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제 1 장


9. 격노한 사무라이


《각하께서 자넬 만나시겠다네.》

가루베는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서기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인제는 개들도 꼬리를 칠만큼 고마무라에 걸음을 했건만 여직 만나주지조차 않던 주인이 아닌가. 그런 주인을 두고 죽일놈의 두상태기라고 뒤욕인들 얼마나 많이 퍼부었던가. 그런데 별안간 이렇게 불러들이다니?…

어리뻥해 서있는 가루베에게 서기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귀띔했다.

《헌데 주의하라구. 각하께선 자네 말을 전해듣고 심기가 매우 불편해하시네.》

가루베는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런즉 아라기 사다오가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단 말이지. 행여나 해서 서기에게 던진 한마디 말이 요지부동이던 령감의 마음을 움직여놓았다는게 스스로도 놀랍기만 했다. 금시 목구멍이 말라들고 오한이라도 만난듯 온몸이 떨려났다. 가루베는 흐드득 솟구쳐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켜버렸다.

심기가 불편해한다구? 하긴 미꾸라지국 먹고도 룡트림을 하는 령감이 하루아침에 망신거리가 되였으니 그럴만도 하지. … 노발대발할 두상의 모습이 방불하게 떠올랐다. 그때문에 첫 대면부터 거북살스레 될건 뻔했지만 아무튼 일은 제대로 돼가는셈이였다. 가루베는 길고짧은건 대봐야 안다고 생각하며 급히 서기를 따라나섰다.

서기의 방에서 나온 두사람은 정원으로 향했다. 볼에 닿는 바람이 차거웠다. 누런 겨울해살이 정원을 비치는데 석류나무의 엉성한 가지우에서 참새들이 귀찮게 재잘대고있었다. 그래도 손질하느라 애쓴 관목들이며 산보길을 보니 말년의 고독과 애수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보려는 늙은 주인의 서글픈 모지름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새도 죽음에 이르면 울음소리가 구슬퍼진다던가. …

은연중 찾아든 이런 애상에 가루베의 퉁방울눈은 제법 눅눅해왔다. 그러던 그의 걸음이 갑자기 비칠거렸다. 가마니에 싸인채 정원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종려나무 두그루를 보았던것이다. 아무리 눈여겨봐야 지난가을에 자기가 보낸 나무들이 헨둥하지 않은가. 가루베는 그만 소태먹은 우거지상이 돼버렸다. 아라기에게 희귀한 수종의 정원수를 진상하느라 수천리 떨어진 규슈남단에까지 가서 돈인들 좀 많이 썼던가. 그렇게 갖은 품을 들여가며 구해온 나무들이 개밥에 도토리취급을 당하고있는 꼴을 보니 참기 어려운 수모감에 기가 꺽 막혀왔다.

하지만 가루베는 꼭두까지 치미는 부아통을 애써 삭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라기 사다오 같은 큰 인물을 상대하자니 어차피 감수해야 할 수모라고 그는 생각했다.

(참을인자 셋이면 큰사람이 된다 했겠다. 참자, 이런 천대를 참고 견디느라면 언제건 반드시 되갚을 날이 올테지.)

가루베는 킁킁 코그루를 박으며 육중한 몸을 엉큼엉큼 움직여갔다.

련못근처에 이르러 소로길에 들어서니 느럭느럭 게다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마른 꽃나무가지들사이로 아라기가 산보하는 모양이 어른거렸다. 덧옷을 든 하녀가 공손히 뒤따르고있었다. 한손으로는 지팽이를 짚고 등뒤에 얹은 다른 한손으로는 빈 가위를 찰깍거리며 꽃나무들을 돌아보는 늙은이의 모습은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퍼그나 한가해보였다. 가루베는 잠시 멈춰서서 안경을 고쳐낀다, 대머리를 다듬는다 뒤설레를 떨고나서 황급히 서기의 뒤를 쫓아갔다.

《데려왔습니다.》

서기가 아라기에게 다가가 짤막하게 여쭈자 강대처럼 갱핏한 늙은이의 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 순간 가루베는 저도 모르게 사지가 움츠러들고말았다. 몸서리치도록 매몰찬 눈길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던것이다. 무서운 눈빛이였다. 주위의 모든것을 얼어붙게 하는 저토록 살기찬 기운이 팔십객의 노닥다리한테서 쏟아져나온다는 사실앞에 가루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게다가 아라기는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구일본군의 륙군대장제복까지 걸치고있지 않는가.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해묵은 군복을 걸쳐입군 한다는 아라기의 괴벽에 대해 들은바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였다. 그 군복에서 뻗쳐나오던 불가항력의 질식감, 온 렬도를 악패듯이 휘둘러대던 절대권력의 살벌했던 기상이 전률속에 떠올랐다. 대번에 범 본 개마냥 주눅이 든 가루베는 유들진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띠우며 아라기에게 굽신거렸다.

《가루베 신조라고 합니다. 각하께 이렇게 직접 문안을 올리게 된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라기는 그러는 방문객을 대충 훑어보고는 허드레손이나 대하듯 이내 머리를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딴소리를 한다.

