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제 5 장


7

복구건설장에 나갔던 한정아는 밤늦게야 돌아왔다.

무거운 혼합물을 운반하느라 기운을 말짱 뽑고 나른해서 반토굴로 들어서던 그는 건설장에서 때없이 발견되는 폭탄과 맞다들렸을 때처럼 오똑 굳어졌다.

모녀가 오붓하게 살고있는 《녀자왕국》을 침범한 남자구두!

빠끔히 열린 방문안을 들여다보니 뜻밖에 외사촌오빠가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고있었다.

오빠가 왔구나! 가만,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두눈을 깜빡거리던 한정아는 그만에야 《어마나, 내 정신 봐!》 하고 깜짝 놀랐다. 오늘이 바로 어머니의 생일이였던것이다. 그래서 여느때는 바빠서 옴짝 못하는 오빠도 찾아온것이고.

미안한 감정을 안고 방문을 열자 오빠가 반겨맞았다.

《오, 정아로구나. 잘 있었니?》

인사말을 받으며 한정아는 제발 오빠가 어머니생일소리를 꺼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로성익은 종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야말았다.

《넌 뭐냐? 어머니생일날이야 일찍 들어와야지.》

어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딸을 두둔하였다.

《바쁜데 무슨 생일이냐? 나두 좀전에 돌아왔다.》

긍지높게 울리는 그 말속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종이공장을 그전보다 더 크게 건설하려는 녀성지배인의 배심이 엿보였다.

손가방을 방구석에 내려놓은 한정아는 제꺽 말코지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벗기였다.

《그만둬라.》

앞치마를 두르던 그는 만류하는 오빠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뭘 좀 가져왔다.》

옆에 있던 불룩한 가방을 끄당긴 로성익은 소리가 나게 쟈크를 열었다.

가방에서 먹음직스러운 송편, 말린낙지, 타래진 순대 등이 연방 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것은 외국제고급향수였다.

향수병을 빙그르 돌려 화려한 상표를 일별한 로성익은 한정아에게 쑥 내밀었다.

《이건 너한테 주는거다.》

《어디서 났어요?》

《차경준이라고 내가 아는 청년이 준거다.》

한정아는 속으로 놀랐다.

혹시 그 사람이 아닐가?

아닐세라 오빠가 이런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전쟁전에 외국류학갔다가 귀국한 청년인데 무역기관에서 일한다.》

향수병을 내려놓는 한정아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

차경준, 며칠전 공원에서 헤여질 때 그는 이틀후에 동창회가 있는데 꼭 와달라고 강조하였다.

급히 넘겨야 하는 기사때문에 바빴지만 한정아는 몇해만에 만나는 대학동창생들을 실망시킬수 없어 짬을 내여 차경준의 집으로 갔었다.

아직 반토굴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느새 번듯하게 세운 기와집에 들어갔더니 알만 한 얼굴들이 환성을 지르며 반겨맞았다.

대학때는 별로 말을 나누어보지 못한 그들이였는데 지금은 막역지우라도 만난것처럼 무척 반가와하였다.

가벼운 목례로 그들의 따거운 시선을 밀어낸 한정아는 한쪽구석에 얌전히 앉았다.

잠시후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지자 그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능숙하게 다루며 먹기 시작하였다.

한정아는 손이 나가지 않았다.

남들은 통강냉이밥에 된장국을 먹으며 복구건설을 하고있는데 아늑한 집에 들어앉아 고급료리를 먹자니 어쩐지 죄스러웠다. 그렇다고 오자바람에 일어날수도 없어 그냥 앉아있었다.

점점 취기가 오른 동창생들은 저저마다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역기관이나 외교부문에 종사해서 그런지 전부 돈과 왈쯔소리뿐이였다.

더는 참을수 없어 조용히 빠져나오는데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차경준이 헐레벌떡 따라나왔다.

《왜 벌써 가오? 아직 회포도 나누지 못했는데.》

동창회라는 구실로 자기를 그런 좌석에 끌어들인 차경준에게 한정아는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었다.

《경준동지, 지금 온 나라가 낮과 밤이 따로없이 들끓고있는데 옳지 않다고 봐요.》

차경준은 게면쩍은 기색을 지었다.

