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16


동해려관은 도시에서 전후에 건설한 현대적인 건물중의 하나이다. 오늘은 일요일이여서 류계환은 하루쯤 푹 쉬리라 마음먹고 자기 방에서 심심풀이로 외국번역소설을 읽고있었다. 이때 녀성관리원이 나타나 밖에 녀자손님이 왔다고 알려주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녀자손님이라고 하기에 미용사로구나 하는 직감을 하였지만 기다린 사람은 생신하기 이를데없는 초면의 처녀였다.

스무살이나 넘겼을듯 한 처녀가 눈길을 끄는 희고 반듯한 이마를 살며시 숙이며 하는 말이 남계수지배인이 보내서 왔다는것이였다.

류계환은 이상하게도 속이 두근거렸다. 꼭 못할짓을 한것 같은 괴이한 심사에 접한 그는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류계환은 이 처녀가 남계수의 딸이구나 하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그런가고 물을수도 없어서 어물쩍 넘겨버리려는 투로 말했다.

《일요일이긴 해도 난 바쁜데…》

《말씀드리면 꼭 응하실거라고 했습니다.》

처녀의 차분한 목소리와 씨가 박힌 말마디들이 거절할수 없게 하였다. 류계환은 미용사를 만나지 않은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끌려가듯 따라섰다. 려관에 그냥 남아있었댔자 그 녀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올것만 같았던것이다. 달콤한 신세를 진 품을 외면하려는것도 그의 처세도가 가르치는 계시가 있었기때문이였다.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 그러면 헤여나오지 못할지어다.

류계환은 남계수의 집으로 가는줄로만 알고 따라걷다가 이상하여 물었다.

《지배인이 어데서 날 기다리나?》

《조금만 가면 됩니다.》

처녀는 바다기슭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니 바다소풍을 하자는건가?》

류계환의 말에 처녀는 조용히 웃어만 보였다.

흥성철제일용품공장에 대한 검열을 마감지었다. 류계환은 비로소 흥성철제일용품공장을 검열대상에 포함시킨것을 후회하였다. 애초 검열대상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료해과정에 나타났다는것은 너무도 일반적인 결함들과 편향들이였던것이다. 그러니 남계수가 일하는 공장을 검열했다는 자체가 론의거리로 될수 있었다. 그 일은 전가할수 없는 자기의 책임이라는것을 알게 될수록 미용사가 의문스러웠다. 무슨 까닭에 남계수를 제껴달라고 간청했는지 알수 없다. 검열이 마감단계에 이른것을 아는지라 어지간히 못살게 굴었다. 아무리 칼이 서슬이 선들 칠 목이 없는데야 어떻게 하는가. 이 류계환이 무소불위의 인간은 아니지 않은가.

이틀전 검열총화회의때 본 남계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단위와는 달리 공장의 행정부서 책임자들과 직장장들만 모인 규모를 축소한 회의였다. 시와 구역의 일군들 몇사람이 참가하였다. 자료통보에는 공장의 생산실태와 기업관리에서 료해된 긍정적인 문제들과 함께 무시할수 없는 일부 편향들이 지적되였는데 그중의 많은 부분은 지배인에 대한것이였다. 독단과 전횡에 가까운 관료주의적인 일본새, 낡은 사상잔재에 뿌리를 둔 군중관점이 날카롭게 제기되지만 남계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채 세시간이 넘도록 자세를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총화회의를 지도하던 류계환은 회의 전기간 한본새의 모양인 남계수가 눈에 거슬리여 한마디 하였다.

《지배인동문 사업에서 참고할 문제들이 없소? 적어두는척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줄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요.》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였다. 남계수는 매우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난 지금 종이장에나 적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심장에 새겨넣고있습니다.》…

류계환은 바다가 도래굽이의 바위우에 그때처럼 앉아있는 남계수가 눈에 띄자 걸음을 멈추었다. 해풍에 총이 센 머리카락이 되는대로 흩날렸다.

《계수형, 바다가 좋군요.》

류계환이 지어먹은 인사말을 하자 얼핏 고개를 돌려본 남계수가 자기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와줘서 고맙네.》

《미안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요. 집에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건데. 길가에서 형수님을 만난게 고작이니 어찌겠소. 내 일이란 워낙 그런걸.》

《자네 언제부터 지금같은 일을 해오나?》

남계수가 별로 흥미를 가지고 묻는것이 아니라는것이 얼굴에 알렸다.

