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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제 3 장


28


살면서 오늘처럼 마음이 허전해본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남계수는 저녁시간에 여느때없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뒤적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아까운 사람을 보내는군. 이제부터 크게 일판을 벌려보려고 했는데, 음음…》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손에 들었던 기술자료들을 밀어던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비서가 소환되여간것이다. 그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건설에 참가하는 돌격대의 정치일군으로 임명되여 오늘 떠났다. 비록 자기보다 나이가 퍽 아래였지만 늙고 괴벽한 이 남계수를 얼마나 진정으로 위해주었던가. 공장의 종업원들모두가 아쉬운 마음을 안고 눈물지으며 바래주었다. 당이 맡겨준 중요한 초소로 떠나는 사람이지만 함께 일하지 못하는 섭섭함은 지우지들 못하는것이였다.

남계수는 역에까지 나가서 작별하였다.

《지배인동지, 일만 일이라구 하지 말구 건강을 돌봐야 합니다. 이젠 년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걱정은 마오. 이제 백두산에 갔다와서 같이 또 일을 해야지? 난 당비서를 기다리겠소.》

《지배인동지도 참, 좋습니다. 내 꼭 다시 돌아오지요.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야 어련하겠소. 이건 우리 로친이 제손으로 뜬건데 추울 때 속에다 껴입소.》

남계수가 내주는 모내의를 받으며 당비서는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교장선생님에게도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일이 무척 바쁘실텐데 언제 이렇게…》…

남계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사람이였건만…》

보내고나니 못견디게 그리운 사람이 당비서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일했다. 종업원들은 지배인은 어려워하지만 당비서앞에서는 못하는 말이 없었다. 어느 집 숟가락이 몇갠지까지도 다 알았으며 생활에서 제기되는건 뛰여다니며 풀어주려고 애썼다. 한마디로 종업원들의 마음속에서 산 당일군이였다.

전화종소리가 울렸지만 자기 감정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남계수는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전화기는 지지 않겠다는듯 계속 울어댔다. 송수화기를 드니 리건창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어떻게 사무실에 다 앉아있구만. 당비서를 보내고나서 속이 좋지 않아서 그러는게 아니요?》

남계수는 제꺽 인정해버렸다.

《귀신같군요. 허허.》

《어찌겠소. 큰일을 먼저 생각해야지. 안 그렇소?》

《여부가 있나요. 날 걱정해서 하는 전화는 아닐텐데 어떻게 이 밤중에…》

《내 차를 보낼테니 좀 와주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와서 의논해보기요.》

남계수가 리건창의 방에 들어선것은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얼굴이 부석부석한 리건창이 의자쪽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시당책임비서가 이 밤중에 찾을 때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앞세운채 남계수는 리건창이 먼저 말을 떼기를 기다렸다.

《참, 구일파동포가 조국방문을 하게 된다는건 알고있겠지?》

리건창이 묻자 남계수는 머리를 끄덕여 긍정해버리고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구일파가 오면 왔지 그 일로 이 밤중에 찾을리는 없다고 여기는 그였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우리 시의 경제실태를 보고받으시고 또다시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소.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집중되여있는데 맞게 로동자들의 로동조건을 원만히 보장해주는 사업을 첫자리에 놓지 못하는것을 보면 일군들의 사상관점이 문제라고 지적하시였소.…》

《?》

자리에서 일어난 리건창은 무거운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제끼였다. 남계수도 자못 마음이 무거워져 엉거주춤 일어나려는것을 그가 손짓으로 눌러앉혔다.

《고열과 유해가스에 의한 피해를 가시려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심혈을 바치고있지만 아직은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고있소. 자, 이걸 좀 보오.》

리건창은 외국의 과학기술잡지를 남계수앞으로 내밀었다. 새로 개발리용되고있는 기계들이 소개되여있는데 기술적진보의 일단을 볼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보트가 사람을 대신하여 정밀제품을 조립하는것이 남계수의 눈길을 끌었다.

《어떻소?》

《발전된 수준이지요.》

《부럽소?》

《부럽기야 뭘, 기계공업발전의 력사가 오래다고 뽐내는 나라들에서 자랑하는건데…》

리건창이 마주앉으며 내쏘듯 말했다.

