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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16일

평양시간


제 9 회


제 1 장


9


바다는 거대한 숨을 쉬면서 타협을 모르는 눈으로 바라본다. 자기가 생명을 준 땅에서 흘러오는 천만갈래의 물줄기들에게 소리쳐 부른다.

오라, 내 품으로! 네 아무리 흐린 물이라 할지라도 두려워말고 오라. 맥이 진해 말라버린 나약한것들은 애초에 떠나오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느냐. 오기는 힘들어도 내 품에 안기면 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거대한 힘으로 하늘도 뒤흔들리라.

남계수는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의 웨침을 듣고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바다는 보이건만 아직도 작은 산골물로 남아서 시름을 안고 뒤척이고있지 않는가. 정녕 예까지 와서 말라버리는것인가.

공장에 대한 검열은 점차 심화되면서 지배인에게 초점이 집중되고있었다. 그렇지만 남계수는 개의치 않고 생산을 내밀었다. 동소옥이 망라된 기술혁신조에서는 연마재와 법랑칠물개발에서 한걸음씩 전진하고있다.

오늘은 일요일이여서 그는 머리도 쉬울겸 바다소풍을 나온것이다. 그는 지금 류계환에 대해 생각하고있다.

류계환은 함주벌 농사군의 아들이다. 이 도시에서 그를 사귄것은 태평양전쟁이 터지기 몇해전이였다. 그때 류계환은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나섰지만 현해탄을 건너갈 로자도 없는 불쌍한 식민지땅의 젊은이였다. 그 사정을 안 남계수는 서슴없이 돈 20원을 내주었다.

그렇게 헤여진 뒤 해방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다시 만났는데 정신적으로 방황하기는 남계수와 다를바 없었다. 욕망은 큰데 갈길을 몰라 허둥거리는 인간이였다. 그러던 사람이 전후에는 어느 한 성의 지도원이 되여 나타나서는 놀라게 했다.

《계수형은 이게 뭐요. 사람은 대세를 잘 봐야 해요. 개인기업이 오래갈상싶어서 그러오? 기업타산보다 순풍에 돛을 올릴 생각을 해야지요.》

틀을 차리는 그의 훈시에 남계수는 화를 냈다.

《난 그런건 못 배웠으니 임자나 순풍을 따라가라구.》

남계수는 도래굽이바위에 앉아 바다에 눈길을 둔채 생각을 이어나갔다.

얼마전에 자기를 무던히 찾던 무역부문의 한 일군이 여기까지 찾아내려왔기에 만났다. 뜻밖에도 남계수의 옛친구인 구일파의 소식을 가지고 왔던것이다. 어떻게 되여 남에 있어야 할 사람이 유럽이라는 만리타향에 가있는가. 오늘도 그의 말이 귀전을 두드리는 때가 있다.

《청산과 숙청!》

구일파는 북에 남은 개인기업가들의 운명을 그렇게 예언하였다.

해방되던 해 9월초에 헤여진 구일파를 남계수는 그로부터 두달후에 서울에서 만났었다. 철공소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좀 마련해보려고 남포앞바다의 생선을 사가지고 인천에 나갔던 그였다. 그때 그가 탄 작은 목선이 부두에 들어서기 바쁘게 어데서 나타났는지 모를 군복입은 서양의 강도무리들이 한푼도 내지 않고 고기 한배를 다 삼켜버렸다. 남조선에 기여든 미군이였다.

《고기 한배가 뭐가 큰가. 꽝하면 목숨이 날아나는 판인데.》

남계수를 맞아준 구일파의 정상은 형언할수 없을 정도였다. 헤여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삽자루만큼이나 가늘어진 목에 올려놓은 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는 꼴이 정말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였다. 두달도 못되는 사이에 미군정과 연줄이 있다는 한 사기협잡군에게 가진 돈을 깨끗이 털리우고 가마 밑구멍을 땜질하여 간신히 창자를 건사하고있었다. 남계수와 헤여질 때 북에 남아있다가는 《청산》을 당할거라고 걱정하던 그가 미군정아래 란장판으로 변한 남녘땅에서 눈을 펀히 뜨고 생눈알을 뽑힌것이였다.