《이젠 10년가까이 되여오지요.》

《그래, 세월이 못하는 일이 없다더니 그른데가 없는 말이야. 허허, 사람이란 달라지기마련이지. 안 그런가?》

어덴가 비꼬아대는 말이지만 류계환은 남계수의 성미를 아는지라 쓴입만 쩝쩝 다시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곁에 앉은 사람이란 한때 천하에 무서운것이 없다던 사나이였던것이다. 개인철공소때는 주인이였어도 손에서 쇠망치를 놓지 않고 단쇠를 두드려댔다.

《세상일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래도 이번 검열을 내가 책임진걸 다행으로 여기시오.》

남계수편에서 객적어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무슨 일인들 안 겪었다구 검열 같은걸 무서워할텐가. 내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는거지. 목을 내대라면 그렇게 하는거구.》

류계환은 상대가 상대이지만 하는 말이 너무도 날카로와 입을 벌리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람은 당초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떤 배심으로 사는것인가. 남계수라는 사람은 자기를 통제하는 세계가 있다는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류계환은 말했다.

《고작해서 6급기업소의 지배인인데 셈을 해선 뭘 하오.》

네가 나를 두고 세월이 빚어놓은 놈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도 할말이 있다는 심사가 깔린 말을 듣자 남계수가 고개를 움씰 돌렸다. 그의 눈빛에서 이상한 빛이 발산하자 류계환은 겁을 먹으며 피했다.

《정말 그렇지?》

남계수가 다그치듯 묻는데 어찌나 진심어린 목소리인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롱담을 해본건데 뭘 그러오.》

남계수의 함석판같은 손바닥이 그의 무릎을 철썩 내려치자 류계환은 아픔으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계환이가 이제야 진짜소리를 하는구만.》

《허허, 이거 두드려주는거요, 매를 치는거요? 아프구려.》

남계수는 지금 류계환의 심리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한것은 이 나이를 먹으며 살지만 남의 속을 들여다볼줄은 전혀 모르는 남계수였던것이다. 괴벽스럽다할만큼 고지식한 이 사람은 주관이 남달리 강하지만 천진할만큼 솔직했고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면 무한히 허심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남계수라는 인간을 리해하기 어려운것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이번 검열에 대하여 할테면 하라지 하는 배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검열이 끝난 지금에 와서는 자기 인생에서 귀중한것을 가르쳐준 계기였다고 여기고있는것이다. 왜냐하면 그간 공장에 내려와서 일한 검열성원들이 책임성이 높고 공정한 일군들이라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검열은 사실상 남계수에 대한 사업상료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그 결과를 두고 내심 자기를 알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고 여기고있는것이였다. 기업관리에서는 은근히 제노라고 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일군이라는것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우리 시대 일군으로서 지녀야 할 사상정신적풍모인것이다. 정치적으로 둔감하고 사업방법이 뒤떨어졌으며 작풍에서는 론의할 여지도 없는 인간이 남계수라는것을 확인해주었다. 누구도 해줄수 없는 충고를 검열이 대신해준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듯 제나름의 주관과 고지식한 솔직성을 가진 남계수였기에 검열을 책임진 류계환이 랭담하게 공장실태를 료해한것도 자기에게는 때맞춰 도와준 일이라고 여기고있는것이다. 이전부터 맺고 사는 인연으로 하여 묵과되는것이 있다면 공명정대한 검열이라고 말할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는 류계환의 처사를 고맙게까지 여기였으며 오늘은 이렇게 찾아서 얼굴이라도 다시 볼 생각을 했던것이다.

《계환이, 난 이번 기회에 거울을 마주한것처럼 제 모양을 볼수 있었네.》

류계환은 턱이 떨어질만큼 입을 벌린채 다물지 못하고 어정쩡한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남계수의 말이 어느것이 진정인지 검열일군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도 알아맞힐수가 없었다.

《허허허, 엉터리야, 나야말로 응석받이였어.》

남계수는 가슴이 뭉클하도록 치미는 생각을 안은채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끝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누가 나 같은것을 이날까지 지켜주었는가. 일찌기 버려도 아까운것 없는 하찮은 인생이건만 나라에서는 거창한 변혁의 시대에까지 이 손을 잡아 이끌어주지 않았던가.