《바로 그 관점이 문제라는거요. 기업관리와 기술혁신에서는 제나름의 안목을 가졌다는 동무가 아닌가 말이요.》

남계수가 턱을 쓸어내렸다.

《하- 이건 공연히 날 보구…》

《바로 이 기술자료들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우리들에게 친히 내려보내주시였단 말이요. 어떻소, 뭘 좀 생각되는바가 없소?》

《?…》

가슴을 치는 충격을 받아안으며 남계수는 과학기술잡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자기는 잡지에 실린 기계들을 보는 첫 순간 세계적인 기계공업발전의 추세라는 일반화된 관점에서 무심히 보지 않았는가.

물론 아직은 없거나 모자라는것이 많고도 많은 우리의 현실에 대한 위축된 심리와 랭정한 인식이 작용한것도 사실이였다. 자기의 공장실태만 놓고보아도 고작해서 유압식기계장치를 창안해놓고 만족해하는 형편이 아닌가.

《그이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나가자면 우리가 아직 너무도 멀리 뒤떨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지금 무엇을 바라시는가, 황철의 자동화본보기를 마련해주시며 주신 그이의 가르치심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집행하고있는가, 우린 이런 각도에서 자신들을 심각하게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남계수는 상우에 놓인 틀어쥔 자기의 주먹을 보며 무겁게 대답했다.

《저부터가 해놓은 일보다 높은 평가를 바라는 버릇이 붙었습니다. 자화자찬이 나쁘거든요. 당에서 의도하고 요구하는 수준에서 목표를 높이 세우고 일해야 하겠는데…》

《옳소. 우리에겐 사소하게나마, 또 순간이나마 자만할 권리가 없소. 남동무, 동무를 이렇게 부른건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기 위해서요. 우리는 래년에 공화국창건 서른돐을 경축하게 되오. 이 뜻깊은 경사를 우리는 무슨 성과로 맞이할것인가,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박한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당에서 현시기 의도하고 절실히 바라는것이여야 하지 않겠소?》

남계수는 이 방에 들어서는 첫 순간 리건창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어떤 중요한 과업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분명 그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것은 명백했다.

《시당위원회는 심중히 협의하고 동무네 공장에서 산업용로보트를 제작할데 대한 과업을 주기로 했소.》

《예?…》

남계수는 어깨에 묵중한 짐이 실리는것을 느꼈다. 호흡이 빨라졌다.

로보트라면 방금 외국의 과학기술잡지에서 본 현대적이며 자동화된 기계였다. 현재 공장의 기술수준으로서는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올라있는 첨단설비이기도 했다. 가능성과 현실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할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것은 모험을 동반한 공명심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수가 없는것이다.

더구나 과제대상은 현대기계공업에서는 최정수라고 해야 할 로보트가 아닌가! 공장의 현존생산토대, 기술력량이 해결할수 있는가를 정확히 타산해야 한다.

《할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하는것을 따질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사활적인 요구로 제기해야 하오. 당에서 그처럼 귀중히 여기고있는 우리 로동계급을 고열로동과 유해로동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도 또 나날이 비약하는 세계적인 기계공업발전수준을 하루빨리 따라앞서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나서는 과업이요. 그래 어떻소?》

《연구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대중토론도 해야 하거든요.》

《옳소. 대중의 지혜를 발동하는것이 중요하오. 그들에게 당의 의도를 옳바로 심어주고 한사람같이 불러일으켜야 하오. 동무들의 힘과 지혜로 완성한 그 로보트에 동무들의 손으로 〈흥성〉이라는 자호를 붙인다는 심정으로 토론하고 결심하기를 바라오.》

남계수는 벅차오르는 흥분을 눅잦혔다. 《흥성》은 오늘 이 항구도시의 작은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상표이지만 전국에 알려져있다. 그것은 곧 공장로동계급의 자부심이며 명예인것이다. 이제 그이름을 단 로보트를 공화국창건 서른돐을 맞으며 훌륭히 만들어 당에 선물로 드린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결의가 곧 실천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성공에 이르자면 천만시련을 각오해야 하는것이다.

《협의하고 곧 보고하겠습니다.》

《기다리겠소.》

리건창의 바래움을 받으며 남계수는 시당청사를 나섰다.


