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제 2 장


7


숙영구령이 내리자 한정아는 산릉선쪽으로 뛰여갔다.

그곳에는 두개의 큰 바위가 나란히 웅크리고있었는데 삭정이와 락엽을 긁어모아 바닥에 깔고 배낭뒤에 동여맸던 모포를 풀어 지붕처럼 덮었더니 제법 아늑한 《잠자리》가 생겨났다.

《서분아주머니, 어서 오세요!》

뚱기적거리며 다가온 서분이는 몹시 미안해하였다.

《나한테 모포를 주면 어떻게 해요?》

《아이참, 나야 사람들 틈에 끼워자면 춥지도 않구 좋지요 뭐.》

별걱정을 다 한다는듯 두눈을 곱게 흘겼으나 한정아는 마음이 개운치 못하였다.

날씨가 급작스레 추워졌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사나운 칼바람에 숲은 마구 비명소리를 질렀고 아침이면 락엽우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그속에서 자며말며 하다가 부스스 일어난 사람들은 추워서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임신부인 서분이는 남달리 더하였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그를 보느라면 마음이 아릿해지군 하였다. 이런 때 개인천막이 있으면 바람도 막고 모포속에 불돌을 들여놔주면 춥지 않겠는데.

그 생각을 한것은 처음이 아니였다. 천막을 구하자면 부득불 련대장을 만나야 하는데 벼랑길을 통과한 후로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와 마주서고싶지 않았다. 게다가 련락병한테 젖은 군복을 보내고나니 그 감정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오늘 밤도 바위짬에서 추운 밤을 보내야 하는 서분이의 정상을 생각하니 더는 자존심을 내세울수 없었다.

그래, 련대장동지를 만나자!

결심을 내린 그는 서분이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미안해하지 말고 후에 고운 애기만 낳아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저고리고름을 들어 눈굽을 훔친 서분이는 수줍게 대답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인차… 몸을 풀것 같애요.》

《아이, 그럼 됐군요. 자, 이젠 쉬세요.》

어색해하며 잠자리에 누운 서분이는 눈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아지미도 같이 눕자요.》

한정아는 방긋 웃어보였다.

《난 또 사람들한테 가봐야 해요.》

서분이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몸이 견디겠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구…》

말꼬리가 이상하게 죽어든다 했더니 어느새 그는 잠들어버렸다.

퉁퉁 부은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 돋은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한정아의 가슴속에 동정심이 솟아올랐다.

막달찬 몸으로 행군하자니 얼마나 힘들가. 그래도 서분아주머닌 주저앉지 않고 북으로 가고있어. 이제 태여날 아이를 위해, 자식한테 참다운 행복을 안겨주기 위해서. 아주머니, 제발 끝까지 힘을 내세요!

뒤에서 누군가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저쯤에서 련대장련락병이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서분이를 깨울가봐 한정아는 재빨리 그를 향해 마주 걸어갔다.

눈치빠른 련락병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말을 꺼냈다.

《혹시 련대장동지 군복을 빨 때 군공메달이랑 건사하지 않았습니까?》

《네, 여기 있어요.》

한정아는 양복주머니에서 군공메달과 유지로 싼것을 꺼내주었다.

련락병은 마치 귀중품을 잃었다가 찾은것처럼 기뻐하였다.

《히야, 그런걸 난 잃어버린줄 알구 속이 한줌만했댔습니다.》

군복소매로 이마의 땀을 뻑 훔치는 그를 보자 한정아는 롱조로 물었다.

《련대장동지한테 졸경을 치른 모양이지요?》

《말두 마십시오. 이걸 잊어버리는 날엔…》

련락병은 목을 움씰하더니 호랑이가 두발을 쳐들고 먹이감을 덮치는 흉내를 해보였다.

《우리 련대장동진 한번 성나면 범 한가지입니다.》

《호호호. 그렇게 무서운가요?》

《예,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까?》

련락병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한정아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련대장동지가 성나기 전에 어서 가보세요.》

련락병이 가버리자 한정아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배낭속에서 실패를 꺼냈다. 서분이때문에 련대장을 만나려던 참이였는데 이왕이면 어제 낮에 젖은채로 돌려보낸 그의 군복을 기워줄 생각이였다. …

한정아가 천막에 들어섰을 때 표무강은 붉은 비로도천에 싼것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어찌나 정신이 팔렸는지 사람이 들어선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의 눈가에 어려있는 숙연한 빛을 보자 처녀는 차마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돌아서자니 공연히 놀래울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한정아는 숨을 죽이고 서있었다.

