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제 1 장


8. 백제의 후손


술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흐르는 속에 퍼그나 시간이 흘러서였다. 문득 리경식은 이미전부터 궁금하던것이 떠올라 느닷없는 물음을 상열에게 던졌다.

《헌데 어떻게 돼서 자넨 백제에 대해 그리도 애착을 가지게 되였나?》

《엉?》

박상열은 뜻밖의 질문이였던지 한동안 경식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누구에겐지 모를 허거픈 웃음을 흩뿌리더니 천천히 담배 한대를 붙여무는것이였다. 벌기우리하니 달아오른 상열의 얼굴우로 담배연기가 굼실굼실 흩날려갔다. 얼마후 독백을 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두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구만. 허허…》

술에 멍멍해진 상열의 두눈이 허공중의 어느 한 곳을 하염없이 더듬는다. 그러는 그의 얼굴가에는 차츰 구슬픈 빛이 서리여오고있었다.

《자네 말이 옳네. 나에게서 백제는 한낱 묻혀버린 과거가 아닐세.

내 고향은 충청도 부여라네. 자네 부여에 와본적이 있나?… 그 옛날엔 소부리로 불리우던 백제의 도읍지였던지라 사람들은 흔히 부여라고 하면 옛적의 재보를 많이 간직하고있는 고장일거라고 짐작들 하지. 하건만 엇비슷한 시대의 도읍지였던 경주에 비해볼 때 부여가 내보일만 한 문화재란 너무도 보잘것없는것이라 하지 않을수 없네. 그럴수밖에. 신라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외세에 저항했던 백제는 그 대가로 철저한 파괴와 로략질을 당하였으니까. 백제문화의 광휘를 뿌리던 궁궐이며 사찰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남아있는것이라군 주추돌이나 기와쪼각정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걸세. 그래서 〈경주는 눈으로 보고 부여는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말도 생긴거겠지.

난 태여나 일곱해밖에 고향에서 살지 못했네. 그렇지만 유년시절에 본 고향의 정경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네. 푸르무레한 들, 아담한 곡선을 그리며 자리잡은 나직한 구릉들, 기암절벽들사이로 유유히 흐르던 백마강의 푸른 물결과 백제유민들의 한많은 넉두리인양 어디선가 들려오던 〈산유화가〉의 길고 처량한 가락소리… 그런가 하면 형들을 따라 부소산에 놀러 갔다가 계곡으로 흘러내려온 백제의 기와쪼각을 처음으로 만져보던 일이랑 구두레나루에서 어머니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나루배를 타던 일도 눈앞에 선히 안겨오네. 참, 일본인들이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게 된것도 백제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건네줄 때 관문역할을 했던 구두레나루에 연원을 두고있다는 일설도 있더구만.

우리 집안은 부여고을에서 십대가 넘게 살아온 퇴락한 량반의 가문이였네. 한때는 대제학을 배출할 정도로 가운이 번창했던적도 있었다지만 증조부가 망국의 〈을사5조약〉날조에 통분을 느끼고 자결해버리신 뒤로는 점차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더군.

난 삼형제중에 막내로 태여났네. 집안어른들의 강요로 마음에도 없이 우리 어머니와 살아야 했던 아버지는 내가 세살적에 서울에 공부하러 간다는 말을 남긴채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버리셨지. 난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철이 들기 시작했네. 우리 어머니의 장농우에는 낳은 순서로 자식들의 태줄이 매여있었는데 어느 자식이 병에 걸리면 어머니는 그 자식의 태줄을 내려놓고 정화수를 떠서 기도를 올리시군 했다네. 그렇듯 자식사랑이 지극한분이였지만 아버지가 떠나가버린 후 두해가 지나자 다섯살밖에 잡히지 않던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형제모두를 작은할아버지가 훈장으로 있던 서당으로 내모시더구만. 아마 자식들이 아비없이 막 자란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들을가봐 강심을 먹으셨던 모양이야.