로보트제작문제를 둘러싸고 열기띤 론쟁에 이어 불같은 목소리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도 아름찬 과제이지만 기어이 해내야 한다는 결의에 충만되여있었고 해결방도를 찾기 위한 고심어린 노력은 기술집단만이 아니라 작업현장들에서도 진행되였다.

기계전문가인 려현석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것은 불가피한 일이였다. 그는 동소옥에게 기대를 걸고 토론하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나이든 처녀의 심리에는 변화가 생기고있었다. 그 원인을 알수 없어 려현석은 은근히 고민하였다.

동소옥은 려현석이 기술협의회라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댄 때부터 자기라는 존재가 동정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제나름의 불만에 빠져 좀처럼 헤여나오지 못했다. 원망스러운것은 려현석이였다. 자기를 위해주려 한 그 의도자체는 고맙게 여겨지지만 어딘가 동소옥에게는 가슴속의 해묵은 상처를 파헤친것이나 다름없이 되여버렸던것이다. 바라지도 않는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애를 쓰는것도 그에게는 한갖 모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가. 내가 가지려 하는 그 목적이 과연 이루어질수 있을가. 헛된 노력으로 이루지 못할 꿈을 안고 산다면 허무하다고 해야 하리라.…

이무렵 처녀의 의식속에는 일종의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나고있었다. 그 원인을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진정을 모르는 동요로 하여 한층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생활의 파문은 여기저기서 일지만 독신자합숙의 옛 사감이였던 녀인은 평양이라는 먼곳에서도 전화를 리용하여 이상할만큼 큰 힘을 가진 지레대원리를 적용하군 하는것이다. 서서히 그리고 완강히 접근해오는 그를 물리치기 어려웠다.

《소옥이, 누구에게나 인생궤도가 정해져있는거야. 거기서 탈선하면 실패를 후회해도 때가 늦는다. 난 강요하지 않아. 소옥일 잘 알고 알맞춤한 상대에게 안내하자는것뿐이야. 내가 소개하는 1등서기관은 소박한 인물이다. 외교활동을 하지만 제손으로 빨래도 하고 밥도 짓는다. 그렇게 10년가까이 살아온 그란다. 전재고아로서 나라에서 공부를 시켜 키운 사람이다. 그의 안해도 고아였는데 전쟁시기 미군비행기들이 던진 세균무기의 피해자로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지. 그에겐 소옥이처럼 고생을 해본 녀자가 필요해. 이를테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해야 할… 난 너의 경력카드를 그에게 그림처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동의를 받았다. 소옥인 이젠 나이도 있지 않아. 20대의 처녀처럼 랑만적일수는 없어. 생활은 역시 생활이니까. 대답해봐.》

기술준비실 책상우에는 남계수가 가져온 외국의 과학기술잡지들이 놓여있었다. 그 잡지들에 깃든 사연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로보트제작과 관련한 문제를 연구하고 의견을 내놓으라는 기사장의 지시를 받았지만 동소옥의 눈길은 한곳에 멎어서 움직일줄 몰랐다.

나는 지금 중요한 운명의 기로에 서있다. 사람은 받아주는 곳에 몸을 담기마련이다. 너는 네가 나이를 먹고있다는것을 모르고있다. 이제 2~3년후에는 오늘과 같이 너를 찾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는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가 되면 한생의 반려를 가져보지 못한 녀자로 조용히 남은 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그럼 사감이? 아니, 그는 이렇게 말할 녀자가 아니다. 그는 나에게 강요한 일이 없다.…

의식의 파동을 일으키는 감성의 장막뒤에는 언제나 그의 결심을 불허하는 리성의 요구가 존재했다. 사실상 그것은 오래동안 동소옥이라는 인간개체속에 내재해있는 신성한 그 무엇인듯싶었다. 그것은 20대에 벌써 무모한 기질의 소유자인 처녀를 제압하였으며 분별을 간직하고있는 인간의 제모습을 되찾도록 말없이 인도해온것이기도 했다. 이룰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사랑해온 그것의 의미는 결코 감성적인것만은 아니였다. 살아숨쉬는 인간에게는 때로 감성이 리성을 대신할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로 될수 있는 그런 경우도 있게 되는것이 아닌가.