하다면 내 그 고마운 손길에 보답한것은 무엇인가. 일찌기 손에 기계기름을 묻히며 로동계급속에서 일했더라면 로력혁신자라도 되여 대중의 신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 이제야 자신을 알았을진대 무엇을 서슴겠는가. 아직은 나에게 힘이 남아있다.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 모든 자존심과 욕망을 미련없이 버리고 로동계급의 한 성원이 되여 평범한 인생길을 새롭게 걸어가리라.

《그렇단 말이야. 흠흠, 내라는 사람의 몸값이라야 얼만가. 내 그걸 아까와했거던. 계환이, 난 이젠 바다에 뛰여들려네.》

류계환은 남계수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고개만 쭈빗댔다.

《해수욕을 하려구요?》

《흐흐, 아예 빠져들자는거지.》

《예?》

남계수가 우쩍 기운을 내며 일어서는통에 류계환은 눈이 둥그래졌다. 이 사람이 아까부터 아리숭한 말만 늘어놓더니 이러다가 내앞에서 무슨 일이라도 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왜 놀라는건가?》

《뭘 어쩌자는건지…》

《내 평생 언약을 지켜 산다고 했지만 제 타산만 하면서 살았거던. 이 머리통에 앉은 때가 채 벗겨지지 않았단 말이네. 허허, 그러구보면 남계수라는 이 인간도 소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지?》

《당초에 모를 소리만 하는군요.》

《모르겠다? 자넨 그럴수도 있네. 있구말구.》

두손으로 허리를 짚은 남계수가 바다기슭의 모래불쪽을 바라보며 소리쳐 물었다.

《소옥아, 다 됐냐?》

류계환은 자기를 안내해온 처녀를 바라보았다. 한손에 밥죽을 든 동소옥이 가마뚜껑을 열어보고나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해풍에 구수한 냄새가 흘러왔다.

《내 오늘 자네한테 섭죽맛을 보이자고 찾은거네.》

남계수가 가자고 손짓을 하며 앞섰다.

《딸인가요?》

《그럼, 내 딸일세. 비록 이 아비는 변변치 못해도…》

류계환은 급기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집을 둬두고 하필이면 바다가에 나와서 명색이 손님인 사람을 대접하자고 할리 없는 남계수였다. 신유정의 음식솜씨는 오래전에 맛을 본 자기였다. 안해를 두고 딸만 데리고 나왔다는것자체가 의문을 자아내는것이다.

《형수님은 왜 데리고 나오지 않았소?》

궁금증이 난 류계환이 묻자 남계수는 어깨를 으쓱댔다.

《그 사람은 학교일이 바쁘다는구만.》

《그래요?》

《여보게, 이번에 정말 자네가 고마왔네. 내 이 나이에 철이 들지 알겠나.》

남계수가 여전히 저만 아는 소리를 하며 씨엉씨엉 내걷자 류계환은 멍청히 서있다가 주춤거리며 따라섰다.


동소옥은 종시 미용사의 호의를 거절했다. 옛 합숙사감이 때마침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굴곡이 매우 위태로운 자기의 심리그라프를 보았던것이다. 파동이 심한 정도가 아니였다. 사감이 무척 고마왔다. 무슨 모델로 나선다는것이 아무모로 보나 자기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한편 공장에서는 그에게 새로운 일감을 맡겨주었다. 법랑칠물개발에서 얻은 경험에 기초하여 새로운 합금재료들을 연구하는것이였다. 공장대학이나 다니는 자기에게는 너무도 아름찬 과제이지만 안겨주는 믿음이 고마웠다.

당위원장이 실험실에까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동무에 대한 기대가 크오. 동무 같은 공장대학 졸업생들이 우리 공장의 기술력량에서 핵심을 이루게 될거요.》

일부 사람들속에서는 소옥이가 굉장한 점수를 땄는데 그 원인이 뭔지 모르겠다는 뒤소리까지 하고있단다, 나 같은걸 놓고서도 시기하지 못해서 안달복달이니 지배인이야 말해 뭘 할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큰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은 저으기 초조해났다. 검열이 끝났다지만 남계수가 무사하지 못할것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히 나돌고있다.

