝아지며 서둘러 물었다.

《그거 듣던중 반가운 소리다. 무슨 일을 한다더냐?》

동소옥은 합숙사감이였던 녀성에 대하여, 그가 나서서 소개하는 남자에 대하여 사실그대로 이야기하였다.

남계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소옥이가 결혼을 한 다음에도 공장에서 계속 일하면 되는것으로 별치않게 여겼던 그였다. 그런데 대상자로 나선 사람과 결합되면 한달안으로 출국해야 한다지 않는가.

지금 공장은 어려운 과제를 받아안고 들고뛰여야 할 판인데 핵심적위치에 있는 이애가 간다면… 그렇다고 나이를 잔뜩 먹은 처녀가 혼처가 생겨 시집을 가겠다는걸 막아나설수도 없는노릇이다.

그가 지금까지 은근히 바란것은 소옥이가 려현석이와 결합되는것이였다. 처녀는 자기 말을 들을것이라고 믿었고 남자편이 문제여서 이렇게저렇게 줄을 놓아가며 그답지 않게 매우 신중히 알아보았는데 려현석은 재취할 의향이 꼬물만큼도 없는 사람이였다.

《우리 애들이 이붓어미의 눈치를 보면서 자란다면 난 그애들의 어머니를 볼 면목조차 잃은 사내가 되고맙니다. 아무러면 내가 제 자식 둘이야 키우지 못하겠습니까.》

려현석의 심정은 이러했다. 의심할 여지없는 남자의 결심으로 하여 진정으로 도와주려고 나섰던 사람들은 눈굽을 훔치며 물러서군 했다. 남계수는 동소옥의 성격을 알기에 선뜻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스무살을 갓 넘겼을 땐 덤벙거리며 사람들을 웃기는 일을 저지르고 다녔지만 서른살이 지난 오늘은 감히 누구도 범접 못할 오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동소옥이다. 기술에 있어서나 품성에 있어서나 비난받을 일은 조금도 없이 생활하여 입심이 센 녀자들도 혀를 내두른다.

《소옥이야말로 인간개조의 전형이야.》

《소옥이 엄마도 옛날엔 춤개나 췄다누만.》

《그런데 어쩌지. 우리 아가씬 춤하구두 리별을 했으니…》

《일밖에 모르는 처녀할머니가 되는게 아니야. 호호호.》

동소옥은 그러루한 입타령에는 면역이 생겼는지 들으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너만 좋다면 난 반대없다만 공장일이 걱정이구나.》

《현석기사가 있지 않아요.》

《그 사람 말은 달라. 그리구 이걸 네가 기술준비실 책상우에 두고 갔다더라.》

남계수가 가방에서 두툼한 실험분석일지를 꺼내놓았다.

동소옥의 눈길이 놀라움으로 굳어지고말았다.

저게 어떻게 큰아버지의 손에 들어갔는가. 난 그 사람에게 많은 참고가 되기를 바랬는데, 그 일지속에 자기의 마음까지 얹어 그 남자에게 남겨두었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돌아올줄은 몰랐다. 려현석은 이젠 녀자의 마음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하여가는것인가.…

남계수의 마음은 자못 허전하였다. 지금까지 속을 써온 동소옥의 장래문제지만 그것이 예상외의 결과로 번져지는것을 보게 되는 지금의 심정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건전한 리성을 가진 처녀가 행복한 리상을 추구하는것을 어찌 탓할수 있겠는가.

인생길이란 천만갈래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사는것이 인생인것이다. 아버지와는 다른 딸이 아닌가. 이제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자기가 대신할수도, 이끌어줄수도 없는 처녀의 인생길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남계수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내 오늘 네 실험일지를 보느라니 생각이 많았다.》

동소옥은 잘못이나 저지른듯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네가 그처럼 공장을 위해 고심해온줄은 미처 몰랐구나. 고작해야 애물단지가 제구실을 하는 때가 왔다구 여긴게 전부였으니 나도 늙었는가부다. 한건의 기술혁신이 수십수백번의 실패를 겪을진대 그것을 묵묵히 이겨내고 성공을 안아오는 네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네 부모들도 오늘 훌륭히 성장한 너를 본다면 마음을 놓을게다. 아무렴, 우리 소옥이가 정말 몰라보게 자랐어.》

남계수는 가식없는 말을 하고있었다. 진정어린 말마디들이 가슴을 휘저어대자 동소옥은 어지럼증을 느끼는 때처럼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며 무릎우에 떨구었다.

