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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18일

평양시간


제 13 회


제 2 장


13


시대는 자기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1956년 12월에 시작된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대고조의 열풍은 이 땅우에 천리마시대를 펼쳐놓았다.

천리마시대의 특징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서로 돕고 이끌며 아름다운 미풍이 차넘치는 인간사랑의 대화원을 탄생시킨것이다. 무한히 성실한 로동과 창조적열의, 계속혁신, 계속전진하는 불굴의 기상과 사심없는 동지적협조와 단결, 헌신적인 사랑과 집단주의는 천리마운동의 정신적인 토양이기도 했다.

이렇듯 위대한 시대는 사람들의 성격을 비범하게 창조하고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도 천리마를 생각했고 일을 해도 천리마를 탄 기세였으며 남을 도와도 그처럼 열정적이였다.

흥성철제일용품공장도 천리마운동의 불길속에서 자기앞에 맡겨진 생산계획을 어김없이 초과완수하는 단위로 여러개의 천리마작업반을 가진 기업소로 변모되여갔다.

동소옥이 망라된 기술혁신조는 석달동안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법랑칠물을 자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분석실에서 나온 실험자료를 받고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현장에서 침식을 하며 실패는 얼마나 거듭했던가. 자체로 만든 칠감을 가지고 법랑그릇을 만들고는 모두 환성을 올렸다. 주철로 쇠절구나 생산하던 공장에서는 희한한 풍경이였다.

《보오, 기사장동무. 한가지는 해결하지 않았소!》

남계수가 기쁨에 넘쳐 소리치자 정시홍은 감격에 목메여 말했다.

《우리 소옥동무가 정말 용습니다.》

한옆에 선 동소옥은 고개를 수그린채 소리없이 눈물을 훔쳤다. 공장을 위해 자기도 자그마한 일이나마 해놓았다는 짜릿한 감정이 가슴을 휘저어대고있었던것이다. 오늘은 일찍 합숙에 돌아가 그새 못본 호실처녀들과 실컷 노래라도 부르리라 마음먹었다.

기술혁신조를 위해 새로 꾸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차리였다. 그 자리에는 남계수와 강치명도 있었다. 늦게 들어와 구석자리를 차지하려는 동소옥을 정시홍이 강치명의 옆에 데려다 앉히였다.

《소옥동무, 수고했소. 축하하오.》

강치명의 말에 동소옥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생각나지 않아 얼굴만 붉히였다. 이런 칭찬을 받을줄 몰랐고 받고보니 자기에게 차례진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던것이다.

남계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동무들, 일하는 멋이 있지 않소. 허허. 그래서 남의 집 흰쌀밥보다 제 집 강낭밥이 좋다는거요. 넘겨보며 침을 흘린대서 누가 준대? 제것이 제일이라는거요. 우린 올해(1963년) 2.4분기계획을 벌써 다 수행했소. 일한만큼 상금도 듬뿍 안겨주구. 어떻소?》

김이 물물 나는 내포국을 먹으며 사람들은 흐뭇해서 웃어댔다. 강치명의 눈섭이 쭝깃거렸다. 남계수의 말이 그른건 아니지만 마지막 소리만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것이다.

《당위원장동무두 한마디 하십시오.》

남계수가 고개를 돌리자 강치명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마디를 찍어가며 내뿜었다.

《집단주의정신, 집단적기술혁신! 우린 이걸 장려해야 합니다.》

기술혁신조의 마지막사업총화를 짓고난 뒤 동소옥은 민청위원장이 찾는다는 련락을 받고 공무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무직장 휴계실 맞은켠에 있는 민청원들이 모임장소로 리용하는 스레트지붕을 씌운 건물앞에 이른 동소옥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성이 난 대답소리가 들려나오자 어깨를 옹크린 동소옥은 방안에 들어서며 고개부터 숙였다.

《불렀습니까?》

《고개를 들고 보오. 이 동무를 아오?》

려현석의 목소리에 간신히 눈길을 쳐들던 동소옥은 눈앞에 서있는 낯익은 청년을 보자 금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한손으로 입을 가린 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더듬거려 책상에 의지하였다.