《나도 그런 생각은 없지 않았지만 동창생들이 하도 모이자고 하기에…》

변명하듯 얼버무리는 그를 서늘한 눈매로 바라보던 한정아는 《먼저 실례하겠어요.》라고 인사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그 일이 있은지 불과 한주일도 안되였는데 그가 오빠한테 고급향수를 보낸것이다.

무역기관에서 일하는 그 사람이 어떻게 오빠와 련계가 있을가? 하긴 그에게 있어서 그쯤한 일은 별로 힘들지 않을것이다.

《왜 그러니?》

외국제향수를 처음 보는 누이동생이 사용법을 몰라서 그러는것이라고 짐작한 로성익은 제편에서 향수병을 집어들고 흔들었다.

불의에 향수세례를 들쓴 한정아는 냉큼 물러났다.

《아이, 무슨 냄새가 그래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못할망정 성을 내는 누이동생이 우습다는듯 로성익은 시까슬렀다.

《아무렴 시큼한 땀내에 비기겠니?》

메슥메슥한 향수냄새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있던 한정아는 새침해서 반문하였다.

《땀냄새가 어째서요?》

《넌 기자라는게… 그래, 네 몸에서 향수내가 풍기면 취재대상들이 좋아하면 좋아했지 나빠하겠니?》

한정아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좋아하긴 고사하고 모두 달아날거예요.》

《왜 말이냐?》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외국제향수내나 풍기는 인간들을 경멸하거든요. 기계공장에 나가면 기계기름냄새가 나야 하고 건설장에 나가면 몰탈냄새가 나야 사람들이 속을 터놓거든요.》

그때 그들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끼여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말싸움이냐? 어서 저녁이나 먹자꾸나.》

가지고 온 음식들을 상에 올려놓은 로성익은 술병마개를 슬슬 돌려서 뽑더니 정히 술을 부었다.

《고모님, 건강하십시오.》

세상떠난 오빠를 대신하여 아들맞잡이로 키운 조카가 생일날이면 잊지 않고 꼭꼭 찾아오니 어머니는 감개무량해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한정아가 부엌에 나가자 로성익은 정색해서 물어보았다.

《고모, 정아는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달그락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쪽을 곁눈질해본 어머니는 한숨부터 내쉬였다.

《글쎄, 맞춤한 대상자가 있으면야 시집을 보내야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듯 로성익은 품속에서 사진을 꺼냈다.

《아까 말한 청년인데 얼굴도 잘나고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사진을 보고 마음이 동해하던 어머니는 자신없어하였다.

《정아가 어떨는지.》

《아, 딸이야 어머니말이면 다지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우리 정안 여느 처녀들과 다르네.》

마침 동자질을 끝낸 한정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치마를 두손으로 쓸어내리며 앉자 로성익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넌 요즘 뭘 하고있니?》

《뭘 한다는건 무슨 뜻이예요?》

누이동생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로성익은 어이없어하였다.

《넌 기자가 되더니 좀 까다로와졌구나.》

한정아는 자기가 지나쳤다는것을 알았다.

그전 같으면 오빠한테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전쟁때 생겨난 불미스러운 감정은 지금도 가셔지지 않고있었다.

《그건 그렇구 이젠 너도 나이가 찼는데 일생문제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

《사실 내가 오늘 온건 고모생일을 축하해주자는것도 있지만 네 문제도 락착짓자는거다.》

찾아온 목적을 명백하게 밝힌 로성익은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듯 손에 들고있던 사진을 내밀었다.

《한번 보렴.》

한정아는 고개를 숙이고 손톱여물만 썰었다.

무엇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 몇마디 주고받다가 혼사를 결정해야 한담? 그건 무책임한 결혼이야. 난 절대로 선보고 시집가진 않을테야. 사업과정에 상대방을 파악하고 그의 진실한 인간미와 높은 리상에 마음이 끌려서 《아, 이 사람이다!》 하고 확신이 가는 그런 남자와 일생을 같이하겠어. 그리고 일단 결합되면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고.

《난 아직 그 문제를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딸의 말에 어머니는 펄쩍 뛰였다.

《무슨 소릴 하냐? 처녀나이 스물일곱이 좀 적으냐? 남의 집 딸들은 벌써 아이를 업고 다니는데. 난 그저 우리 집에서 애기울음소리가 들리고 기저귀냄새가 푹푹 풍겼으면 좋겠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오빠도 한마디 끼웠다.

