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제 2 장


6


남쪽하늘가에서 무거운 대리석공을 굴리는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수림우에 거대한 잠자리모양의 직승기가 나타났다.

《은페!》

행군중에 있던 전사들은 재빨리 숲속으로 몸을 숨기였다.

련대상공을 빙빙 돌고있는 적직승기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산군련대장 표무강씨 들으시오. 나 허정효요.》

굵다란 잣나무뒤에 서있던 표무강은 두눈을 부릅떴다.

허정효라구? 친구의 너울을 쓰고 나를 민족반역의 길에 끌어들이려고 음으로양으로 책동하던 교활한 원쑤, 내가 대대를 이끌고 북으로 의거하려고 하자 신애를 인질로 붙들어두고 발악하였던 간악한 원쑤. 그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수 없었던 저자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가.

《표련대장, 아무래도 우리의 상봉은 숙명인것 같구만. 그건 그렇고 당신도 알겠지만 고대그리스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를 알지어다.〉라고 하였소. 그렇소. 현명한 인간일수록 자기 처지를 잘 알고 옳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거요. 당신은 첫번째 선택을 잘못했소. 그렇다고 락심할건 없고 이제라도 개심하고 귀순한다면 우린 과거를 일소하고 환영하겠소. 난 장교의 명예를 걸고 엄숙히 약속하는바이요.》

수림은 잠든것처럼 고요하다.

《참, 당신한테 알려줄게 있소. 우리한테 홍일남이라는 당신 부하가 와있소.》

표무강은 귀를 의심하였다.

저게 무슨 소린가? 일남이가 저 독사같은자한테 가있다니.

그 의혹을 증명이라도 하듯 확성기에서 울리는 눈물젖은 목소리.

《련대장동지, 난 홍일남입니다.》

《?》

《나도 이런 결심을 내리자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앓고있는 어머니를 버리고 련대에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방망이 호되게 얻어맞은것 같은 기분이였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는데 홍일남은 계속 주절거린다.

《련대장동지, 불쌍한 전사들을 생각해서라도 모두 데리고 귀순하십시오. 제발 빕니다!》

삽시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것 같았다.

일남이, 네가… 네가 그런 인간이였단 말인가?

꽉 틀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있는데 앞쪽에서 날카로운 눈길이 날아왔다.

전선사령부 대표 로성익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굳어진 얼굴은 이렇게 묻고있었다.

《동문 아직도 할 말이 있소?》

표무강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랬으나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런 말을 꺼냈다.

《좀 이상합니다.》

꽉 다물려있던 로성익의 입에서 차거운 말소리가 튀여나왔다.

《뭐가 이상하다는거요?》

《어쩐지 〈ㅅ〉자발음이…》

《동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거요?》

그때 후위구분대쪽에서 한 전사가 달려왔다.

《련대장동지, 적입니다!》

표무강은 권총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련대 모엿!》

숲속에서 달려나온 전사들은 저저마다 격분을 터뜨렸다.

《에익, 너절한 자식!》

《전우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다니.》

《만나기만 해봐라. 당장 쏴죽일테다!》

전사들이 분개해하고있을 때 로성익은 군복바지에 달라붙은 도꼬마리씨를 차근차근 뜯어내고있었다.

그가 그렇듯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할수 있는것은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말았다는 생각때문이였다.

홍일남이 산을 내려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로성익은 벌써 오늘과 같은 날이 들이닥칠것이라고 짐작하였었다. 그래서 탈영자가 련대로 돌아온다는 표무강의 주장을 일축하고 즉시 련대를 출발시키라고 명령하였던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자기가 내린 명령은 조성된 정황에 대처한 신속하고도 정확한 조치였다. 만약 표무강의 말에 동조하여 련대를 출발시키지 않았다면 어떤 엄중한 사태가 벌어졌을지 모른다.

침착한 손놀림으로 마지막 도꼬마리씨를 뜯어내는데 눈앞에 술취한 사나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대장동지, 정말 날 총살하겠다는겁니까?》

두눈에 흰자위가 번뜩거리는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본 로성익은 두눈을 꽉 감아버렸다.

월로쟈!

가슴을 찢어발기는 아픔속에서 그는 자기가 이곳 수림속을 떠나 머나먼 로씨야의 어느 한 촌락입구에 서있는것을 느꼈다.

…대대가 마을앞을 지나고있을 때 3중대 중사 월로쟈가 맨머리바람에 달려왔다.