아이참, 언제까지 저렇게 있을가?

문득 표무강의 손이 움직이더니 남포등불빛에 뭔가 번쩍 빛났다.

《!》

그것은 좀전에 련락병이 찾아간 군공메달이였다.

군공메달을 웃주머니에 정히 간수한 그가 이번에는 유지에 싼것을 풀기 시작하였다.

처녀의 가슴속에 호기심의 초불이 반짝 켜졌다.

물에 젖을가봐 싸고 또 싼 유지속에서 과연 무엇이 나올가?

다음순간 처녀의 눈에 어이없는 빛이 그려졌다.

한장의 쪽지편지!

아이참, 그런걸 난…

추연한 눈길로 편지를 보던 표무강은 한숨을 내쉬고나서 유지에 도로 싸더니 품속에 넣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천막입구에 서있는 처녀를 알아보자 놀라와하였다.

《동무가 어떻게 여기 있소?》

한정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하다가 대답하였다.

《저, 군복을 기워주려고 왔습니다.》

《군복?》

《네.》

한정아는 련락병을 만났던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찢어진 군복앞섶을 내려다본 표무강은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니 가보우.》

순간 내가 공연히 찾아온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정아는 마음을 다잡고 도담하게 나왔다.

《그러지 말고 군복을 벗어주십시오.》

표무강은 증을 냈다.

《동무, 한번 말했으면 됐지 무슨 말이 많소?》

처녀는 담벽에 맞고 튀여나온 고무공마냥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련대장동진 전사들앞에 그런 군복을 입고 나서겠습니까?》

《뭐요?》

《전 련대장동지가 모든 면에서 전사들의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동무가…》

두눈을 지릅뜬 표무강은 무슨 일을 칠것처럼 다가왔지만 어째서인지 슬며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정아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수천명의 전사들을 쥐락펴락하는 련대장이 처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니. 아이참!

씩씩거리던 표무강은 시끄러웠던지 군복을 벗어주고는 뒤로 돌아섰다.

군복을 받아든 한정아는 그가 보지 않는 틈에 살그머니 냄새를 맡아보았다.

깨끗이 마른 군복에서는 시큼한 땀내가 더는 나지 않았다.

마음이 가벼워진 처녀는 찢어진 앞섶을 마주 붙이고 바느질을 시작하였다.

소녀시절부터 한정아는 이악하고 알뜰한 홀어머니슬하에서 규방처녀가 갖추어야 할 재간들을 차근차근 배우며 자랐다.

음식만드는 법, 방을 거두는 법, 웃어른앞에서 가져야 할 몸가짐…

그가운데서도 바느질솜씨는 보통 꼼꼼하지 않은 어머니도 감탄할 정도로 뛰여났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군복앞섶을 깁는것쯤은 눈감고도 할 일감이였다.

제꺽 바느질을 끝낸 한정아는 천막가운데 장승처럼 서있는 표무강을 찾았다.

《군복을 기울 일이 있으면 또 부탁하십시오.》

표무강은 잠자코 군복을 몸에 걸치기만 하였다.

언제 찢어졌던가싶게 말쑥해진 군복을 주의깊이 뜯어보던 한정아는 다른것이 없다는것을 확인하자 정색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련대장동지, 한가지 제기해도 되겠습니까?》

두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한정아가 한 말이 생각났는지 표무강은 선선히 응하였다.

《말하오.》

《개인천막을 하나 해결해주십시오.》

표무강은 의아쩍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동무가 쓰려고 그러오?》

《아닙니다. 서분아주머니가 추워해서…》

《임신부말이요?》

《네, 인차 해산할것 같습니다.》

그때 련락병이 천막안에 들어섰다.

표무강은 마침이라는듯 그에게 후방부련대장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인차 후방부련대장이 헐떡거리며 뛰여왔다.

《후방부에 개인천막이 있소?》

《예, 있기는 한데 꼭 쓸데가 있어서…》

표무강은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허리를 분질렀다.

《그걸 이 동무한테 내주오.》

《예? 사실 그건…》

《무슨 말이 많소?》

《알았습니다.》

《후방부련대장동무를 따라가오.》

한정아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 표무강은 성큼 천막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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