일찌기 우리 할아버지가 없고나서 문중의 좌장노릇을 맡아온 작은할아버지는 랭수를 마시고도 큰기침을 하는 꼬장꼬장하고 엄한 선비시였지. 허허… 마치 어제일처럼 생각되네그려. 글공부중에 내가 헛눈이라도 팔면 당장에 산죽뿌리로 된 작은할아버지의 서산대가 종아리에 떨어지군 하던 일이랑 책 한권을 뗄 때마다 책씻이라고 해서 어머니가 떡을 빚어 동네에 돌리던 일들이 말일세.

더더욱 잊혀지지 않는건 왜놈들의 폭정밑에서 기를 못 펴고 살아가던 고향사람들의 모습이네. 거 그전에 학질을 떼기 위해 〈염라대왕〉과 〈어영대장〉이라는 무서운 이름을 써서 이마에 붙이는 주술료법이 있더랬지. 글쎄, 어찌나 왜놈들이 못되게 굴었던지 우리 고장 사람들은 학질에 걸리면 조선총독이나 파출소장의 이름을 이마에 써붙이군 했다니까. 어느해인가 옆집 임신부가 밀주단속 나온 왜놈순사의 발길에 채워 피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도 〈쪽발이새끼들!〉이란 욕설이 저절로 튀여나오더구만. 그때부터 난 왜놈들만 보면 겁보다도 분한 마음이 앞서군 했네.

내가 일곱살 되던 해였네. 몇해동안 소식 한장 없던 아버지가 불쑥 고향에 편지를 보내왔더군. 일본에서 무사히 지내고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였네. 어머니는 편지내용을 전해듣자마자 동네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세 자식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떠나셨네. 휑뎅그렁한 들판에 마른바람이 슬프게 불던 가을날이였지. 목메인 고동소리를 울리며 떠나던 관부련락선 3등실에서 둥근 선창에 얼굴을 갖다대고 멀어져가는 부산부두를 바라보며 눈물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가슴을 에이군 하네.

아버지가 거처하신다는 오사까근처의 히라가따라는 도시에 우리 모자일행이 이른것은 여러날이 지나서였네. 너무도 뜻밖이였던지라 아버지는 기가 차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더구만. 가문의 종손된 도리를 영 외면할수가 없어 문중어른들께 안부 몇자 적어보낸 일이 그렇게까지 번져질줄은 아버지도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야. 그래도 어찌겠나. 세 자식까지 앞세우고 현해탄을 건너 수천리길을 찾아온 어머니를 차마 문전박대할수 없었던지 아버지는 다른 말을 못하고 우릴 받아들이셨네.

그 당시 아버지는 고철상을 하고계셨네. 후날 이야기를 들으니 문중사람들에게서 걷어모은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일본으로 온 아버지는 처음에 공부를 해보려고 했지만 민족차별이 격심한 일본사회를 체험하면서 인츰 환멸을 느끼셨다더군. 그렇다고 다시 고향에 돌아갈 체면도 없었던지라 아버지는 모든것을 다 포기해버린채 혹가이도에서 시꼬꾸까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녀자를 사귀고 도박을 즐기셨다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아무곳에나 머물러 날품팔이를 하시고 돈이 생기면 또다시 내키는대로 떠나군 하셨지. 타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을 숙명으로 알고 살수밖에 없었던 망국노의 못난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정처없이 헤매다니던 아버지는 어느날 우연히 만난 삼촌벌 되는 한 친척분에게서 호된 꾸중을 듣고서야 비로소 방랑을 그만두게 되시였다는걸세.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방랑벽은 재차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네. 아버진 매일같이 집을 비우고 어데론가 나갔다가는 밤이 이슥해서야 곤드레만드레 취한 몸을 난파선처럼 기우뚱거리면서 들어오군 하셨네. 그리고는 까닭없이 어머니와 우리들에게 역정을 내기도 하시고… 정말이지 술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아갈수 없는분 같더라니까.

별수없이 생계는 어머니와 형님들이 걸머지지 않으면 안되였네. 어머니는 걸레며 밀대 같은 청소도구를 만들어 병원에 납품하는 일을 얻어하셨고 두 형님은 때이르게 손수레를 끌고 파철을 모으러 다녔지. 그런 속에서도 어머니는 막내자식 하나만은 공부를 시켜보려고 나를 근처의 국민학교에 보내시더군.