동소옥에게 있어서는 친혈육이상인 남계수였다. 개인기업가였던 경력으로 보나 사생활에서 제기되고있다는 문제들을 보면 전혀 무근거한 뒤소리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큰아버지는 그런 험담까지 들쓰고 사는지 알수 없다. 지배인에게 안해가 아닌 다른 녀자와 교제하여 생긴 아이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도 부끄럽고 분하기도 하여 울기까지 하였다. 요즘은 남계수의 가정에 대한 우려감으로 집에 찾아가는것도 조심한다. 큰어머니의 얼굴을 대하기가 무참했던것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가정의 불안정을 체험하며 자란 동소옥이다. 어머니는 연약하기 이를데없었는데 집안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해서 한숨쉬는것이 전부나 같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밥을 짓군 하였으며 군소리없이 빨래를 했다. 아버지가 불쌍했다면 어머니는 가여웠다. 그래서 녀자가 한뉘 해야 하는 일을 남들보다 일찌기 배운 그였다. 그가 제일 부러워한것은 큰아버지의 집이였다. 처녀의 눈이여선지 뭐니뭐니해도 집안이 화목하고 일이 잘되자면 녀자가 마음이 무던하며 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품게 한것이 바로 신유정이였다.

신유정은 동소옥에게 있어서 녀성의 표본이나 같았다. 따뜻한 인정, 사려깊은 리해를 가진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같은건 엄두도 못 낼 품성이라고 여긴다. 그처럼 훌륭한 미덕의 소유자를 큰아버지가 배반하지 않았는가. 남자들은 다 그렇게 생겨먹었을가.

근간에 와서는 동소옥이 남계수를 보는 눈마저 달라졌다. 자기가 저질러놓은 옛일과 듣기조차 거북한 뒤소리쯤은 개방귀만큼도 여기는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큰 사낸가. 아무리 담이 크고 호방할지라도 문제가 엄중해지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사회적여론이란 그래서 무서운것이다. 사방에서 비난을 퍼붓는데야 견디는수가 있는가.…

그의 심중은 무척 착잡했다. 자기를 허천에서 데려온 일로 얼마나 시비질이 많았는가를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큰아버지에 대한 좋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공장에 아직도 남아있다.

점심시간을 타서 도서관에 갔다가 오던 동소옥은 공장울타리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청년이 있기에 눈길을 보내다가 가슴이 금시 얼어드는것을 느꼈다.

려현석에게서 쫓기워갔던 그 청년이였던것이다.

어떻게 또 나타났는가. 그 일이 있은 후 당위원장은 찾지도 않았다. 오늘은 정말 당위원회를 찾아온것일가. 저 인간의 진짜속심은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나같은 녀자나 괴롭혀서 뭘 하는가 하는 생각이 북받쳐오르자 동소옥은 용기를 내여 다가갔다.

《어떻게 왔어요?》

정문쪽을 바라보며 서성대던 청년이 흠칫 고개를 돌리더니 알아보고는 히물거려댔다.

《난 동무를 만나러 온게 아니요. 동무야 사랑의 결별을 얼마나 멋있게 했소. 정말 잊지 못할 인연이지.》

금시 피곤이 실린 동소옥의 얼굴에 미간주름이 살아났다.

《무슨 사랑말인가요? 누구와 어떤 사랑을 했다는거예요?》

청년의 입이 한쪽으로 찌그러드는게 참을수 없이 약을 올렸다.

《후회하게 될거야. 뭐 로력혁신자가 되겠다구? 동소옥이가? 자기를 알지 못하거던. 난 소옥일 누구보다 잘 알며 멋있게 이끌어주려고 했건만…》

《이 소옥인 소경이 아니니 제발로 걸어가요. 난 비겁하게 자기 잘못을 감추고 살지 않아요. 남자답기를 바래요. 나같은 녀자나 괴롭혀서 뭘하나 말이예요.》

동소옥은 북받치는 서러움을 안고 돌아서는데 등뒤에서 야질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왜 그러는지는 곧 알게 될거야.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내 왔던가…》

구역질이 나는 노래가락까지 들려와 동소옥은 작은 주먹을 꼭 틀어쥐며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험실에서 공장정문은 한눈에 보인다. 마음이 산란해난 동소옥은 일을 하면서도 계속 그쪽을 주시했다. 작업대우에는 날이 선 공구들이 널려있었다. 실험재료인 금속분말을 옮기면서도 눈길은 자주 정문에 가군 했다.