그 누가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알아줄텐가. 바라고바라지만 이루지 못할 소원이여서 마침내는 동요했으며 맹세를 스스로 저버리려 한 자기였다. 과연 이것이 려현석이 언젠가 욕했듯이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변하는 녀자의 마음이 아니란 말인가. 내 이제 어떤 화려한 생활에 묻혀 행복에 잠긴다 해도 마음속 공허는 상처로 남아있으리라. 내가 외면한 거창한 창조적투쟁은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를 한껏 비웃어줄것이다. 사실상 나처럼 량심을 저버린 사람들이 생활일반을 론하는척 하면서 들끓는 현실을 도피하고 투쟁을 외면하는것이 아닌가.

이 순간 동소옥의 망막에서는 불길이 솟구쳐올랐다. 붉은 화광속에 선 한 녀성의 모습이 눈앞을 꽉 메웠다.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을 가진 녀성이였건만 죽음을 몰아오는 불길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생명의 진가를 고상한 희생으로 가르쳤던것이다. 만일 그 녀성이 나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기가 자리를 잡고있다는것을 안다면 수치로 여겼으리라. 용서하세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동소옥은 눈앞에 안겨오는 헌신의 그 모습앞에서 끝없이 속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사랑의 선택은 자유다. 누구도 강요를 못해. 그럼 난 가겠다.》

남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아버지, 절 데리고 가요.… 함께 가겠어요.…》

애원이 어린 눈동자를 쳐들어올린 동소옥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을 이겨낸 간절한 목소리가 울리고있었다.


리건창은 자기 방으로 들어서는 남계수와 동소옥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남계수가 멋진 딸을 옆에 세우고 나타나니 볼멋이 있어. 하하하, 내 방이 금시 환해지는게 알린단 말이요.》

리건창의 기관총 쏘듯 하는 말과 호탕한 웃음소리에 동소옥이 고개를 살풋이 숙이며 인사를 하고 남계수는 무랍없이 응대했다.

《책임비서동지, 내 딸이 잘 생겼지요? 하하.》

《자, 어서 와 앉소. 앉으라니까.》

동소옥은 남계수의 옆자리에 두손을 무릎우에 모은채 소곳한 자세로 앉았다.

《우리 소옥이가 합금철실험생산에서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장해.》

《저야 뭐 한 일이…》

《여보, 남동무. 저애가 몇살이요?》

남계수가 입귀를 찡그렸다.

《애물이우다. 서른다섯을 넘길 잡도리니…》

화제가 첫판부터 자기한테 쏠리기에 동소옥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한심하구만. 동무 책임이 큰줄 아오.》

리건창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어렸다.

《책임비서동지가 좀 도와주시우. 애가 책임비서동지의 말이야 들을지 알겠습니까.》

한숨을 내쉬던 남계수가 이런 투로 다가들자 리건창이 급해난듯 손을 내흔들었다.

《여보, 여보! 이날까지 끼구있다가 이제 와서 나한테 떠밀내기요. 내 힘으로도 사랑만은 해결하지 못한단 말이요.》

동소옥은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울고있었다. 진정어린 사랑을 받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것은 성실한 로동과 진실한 감정이 맺어준 인간들사이의 아름다운 뉴대이리라.

《이렇게 부른것은 조국을 방문하기 위해 유럽에서 오는 구일파동포가 래일 우리 도시에 도착하기때문이요. 물론 안내하는 일군들이 있지만 그 사람은 남계수동무의 구면지기고 소옥이의 아버지와도 잘 아는 사이이기에 소옥이도 함께 오라고 했소. 해외동포가 조국방문의 나날을 즐겁게 보내도록 해야 하겠는데 남동문 기업소의 책임일군이여서 노상 따라다닐수는 없고 해서 소옥동무가 아버지의 옛친구를 동행하면서 따뜻이 돌봐주어 불편이 없이 지내도록 하자는거요.》