《소옥이, 난 동무를 리해하기 어렵다는것을 오늘에 와서야 알게 되오. 사람은 본의아니게 남한테 마음고생도 시킬수 있다는것을 느꼈소. 그 원인은 전혀 모르면서 말이요.》

앞에는 생면부지의 소개받은 남자가 서있다면 뒤에는 인생의 자서전에 반드시 적어넣어야 할 사나이가 자기의 경솔한 언행으로 하여 괴로움을 당하고있다. 파악없는 한사람이 추상적일수밖에 없는 선망의 대상이라면 다른 사람은 무한히 솔직하고 성실하다. 미지의 세계에는 황홀하다 해야 할 생활이 기다릴수 있지만 돌아서면 오늘의 련속으로 되는 평범한 로동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소박한 아침저녁을 맞고보내야 한다.

동소옥의 고민은 려현석이라는 남자가 안겨주는것이였다. 어떻게된 영문인지 이룰수 없는 사랑으로 간주된지 오랬지만 오늘까지 미련 같은것은 남아있었다. 그 미련이라는 앙금이 우연한 정황에서 돌발적인 감정으로 터져나왔을 때 그는 도저히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다. 려현석으로서는 접수할수 없고 리해는 더욱 할수 없는 말이 자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은 짧았지만 그것이 할수 있는 말의 전부였기에 안타까왔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 일이 있은 후 려현석은 자신을 검질기게 돌이켜보는것이 알렸고 번뇌로 하여 수척해지는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함께 일하지만 서로가 무엇을 묻는것조차 꺼려했다.

실험로에서는 크롬강을 만들어냈다. 그들 두사람이 오래동안 연구하여 기술적인 기초를 마련한것이다. 한쪽에서는 생산계통을 새로 꾸리기 위한 전투를 벌리지만 두사람은 실험생산준비를 갖추고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려현석은 동소옥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말없이 맡아하였다.

며칠전 정시홍이 그들이 일하는 장소에 와서 느닷없는 말을 하였다.

《바이올린 1번수의 음정이 변하는것 같구만. 내 듣기엔 불협화음이요. 지속되면 곤난하기에 지휘자로서 의견을 주는것이니 참작하기를 바라오.》

기사장은 매우 섬세한 일군이다. 그는 데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심리를 조절하는데 언제나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불협화음을 들었다는것은 스쳐지나서는 안될 권고인데도 동소옥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저지른 일이지만 제힘으로는 바로잡을수 없기에 방임할수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그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어제는 실험생산준비를 마감단계에서 진행하는데 려현석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옥동무, 난 좀 일찌기 집에 들어가봐야 할것 같소. 딸애가 몹시 앓는데다 어머니까지…》

려현석의 딸은 이따금 집에 찾아가면 우리 아줌마가 온다며 허리에 매달려 돌아가는 귀염둥이다. 어떻게 앓기에 웬간해서는 집사정쯤은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근심에 잠겼는가. 그러나 걱정과 달리 민망할 정도의 말을 해버리고말았다.

《아버지다와야 하지 않나요. 아침에 앓는걸 보고 나왔겠는데 지금이 몇신가요. 무관심과 몰인정은 다른거라고 봐요.》

경황이 없는지 려현석은 고개만 끄덕대고는 가버렸다. 그의 뒤모습을 보느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걸 겨우 참았다. 커다란 공백이 생긴 생활을 안고도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다. 남에게는 뜨거운 정을 기울이지만 한창나이에 사랑이라는 큰것을 잃은채 고독에 시달리고있다. 그토록 마음씨곱던 안해는 떠나가버린 사람이건만 남자는 그 사랑을 못 잊어 새로운 사랑은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도 메워줄수 없는 생활의 공백을 안고 살자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소옥이, 기회란 나는 새와 같다는 말이 있다. 1등서기관은 한달후엔 주재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안해와 함께 가기를 바란다. 시간이 없어. 빨리 결심하기를 바란다.》

사감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자 동소옥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였다. 다가올 생활의 유혹을 물리칠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간직했던 결심과 인정으로 이어진 모든것을 허물어버리기 시작했다.


《…세월은 정녕 류수와 같다는 말이 옳았소그려. 타향에서 백발을 날리며 망망대해를 향해 서있노라면 떠나온 고국산천이 삼삼히 보이고 정을 나누며 살던 옛 지기들의 모습이 그리워 눈물을 주체못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오.