얼마나 천연스러운 웃음을 지은 얼굴인가, 저 사람이 여기로 찾아온 목적을 알겠다.

신유정이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일을 또 저질렀구나 하는 통탄이 터져나오지만 엎지른 물이였다. 무슨 말인들 안했겠는가. 한시간전에는 칭찬을 받았건만 지금은 딴 사람으로 돼버리는것이다. 이것이 동소옥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혐오감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동소옥동무요. 우리 공장 기능공이요.》하고 려현석이 청년에게 동소옥을 소개했다.

《알지요. 잘 압니다. 이 동문 고상한 사랑에 대한 모욕도 서슴지 않지요. 난 소옥동무가 무척 보고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풍의 소유자입니까. 남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으니까요. 변태적이지요. 그런데서 쾌락을 맛본다면 말입니다.…》

《그만 비죽거리오!》

려현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동소옥은 의자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머리속이 텅 비여버리는듯싶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이름할수 없는 혐오의 감정만이 흘렀다.

《난 민청위원장이나 만나자고 온게 아니요. 당위원장방이 어데요?》

《당위원장동진 지금 없소.》

《대주기만 하시오. 내가 방앞에 가서 기다릴테니.》

《쾅!…》

대망치로 철판을 내려치는듯 한 소리가 귀청이 터지게 울렸다. 여기 공무직장은 쇠를 많이 다루어서인지 민청위원장의 책상도 아연도금판으로 만들었다. 려현석의 틀어쥔 주먹이 무섭게 떨었다. 껑충 놀란 청년이 커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거요?》

《그건 자기한테 물어보라. 비렬한 자식!》

《사람을 모욕하지 말라구요. 피해자를 이렇게 대하는 법이 어데 있소?》

《래일 네가 말하는 그곳으로 다시 나오라. 내 그때 너를 때렸다는 사람들을 데려올테니.》

《이건 위협이요?》

《좋도록 생각해. 네가 전번엔 풋내기들에게 혼이나 나고 이렇게 너절한 걸음을 하지만 이번엔 내 주먹에 부서져나간다는걸 알라! 일어섯, 뒤로 돌앗, 냉큼 사라지라!》

《그러니까 위원장도 결탁되여있다는건데…》

《나는 자기 민청원들의 생활을 다 알며 책임지는 사람이다. 어데 다니며 얻어맞지나 말구 우리 소옥동무처럼 공장대학에나 다니는게 좋아.》

《알겠수다. 알았다니까요. 동소옥이라는 처녀때문에 피해를 입을 땐 날 원망하지 말라요. 어디 두고보자구요.》

얄팍한 입술을 나불댄 청년이 사라졌다.

동소옥은 굳어진채로 움직일줄 몰랐다. 아무런 변명도 할수 없었던 자기가 아닌가.

《됐소, 동문 가보오.》

정신을 수습한 동소옥은 초점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제자리에 앉은 려현석은 자기도 무엇인가 부담스러운지 말없는 손짓으로 소옥이더러 어서 가라고 했다. 그제야 동소옥은 거쿨진 사나이를 어렴풋이 느꼈다.

커다란 머리와 쩍 벌어진 상체, 꿈틀거리는 검은 눈섭과 꾹 다물린 입술이 확 안겨왔다. 그는 남자의 표상을 이렇게 받은적이 한번도 없다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안으면서도 자리를 빨리 떠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러났다.…

동소옥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먼곳을 바라보며 걸었다. 가슴속에는 수치감이 고여있었다. 어떻게 되여 그 청년이 공장에까지 찾아왔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그래도 사낸데 자존심도 없는가. 입건사를 바로 못해서 한번 혼쭐이 난건데 그걸 들고다녀서는 어쩌자는건가.

큰어머니말씀이 옳았어, 이 못난인 언제나 생각을 짧게 하는게 탈이야, 복숭아면 뭐라고 심장이면 어떻다기에 넥타이핀을 굳이 찾으려 하다가 일을 쳤어, 그런데 민청위원장이 어떻게 그걸 아는가, 내동무들이 말해줬을가.

그제야 앞에서는 바로 보지 못한 려현석의 성이 잔뜩 난 얼굴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나는 자기 민청원들의 생활을 다 알며 책임지는 사람이다.…》

려현석의 목소리가 귀전을 두드리자 심장은 쿵- 하고 뛰고 흐느낌이 북받쳐올랐다.