《앗!…》

손끝이 선뜩해나기에 내려다보니 빨간 피방울이 맺히고있었다. 하지만 아픔보다 공장정문으로 들어서는 려현석과 청년이 눈에 뜨이자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오늘은 기어코 당위원장을 만나자는것인가. 그런데 왜 청사에 들어가지 않고 딴데로 가는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꼭 누른채 동소옥은 성급히 실험실을 나와 두사람의 뒤를 조심히 따라가다 걸음을 뚝 멈췄다. 려현석이 청년을 데리고 가다가 때마침 마주 오는 웬 사람과 몇마디 나누더니 세사람이 함께 움직이는것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공장에 자주 들리군 하여 소옥이도 잘 알고있는 안전원(당시)이였다. 아마도 서로 만나기로 약속이 있은듯 한 모양이였다.

동소옥은 온몸이 금시 땅속으로 잦아드는감을 느끼며 비칠거렸다.

그는 느티나무옆에 서서 세사람이 사라진쪽을 살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한동안이 지나서 그쪽에서 알만 한 세 청년이 나오는것이였다. 그들은 공장대학의 동창생들, 자기를 위해 룡천강가에 나와주었던 동무들이였다. 느티나무뒤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피는데 성미가 급한 다부진 청년이 기염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자식같으니, 안전원앞에서 받아넘기려다 겨우 참았다.》

《진정하라구. 그 잘난 녀석이 또 법기관에 신소질을 할지도 몰라.》

《이번엔 그 자식을 아예 벙어리로 만들어버리고말지 뭐.》

《이젠 그만해. 우리도 잘못했어. 소옥동무를 돕는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지, 뭘 그래.》

셋중에서 제일 체격이 큰 청년이 진중하게 말해서야 다들 조용해졌다. 동소옥은 그들이 자기때문에 불리워왔댔다는것을 알고나서 마음을 진정 못하며 나직이 찾았다.

《안…슈타인!…》

그 소리에 세 청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동소옥을 보자 각기 손을 쳐들어보이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것은 걱정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동무네 민청위원장…》

참지 못하는 성미인 다부진 몸매의 청년이 이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어보였다. 안전원에게 불리워왔던 모양들인데 아무런 근심없이 얼굴에 웃음을 짓고 가는것이였다.

동소옥은 금시 목이 메여났다. 동무들이 고맙다는 생각을 넘어 마음은 려현석에게 달려가고있었다. 그러니 민청위원장이 저 동무들을 오게 한것 같았다. 본인인 자기로서는 뭐라고 변명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고맙게도 전후사연을 아는 동무들이 사실을 증명하도록 한것이였다.

동소옥은 느티나무에 기대며 눈을 꼭 감았다. 눈앞으로 금시 려현석이 다가드는것만 같았다.

언제나 불만스러워 바라보던 눈길, 말수더구는 적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사정을 보지 않고 엄하게 다불리는 성미, 욕은 무섭게 해도 사람을 아끼는 갸륵한 마음씨를 가진 남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일생을 의지한다면 얼마나 큰 행복일가 하고 생각하던 동소옥은 불쑥 소스라쳐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 나이를 먹으면서 처음 가져보는 젊은 심장의 고백이였던것이다. 누구도 볼수 없는 처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봄순 같은것이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갈망하는 시절은 이처럼 자기도 모르게 찾아드는것인가. 사랑은 처녀의 마음속에 그려보는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에 망울을 터치는가싶었다. 동소옥은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서 왕청같은 상념에 잠길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마음이 끌리면 무작정 따르기에 남은 생각지도 않는 정을 기울이다가는 이것도 아니였구나 하며 후회하는것이다.

《동문 거기에 왜 서있소?》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맞힌 동소옥은 고개부터 푹 숙이였다. 제 얼굴을 내보일 형편이 못되였던것이다. 방금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바로 그 남자가 앞에 서있지 않은가. 그가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는것 같아 부끄럽고 두려웠다.

《전번에 왔던… 그 동무가…》

《안전원동지가 지금 만나고있으니 소옥인 다른 생각말구 가서 맡은 일이나 하오.》

려현석은 불쾌한 일은 상기하고싶지도 않은지 내뱉듯이 말하고는 공무직장쪽으로 씽씽 걸어갔다.

어쩌면 저리도 무정한가. 가슴을 조이며 사는 처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못쓰나. 멀어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동소옥의 눈가에는 이슬이 가랑가랑 맺혀돌았다. 말 못하는 그 원망과 함께 한 남자가 처녀의 가슴속에 더욱 뜨겁게 자리를 잡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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