《대대장동지, 한가지 제기할만 합니까?》

《월로쟈, 모자를 쓰오.》

너부죽한 얼굴에 빙글빙글 웃음을 담고있던 월로쟈는 손에 쥐고있던 납작한 뻴로뜨까를 곱슬곱슬한 머리우에 올려놓았다.

《말하오.》

《이 마을에 저의 약혼녀가 있습니다. 따냐라고 금방 딴 양벗처럼 싱싱한 처녀인데…》

《본론을 말하오.》

《예, 전선에 나온 다음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사정을 좀 봐주십시오.》

《…》

《만나보고 제꺽 돌아서겠습니다. 처녀를 만나고 돌아와선 싸움을 더 잘하겠습니다.》

처녀를 만나고 돌아와 싸움을 더 잘하겠다는 그 결의가 로성익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좋소. 한시간 주겠소.》

《히야, 고맙습니다. 대대장동지!》

사기가 난 월로쟈는 냅다 뛰여갔고 대대는 마을을 지나갔다.

한시간이 지나고 오후해가 저물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월로쟈를 기다리던 로성익은 래일 아침에 푸접좋은 그가 싱글벙글하며 나타날것이라고 믿었다.

에라, 처벌은 주지 말자. 그야 제일 우수한 중기사수가 아닌가.

다음날 아침 로성익은 《대대장동지, 도착했습니다.》 하는 월로쟈의 보고가 아니라 천식환자의 기침소리같은 도이췰란드제자동총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깨여났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것은 이리떼마냥 달려드는 적들이였다.

《중기, 사격하라!》

목갈린 대대장의 명령에 대대에 한문밖에 남지 않은 중기가 뚜루룩거렸다.

누런 불줄기가 악착스럽게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날아갔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쓰러지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아차! 하고 로성익은 혀를 깨물었다. 지금 중기를 붙들고있는 전사는 중기사격으로 널판자에 《8》자를 새긴다는 월로쟈가 아니라 사격술이 능하지 못한 부사수였던것이다.

아, 월로쟈를 괜히 보냈구나!

하지만 언제 후회하고있을 사이가 없었다. 진지를 돌파한 적들이 숙영지로 육박하고있었던것이다.

《철수, 철수하라!》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은 대대는 황황히 물러났다.

적들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나왔을 때 로성익은 반수이상의 전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것을 알자 얼굴이 까맣게 질려버렸다.

먼발치에서 파쑈들이 화염방사기로 전우들의 시체를 불태우는것을 본 그는 자신의 실책을 끝없이 저주하며 몸부림쳤다.

저녁무렵, 포승에 묶이운 월로쟈가 끌려왔는데 능청스럽게 빛나던 두눈은 모주먹은 돼지처럼 흐리멍텅하고 입에서 역한 술냄새가 풍겼다.

《대대장동지, 글쎄 따냐가 내 목을 부여잡고 매달리는데…》

《정신차렷!》

입에서 구렝이가 나가는지 뭐가 나가는지 모르고 히히덕거리는 그의 머리우에 물바께쯔가 통채로 들부어졌다.

《어- 시원하다!》

온몸이 흠뻑 젖은 월로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팔뚝만 한 고기뼈다귀도 와작와작 씹어버리는 든든한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얻어맞은 개처럼 쫓기우면서 뭘 그럽니까?》

로성익은 보기만 해도 역겨운 그 상통을 힘껏 후려갈겼다.

대번에 입술이 터졌지만 월로쟈는 그냥 히물거렸다.

《대대장동지, 공연히 힘을 뽑지 말구 내 말을 들으십시오. 듣자니 도이췰란드군은 벌써 모스크바부근에 당도했답니다. 며칠 있으면 그곳에 나치스기발이 휘날린단 말입니다.》

《배신자!》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시유. 어쨌든 우린 졌소. 망했단 말이요.》

로성익은 더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자기를 겨눈 총구를 보자 월로쟈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날 쏘겠다는거요?》

절컥!

격발기소리가 울리자 월로쟈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자 한 말은 취중에 한겁니다. 제발 용서해주시유.》

허겁지겁 발목에 매달리는 월로쟈를 걷어찬 로성익은 방아쇠를 연방 당겼다.

땅, 따당-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건 희생된 전우들의 복수다! 또 이건 너를 믿었던 나를 총살하는것이다!