《한겨울에 용케도 피여나는구나.》

늙은이가 느적느적 그리로 걸어갔다. 가루베도 서기며 하녀와 함께 시중군인양 뒤를 따랐다. 발가우리하게 부풀어오른 동백꽃망울들이 듬성듬성 가지끝에 붙어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아라기는 꽃을 고르려는지 손가위를 찰깍대며 동백나무들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꽃망울들을 들여다보며 심드렁하니 묻는것이였다.

《그래, 뭐가 어찌되였다구?》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엉거주춤하니 서있던 가루베는 서기가 바삐 눈짓해서야 령감이 다름아닌 자기에게 묻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지르숙이는 가루베의 입언저리에 쓴웃음이 스쳐갔다. 그러고보니 겉으로는 저렇게 아닌보살을 해도 령감이 서기한테서 말을 전해듣고 젖먹은 밸까지 뒤집혀있는것이 분명했다. 기미를 눈치챈 가루베는 아래배에 그득히 힘이 실리는것을 느끼며 좀전에 서기에게 퉁겨주었던 말을 아라기에게 다시금 뱉아놓았다.

《각하, 여쭈옵기 송구합니다만 달포전에 각하의 장서를 정리하러 왔던자들이 저… 조선인들이라고 합니다.》

아라기가 깔보는듯 한 눈찌로 가루베를 흘깃했다. 네깟놈이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묻는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루베가 우물거리는데 고맙게도 서기가 약삭바르게 나서주었다.

《이 가루베군은 오랜 문화재전문가여서 그 분야에선 소식통이라 할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루베 신조는 이른바 《백제고고학의 권위자》로 자처하는 대학강사였다. 아라기에게 연줄을 놓으려고 벌써 이태째나 고심분투해오는 그였지만 거만스럽기 짝이 없는 왕년의 군벌은 비위살이 떡판같은 이 불청객을 상대할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라기의 서기가 그런대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품들여 삶아놓은 덕에 서기는 주인의 기분상태며 움직임 같은것을 가루베에게 자상히 알려주었고 또 기회가 나질 때마다 주인에게 가루베에 대한 소리를 조심조심 여쭈군 하였다.

얼마전 가루베가 서기로부터 아라기의 장서를 정리하러 왔던자들에 대해 얻어들을수 있은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서기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범상히 흘린 말이였고 가루베도 처음에는 어느 고서장사치나 학자나부랭이들이 왔댔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면서도 수십여년간 골동품을 다루어온 가루베인지라 호기심이 동해 대체 어떤자들이 왔댔는지 인맥을 동원해 슬그머니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어찌된 감투끈인가. 천만뜻밖에도 아라기의 장서를 정리해간자들이 조선인들이라는것이 아닌가.

가루베는 도무지 갈피끈을 찾을수가 없었다. 로망이 들지 않고서야 조선인들이라는걸 뻔히 알면서 아라기 사다오령감이 자기의 장서를 통채로 내보였을리 만무한것이다. 그러니 눈뜬 소경노릇을 했다는건가. 서기가 들려주던 말을 되씹어보니 필시 조선인들에게 얼리운 꼬라지였다. 사태의 진상을 깨닫는 순간 가루베는 깨고소해지는 기분을 금할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껏 아라기한테서 오죽이나 업수임을 당했던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조선인들에게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을 아라기에게 알려주고 오만무례한 령감의 오장이 뒤집히는 꼴을 잘코사니야 구경하고싶었다.

그러나 뒤미처 먼 번개발의 어렴풋한 섬광 같은것이 가루베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옳아, 정말로 조선인들이 왔댔다는걸 일러바치면 꽤 재미있겠는걸. 두상이 불맞은 늑대처럼 지랄발광할게야. 아마 그 자리에서 날 불러들이라구 불호령을 내릴지도 모르지. 결국 일은 제대로 되는셈이 아닌가.)

궁하면 통한다고 급작스레 튀여오른 그럴듯한 묘책에 가루베의 가슴은 상사말 뛰듯 투닥거렸다. 불을 콱 싸질러서라도 아라기의 관심을 자기한테 끄당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다고 아라기가 웬걸 움직이겠나 하는 회의심도 컸지만 도굴군시절의 투기심이 되살아나 가루베는 오늘 또다시 걸음을 한 기회에 자기가 알아낸 사실을 서기에게 일러버렸다. 궁여지책이였다 할지… 헌데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리도 마이동풍이던 두상이 덥석 미끼를 받아물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모든것을 아라기에게 그대로 털어놓을수가 없어 가루베는 적당히 골라가며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늙은이의 움푹 패인 관자노리가 괴상하게 울근거렸다. 고통, 수치, 분노와 앙심이 싸늘하게 굳어져가는 늙은이의 눈망울속에서 사납게 맞부딪치고있는듯 하였다. 가루베가 설명을 마쳤지만 아라기는 눈꼬리에 독이 올라 꽃망울들만 노려보고있었다. 숨가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이 지나 아라기의 입에서 가느다라면서도 짓눌리운듯 한 소리가 새여나왔다.