나에게도 그런 오빠가 있었으면… 바랄수 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저도 모르게 눈언저리를 훔쳤다. 울고있었던것이다. 그는 한 남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서는 자기를 보았다.


공장참모회의에서는 법랑일용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실무적인 문제들이 토의되였고 필요한 대책들을 세웠다.

《기사장동무가 수고많았소.》

회의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이 돌아가자 남계수는 정시홍과 마주앉았다.

《나야 뭘 한게 있습니까. 연마분도 법랑개발도 대중의 힘이 아니였다면 어느 한사람의 재능으로는 한정없이 시간을 소비해야 했을겁니다. 재삼 느끼지만 천리마운동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달라지는게 알리거든요.》

《이를데 있소. 그래서 새로운 대중운동이라고 하지 않소.》

《옳습니다.》

남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 공무직장 려현석이 말이요. 민청위원장이겠다, 공장대학생이니 기술학습을 책임지우면 어떻소?》

《당위원장동무와 토론을 해보십시오.》

《이런 일이야 기사장동무가 할수도 있지 않소.》

정시홍은 고개를 기웃한채 생각에 잠겼다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 부기장말입니다. …요즘에 와서 별루 검열소조가 있는 방의 문고리를 자주 잡던데요.》

《좋은 일이지 뭘 그러오.》

《개잡아 술추렴하구픈 사람은 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지요. 부기장같은 사람을 두고 겨드랑이에 낀 밤송이같다고 말하지요.… 참,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 소옥동무와 어쩌고저쩌고했다는 돼먹지 않은 녀석이 찾아와 우리 민청위원장을 만났는데 혼쭐이 나서 쫓겨간 모양입니다. 려현석동무가 어떤 젊은이입니까. 끌날같은 제대군인이지요. 안목이 투철하고 생각이 깊으며 걸음걸이가 무게가 있는 동무입니다. 현석동무가 나한테 하는 말이 그 불량배녀석을 좀 알아봐야겠다는겁니다.》

남계수는 자기도 들은 일이라 입귀에 웃음을 담고 듣기만 하다가 물었다.

《그 사람 장가를 안 드오?》

《애인은 있는가 봅니다. 군대때 부대 간호원이였다는지…》

《좋구만.》

더 할 말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정시홍은 《전 퇴근하겠습니다.》 하고 방에서 나갔다.

빈방에 혼자 남은 남계수는 작업현장을 돌아볼가 생각하며 일어섰다. 밤길을 저벅저벅 걸어대던 그는 쭈빗이 고개를 돌리였다. 공장정문을 벗어난것이다. 마음이 정한 방향은 작업장인데 걸음은 집으로 향한것이다. 안해의 얼굴을 마주볼수 없어 사무실에서 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침식을 해왔다. 남편의 신상에 비친 그림자를 확연히 보고있는 안해가 틀림없었다. 좀해서 안색을 흐리는 일이 없는 녀자지만 근간에 와서는 전에없이 짜증도 부린다.

《사람은 단정해야 한다.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를 생각해야 해. 그런 지각이 없으면 아무짓이나 하게 된다.》

막내아들을 꾸짖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남계수는 자기를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람이 스며들지 못하는 벽이 없다지 않는가. 녀자들의 귀로는 들어넘기기 어려운것이 아마 그런 말들일것이다.

젠장, 소문이라는게 아무리 입심사나운 아낙네같다고 한들 처마밑을 지나가는 바람이지 뭘 그러는가. 사람이 사느라면 무슨 소린들 안 들으랴. 자기만 떳떳하면 그만이지.

이것이 만사를 자기식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해의 낯색이 머리속에서 감돌자 그는 활활 머리를 저어댔다.

집마당에 들어선 남계수는 선자리에서 둘러보았다. 밤이지만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가려볼수 있었다. 자그마한 남새밭에는 부루며 시금치가 먹음직스럽게 자라고있다. 언제 한번 집안일에 손을 적셔본 일 없는 자기를 생각하며 그는 공연히 서성거렸다.