《그래 어떻게 살아갈셈인가?》

《숨은 붙어있으니 살자구 버둥거려야지. 허허. 하는수없이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내려가야 할가부네.》

이렇게 헤여진 구일파다. 그 시절에 몰락했다고 해야 할 사람이 유럽에서 기업을 차렸다니 수수께끼다. 예측할수 없는것이 우리 같은 인간들의 운명인가.

남계수는 때없이 찾아드는 공허와 함께 자신도 리해할수 없는 심리상태에 빠져드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무엇이 어떻든 자기를 향해 그 어떤 새로운 생활이 다가오고있다는것을 느끼였다.

공장에 대한 검열이 심화되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된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로동조건의 개선과 종업원들의 문화후생조건보장과 관련한 자금지출정형이 검열소조성원들에 의해 료해되였는데 그 수자는 지배인의 사상관점이기도 했다. 지난 몇해동안 그는 기업소가 국가계획을 수행하여 조성한 자금을 가지고 생산설비를 갱신하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데만 치중하였다. 개인수공업자들과 상공업자들이 가지고있던 낡은 설비를 가지고 발족한 공장이여서 물질기술적토대가 허약한데 허리띠를 풀어놓고 후생시설을 건설할 형편이 못된다고 여기였던것이다. 녀성로동자들이 목욕탕을 제대로 리용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의견을 들으면서도 눈을 감고 무시해버린것도 그런 리유에서였다.

오늘에 와서 지배인이 생산자대중의 로동조건 같은데 관심조차 돌리지 않았다는 엄격한 비판은 부정할수 없게 되였다.

남계수는 비로소 자기라는 인간이 가지고있는 제한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수 있었다. 주관이 강한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기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세상만사에는 때가 있기마련이고 사람도 필요되는 때가 있기마련인것이다. 낡은 설비를 페기해야 하듯이 쓸모가 없어진 사람도 밀려나기마련이다. 이것은 생활의 론리이기도 하다. 남계수라는 소자산계급출신의 인간이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의 확립이라는 거창한 변혁속에서 시대의 흐름과 함께 호흡하며 한개 공장의 지배인으로 이쯤 살아온것도 큰것이 아니고 뭔가.

공장의 검열정형을 료해한다면서 류계환이 왔다가 간 이후부터 손맥이 풀린 남계수는 사업의욕을 잃다싶이 했다. 이름만 들어도 불쾌하지만 어쨌든 일단 공장에 내려온 중앙의 일군이고 영 모르는 사이도 아니여서 주인의 립장에서 한번 찾아가 인사라도 하는게 례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은 한사코 거부하는 성미를 종시 이겨낼수 없었던것이다.

지배인은 찾지도 않고 당위원장만 만나고 가버린 류계환이다. 앞으로도 당위원회를 통하여 지배인을 료해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것이라고 남계수는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오늘의 격동하는 시대현실에 확실히 불합리한 일군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당위원회회의가 진행될 때면 그는 작업장들에서 공허감을 이겨내기 위한 시간을 보내였다. 자기의 인생에 자리잡고있는 커다란 공백, 그것은 스스로 찾아서 메워야 하는것이기에 마음속으로 모지름을 쓰는것이다.

바다는 쉼없이 사색깊은 음악을 연주한다. 끝없는 대자연의 세계에서 울려오는 선률에 몸을 맡긴채 남계수는 시름많은 가슴을 안고 하염없는 생각을 이어가는것이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것이다. 고립무원한 인간이란 존재할수 없다. 때문에 인간관계자체가 복잡하고 다양하기마련이다.

신유정은 생활을 너그럽게 대할줄 알았으며 사랑하였다. 이제는 50대에 들어선 나이지만 교단에 서있는것도 후대들에게 바치려는 사랑의 감정을 떠나서 살수 없기때문이였다.

신유정은 량반사대부의 가문에서 태여났다. 고조부때부터는 벼슬을 살지 않으면서 실학탐구로 대를 이었다. 그와 같은 가정적영향은 그로 하여금 봉건적륜리도덕에서 일정하게 벗어나도록 하여주었다. 사서삼경에 구속을 받지 않으면서 신학문에 접근하였고 당시로서는 개명한 녀성들속에서 인기가 있었던 사범교육도 받을수 있게 하였다.