《대체 어찌된거냐?》

이번에는 서기에게 던지는 물음이였다. 살얼음우에 서있는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서기가 접시물에라도 빠져죽고싶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워낙 문부성과 옛 지기들쪽에서 각별히 부탁해온데다가 각하께서도 수차례 장서를 정리해버리라고 분부하셨던지라 제가 미처 그자들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각하!》

아라기의 얼굴에 피기가 번져갔다. 서기는 기가 질려 어쩔바를 몰라하며 황황히 덧붙였다.

《각하, 너무 상심마십시오. 당장 그자들을 사기죄로 고소하고 각하의 장서를 되찾아오겠습니다. 각하께서 화를 당하셨다는걸 알면 필경 법조계에서도 발벗고 나설겁니다.》

《허-》

갑자기 아라기가 허파에서 바람새는 소리를 쏟았다. 야멸찬 웃음을 입가에 사려문채 늙은이는 서기를 흘겨보며 뜨직뜨직 말했다.

《법에 고소한다?! 그러니 대일본제국의 륙군대신이 법정에 나서서 센징따위들과 아웅다웅한단 말이지. 흠, 그것 참 가관이겠구나. 그 꼴을 세상사람들이 보면 뭐라 할가? 저 아라기가 인젠 갈데 없는 송장이구나 하구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가? 이봐 서기, 군도 인젠 총기가 흐려지는가보군.》

악에 받쳐 시까스르는 늙은 주인의 조롱에 서기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려버리고말았다. 아라기는 상처입은 짐승마냥 씨근벌떡대며 울화통을 터뜨릴 대상을 찾는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늙은이의 꼴을 가루베는 두려움속에 지켜보았다.

가루베의 생각에도 서기의 방도라는게 신통해보이지 않았다. 아라기가 조선인들의 말만 듣고 장서정리를 맡겼다면 몰라도 기본동기야 어디까지나 유력가들의 청탁때문이 아니였던가. 또한 아무리 민족차별이 통하는 일본사회라 해도 조선사람과 상대하면 안된다고 감히 법조항에까지 쪼아박지는 못한 형편에서 무턱대고 조선인들을 사기죄로 몰수도 없는노릇이였다. 하긴 아라기의 이름을 대면 법관들도 모른다 하지는 않을테지. 허나 조선인들을 보증한 유력가들 역시 각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만만치 않을텐데 과연 일이 손바닥 뒤집듯이 뜻대로 될가? 설사 그리된다 해도 소송과정에 구일본 륙군대신의 가련한 말년이 말짱히 드러나고 아라기의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박힐건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불집을 터뜨린 장본인이였던지라 이 시각 가루베는 여간만 뒤가 저려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엉뚱한 불똥이 자기한테로 튀여올것만 같아 속이 뒤숭숭해오는데 독기를 품고 주절거리는 아라기의 혼자소리가 가루베를 긴장시켰다.

《헌데 이상하구나. 그 조선놈들이 무엇때문에 내 장서에 그다지도 눈독을 들였을가?》

가루베가 풀어주어야 할 의문이였다. 침먹은 지네모양 이렇게 오금을 못 펴고있을 때가 아니였다. 모처럼 맞다든 기회에 지랄을 써서라도 아라기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도스르며 가루베는 입을 열었다.

《각하, 이번에 제가 문화재를 다루는 사람들을 두루 만나 좀 알아낸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왔던 두 조선인중 한자가 오래전부터 〈조선향악보〉라는 고서의 행방을 수소문해왔는데 각하의 장서를 노린것도 분명 그때문일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현재도 계속 그 책을 찾고있다는걸 보면 아직까지 목적을 이루지 못한가 봅니다.》

《〈조선향악보〉?》

아라기의 눈섭이 송충이처럼 꿈지럭거렸다. 잔뜩 시르죽어있던 서기도 그 말을 듣자 수선을 부리며 끼여들었다.

《아, 저도 생각납니다. 장서정리가 끝나갈무렵에 한자가 나한테 와서 그런 책제목을 물은적이 있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아라기는 호들갑을 떠는 서기를 아니꼽게 가로보더니 가루베를 향해 캐물었다.

《대체 건 뭘 하는 책인가?》

다행히 가루베는 늙은이의 그 질문에도 대답할 준비가 되여있었다.

《각하, 저도 그런 책이 있다는걸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알아본바에 의하면 〈조선향악보〉는 〈합방〉이전에 조선궁중에서 쓰이던 민족음악을 기록한 악보집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민족음악을 연구하는데서 자못 가치있는 자료인데 〈대동아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으로 들어온것으로 보아집니다.》

《흠, 그래서 조선놈들이 혈안이 돼서 찾는단 말이지.》

손가위를 쥔 손으로 카이제르수염을 비틀어꼬며 아라기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차겁고 섬찍한 웃음이였다.

늙은이는 한동안 입을 앙다문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가루베쪽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묻는것이였다.