허나 일본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것이란 쓰디쓴 렬등감과 비굴한 인내심뿐이였네. 아침마다 교장은 철부지학생들을 운동장에 정렬시키고 히노마루를 가리키며 묻군 했지. 〈저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러면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했네. 〈히노마루입니다!〉. 〈너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조선사람인가?〉. 〈아닙니다!〉. 〈그럼 중국사람인가?〉. 〈아닙니다!〉. 〈너희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일본사람입니다!〉. 교장이 반복하여 물을수록 아이들은 더욱 기세가 올라서 자기들은 〈일본사람〉이라고 목청껏 떠들어댔네. 그러는 학생들속에는 나 같은 조선아이들도 섞여있었건만 다른 민족에 대한 교육적배려는 꼬물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조선사람이 조선사람으로 될수 없는 마당이였지.

조선아이라고 따돌리는 일본애들의 〈이지메〉(집단적으로 몰아주는것)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것이였네. 내가 일본말을 서툴게 하면 아이들은 제가끔 흉내를 피워 날 조롱했고 내가 고무신이라도 신고있는걸 보면 〈쭁꼬, 쭁꼬〉(일본인들이 조선사람을 멸시하여 부르는 말) 하면서 못살게 굴었네. 그럴 때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골백번 꿈틀거렸지만 자식 하나를 학교에 보내놓고 늘 대견해하시는 어머니앞에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더구만.

난 일본애들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네. 〈조센징 닌니꾸 구사이〉(조선사람 마늘냄새 고약하다.)라고 경멸하는 왜놈애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마늘이나 고추장 같은건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네. 그뿐이겠나. 날마다 손으로 코를 부여잡고 열심히 일본말의 코소리를 련습하기도 했지. 난 조선을 모국으로 갖고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네. 일본땅에서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조센징〉이라는 말을 듣는것이 죽기보다 더 괴로웠네.

어느날 있은 일이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더랬지. 아이들은 왁자그르 떠들며 집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네. 나도 애들속에 끼워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는데 불현듯 길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더구만. 돌아보니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마중나오신것이였네. 억수로 쏟아져내리는 비발속에서도 어머니가 신고계시는 흰고무신이 유표하게 내 눈을 찔러왔네. 순간 학급애들의 눈에 띄울가봐 더럭 겁이 나더군. 난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뺐네. 온몸에 차가운 비를 맞으며 어쩔줄 몰라 망연히 서계시는 어머니를 등뒤에 남긴채 말일세. … 정말 울고싶도록 슬픈 순간이였네.》

박상열의 말은 돌우에 부딪친 비방울처럼 흐트러지고말았다. 상열은 수치를 가리우려는듯 고개를 떨구더니 안경을 벗고 축축하게 젖어든 눈구석을 주먹으로 찍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경식의 가슴도 뻐근한 아픔으로 저려났다. 한동안이 흘러서야 상열은 이마전에 내배인 땀을 훔치며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날 밤이였네. 아버지는 여느때보다 더 만취해서 들어오셨는데 글쎄 나를 보자마자 불이 나게 따귀를 후려갈기시는게 아니겠나.

〈이놈아! 제 부모가 그렇게도 창피하면 래일부터 당장 게다짝이나 걸치고 다녀라!〉

이렇게 고함을 지르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쓰라린 분노와 노여움으로 하여 괴롭게 이그러져있었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날 우연히 거리를 지나가던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를 뿌리치고 달아나는 꼴을 죄다 지켜보셨다는걸세. 난 너무 얼이 나가 코피가 터져 흐르는것도 닦을념을 못하고 아버지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네. 늘쌍 어머니와 우리를 싫어하시는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돌같은 가슴속에 그처럼 격렬한 감정이 숨어있는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버지가 날 때린건 단지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때문만이 아니였던것 같네. 난 그 시절의 아버지가 왜 밥상앞에 마주앉으면 기어코 된장찌개부터 찾군 하셨는지, 그런가 하면 고향을 버리고 오시면서도 어째서 가문의 족보책만은 고집스레 품에 안고 오셨는지 오늘에야 어렴풋이 알것 같네. 그러이. 고향과 문중사람들한테서 불효자식이라고 지탄을 받아온 우리 아버지도 결국은 민족의 아들이였네.