수집음을 타던 동소옥의 낯빛이 리건창의 말을 들으면서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없는 과업이였다. 고작해서 금속재료나 관찰하던 내가 어떻게 나보다도 나이도 많고 해외에서 곡절많은 생활세파를 겪어온 해외동포기업가에게 도움을 줄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한다면…

리건창은 동소옥의 심리상태를 환히 들여다보는듯 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소옥동무, 좀 어렵고 힘들수 있지만 오래동안 헤여져있던 아버지를 만나는 딸의 심정으로 진심을 다해 잘 돌봐드리면 되는거요. 동행하느라면 동무도 우리 민족의 불우했던 력사를 알게 될거구 오늘 우리 인민이 누리고있는 존엄과 행복의 무게를 더욱 새롭게 느끼리라 믿소. 그래서 우리는 동무를 믿고 이 일을 맡기는거요.》

지리에서 일어난 동소옥은 떨려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어서 앉소.》

리건창은 구일파가 조국을 방문하게 된 경위와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다난한 인생길에 파란많은 운명의 고비들을 헤쳐야 했던 이 사람은 이역땅에서 살지만 조국을 잊지 않고있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민족분렬의 비극을 아파하고있으며 겨레를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는 애국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는 해외동포였다. 본것이란 이국풍조여서 처음부터 모든것을 다 리해할수는 없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을 기울여 그에게도 따사로운 조국이 있다는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튿날 남계수는 동소옥을 데리고 해당 부문 일군들과 함께 역에서 구일파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훨씬 늙은 백발의 로인을 만난 격세지감으로 남계수는 구일파를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게 얼마만이요, 구일파! 정말 반갑구려.》

《계수형! 이 못난 놈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어 고맙소. 내가 구일파요.》

《어디 다시 보자구. 응! 옳구만. 이렇게 우린 늙은이가 돼서 만나누만.…》

남계수는 구일파를 그러안은채 등을 한손으로 두드리며 보고 다시 보았다. 주름이 뒤덮이고 로인반점이 얼룩진 구일파의 볼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무상한 세월속에 젊음은 사라지고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모습이 자리를 잡은것이다.

《부인은 건강한가?》

구일파가 신유정을 잊지 않고 묻기에 남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동부인하지 않았는데 제가 나오면 실례가 된다면서 집에서 맞겠다고 했네.》

《역시 현숙한 부인일세. 자네가 진정 부럽네구려.》

《무슨 말을 하나. 참, 일파형이 기억하겠는지. 오래동안 나와 같이 일하던 동윤덕이 말이네. 그만하면 기술이 높았던 사람이지.》

《동윤덕이라… 가만, 성진쪽에서 기술을 배웠다던 성미가 늘어진 사람 말이지? 그래, 그 사람 이름이 동윤덕이였지. 생각나네.》

《여전히 총기는 좋구만.》

남계수가 동소옥을 내세우며 소개했다.

《이애가 그 사람 딸일세. 소옥이라고 하지.》

동소옥이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조국을 찾아 먼길을 오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소. 정녕 반갑소!》

구일파는 동소옥을 따뜻이 포옹하고는 자식을 만난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사람의 한생에 슬픈 날만 있으라는 법은 없는가보구나. 이렇게 너를 보니 너의 아버지를 만난것처럼 기쁘구나.》…

구일파의 조국방문을 환영하는 동석식사가 끝난 다음 그를 숙소까지 데려다준 남계수와 동소옥은 밤길을 나란히 걸었다. 밤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렸다.

《춥지 않냐?》

《아니요.》

《무슨 생각을 하느냐?》

동소옥은 남계수의 팔을 낀채 대답했다.

《아버지를요. 오늘 구선생님의 모습을 보느라니 자연히 아버지의 생각이…》

《네 아버진 사실 괜찮은 사람이였다. 기술도 있구 일도 직심스럽게 했지. 전쟁시기 나하구 전선에 보낼 원호물자를 생산했다. 너두 생각날게다. 네 아버진 그때의 정신으로 살았어야 했다. 이날까지 살면서 나에겐 후회되는 일이 정말 많기도 하구나. 내가 옳바르게 생각하고 네 아버지를 진심으로 도와야 하는건데 머리속에는 리윤이라는 타산만 차있다나니 기술만 아까와했지 마음을 바로 먹고 일하도록 도와줄 생각을 못했다. 내가 허천에 몇번 내려간건 값눅은 인정외엔 아무것도 아니였다.… 소옥아, 언제나 아버지를 잊지 말고 네손으로 만드는 강철처럼 굳세면서도 값있게 살거라.》