《문화재를 전문한다 했던가?》

(그러면 그럴테지.)

가루베는 속으로 무르팍을 탁 쳤다. 마침내 령감이 슬금슬금 이쪽을 넘보기 시작한것이다.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바르며 아라기에게 대답했다.

《예, 제국시절에 조선에 건너가 살면서부터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라기의 얼굴에 대뜸 랭소가 떠오르는게 아닌가.

《흥, 보아하니 조선에서 골동거래라도 한가보군. 하긴 그때 반도로 건너간 일본인가운데 적지 않은자들이 그런노릇을 하면서 제법 재미를 봤다지?》

《?》

가루베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말았다. 내흉스럽기 짝이 없는 이 령감이 벌써 자기의 구린 뒤를 다 알고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속이 켕겨왔다.

(어떻게 해서든 두상앞에 그럴듯한 모양으로 나서야 할텐데…)

안달이 난 가루베는 오뉴월 쉬파리마냥 넉살스레 아라기에게 달라붙었다.

《각하, 비록 골동품들을 다루었다 해도 자부심은 자못 큽니다. 동양의 우수한 보물들을 모조리 우리 일본에 걷어모으려 한것도 따지고보면 전장에서 무훈을 세운것 못지 않은 애국충정의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흐흐…》

늙은이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

《마치 내앞에 흑룡회의 지사라도 와있는것 같구나.》

아라기는 야유조로 이렇게 빈정대더니 가루베의 늘어진 볼살이 역겹다는듯 골살을 찌프리며 외면해버렸다. 순간 가루베는 참기 어려운 모멸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괘씸한 두상태기! 다 망해빠진 주제에 이 가루베 신조를 조롱하려들어!)

금방이라도 고래고래 악다구니소리가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뭐 대일본제국의 륙군대신이라구? 저 늙다리가 기껏 했다는짓이 도대체 뭔데? 병졸들이 전장에서 무리로 죽어나갈 때 후방 한가운데 틀고앉아선 화약내도 맡아본적 없는 애숭이장교들을 추켜 쿠데타를 일으킨자가, 그것두 백주에 정부대신들을 기관총으로 쏴죽이게 한자가 륙군대신은 뭐 말라죽은 륙군대신이야! 늙다리가 걸치고있는 저 륙군대장제복이란건 또 몇푼어치나 나가기에?…

패전직후 가루베는 페허가 된 도꾜의 어느 저자골목에서 저런 제복을 본적이 있었다. 요란한 훈장들로 치장된 제국의 륙군대장제복이 누구도 돌따보지 않는 헌옷가지들속에 끼워 장마당에 걸려있던 꼴이란… 그 꼬락서니를 저 령감이 한번 봤더라면 환장을 했을테지. 에잇, 썩어문드러질 두상태기! 벼락이나 맞아 콱 뒈질 놈의 두상태기!…

분통이 터져와 미친듯이 속으로 쌍욕을 퍼부어대던 가루베는 불현듯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호되게 뒤통수를 후려쳐왔던것이다.

(이쯤한데 발끈하다니. 고마무라에 드나들면서 여태껏 당한 수모가 얼마라구.)

혹시나 눈치채지 않았는가 해서 가루베는 불안스레 령감의 동정을 엿보았다. 아라기의 가시돋힌 눈길이 아까부터 꽃나무들에 박힌채 움직일줄 모르고있었다. 가루베는 슬그머니 안도의 숨을 내쉬며 뻣뻣하게 굳어졌던 안면근육을 애써 풀었다.

그가 이처럼 곤욕을 참고 견디며 아라기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신고를 다 하는데는 그럴 까닭이 있었다.

제정때 조선에서 살던 가루베는 골동거간군들과 짜고 무려 수천여기에 달하는 백제무덤들을 도굴하여 일확천금한 사나이였다. 일본은 패망하였어도 식민지시절은 비천했던 한 일본인에게 부귀영달을 가져다주었다. 조선의 옛무덤들에서 파낸 부장품들로 일약 벼락부자가 된 가루베는 전후 자기의 도굴품들을 세상에 내놓아 일본학계의 관심을 모았고 나중에는 《백제고고학의 권위자》로 대학의 강단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허나 말 타면 종 두고싶다고 재부와 명성을 그러쥔 가루베의 가슴속에서는 차츰 새로운 엉뚱한 욕망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정계에 나서고싶었던것이다. 권력의 자리에 올라앉아 온갖 위선과 기만으로 막대한 치부를 하는 일본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는 정치야말로 제일 큰 장사이고 권력이자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것을 부러움속에 깨달았다. 가루베는 망상에 부풀어올라 고향인 후꾸오까현의 다가와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할 결심을 하였다.