그날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나는 온밤을 밖에서 보낼수밖에 없었네. 우리 집의 대고리짝속엔 가문의 족보인 〈반남박씨세보〉가 들어있었는데 다음날부터 난 아버지의 지엄한 명에 따라 저녁마다 족보의 전체 내용을 소리내여 읽고 옮겨베끼지 않으면 안되였지. 허허허…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아버지의 처사가 선뜻 리해되지 않더구만. 이따금 심부름을 갔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조선인마을의 정경을 볼 때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멸시받는 겨레들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조센징〉이라는 렬등의식은 못견디게 나의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군 했네.

그러던 나의 마음속에 배달민족의 기가 살아오르기 시작한건 중학교 1학년때였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미야자끼라는 량심적인 교원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선생이 력사시간에 이런 내용의 말을 하더구만.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구다라(백제)다. 불교만이 아니라 일본의 온갖 문화가 거기서 건너왔다. 따라서 구다라는 일본문화의 은인이요, 뿌리라고 할수 있다. …〉

미야자끼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나의 온몸엔 환희와 감동이 전류마냥 흐르고있었네. 이튿날부터 난 시내의 도서관들을 찾아다니면서 구다라와 관련된 서적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네. 정말 놀랍더구만. 일본의 지명들과 낱말들, 력사와 문화의 갈피들마다에서 구다라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보았을 때, 더구나 운명적인 인연이라 해야 할지 내가 살고있는 히라가따라는 고장이 백제신사며 왕인묘 같은 백제인들의 자취를 많이 간직하고있는 까닭에 〈일본속의 백제〉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의 충격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네. 자랑할것이라군 아무것도 없는줄 알았던, 그래서 멸시를 받을수밖에 없는줄 알았던 우리 민족에게 그렇듯 가슴벅찬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앞에 어린 나의 심장은 미칠듯이 높뛰였네.

자기 민족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길 때 생각지 못한 힘이 솟구치는것 같네. 난 평소에 날 〈조센징〉이라고 멸시하며 못살게 굴던 일본애들에게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선언했네. 〈난 구다라징이다!〉 하고 말일세. 그때부터 난 학급애들중에 누가 날 〈조센징〉이라고 놀려주면 젖먹은 힘까지 다 내서 달려들군 했더랬지. 내 눈등에 난 흠집도 그래서 생긴거구. 허허허… 중학시절에 내가 학교야구팀의 투수로 맹활약을 할수 있은것도 그리고 힘겨운 조건을 무릅쓰고 고등학교까지 다닐수 있은것도 따지고보면 〈난 백제의 후손이다. 그러니 일본애들한테 눌리면 절대로 안된다.〉는 오기와 뚝심때문에 가능했던것 같네. 난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백제인으로 성장해갔네.

중학을 마치고 도꾜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백제에 대한 나의 애착은 여전했네. 동료들이 류행을 따른다고 괴테의 〈파우스트〉나 앙드레 지드의 소설책을 멋삼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때도 난 항상 백제와 관련된 서적만 고집스럽게 품고 다녔으니까. 고백하건대 침략당하고 모욕당한 약소민족의 후예였던 나에게 있어서 백제는 자기를 버티여내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세. …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듬해 태평양전쟁이 터졌지. 온 일본땅이 〈멸사봉공〉과 〈야마또정신〉으로 강다짐되고 내인들마저 몸뻬차림에 죽창을 들고다녀야 하던 그 살벌했던 시절은 떠올리기조차 소름이 끼치는구만. 자네도 겪었겠지만 그때 왜놈들의 발악이 오죽이나 심했나. 결국은 나도 학도병으로 남양군도에 끌려나가지 않으면 안되였지. 비참하고 지겨웠던 전쟁터에서 어떻게 내가 죽지 않았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네. 그때 내 머리속에는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짓밟고 짓이겨도 살아나고 석달을 가물어도 살아나는 길짱구처럼 악착스럽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뿐이였네.