계수형,

무정한 세월속에 망각된 생활은 얼마며 늙어가는 망령이 앗아간 추억은 얼마인지 모를진대 이 마음속에 그대만은 옛 모습대로 남아있으니 진정 심중지인이 계수형인가 하오. 평양에서 헤여질 때 나한테 한 말을 나는 오늘도 잊지 않고있소. 우리 기업가로서 한사람은 남에서 다른 사람은 북에서 당해보자고 하던 그 말을 나는 지금도 새겨보며 과연 누가 옳은 길을 걸었는가고 묻군 한다오.

남행렬차에 몸을 실었던 이 몸은 이국의 하늘아래서 표류하다가 기업의 뜻은 이루었다지만 민족을 떠난 불귀의 객이나 같은 신세라 계수형을 한번 만나고 이승을 하직하리라 마음먹으며 조국방문을 신청했소그려. 이 몸이 과연 평양에 가서 무엇을 보게 될는지 알수 없어 이밤도 뜬눈으로 새우며 계명산천을 그려본다오.…》

이 세상 하늘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의 살붙이들이 불운을 당하여 바라지 않은 타향살이를 오늘도 하고있는것인가. 구일파도 그들속의 한사람이다. 사람은 결코 배부르고 돈이 많아 향락을 누릴수 있다 해서 만족한 인생을 사는것은 아닌것이다. 억만장자의 고픔은 창자에 있는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마도 구일파는 조국에 와서 여직껏 모르고 산 많은것을 알게 되리라고 남계수는 확신했다.

구내식당앞의 건물을 랭동창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있었다. 남계수는 랭동창고건설형편을 보려고 나섰다.

《모를 일이거든요. 부기장이 요즘 얼마나 열성스러운지,… 랭동고건설을 맡아하는데 언제나 말없이 이신작칙하여 사람들의 평가가 좋습니다.》

정시홍의 말이 생각나 남계수는 홀로 웃었다. 랭동창고는 유리섬유를 리용하여 보온벽체를 완성하고 지금은 기계실바닥치기를 하고있었다. 조영길은 작업진행정형을 간단히 보고했다.

《부기장이 솜씨가 있구만. 언제면 랭동기시운전을 해보겠소?》

《기초만 양생되면 할수 있습니다.》

극동실은 랭각관이 다 설치되여있었다. 랭동할 물자들을 올려놓을 당반들은 합리적으로 배치했고 바닥은 인조석으로 미장까지 하였다.

《이만하면 괜찮소. 이걸 건설하는데 한달은 걸렸지?》

《아닙니다. 정확히 22일간인데 시운전할 날까지 합치면 25일간으로 계산했습니다.》

남계수가 랭동창고휴계실안을 돌아보는데 조영길을 찾는 어떤 녀자의 소리가 들리여 고개를 돌렸다.

이게 누군가, 홍진실이다. 이 녀자가 여기 작업장까지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구는 모양이다.

《부기장동지, 작업이 몇시에 끝나나요?》

《모르겠소. 그건 왜 묻는거요?》

《좀 만나자구요.》

조영길이 대답을 못하는데 휴계실안에서 나온 남계수가 대뜸 말했다.

《내가 만나면 안되겠소?》

지배인이 여기에 있을줄은 생각 못한 홍진실이 《에그머니!》 하는 소리를 지르며 내빼려 했다.

《홍동무, 그러지 않아도 내 동무를 한번 만나자고 하던 참이요. 한데 왜 그렇게 바빠하오?》

《지배인동지, 사실 전…》

《내가 뭐 호랑이기라도 하오? 떨긴, 자! 내 사무실에 가기요.》

된코에 걸려들었다고 여기는지 홍진실은 발재린 걸음을 하며 따라서고 조영길은 한숨을 쉬며 멍청히 바라보았다.

반죽좋은 홍진실이지만 지배인방에 들어와서는 기가 죽어 서성댔다.

《앉소, 앉으라는데. 무슨 못할짓이라도 하구 들킨 사람같이 왜 그러오?》

두손을 맞잡은 홍진실은 쭈밋거리며 의자에 간신히 몸을 부리웠다.

《동무말이야.》

나이가 들었지만 목소리가 청청한 남계수의 나꿔채는듯 한 말에 흠칠 놀라며 홍진실은 눈길을 들었다.