하건만 제아무리 갑작졸부라 해도 근본이 허약한 어제날의 시정배가 일본정계에 발을 들이밀겠다는것은 지렁이 룡꿈꾸는 격이 아닐수 없었다. 일본에서 정치무대에 나서려면 《3방》 즉 《간판》, 《지반》, 《가방》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간판》은 집안래력이나 학벌, 정당관계이고 《지반》은 지역기반 그리고 《가방》은 돈지갑을 의미하는바 일본말로는 《간방》, 《지방》, 《가방》이라고 발음하는데로부터 《3방》이라고 하는것이다. 이 《3방의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여나는 정치인들이 다름아닌 세습의원들이다. 일본국회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는 세습의원들은 선대에게서 지역을 관리하는 후원단체들을 모조리 물려받는것은 물론이고 후원단체들의 돈줄까지도 고스란히 상속받는 행운아들이였다. 그런 정치인들에 비해볼 때 자기가 가지고있는 돈과 배경이라는게 얼마나 초라한것인가를 가루베는 뼈저리도록 통감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는 물러설념을 안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도 미천한 농부의 자식이였고 이또 히로부미 역시 사무라이의 보잘것없는 하졸이 아니였던가. 미꾸라지도 천년이면 룡이 된다는데 자기라고 정치를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가루베는 꺼질줄 모르는 야망으로 배꼽을 달구며 정계진출에 필요한 인맥을 만들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여다녔다.

그러던중 뜻밖의 호박이 굴러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륙촌매부가 대학동창인 아라기의 서기를 소개해주었던것이다. 가루베는 이게 웬 떡이냐고 쾌재를 올렸다. 왜 그러지 않으랴. 자기 처지에서 아라기 사다오 같은 우익거물에게 붙을 길이 생겼다는게 어디 흔히 차례질수 있는 행운인가.

일본정치에 뻗쳐있는 우익세력의 검은손이 얼마나 막강한가 하는것은 다소라도 정치에 관심하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패전후 일시 움츠러들었다가 미점령당국의 비호밑에 활기를 되찾은 우익세력은 일본의 도처에서 악성종양처럼 창궐하고있었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이고 폭력단체에 이르기까지 우익세력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정계, 재계, 우익의 3위1체》라는 말이 나돌 지경으로 일본의 우익세력은 특권층과 긴밀히 유착되여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익세력들의 뒤에는 바로 제국시대의 골동들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던것이다. 전쟁시기 긁어모은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하여 정계의 막뒤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는 고다마 요시오도 일본의 수급전범자였고 자민당 총재와 수상을 력임한 기시 노부스께도 도죠내각에서 전쟁경제를 주도했던 수급전범자였다. 고마무라에 은둔해있는 아라기 사다오 역시 우익세력을 뒤에서 조종하고있는 흑막속의 거물이 아닌가.

가루베는 떡 본 도깨비마냥 아라기에게 명줄을 걸었다. 그런 거물을 정치적대부로 업을수만 있다면 말그대로 룡이 여의주를 얻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태동안 그가 별별 랭대와 굴욕을 다 당하면서도 문안을 한다, 선물을 마련한다 하며 아라기에게 발길을 끊지 않은것이 그때문이였다.

(지금껏 쏟아부은 공력과 시간을 나무아미타불로 만들수야 없지. 암, 둔갑할줄 모르구야 무슨 정치를 할수 있담.)

어느새 가루베의 얼굴은 느글느글한 표정으로 돌아가있었다. 그러느라니 좀전에 아라기가 문화재를 전문했는가고 묻던것이 생각났다. 난데없이 령감이 그건 왜 물었을가?… 안경알속에서 퉁방울눈을 디룩거리던 가루베에게 피끗 짐작되는것이 있었다.

(가만, 이 두상이 내 손을 빌려서 장서를 도루 뺏어오겠다는 수작이 아닐가? 그럴법도 해.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라니까 자기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일을 원만히 수습할거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 그렇구말구. 그런 일에 들어서야 골샌님같은 저런 서기 열을 합친들 이 가루베를 당할수 있을라구.)

다른 일은 몰라도 장물거래와 관련된 일에서만은 첫손가락에 꼽히지 못하면 입맛을 잃을 그였다. 령감에게 자기의 수완을 보일 생각을 왜 진작 못했을가 하는 후회에 혀를 깨물며 가루베는 엄벙덤벙 아라기앞에 나섰다.

《각하, 분부만 하신다면 조선인들이 가져간 각하의 장서를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그자들과 은밀히 교섭하겠습니다.》

살통을 만났다는듯 서기의 얼굴이 금시 밝아졌다. 헌데 정작 당사자인 늙은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먹었는지 여전히 꽃나무들만 지꿎게 쏘아보고있을뿐이였다. 가루베는 등이 달아 아라기에게 충성스럽게 덧붙였다.

《각하, 가루베 신조를 믿어주십시오! 각하의 혁혁한 명성에 티끌 한점 묻지 않게 하겠다는걸 이 자리에서 목숨걸고 확약합니다!》

졸지에 늙은이의 입에서 시들먹한 외마디소리가 튕겨나왔다.