마침내 그처럼 갈구하던 해방의 날이 왔네. 우리 겨레에게 24시간 내내 태양이 떠있던 그날의 감격은 자네에게도 마찬가지였을테지. 내가 사지판에서 살아오니 어머니랑 징용터에서 돌아온 두 형님이 나를 부여안고 온밤 울며웃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더구만. 하지만 식구들속에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네. 술에 절어 오욕의 세월을 근근히 견디여오던 아버지는 온몸에 푸르딩딩 간독이 올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불이 꺼지듯 세상을 떠나셨다는게 아니겠나. 달래김치가 먹고싶다는 고별의 말을 남기시고 말일세. …

난 형님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갈 차비를 서둘렀네. 하건만 어디 배를 구할수가 있어야지. 들려오는 소문이 일본전국에서 물밀어드는 동포들바람에 시모노세끼며 오사까항은 사람사태가 날 지경이고 수많은 동포들이 한지에서 며칠을 기다려봐도 배편이 차례지지 않아 아우성이라는것이였네. 거기다가 전염병까지 발생해서 무리로 사람들이 쓰러지고있다는 소식에 우리일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우고있더랬지. 그럴즈음이였네. 하루는 어떤 동포유지가 찾아와서 대뜸 날더러 히라가따동포상조회의 부회장사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네. 8.15직후 일본도처에서 재일동포들의 자치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 않았나. 히라가따동포상조회도 그런 단체들중의 하나였지. 취지를 들어보니 히라가따시에 사는 동포들의 귀환대책과 민생방조를 목적으로 무은 단체였는데 내가 젊고 어느 정도 공부를 한데다가 구변까지 좋아 적임자라던지. 허허…

난 두말없이 응해나섰네. 당장 귀국할 길이 막연해서였기도 했지만 해방된 세상에서 나도 민족을 위해 뭔가 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젊은 혈기가 막 북받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더구만. 난 힘든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뛰여다녔네. 일터를 잃고 실업상태에 있는 동포들을 위해 미군공습으로 불타버린 시가지의 한쪽귀퉁이를 빌려 자그마한 간이점포들을 꾸려놓는 일도 도와주었고 장사할 힘이 없는 동포들을 위해서는 전쟁통에 페허가 된 곳을 정리하는 막로동도 알선해주었지. 그런가 하면 상조회간부들과 함께 시청으로 몰려가 당국자들의 민족차별정책에 항의를 들이대기도 했더랬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치는데 뜻밖에 고향에서 편지가 날아오질 않겠나. 고종사촌형이 내 소식을 전해듣고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였네. 사연인즉 해방이 되자 그 형님이 고향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향토사를 연구정리할 목적으로 〈부여문화동호회〉라는걸 내왔다더구만. 헌데 글쎄 일을 시작하자고보니 중요한 사료의 하나인 〈부여읍지〉를 왜놈들이 략탈해갔다는게 아닌가. 고향의 사적을 기록해놓은 그 책이 없이는 향토사연구가 곤난하니 아무쪼록 환국하기 전에 〈부여읍지〉의 행방을 꼭 알아봐달라는 부탁이였네.