《아니, 오셨으면 들어와야지 게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꼭 지각한 학생처럼…》

안해의 목소리가 밝아진것을 느낀 그는 고개를 주억대며 시큰둥한 말로 대답했다.

《언제적 학생인데 아직두, 쯧쯧.》

《그렇게 찾으면 좋아하시길래 한 말이예요.》

신유정은 남편의 옷을 받아 걸고나서 저녁상을 들여왔다. 음식타발을 모르는 남계수였다. 주면 주는대로 먹는 남편이기에 신유정은 무척 마음을 쓰며 밥상을 차리는게 생활습관이 되였다. 간소하게 차려도 입맛을 돋굴 젓갈과 물고기구이 같은것은 놓치지 않았다.

적쇠로 노랗게 구워낸 고등어를 보며 남계수는 안해의 변함없는 정성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미안한감을 감출수 없었다. 멋적은 감정의 공백을 메우려고 남계수는 동소옥이 법랑칠물을 만들어냈다는 말을 하였다. 안해의 말없는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럴뿐 반응이 없자 구운 고등어토막을 집어들고 아이들한테도 먹였는가고 전에 없던 엉너리를 쳐댔지만 대답은 너무 잘 먹어서 걱정이라는 소리로 그치고만다.

남계수는 웬일인지 안해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집안일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성미곱지 못한 사람과 살면서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그때말이요. 그때…》

《영문없이 그때란 뭔가요?》

《57년도 말이요.》

《예?…》

《내가 개인기업가의 감투를 제손으로 벗던 일이 생각나오?》

신유정은 여전히 의혹을 품은채 마주보기만 했다.

《당신이 아니였으면 나는 결심을 못할수도 있었소.》

그제야 신유정은 말귀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웃었다. 사람이란 리기적이기마련이다. 내것, 제것이란 말이 그래서 생긴것이 아니겠는가.

그무렵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안절부절을 못했다. 자다가도 일어나 앉아서는 머리를 싸쥐고 뭔가 골몰하였다. 남편의 생각을 제편에서 먼저 물어본 일이 없는 신유정인지라 무슨 일인지 알수 없어 혼자 속을 썩였다. 한정이 있을상싶지 않은 남편의 고민을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어 어느날 밤 용단을 내려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녀자가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그 말을 기다리기나 한듯 남편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여직 살면서 한번도 하지 않은 소리를 하여 깜짝 놀래웠다. 수중에 2천만원에 달하는 돈이 있는데 그걸 내놓고 사회주의적인 기업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내리자니 참으로 힘들다는 고백이였다.

엄청난 돈의 액수도 놀라게 하지만 남편이 운명의 전환을 해야겠는데 노를 젓지 못해 그런다는것을 알게 된것이 더 놀라웠다. 어떤 말이든 해주어야 했다. 돈보다 귀한건 옳바른 인생을 사는것이 아닌가.

《녀자의 말이래도 들어주시겠어요?》

《말해주우.》

《신문을 보았는데 당신과 같이 개인기업을 하던 사람들이 지금 말하는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바치고 생산협동조합을 조직했더군요. 이런걸 두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지요. 땅도 돈도 인생은 대신 못해요. 낡은 경리형태의 개조가 더는 미룰수 없이 불가피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여보, 내 당신한테 좋은 옷 한벌 해입혔어도 이러지 않겠소. 우리 아이들을 언제 한번 배불리 먹인적이라도 있었는가 말이요.》

《남자생각은 대공을 날고 녀자궁리는 부뚜막에 있다지 않나요. 집안걱정, 애들걱정은 하지 말구 당신이 나가서 하는 일이 잘되기만 하면 되는거예요.》

《여보!… 고맙소. 당신이 아니였다면 난 자기를 이겨내지 못했을거요.》

신유정은 그날에 한 남편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것만 같았다.…

《내 당신을 만나 오늘까지 살면서 그때처럼 고마운적은 없었소.》

신유정은 남편의 진정어린 말에 《됐어요.》 하고는 밥상을 들고 나갔다. 남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또 나가시겠어요?》