《바보!》

가루베는 한순간에 멍청해지고말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 이번에도 빗맞혔다는건가? 춤을 춰야 할지 곡을 해야 할지 통 짐작할수가 없었다. 김이 새여버린 풍선꼴로 휘주근해있는 가루베의 귀에 경멸조로 중얼대는 령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까짓 케케묵은 장서나 다시 찾아선 뭘 해. 뭐, 조선놈들과 교섭을 한다구? 쓸개빠진것들!》

가루베의 입에서 맥빠진 소리가 새여나왔다.

《그럼 어찌했으면 좋을지?…》

아라기는 손가위로 꽃망울들을 톡톡 건드려보고있었다. 먹이감을 고르는 맹수마냥 늙은이의 눈자위가 악의에 번득거리고있었다. 불쑥 령감이 누구에게라 없이 묻는다.

《그 조선놈들이 찾고있다는 책이름이 뭐라구?》

서기가 얼떠름해서 상기시켰다.

《〈조선향악보〉말씀입니까, 각하?》

그러자 아라기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맞았다. 난 그걸 가져야겠다.》

늙은이는 가루베를 돌아보며 따져물었다.

《내앞에 그 물건을 가져다놓을수 있느냐?》

아라기의 매몰찬 눈이 대답을 요구하고있었다. 가루베는 얼친 물고기처럼 입을 하 벌린채 늙은이를 바라보았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셈인가? 애당초 음악이라는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을 이 두상이 《조선향악보》를 가져다간 대체 뭘 하려구? 늙어지면 회상으로 산다더니 갑자기 조선의 옛 음악책을 뒤적거리면서 식민지시절을 되돌아보고싶은 생각이라도 들었는가? 늙은이의 변덕에 머리가 어찔어찔했지만 언제 그런 의문이나 붙들고있을 경황이 아니였다. 가루베는 때가 늦을세라 거품같은 찬사를 아라기앞에 아낌없이 터뜨렸다.

《각하, 제가 미처 각하의 그 고명하신 뜻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각하께서 이렇듯 조선의 옛 음악에까지 각별한 애정을 품고계실줄은… 황송합니다, 각하!》

아라기의 두눈에서 비웃는듯 한 광채가 희번득였다.

《애정?》

심술궂게 입을 비틀며 그 말을 되받아외우던 아라기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발작에 가까웠다. 강마른 몸뚱이를 뒤틀며 실성한듯 뿜어대는 늙은이의 목갈린 웃음소리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같이 으쓸하고 청승궂기 짝이 없었다. 가루베도 서기도 그리고 하녀까지도 공포에 질려 그 소리를 듣고있었다.

늙은이는 시작할 때처럼 홀연히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짚고있던 지팽이를 하녀에게 맡기고나서 느적느적 동백나무의 가지 하나를 휘여잡았다. 금방 피여날듯 부풀어오른 동백꽃망울이 가지끝에 붙어있었다. 아라기는 꽃망울을 들여다보며 이죽거렸다.

《각별한 애정이라… 그럴듯한 소리야.》

다음 순간이였다. 뜻밖에도 아라기가 손가위를 들더니 통통하게 물오른 꽃망울의 중둥을 싹독 베여버리는것이 아닌가. 조금도 거침없는 무자비하고 랭혹한 솜씨였다. 반동강이 나버린채 누데기마냥 붙어있는 꽃망울을 보며 모두가 아연실색해있는데 아라기는 도륙과 학대를 소일거리로 삼던 륙군대신시절의 변태심리가 발작했던지 남은 반동강마저 계속해서 싹독싹독 썰어버리는것이였다. 그러는 늙은이의 입가에는 잔인한 통쾌감이 서려돌고있었다. 종내 가지끝에서 꽃망울을 형체도 없이 지워버리고나서야 아라기는 가위질을 멈췄다. 마구 잘리워진 꽃망울쪼박들이 어지러이 발밑에 흩어져있었다.

《그 조선놈들이 향악보인가 뭔가 하는걸 찾아다닌다구 했지. 헌즉 내가 먼저 그 물건을 손에 넣으면 필경 그것들이 이리루 찾아들게 아니냐. 흠, 그리되면 내 조선놈들이 보는 앞에서 그 책을 이 꼴루 만들테다. 이렇게 말이야!》

피방울인양 흩뿌려진 꽃망울쪼박들을 느릿느릿 게다짝으로 지르뭉개며 아라기가 뇌까리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가루베는 령감의 안속에 어떤 돌같은 앙심이 꿈틀거리고있는지 알수 있을것 같았다. 부어오른듯 한 눈두덩아래서 늑대마냥 안광이 튀는 사무라이의 격노한 모습은 볼꼴없는 한갖 간상배의 오금을 얼어붙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가루베는 부러웠다. 아직까지도 늙다리의 온몸에 서슬 시퍼렇게 남아있는 어제날의 위엄이 부러웠고 자기 뜻을 거스르는자라면 누구든 벌레밟듯 짓밟으려드는 광포한 그 기백이 두려우면서도 부럽기 그지없었다. 가루베도 그런 위엄을 떨쳐보고싶었다. 생사여탈권을 거머쥐고 만사람의 머리우에 틀고앉아 부귀와 권세를 한껏 누려보고싶었다. 가슴속에서 검붉은 피가 울꺽 치밀어오르는것을 느끼며 그는 모주먹은 돼지 껄때청으로 아라기에게 다짐했다.