그 편지를 받아보았을 때 왜 그리도 가슴이 울렁거리던지… 마치 내자신이 사명당이라도 된것 같더구만. 난 이튿날부터 지체없이 읍지를 찾는 일에 달라붙었네. 인젠 해방이 됐는데 산인들 떠옮기지 못하랴 하는 배심으로 말일세.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야 난 그 일이 진창길에 흘린 좁쌀알을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걸 깨닫게 됐네. 하지만 포기할수가 없었네. 단순히 고향사람들의 부탁을 외면할수 없다는 도리때문만이 아니였네. 그보다 더 내 결심을 요지부동으로 만든건 읍지의 행방을 찾아헤매는 과정에 목격한 기막힌 현실이였네. 글쎄, 우리 민족의 귀한 고문헌들은 죄다 일본에 와있더라니까. 고서업계에 눈이 트이면서야 난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조선본〉이라고 하는 우리 서적들을 거의 씨를 말릴 지경으로 도적질해갔다는걸 알게 됐네. 어찌 그뿐이겠나. 이등박문과 데라우찌를 비롯한 비렬한들이 왕조의 실록이랑 규장각의 장서를 비롯해서 수많은 민족고전들을 몰래 빼돌린 사실도 자상하게 알수 있었지. 오죽하면 일본인들자신이 조선의 민족고전을 구하려면 오히려 일본에서 찾아보는게 낫다는 말까지 하고있겠나.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 난 번번이 헛물을 켤적마다 왜놈들이 도적질해간 우리의 고서제목들을 아는껏 속으로 외워보면서 강심을 도슬러먹군 했네. 어느새 두달 남짓한 시일이 흘러갔네. 그새 귀국하는 배편도 여러차례 나섰건만 나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두 형님은 더 참을수 없었던지 어머니를 모시고 어서 떠나자고 불같이 독촉했네. 사실 해방된지 몇달이 되도록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지 못하고 어머니마저 여적 이역의 찬바람을 맞으시게 하였으니 난들 자식으로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왜 없었겠나. 고심끝에 난 어머니와 형님들에게 내 걱정일랑 말고 먼저 귀국하라고 힘겹게 말을 뗐네. 두말할것없이 식구들이 펄쩍 뛰더군. 어머니는 아무 말씀없이 한숨만 쉬시는데 형님들은 날더러 실성한 놈이라느니, 그놈의 공부가 웬쑤라느니 하며 갖은 욕설을 다 퍼붓는거네. 그래도 난 마음을 바꿀수가 없었네. 해방된 땅에서 왜적에게 유린당했던 제 고장의 력사부터 떳떳이 바로세우고싶어하는 고향사람들앞에 어떻게 빈손으로 나설수 있단 말인가. 사비성과 황산벌에 묻혀있는 백제의 원혼들이 날더러 뭐라고 하겠는가 말일세. 이대로 물러서는건 숱한 우리 재부를 로략질하고도 뻔뻔스레 시치미만 떼고있는 왜놈들에게 무릎을 꿇는거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올라 더더구나 단념할수가 없었네.

나중에 어머니와 형님들은 소 만마리가 끌어도 돌려세우기 힘든 녀석이라고 도리를 저으며 나앉더구만. 하지만 막상 오사까부두에서 가족들과 리별할 땐 눈물이 쏟아져나오는걸 겨우 참았네. 헤여지는 순간까지 막내자식의 손을 부여잡고 놓으실줄 모르시던 어머니에게 난 인츰 따라가겠다고, 인츰 가겠으니 념려하지 마시라는 말씀밖에 더 드릴수가 없었네. …

어머니와 형님들이 귀국길에 오른 뒤 난 상조회사업에서 아주 손을 떼고 히라가따에 조그마한 고서점을 하나 차려놓았네. 전적으로 〈부여읍지〉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고서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금껏 난 고서상인들가운데서 떼돈을 번 사람은 본적이 없네. 여느 고물업과는 달리 고서점이라는게 주로 가난한 서생들만 상대해야 하니 그럴수밖에. 거기다가 주위에서 시퍼렇게 젊은 녀석이 할 일이 없어서 케케묵은 고서더미속에 파묻혀 지내나 하는 소리들이 들려올 때면 솔직한 말로 남보기 뭣한 때도 없지 않더구만. 하지만 난 고향의 재보를 되찾아가지고 귀향할 그날만을 꿈꾸며 모든것을 참고 견디여나갔네. 그렇네, 내겐 꿈이 있었네. 백만장자의 재산과도 바꾸기 싫고 이 세상 온갖 유혹과 비웃음에도 무너질수 없는 내딴의 소중한 꿈이 말일세. 그런 꿈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귀국도 미룬채 겨우내 불 한번 제대로 지필수 없는 랭돌같은 자취방과 흙바람 맵짠 이역의 골목길에서 가난한 고서업자로 살아갈수 있었겠나.

그러는 동안 고향에선 수십번도 넘게 귀국을 독촉하는 편지가 왔었네. 헌데 그 편지들이 나에겐 오히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게 하는 엄한 채찍질로 여겨지더구만. 난 편지를 받을 때마다 기어코 뜻을 이루고서야 환국하겠다는 결심을 새삼스럽게 가다듬군 했지.