《백성을 이루는 인총속에 녀자가 얼마냐. 절반을 넘는다고 해야 할 그들이 몽매하다면 나라의 문명개화란 빈소리일뿐이다. 녀자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 녀자라는 밭에서 씨앗이 움트고 자란다는것을 알면 이것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위해서 필요한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신유정에게 공부를 시켰지만 봉건적계률을 떠난 자유를 준것은 아니였다. 봉건륜리에 어긋남이 없는 례절을 갖추고 녀자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학문을 추구해야 하는것으로 하여 그의 성격도 그런 방향에서 형성될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학문을 갖춘 현모량처가 되는것이 신유정의 지향이였다.

이 며칠동안에 그의 생활에서는 충격적인 일들이 생겼다.

그의 수업에 교수참관으로 참가했던 학교의 일부 교원들속에서 여러가지 의견들이 제기된것이였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의 지리적특징을 가르칠 때 평양의 명승고적들을 알려주면서 정지상과 김부식의 관계, 그들의 시적재능의 차이를 흥미있게 설명한것이라든가 옛 당나라시인 리백의 시들을 실례로 들어 우리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한것을 사대주의나 복고주의와 련관시켜보는것이였다.

《강의의 폭과 깊이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학분야를 가르치면서 우리 나라와 세계의 명인들을 소개할수도 있고 그들의 시대적이며 력사적제한성을 취급할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특히 외국의 유명한 시인까지도 노래할 정도로 우리 나라의 자연풍치가 아름답다고 배워준것이 무슨 문제가 될가요?》

력사나 지리과목의 수업을 하면서 명인들과 그들이 남긴 일화들을 들려주는것은 그가 장려하는 교수방법이기도 했다.

신유정은 론리정연하게 설득하려 했지만 이 문제가 우에까지 보고된것을 안 후로는 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운것들을 봉건적이고 복고주의적인 사상잔재라고 한다면 부정할 말도 있을것 같지 않았다. 명백히 량반사대부들이였고 그들의 후손인 자기가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그는 최근에 와서 신경이 예민해지고있다는것을 이따금 느낀다. 심리적평온을 유지해오던 인내와 자제력이 소실되는감도 받았다.

날이 저물고 황혼이 사라진 뒤 그는 학교문을 나섰다. 몇걸음 옮기는데 친절한 인사말이 뒤따랐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지금 퇴근하시는군요.》

신유정은 가슴이 후두둑 뛰는것을 누른채 돌아보았다. 희미한 어둠속에 낯이 익은 젊은 녀자의 모습이 다가왔다.

며칠전에도 만난 녀자다. 이상할만큼 자기의 주위에서 맴돈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나자고 계속 접어드는 사람을 거절할수도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여기에서 자기를 여적 기다리고있었다는 육감이 들자 오늘은 무슨 말을 하자는것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믿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져보지 못한 고민을 이 녀자가 안겨주었다.

《날 만나자는건가요?》

《꼭 그런건 아니구, 우연히…》

곁에 선 불청객은 어깨를 약간 추슬러올리며 턱을 돌리였다.

《요즘 골치아픈 일들이 생겨서 몹시 고달프시겠어요.》

신유정은 이상한 녀자의 질문에 내키지 않는 어조로 반문했다.

《저의 신상에 너무 깊은 관심을 가지고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아뇨, 다만 사모님이 걱정돼서…》

《대단히 고마와요. 하지만 부탁하건대 내 일로 마음을 쓰지는 말아요.》

상대의 심리가 거부하는것쯤은 개의치 않으며 녀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교원대렬을 정리한다는가봐요. 혹시 일생 섰던 교단에서 물러나게 될지 알겠어요?》

신유정은 이 녀자가 지금 근거없는 말을 하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젠 나이도 많고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배치되여오는 새 세대 교원들도 많은 조건에서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라면 그만둘 생각이였다. 다만 괴로운것은 남편에게 골치아픈 일들이 겹치는 때에 자기 문제도 덧쌓이는것이였다.

《더우기 사모님은 남계수지배인의 부인이 아닌가요?》

신유정은 저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와지는것을 느꼈다.

《그래서 뭘 말하자는건가요. 나이로 봐선 날 선생님이라구 불러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가요?》

은근히 화가 난 신유정은 자못 엄하게 말했다.

《사모님은 참 예리하시군요. 실은 저도 사모님의 문하에서 배울수 있었지요. 운명이란 참, 일망무제한 푸른 벌, 풍요한 계절이면 황금바다가 되던 나의 고향땅, 비단필이런듯 곱게도 흐르던 금사강과 두루미떼 날아내리던 백악산… 금시 보이는것 같지 않는가요?》

신유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갑지 않은 녀자가 읊조리는 시구절같은 말속에 자기의 잊을수 없는 지난날이 깃들어있었던것이다.