《각하, 모든 일이 각하의 뜻대로 될것입니다. 제 반드시 〈조선향악보〉를 가져와 각하의 분을 풀어올리고야말겠습니다.》

아라기의 눈살이 다소 풀리는듯 했다. 조소가 비낀 표정으로 가루베를 피뜩 보고난 아라기는 하녀에게서 다시 지팽이를 넘겨받아 짚으며 천천히 게다를 끌기 시작하였다. 잠시후 늙은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여전히 힐난조였다.

《아마 자네들은 저 늙다리가 복수심때문에 환장한거라구 생각하겠지. 흥, 뻔할테지. 물론 복수도 해야지. 허나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가루베는 서기와 함께 뒤를 따르며 어리벙벙해서 령감의 말을 듣고있었다. 그러는데 느닷없이 아라기가 물어왔다.

《〈사무라이로 된자 그 뜻을 세워야 사무라이정신을 발휘한다.〉 누구의 말이던가?》

선뜻 떠오르는게 없어 가루베가 당황해하는데 다행히 서기가 발 빠르게 대답했다.

《저, 요시다 쇼인선생님의 훈계라고 알고있습니다마는…》

아라기는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서기의 대답을 들으니 가루베도 얼핏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면 대표적인 《정한론》자의 한사람이고 이또 히로부미의 은사가 아닌가. 헌데 밑도 끝도 없이 요시다 쇼인소리는 왜 꺼내는가? 엉큼한 령감이 또 어떤 메주를 먹일지 알길없어 가루베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령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자네들의 꼴을 보니 절로 그 말이 떠오르는군. 산이 커야 그늘이 크고 뜻이 커야 대사를 이룰수 있거늘 생각하는 꼴들이 그리 쪼물짝해가지구두 뭐 큰일을 해보겠다구?》

아라기는 어림도 없다는듯 채머리를 흔들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늙은이의 사무러운 눈길이 다시금 자기에게로 날아들자 가루베는 간이 덜컹해서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아라기가 랭소를 머금고 시까슬렀다.

《듣자니 제국시절에 조선에서 적지 않은 보물들을 수집했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 같은자들이 인제 와서 아무리 애국심을 운운한다 해도 제국의 전적인 뒤받침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렇게 하는게 식은 죽 먹기였을가?》

《예? 무, 물론… 대일본제국이 뒤에 없었더라면 겨, 결코…》

급작스러운 질문에 가루베가 황겁해서 쩔쩔매는데 야멸차게 대답을 무질러버리며 아라기의 물음이 또다시 잇달았다.

《하다면 대일본제국이 단지 조선의 보물을 탐내서라든가 자네 같은것들의 치부를 거들어주기 위해서만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

가루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그 모양을 못마땅해서 지켜보던 늙은이가 낯을 찡그리며 돌아서버린다. 아라기는 걸음을 옮기며 화가 난듯 중얼거렸다.

《한심한 놈들. 제국의 뜻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것들이 일본을 위해 구실을 하면 얼마나 할고.》

《죄송합니다, 각하!》

《엄히 편달해주십시오, 각하!》

가루베도 서기도 말끝마다 《각하》를 개여올리며 연송 굽신거렸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령감의 눈밖에 난다는것은 곧 끈 떨어진 갓신세를 의미하였던것이다. 자기를 신주 모시듯 하는 태도들이 싫지 않았던지 아라기는 얼마간 누그러진 어조로 훈시를 늘어놓았다.

《과거 우리가 반도에서 시행한 식민지정책의 알맹이가 뭐였겠는가? 명치이래 쟁탈한 일본의 식민지들가운데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집요하게 항거해나선 곳이 바로 조선이였네. 하기야 우리만 쓴맛을 본건 아니지. 옛적에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원의 황제들두 그렇구 세계의 절반을 정복했던 칭기스한의 대군까지도 조선만은 끝끝내 굴복시키지 못했으니까. 왜서였겠는가? 그건 다름아닌 조선인들의 강렬한 뿌리의식때문이였네. 조상에 대한 깊은 효도심과 끈질긴 혈연관념이라든가, 오랜 정착생활과정에 배인 향토에 대한 류다른 집착, 거기다가 유래가 긴 민족사와 고유문화에 대한 긍지… 이런것들이 없었더라면 수천년동안 큰 나라들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끊임없이 시달려온 그들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정복되거나 동화됨이 없이 민족성을 고수해올수 있었겠는가. 오또기를 생각해보라구. 아무리 뒤집어놓아두 손만 떼면 본래대루 제꺽 일어나 앉군 하는 묘한 물건이지. 헌데 그속에 있는 철심만 빼보지. 다시는 일어날념을 못하구 치면 치는대로 나가넘어지지 않는가. 반도를 통치하는 전기간 일본이 실시한 정책도 요점은 거기에 있었던거야. …》