두해가 지나고 세해가 지나도 내 고집이 흔들리지 않자 어머니는 생각을 달리하셨던지 어느날 난데없이 혼처를 정해서 알려오시더구만. 문중사람의 소개로 들어온 혼처였는데 도꾜에서 크지 않은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 동포상인의 딸이라는것이였네. 너무도 청천벽력이였지만 어머니앞에 불효막심해온 나로서야 무슨 군소리를 할수가 있었겠나. 그렇게 돼서 안사람과 만나게 되였네. 결혼을 하고나서 도꾜로 자리를 옮긴 뒤 난 또다시 여기에 고서점을 차려놓았지. 저 사람이 질색을 했지만 말일세. 허허허…》

박상열은 물그릇을 들고 들어서는 안주인을 가리키며 헌거롭게 웃었다. 그러자 안주인이 그들앞에 물그릇을 가져다놓으며 너름새 좋게 끼여드는것이였다.

《에그, 말씀도 마이소. 지가 처음엔 참말로 기절하는줄 알았십니더. 글쎄, 함께 길을 가다가도 홀지에 지나가는 고물장사군의 손수레를 뒤지질 않나, 집안을 왼통 빈대천지로 만들질 않나. … 한번은 그놈의 빈대때문에 우리 친정집까지 발칵 뒤집어놓은적이 있지 않습니껴.》

《핫하하…》

상열이 안주인의 말에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렸다.

《빈대라니?》

경식은 영문을 몰라 그들 내외를 바라보는데 얼마후 상열이 여전히 웃음집이 흔들거리는 어조로 설명을 달았다.

《빈대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닌게 아니라 헌책을 구입하다보면 그놈때문에 골치를 앓게 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닐세. 내 언젠가 고서 몇권을 구해가지고 오다가 일이 생겨 근처의 처가에 맡겨두었던적이 있었네. 그런데 뜻밖에 그속에서 빈대무리가 쓸어나올줄이야. 처가에선 빈대소동으로 대판 란리가 터지고 1년 내내 그놈들을 박멸하느라고 고생개나 해야만 했지. 그 일이 있은 후로 처켠 사람들은 묵은 서적을 보기만 해도 질겁을 하고 달아난다네. 하하하…》

듣고보니 리경식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흔연스러운 웃음에 가리워져있는 박상열의 도고한 뜻과 고심겨운 노력이 헤아려져 가슴이 뭉클해왔다. 속물근성이 성행하는 이 일본땅에서 저렇게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어디 가나 무자비한 생존경쟁이 란무하고 돈과 권세와 향락에 대한 욕구만이 번성하는 자본주의세계에서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에 매달릴 대신 소귀신처럼 자기가 결심한 일에 일생을 걸고 겨레와 후손들을 위해 제나름으로 젊음을 태워가는 저런 사람들이야말로 어깨를 그러안을수 있는 소중한 벗들이 아니겠는가.

리경식은 박상열이 겪어온 그 모든 고초와 희생을 함께 나누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부여읍지〉는 여태 찾지 못했나?》

경식의 물음에 상열은 히죽이 웃더니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실은 몇해전에 규슈에 사는 한 동포가 읍지를 찾아 고향에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네. 그 말을 처음 전해들었을 땐 손맥이 다 풀리더구만. 지금껏 기울여온 노력이 고스란히 헛공사로 된것만 같더라니까. 하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구. 일본인들에게서 되찾아야 할 재보가 어찌 〈부여읍지〉 하나뿐이겠나. 아까 자네도 봤지만 읍지를 찾느라 헤매다니는 과정에 내가 구입한 민족고전들만 해도 퍼그나 된다네. 난 이왕 이 길에 들어선바엔 일본땅에 널려있는 우리의 옛책들을 하나라도 더 찾아가지고 귀향하리라 마음먹었지. 그러다나니 오늘까지 차일피일 귀국을 미루어온거구. …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벌써부터 이남의 대학들과 연구기관들에선 수집한 장서를 기증해달라는 청탁을 내게 뻔질나게 들이대고있다네. 그럴 때마다 좀 성가시긴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더구만. 금의환향이라고까지 말하긴 뭣하지만 아무튼 나도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진 않게 되였다는 생각에 가슴이 흐뭇해지군 하네. 허허허…》