《나두 늦게야 장가를 들고보니 생각되는게 많구나. 역시 가정은 인생의 보금자리야.》

한정아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속이 답답해난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방바닥에서 버림받고있던 사진을 손에 쥐였다.

《얘, 한번 보기라두 하렴.》

한정아는 《싫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틀었다.

《에구, 무슨 애가 그런지.》

안달이 난 어머니는 딸의 눈앞에 사진을 바싹 가져다댔다.

그바람에 얼핏 사진을 본 한정아는 픽 웃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로성익은 약속이나 한듯 꼭같이 물었다.

《아는 총각이냐?》

한정아는 쓰거운 어조로 대답하였다.

《이 사람은 우리 대학동창생이예요.》

《그게 정말이냐?》

로성익은 세상에 이런 우연도 있느냐는듯 반가와하였다.

《고모, 이런걸 두고 연분이라고 한답니다.》

듣기만 해도 흐뭇한 연분소리에 어머니가 왜 기뻐하지 않으랴.

《에구, 이젠 한시름놓게 됐구나.》

아이참, 어머닌 내 마음은 모르시면서 무턱대고 좋아하시네.

노란 장판바닥에 박박 손금을 긋고있던 한정아는 고급향수병을 띄여보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처음부터 오늘일을 계획하고있었구나. 그때문에 품을 들여 오빠와 사귀였을것이고. 신문사에 찾아온것도, 나를 공원으로 데리고 간것도 모두 내 마음을 사기 위한 연극이였어.

사실 공원에서 만났을 때 나름대로 조국에 보탬을 주기 위해 힘껏 노력한다는 차경준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가서 동창회에 참가해달라는 그의 초청을 수락했었다. 그날 보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다시는 그와 마주서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오빠한테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줄이야.

누이동생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로성익은 제잡담 결론하였다.

《고모님, 소뿔은 단김에 뽑으랬다구 이번 일요일에 그 총각을 집에 데리고 오는게 어떻습니까? 그때 아예 약혼날자도 정하잔 말입니다.》

고개를 오연히 쳐든 한정아는 또렷하게 말하였다.

《오빠, 난 그를 대학동창생이상으로 생각해본적 없어요.》

웃음이 물결치던 로성익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한정아는 필경 오빠가 자기의 립장을 짐작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니나다를가 로성익은 열어놓았던 가방쟈크를 신경질적으로 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님, 후에 또 오겠습니다.》

한정아는 집을 나서는 오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한가지 물어볼것이 있어요.》

《뭐냐?》

《무강동지 말예요. 오빠가 그 사람을 취급한다는게 사실이예요?》

로성익의 얼굴은 딱딱해졌다.

《누가 그러더냐?》

《우연히 알게 되였어요.》

한정아에게 표무강의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김흥선이였다.

얼마전 취재길에서 만난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표무강의 신상에서 벌어진 일을 알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표무강은 어떤 복잡한 사건에 말려들어 검찰기관의 심문을 받는중인데 담당검사가 바로 로성익이라는것이다.

그 소식을 안 다음부터 한정아의 정신은 온통 표무강한테 가있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검찰기관의 심문을 받는단 말인가. 물론 그는 한 처녀의 진정을 받아주지 않은 무정한 사나이이다. 그렇지만 인간됨만은 진실하고 고결하다. 그런 사람이 나라앞에 죄를 지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녀의 몸으로 표무강의 문제에 뛰여들수 없어 속을 태우고있는데 오빠가 집에 찾아왔던것이다.

어느덧 관록있는 검찰일군으로 돌아간 로성익은 피심자들을 대할 때와 같은 틀스러운 자세를 취하였다.

《너한테 구체적으로 말해줄순 없지만 그 사건은 보통사건이 아니다.》

《네?》

《난 네가 그 문제에 나서지 않았으면 한다.》

순간 한정아는 지난날의 오빠를, 색안경을 끼고 사람들을 대하던 랭정하고 메마른 그를 다시 보고있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애매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것 같아 한마디 비치고야말았다.

《오빠, 무강동진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안예요.》

누이동생의 반응이 뜻밖이였던지 로성익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찬찬히 뜯어보았다.

《너 혹시… 그를 사랑하는게 아니냐?》

한정아는 황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데 머리우에서 랭담한 말소리가 울렸다.

《난 네가 누구를 배우자로 선택하든 상관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배우자로 정했다면 이제라도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처녀의 마음속에 검은구름이 모여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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