《큰아버지, 명심하겠어요.》

동소옥은 지금 인간과 그 운명에 대한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구일파라는 해외동포기업가의 운명은 그 인간을 알게 해주는것이다. 파란만장의 인생길을 걷다가 조국과 민족을 알기 위해 황혼기에 찾아오는 걸음을 하기가 쉬웠겠는가. 인간은 뒤늦게라도 옳은 결심을 내릴 때 후회없는 한생을 살게 되는것이 아닌가.

《소옥아, 오늘 밤에 너하구 무슨 말을 그냥 하고싶구나. 구일파를 만나서 그럴가. 난 원래 말을 많이 하는걸 싫어하는데…》

《어서 말씀하세요. 전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의 말씀을 듣기 좋아했어요.》

눈발속을 헤치고 흘러오는 동소옥의 숨결을 느끼며 남계수는 밤하늘 멀리에 눈길을 보냈다. 자욱한 눈발너머로 별이 흐르리라는 생각을 하니 마치도 시인이라도 된 기분이다.

《난 말이다. 젊어서는 길들이지 않은 말새끼처럼 아무데나 뛰여다니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살았다. 그게 바로 기업이라는 난치병을 만났기때문이야. 그 병을 함께 앓은게 네 아버지였다. 말하자면 낡은 사상잔재가 머리속에 꽉 들어찬 인간들이였지. 사람이 자기를 알고 스스로 통제하며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갈길을 몰라 끝없이 헤맸고 리기심에 빠져 끝없이 동요한것이 나란다. 일찌기 바다를 찾는 작은 시내물이라고 여기였건만 내가 바다에 흘러든것은 나이 오십고개에 이르러서였다. 나를 기다려준 바다가 있었다는것을 마침내는 깨달았던거다. 낳아준 어머니마저도 이 남계수라는 인간의 앞날이 걱정되여 한숨만 짓다가 눈을 감았건만 나같이 온통 때꾸러기인 사람도 손잡아주고 이끌어주는 품이 있었으니 이런걸 두고 인생의 행운이라 해야 할게다. 그제서야 나는 바다와 굳은 언약을 하였다. 변함없이 대해를 떠나지 않는 한방울의 물방울이 되겠다고 말이다. 허허, 나란 이런 사람이구나.》

동소옥의 얼굴로는 맑은 눈물이 함박눈을 녹일듯 소리없이 흘렀다.

얼마나 진정에 넘친 신성한 언약인가. 그것이 의지이고 신념이였기에 한 인간은 인생의 모든 풍파를 헤치며 변함없는 한길을 걸어온것이다.

신념과 의리는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추호의 의심도 모르는 투철한 믿음, 사리와 공명을 탐내지 않는 무한한 헌신, 세월의 비바람에도 때오르지 않는 순결한 량심… 사람의 모습은 이렇게 될 때 참되게 산다고 해야 하리라.

《큰아버지가 오늘 들려준 말씀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겠어요.》

《우리 소옥인 정말 괜찮은 처녀야. 아마 네 결심대로 했더라면 지금쯤 외국에 가서 한다하는 외교관들과 춤을 추고있었을지도 모를텐데. 춤이야 우리 소옥일 당할 녀자가 있을라구. 허허.》

동소옥은 남계수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가져다대며 소리없이 웃었다.

아마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허영의 만족일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난 지금이 좋다. 이것이 동소옥이기때문이다. 로동으로 살고 그속에서 보람을 느끼는것으로 나는 만족하다. 변하지 않는 동소옥의 본태는 거기에 있는것이다. 다만 사감에게는 미안하다. 그는 나에게 진심을 보냈다.

존경하는 《펭긴》! 미안해요, 하지만 행복한 나의 인사를 받으세요!…

《큰아버지, 이 소옥인 자기를 알기 시작했어요.…》

깊은 사색에 잠긴 동소옥의 목소리는 겨울밤길에서 조는듯이 울렸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심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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