질쩍거리는 진창속에 배신자의 몸뚱이가 구겨박혔다. …

바로 지금 눈앞에서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있다고 로성익은 생각하였다.

월로쟈와 홍일남, 두사람의 처지는 얼마나 비슷한가. 한사람은 약혼녀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머니때문에 전우들을 배반하였다. 그래도 월로쟈는 지휘관의 승인을 받고 갔지만 홍일남은 자의대로 련대를 떠났다. 세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추위가 들이닥치고 며칠째 굶자 《국군》시절의 버릇이 되살아났으리라. 그가 갈 곳은 한곳뿐이다. 그것은 배신이라는 치욕을 잉태한 고향집이다. 물론 배신자가 대오에서 떨어져나간건 잘된 일이다. 문제는 배신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것이다. 그건 장담할수 없다. 바로 삐라사건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어제 아침 19대대와 함께 행군하고있던 로성익은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를 들었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쪽으로 다가간 그는 대여섯명의 전사들이 모여있는것을 발견하였다.

《그게 사실일가?》

《글쎄 이 산속에서야 그걸 어떻게 알겠나?》

앞을 가리운 잣나무가지를 와락 밀어버린 그는 버럭 소리쳤다.

《동무들은 뭐요?》

전선사령부 대표를 알아보자 전사들은 나쁜짓을 하다가 들키운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수염이 텁수룩한 전사가 덤벼치며 삐라를 바지주머니에 쑤셔넣다가 실수하여 땅에 떨구었다.

바빠난 그가 삐라를 집으려는데 번쩍거리는 가죽장화가 먼저 그것을 짓밟았다.

허리를 굽히고 삐라를 주은 로성익은 보지도 않고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누가 이 너절한걸 보라고 했소?》

고개를 푹 떨군 전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그게 적들의 개나발이라는걸 모르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용서치 않겠소.》

단단히 오금을 박고 돌아서는데 텁석부리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이자 뭐라고 했소?》

《적들이 평양에 들어갔다는게 사실입니까? 그 삐라에…》

전선사령부 대표의 얼굴이 이그러지는것을 본 그는 창에 찔리운 가물치처럼 꿈틀 놀랐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궁금한 모양 이렇게 물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이런 한심한 친구가 있나 하고 그를 노려보던 로성익은 문득 생각되는것이 있었다.

《언제 입대했소?》

《작년에 대대와 같이 의거한 후에 입대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 로성익은 가슴이 뜨끔거렸다.

적지 않은 전사들은 한해전까지만 해도 《국군》에서 복무한것만큼 아직 단련이 부족하고 신념도 투철하지 못하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삐라를 보고 적들의 거짓선전에 귀를 기울이고있는것이다. 이들을 단단히 눌러놓지 않으면 엄중한 후과가 초래될수 있다.

《그래, 삐라를 본 사람이 더 없소?》

《없습니다. 우리도 이자 방금…》

《똑똑히 듣소. 삐라내용을 루설하면 군사재판에 넘기겠소.》

가뜩이나 대하기 어려운 전선사령부 대표의 입에서 군사재판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이 쏟아져나오자 텁석부리는 물론이고 옆에 서있던 전사들도 겁에 질려버렸다.

《그래, 어느 중대요?》

《3중대입니다.》

로성익은 19대대의 선두에서 행군하고있는 3중대쪽을 가리켰다.

《구보로 갓!》

그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사들은 호랑이한테 붙잡혔다가 놓여난 노루들마냥 우르르 뛰여갔다. …

문제의 엄중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저께 로성익은 《사민구분대》에 내려갔었다.

경비소대장을 시켜 그들을 한사람한사람 료해하였는데 특별히 의심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맨 마감에 담화를 한 사나이만은 왜 그런지 껄끄름하게 생각되였다.

고남수라고 하는 그 남자는 행군도중에 끼여든 사람인데 한정아도 그의 신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보다 더 의심스러운것은 고남수의 배낭이였다. 담화과정에 그는 불룩한 배낭을 꽉 붙들고있었는데 경비소대장이 그안에 무엇이 있는가고 묻자 별게 아니라고 잡아뗐다. …

로성익은 군복웃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담배연기를 페장속으로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내뿜자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부두에 정박한 기선마냥 천천히 가라앉았다.

앞으로 책임성을 더욱 높여야 한다. 련대장은 한창나이여서 물덤벙술덤벙하니 그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자!

절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끈 로성익은 군복자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나서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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