가루베의 눈빛이 음침하게 타오르고있었다. 옛 문부대신의 말이 백번 옳았다. 무엇때문에 대일본제국이 그토록 기를 쓰며 조선의 고대사를 깎아내렸던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자기의 말과 글마저 못쓰게 강박한것은 또 무엇때문이였던가. 지어 조선의 기가 살아나지 못하게 한다면서 명산대처의 중요혈마다에 쇠말뚝까지 박아놓지 않았던가. 결국 그 모든것이 조선인들에게서 뿌리를, 고유한 얼을 송두리채 거세해버리려는 제국의 신중한 의도에서 출발하였다는것이다. 그 시대를 조선에서 체험했던 가루베인지라 령감의 주장에 선뜻 수긍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게 보면 조선에서 옛무덤들을 파헤치며 돌아치던 자기라는 존재 역시 대일본제국의 식민지정책에 리용된 일개 도구에 불과했을뿐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머리를 쳤다.

함께 저지른 범죄는 부정한 야합에로 이어지기마련이다. 가루베는 어쩔수없이 동류의식을 느끼며 뜨직뜨직 이어가는 령감의 말에 귀를 강구었다.

《비록 패망은 했어도 우린 꿈을 남겼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꿈을 말이야. 일본이 살아갈 길은 그 길밖에 없네. 우리의 후손들은 또다시 조선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걸세. 일본의 활로를 열어나가는 길에서 선배들이 남긴 뜻과 경험은 큰 밑천이 될거야. 인젠 왜 내가 향악보인가 하는 조선책을 찾는지 알겠는가? 진정한 사무라이의 후예들에게 있어서 조선의 혼이 깃든 그런 문화재는 감상이나 연구의 대상이기 전에 절멸의 대상이 되여야 한다는걸 알았는가 말일세.》

《각하의 소중한 가르치심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병졸마냥 군턱을 당겨 부동자세를 취하며 가루베가 내뽑는 대답소리였다. 그 대답에서 어지간한 각오를 느꼈던지 아라기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얼마쯤 더 걸어갔다. 그러던 령감이 우뚝 멈춰섰다. 아라기는 자기의 뜻을 재삼 강조하려는듯 돌연히 지팽이로 땅을 두드리며 부르짖는다.

《조선놈들은 아예 불알을 뽑아버려야 해!》

팔십객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치고는 지내 야비한 언사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얼을 뽑아버려야 한다는 선행자들의 유지를 그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거라고 가루베는 생각했다. 그는 령감에게서 광란하던 제국시절의 열광을, 그앞에서는 인간적인 모든 리성이 통하지 않던 과거시대의 미친듯 한 흥분상태를 읽었다. 패전으로 굴욕당한 사무라이들의 가슴속에 잉걸불처럼 이글거리는 그 광기는 거역할수 없는 불호령이 되여 가루베의 머리우에 떨어졌다. 아라기의 호령을 따라야 했다. 그것만이 하찮은 간상배가 일본정계에 들어설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고 출세와 영달을 담보하는 확실한 길이라는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가루베는 마치 출전명령을 기다리는 가미가제특공대원인양 비장한 기분에 사로잡혀 상전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동백나무들이 지나가고 랍매의 가지들이 늘어져있는 곳에 들어섰다. 아라기는 손가위로 꽃이 핀 랍매의 가지를 둬개 잘라 하녀에게 주며 차실에 가져다가 꽂으라고 일렀다. 그러더니 불쑥 눈길을 돌리며 묻는것이였다.

《가루베라고 했던가?》

순간 가루베는 너무나 감지덕지하여 숨이 다 막히는것 같았다. 령감이 처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었던것이다. 육중한 몸을 연신 굽석거리며 가루베는 황공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각하!》

아라기는 쓸모를 가늠해보는듯 가루베의 얼굴을 빤히 눈여겨보다가 말했다.

《난 사람들을 두가지로 갈라보군 하지. 나한테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말이야. 그중에서 난 늘쌍 첫째 부류의 사람들과만 대상하거던.》

어쩌다가 던져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늙은이의 으름장이였다.

(기회라는건 날새와 같아서 날아가기 전에 꽉 붙잡아야 한다구 했지.)

가루베는 으스러지게 손아귀를 틀어쥐며 온몸의 기를 모아 아라기에게 다짐했다.

《각하, 절 믿어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선향악보〉를 기어이 각하의 발밑에 가져다놓겠습니다!》

남의 땅에서도 숱한 보물을 긁어모은 자기가 아닌가. 하물며 제땅에서 그깐 조선고서 하나쯤 손에 넣는게 무슨 대수라구. 가루베는 자기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가루베의 호언장담에 늙은이는 시들하니 손만 내흔들뿐이다. 인젠 귀찮으니 물러가라는 시늉같았다.

《자넬 지켜보겠네.》

하녀의 부축을 받아 별장으로 들어가며 아라기가 남긴 말이였다. 가루베는 주린듯이 그 말을 부둥켜잡았다. 그는 대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멀어져가는 령감의 등뒤에 대고 의기양양해서 부르짖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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