《사직을 하구 집에 들어가서 상점일을 했었지?》

《예, 한동안…》 하고 홍진실은 떨떠름하여 대답했다.

《그 일을 다시해보지 않겠소?》

《공장에서 또 나가라는 소립니까?》

《하하, 이 동무가 생각보다는 담이 형편없이 작구만. 누가 내쫓겠다나. 일 잘하는 동무를 그렇게 하면 내가 무슨 손해를 보자구?》

홍진실은 남계수의 표정을 보고서는 무엇도 알수 없기에 령리한 눈만 깜빡거려댔다.

나를 왜 이렇게 불렀는가. 부기장과의 관계를 알고있는게 아닐가. 지배인은 그런 시시한 뒤생활이나 알자고 눈길을 돌리는 남자가 아니다. 무엇때문일가. 상점소리는 왜 꺼내는가.… 이 녀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대지만 대답을 찾을수 없었다.

《내 두루 알아본데 의하면 홍동무가 청렴하다더군. 지난해 공장에서 동태를 공급했을 때 10키로가 더 차례진걸 알구 실어내왔다는게 사실이요?》

홍진실의 얼굴이 금시 활딱 붉어졌다. 꼭 어린 처녀애같다.

《그거야… 덜렁수개, 아니아니, 그 덜렁바우창고장이 잘못 계산해서 그리된건데 내오지 않으면 아무래도 변상을 할텐데…》

《사람이 그래야 해. 좋거던. 말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그런데 남자는 다 수갠가?》

이렇게 말한 남계수는 제가 한 말이 우스워 고개를 쳐들며 껄껄거렸다.

《고치겠습니다.》

한순간에 제입으로 자기자신을 홀딱 벗어보인 홍진실은 이 령감한테 오늘은 껄쭉한 욕사발을 먹는가부다 생각하며 가슴을 조였다.

《고쳐야 돼. 홍동무의 그 환한 얼굴과 인격에 말도 따라서야지. 동무말이요. 공장구내에 작은 상점을 하나 내오려 하는데 그걸 맡기면 잘해보지 않으려오?》

이게 무슨 소린가, 한바탕 욕을 먹는가 했는데 왕청같은 상점이라는건 또 뭔가, 허나 상점일이라는게 내 성미에는 어울리지 않아. 시야비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매일 그 단련을 어떻게 받는담.…

《저… 전 그런 일 못합니다. 머리가 둔한데다 교제에서는 락제가 돼서…》

《흠, 내가 모를줄 알구. 소옥기사가 언젠가 나한테 조용히 말한적이 있는데 동무만큼 계산에 밝은 녀자가 없다는거요. 성격이 좋구, 사출작업반에선 동무가 있어야 웃는다는거야. 그게 얼마나 좋은가.》

《지배인동진 절 연구합니까?》

《마음에 드니까.》

홍진실은 속으로 남계수가 사내라더니 정말 남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일군들이 사람을 알고 믿음을 주는데야 무슨 일인들 못하랴 하는 배심이 고여올랐다.

《이제 랭동창고를 건설하면 그옆에 잇닿아 상점을 하나 내오겠소. 거기서 종업원들에게 여러가지 생활필수품들을 판매해주면서 여름철에는 시원한 사이다며 얼음과자를 팔아주고 겨울에는 밤이나 고구마같은것을 구워서 판매하면 좀 좋은가. 동무는 녀성이니 머리만 쓰면 공장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일을 할수 있단 말이요.》

홍진실은 남계수의 요구에서 거역할수 없는 힘을 느꼈으며 그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을 후덥게 받아안았다. 대중을 위해 한번 일을 잘해볼 결심이 가슴속에 솟구쳤다.

《어떻소, 해보지?》

《예, 자신은 없지만…》

《좋아. 그럼 래일부터 부기장네 작업조에 망라되여 일하오. 랭동고건설이 끝나면 구내상점을 잇달아 짓도록 하겠소. 자기가 일할 곳인데 제손으로 일떠세워야 보람이 있지. 허허.》

《예? 제가…》

홍진실은 금시 아연해지며 남계수를 바라보았다. 미궁에 빠져드는듯 한 착각이 들었던것이다. 부기장과 같이 일하라고 하지 않는가. 구실을 댈 빈틈도 없이 실로 난처한 일감을 고스란히 안겨주는 남계수의 수에 이 녀자는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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