《음, 벌려놓은 일감이 아직 많소.》

《검열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지요?》

《끝날 때가 되면 끝나겠지.》

신유정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며 남편을 바래웠다. 그는 의심스러운 미지의 녀자한테서 남편과 련관되여있다는 주숙진이라는 녀성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부터는 남편의 행실에 대한 의혹과 불만을 지우지 못하며 살고있다. 인간세상에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되나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남편쪽에서는 꿈만해하는 기색이다. 소문이라는게 아무리 험하다 해도 장마철 구름이나 같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남계수는 이렇게 집을 나서자고 마음먹은것도 아니였다. 공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지만 생각은 그냥 허둥거렸다. 이밤처럼 마음의 의지가 그리워본적은 없었다. 안해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한다. 얼마나 옳은 소린가. 그러고보면 저 사람과 내가 바뀌면 남자보다 더 큰일을 할 녀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방금전까지 흥성철제일용품공장에 대한 검열에서 제기된 자료들을 보고난 류계환은 푹신한 쏘파에 몸을 묻은채 자기가 내뿜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계수를 목표로 시작한 검열이지만 종합한 자료들에는 이렇다하게 문제를 세울것이 없었다. 지배인의 독단은 아직도 기업관리에서 철저히 극복되지 못하고있는 일반적인 편향이였다. 이번에 진행하는 검열사업을 놓고 상급은 지켜야 할 원칙을 엄격하게 제기했다. 목적은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해나가는데서 나타나는 편향들을 바로잡고 아래단위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것이다. 이와 함께 일부 관리일군들속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료해하고 해당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독단과 전횡이라는 감투를 씌워 남계수를 처벌하기에는 제기된 자료들이 너무도 빈약했다. 그렇다고 부정부패에 걸기에는 그의 인간됨이 너무 알려져있었다. 더구나 사업방법과 작풍에서는 결함이 있지만 남계수의 기업관리수완은 확실히 남달랐다. 자그마한 철제일용품공장이 자체의 힘으로 법랑제품을 개발하고 다량생산에 들어간것만 보아도 지배인이 경영전략을 옳게 세우고 공장을 관리운영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류계환으로서는 애초 안중에도 없었던 흥성철제일용품공장에 대한 검열이였다. 남계수로 말하면 본인은 기억하고있는지 몰라도 자기로서는 큰 신세를 진 사람이나 같았다. 해방전 그가 선뜻 내준 돈이 없었더라면 관부련락선에 몸을 싣고 일본이라는 땅에 가서 고학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사람이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배은망덕해서는 안된다는것쯤은 모르지 않는 류계환이지만 코꿴 소새끼처럼 채찍질을 당하고있다.

《남계수를 이번 검열기간에 제껴야 해요. 난 당신을 믿어요. 이 녀자의 작은 소원조차 풀어주지 못한다면 당신은 사내가 아니지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환락을 한껏 맛보게 하는 녀자의 요구여서 물리칠수 없는것이였다. 무엇때문에 이 녀자가 크지 않은 공장의 지배인을 놓고 그리도 독을 쓰는지 알수 없었지만 별로 알고싶은 생각도 없는 류계환이다. 신비한 힘을 가진 녀자의 품에 안겨 즐거운 밤을 보내고나면 자기라는 존재는 남지 않았으며 체면은 고사하고 대청아래 선 하인처럼 한정없이 고분고분해지는것이였다. 이따금 내가 미궁에 빠지지 않았는가 놀라기도 해보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한 짧은 의식일뿐 지속적인것이 되지 못했다.

류계환은 지금 남계수의 문제를 놓고 생각을 쉼없이 썰어대고있었다. 며칠전 길가에서 우연히 신유정을 만났다. 나이는 오십을 넘겼어도 체취에서는 왕년에 향수한 지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왜 자기 집에 오지 않는가고 물을것 같은데 입밖에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것이 알렸다. 그저 오래간만이라며 맡은 일은 잘되는가고 묻는것이 전부였다.

시교육부의 한 일군을 통하여 신유정의 교원생활에도 문제가 제기된다는것을 알았다. 그들부부의 인생에 무심할수 없는 곡절이 다가온다는 직감이 들었다.

《낡은 사상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의 도수를 높이는것만큼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류계환이 해줄수 있는 말이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고마와요. 우린 자신들을 개조할 각오를 가지고 사는걸요.》

신유정의 대답은 조용했지만 얼굴에 비낀 그늘만은 지우지 못했다.