박상열의 동그란 얼굴에 소년같은 천진스러운 웃음이 떠돌았다. 그런데 곁에서 안주인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듣자니 이남땅에서두 돈과 빽이 없으면 죽은 목숨 한가지라던데 인규 아부지의 그 수고를 누가 제대로 알아나주겠습니껴. 지발 가족들 걱정버텀 하시문 좋겠십니더.》

우선우선한 태도로 건네는 푸념이였어도 녀인의 말속에는 집일을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야속함이 짙게 슴배여있었다. 경식은 문득 안해생각이 났다. 그의 안해 역시 가정살림을 혼자 떠안고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얼마나 해왔던가. 저도 모르게 측은한 생각이 들어 경식은 안주인에게 위안삼아 말했다.

《그간 아주머니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안주인은 경식의 말에 속이 물컹했던지 무랍없는 하소연을 터놓았다.

《고생이라기보담 이따금 서러운 생각이 들어 그럽니더. 남들은 빠찡꼬를 차린다, 면옥을 해본다 하며 눈에 피발이 서서 뛰여다니건만 저 어른은 예나 지금이나 늘쌍 헌책들만 뒤지고계시니 참말로 속타는 일이 아입니껴. 도대체 거기서 돈이 나옵니껴, 밥이 나옵니껴. 지금이라도 우리가 다른 장사를 시작하겠다문 본가에서랑 기꺼이 뒤를 대주겠다는데도 고집이십니더.》

하건만 상열의 입에서는 시를 읊조리듯 배포유한 소리만 흘러나올뿐이다.

《허, 창공을 날으는 기러기의 뜻을 제비며 참새들이 어찌 알리오. 더구나 대장부가 체통도 없이 처가집에나 매달려 살가.》

옛날 유생들마냥 올방자를 틀고앉아 바라진 몸집을 흔드적거리는 박상열의 거동에서는 자못 거드름스러운 가장의 위엄이 번져흐르고있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에 기가 차는지 안주인이 또다시 응수를 했다.

《그라문 여직껏 우리가 이 고서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껴. 여기서 얻는 수입으론 집세도 대기 힘이 든다는걸 인규 아부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껴. 사실 이 고서점도 누가 장만해준깁니껴. 다달이 턱없이 모자라는 가계비는 누가 보태주고요. 지는 그것이 섭섭하다는깁니더. 왜 우리 부모님들의 성의를 그리두 무시하시는가 말입니더. …》

상열은 심기가 불편한지 안경을 벗어 닦으며 연신 엉치를 들먹거린다. 그러거나말거나 안주인의 푸념은 그칠줄 몰랐다.

《전번에 기와인지 막새인지 하는걸 들여오실 때도 그렇십니더. 아무리 백제물건이 중하다한들 어떻게 그러실수 있습니껴. 그기 어떤 돈입니껴. 우리가 점포라도 따로 마련해서 가계에 보태라구 친정아버님이 피나게 벌어 보내주신 돈이 아입니껴. 그런 돈을 그렇게 한마디 상론도 없이 훌떡 꺼내가시문 지가 인제 부모님들께 머락꼬 변명하는가 말입니더.》

《아, 듣기 싫어!》

그만에야 가장이 버럭 역정을 냈다. 박상열은 얼굴이 시뻘개서 충청도특유의 억양으로 말까지 더듬으며 안해를 욱박지르는것이였다.

《그렇게 돈을 내기 아까우면 말이여, 엉!… 뭐, 뭣때문에 신라가 외적을 끌어들여가지구 백제를 멸망시켰는가 말이여! 엉!》

그러니 자기는 백제인이고 경상도출신의 처켠 사람들은 신라인이라는건가. 긴장된 속에서도 웃음이 솟구쳐나와 경식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말았다.

《하하하…》

그바람에 박상열부부도 제풀에 어이가 없었던지 허거프게 따라 웃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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