사람이란 자기에게 리로운 방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마련이다. 처세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것이 아닌가. 일찍부터 처세도를 닦아온 류계환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는데 어느덧 타성이 생겼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철저히 자기에게 리로운 사람들과의 교제이며 그와 같은 환경을 마련하는것이였다. 따라서 아무리 가깝던 벗이라 할지라도 불리할 때는 외면할줄 알아야 했고 상극이나 같은 사이의 사람이지만 미소를 짓고 접근하는 술수는 깨우친지 오랜 그였다. 오늘에 와서 남계수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류계환이였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기업관리수완이 뛰여났다한들 그게 무슨 대순가. 제 몸 하나도 바로 건사하지 못해 여기저기서 채우며 산다면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수 없는것이다. 남계수가 그렇다. 살줄 아는 요령을 갖추지 못했으니 별수가 없는것이다. 해방후 만났을 때 개인기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고 했건만 제편에서 큰소리를 치지 않았는가. 대세를 바로 볼줄 모르면 편안히 살수 없는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속에 얼마나 많은 우둔한 족속들이 있는가. 남계수도 그런 부류에 속할뿐이다.

류계환은 일시적이나마 품어보았던 은인에 대한 일종의 의리심에서 멀리 떠난 자신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남계수보다는 해안미용원의 아름다운 녀인이 더 가까울수밖에 없었다. 해방전에 진 신세란 가버린것이고 오늘의 매 시각은 미인의 품을 더 간절히 바라기마련이였다.

사무책상우에 놓인 전화기에서 종이 울리자 류계환은 틀진 걸음으로 걸어갔다. 송수화기를 들기 바쁘게 가슴속의 피가 절로 끓어대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련이예요.》

류계환은 터져나오려는 흥분을 누르며 입가에 웃음을 실은채 딴전을 부렸다.

《아, 그렇소? 지금 긴급한 회의를 하려던 참이요.》

이쯤한 정황에서 거짓말 같은건 식은 죽 먹기로 여기는 사람이다. 해안미용원의 미용사라도 시끄러울 때에는 외면해버리는 류계환이였다.

《꼭 하고싶은 말이 있어요.》

녀자편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들지만 류계환의 어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만가만, 지금이 몇신가?… 시간이…》

《좋아요. 한마디만 들어주세요. 남계수지배인이 검열에 몹시 불만이 있어한다는걸 아세요?》

류계환은 눈을 감으며 웅얼거려댔다.

《범한테 쫓기운다구 궁성 담장을 넘겠소? 허허.》

《뭐라구요, 이상하게도 구네.》

《벌써 사람들이 모이오.》

류계환은 제편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인조종사의 지나친 간섭에 싫증을 느낀것이다. 이런 심리는 직업적으로 형성된것이다. 흥진비래라는 말이 있다. 환락의 뒤에 무엇이 기다리는가를 모르지 않는 그였다. 녀자들을 잘못 다루면 차례질건 화밖에 없다는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검열사업이 심화되는 때에는 자기를 밀봉해야 한다는것을 체질화한 류계환이다.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류계환은 잠시 한자리에 서있었다. 체내에 자리잡은 욕망은 아쉬움으로 꿈틀거리지만 예리한 눈길은 자료철을 지켜보고있었다. 녀자를 설다쳐놓아도 안되지만 사업에서도 우유부단하면 후과는 좋지 못하다. 망치질이 약하면 못이 솟구치기마련인것처럼 검열에서 뒤걸음치면 돌이킬수 없는 후과를 빚어낼수 있다. 그로서는 남계수가 미타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 사나운 밸통머리가 무슨 뿔질을 하자고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왕 자기 결심대로 시작한 검열이니 결과는 있어야 한다.

계시는 녀자에게서 받았지만 자기의 분석과 판단에 따라 결심을 내리는듯 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는 흥성철제일용품공장 검열자료우에 붉은색연필로 휘갈겨썼다.

《남계수지배인의 현행자료들과 사소한 발언내용까지 상세히 료해장악하며 확인자들의 증언을 첨부하여 제출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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