금사강이 흐르는 백악산기슭의 재경땅은 그가 밟았고 해방전에 교편도 잡았던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녀자가 그 고장에서 살았다는 소리다.

《당신은 누군가요?》

《저의 이름은 채련이라고 합니다. 사모님은 기억에 없으실겁니다. 하지만 전 그때 사모님을 보았고 남계수지배인은 우리 집에도 오셨댔는걸요.》

마음이 이상해난 신유정은 끌려가듯 걸었다. 랑설이나 들고다니는 녀자로 알았지만 이 말속에서 어떤 진실을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던것이다.

《절 탓하지 말아요. 사모님. 불쾌한 말만을 알려드리는것 같지만 사실을 전하는거예요. 그것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느끼게 한다는것도 안답니다. 하지만 우린 어차피 고통이라는것을 맛보지 않을수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요. 전번에 제가 주숙진이라는 녀자에 대해 한 말도 죄다 사실이라는것을 믿어주세요.》

《그런들 그건 지나가버린 이야기지. 내 남편도 남자니까.》

신유정은 의혹으로 남아있던 심중의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역시 지울수 없는 불안이였다.

녀자의 입에서는 한숨섞인 통탄 같은것이 여전히 시줄처럼 흘러나왔다.

《동방화촉은 꿈이런듯 외로이 홀로 누워 달을 보니 내 불쌍함에 눈물만 흐른다… 사모님, 우리 녀자들이란 그렇게 사는것이 아닐가요?》

참으로 따뜻한 위로인듯싶다. 너무도 많이 들은 통속극에 심취되였던 신유정은 알지 못할 구토감을 느끼며 사라져버린 녀자를 찾을듯이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그러잖아도 자신도 녀자인것으로 하여 미상의 젊은 그 녀자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던 생소한 이름인 주숙진이라는 인물을 은근히 찾아보는중이였다.


법랑칠물을 개발하기 위해 작은 실험실 하나를 내왔다. 아직은 갖춘것이란 소형로와 기구들이 전부지만 이 건물의 주인이 동소옥이라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말썽꾸러기로 알려진 처녀인데 큰일을 맡아한다고 대견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아니꼬와 입을 비쭉거리며 곱지 못한 말도 해댄다.

그런데는 개의치 않고 려현석은 민청원들을 데리고 와서 꾸리는 일을 도와주었고 실험에 필요한 유리관과 그릇들도 마련해주느라 복새통을 일구었다. 그로 하여 동소옥은 심술궂은 몇몇 녀자들의 말도마우에 올랐지만 본인은 여적 모르고있었다. 이성의 눈길이 마주치는 낌새만 느껴도 큰일이나 난것처럼 아부재기를 치며 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입부리들이 이 공장에도 있었던것이다.

연마재는 일정한 파악이 있어 만들어보지만 법랑칠감은 동소옥에게 있어서 너무도 무거운 짐이였다. 그는 지금도 도서관에서 빌려온 기술도서들을 한가득 벌려놓고 앞으로의 실험방향을 찾느라고 고심하고있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려현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동소옥은 덴겁하여 일어났다. 보기만 해도 욕을 하려고 찾아온것처럼 느껴졌던것이다.

《소옥이, 확실히 동문 머리가 비상해.》

려현석의 입에서 밑도 끝도 없이 칭찬인지 야료인지 알수 없는 말이 튕겨나오자 추궁을 받는데 버릇이 붙은 동소옥은 고개부터 숙이였다. 영문을 알수 없지만 민청위원장이면 웃사람인데 아무 말이든 듣는다는 태도에 려현석은 잠시 바라보다 제풀에 웃으며 말했다.

《난 오늘 책을 보고서야 석영이 이산화규소 즉 SiO₂이라는걸 알았다. 그러니 동문 연마재만 아니라 법랑에 대해 예견하고있었다는 소리가 아니야? 법랑의 주성분도 이산화규소더구나, 뭘.》

동소옥은 놀랐다. 민청위원장이 자기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면 이러랴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름할수 없이 기쁘기도 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동무가 기사장에게 제기한 첨가제명세를 나도 봤다. 내가 공장대학의 상급생이라지만 소옥이보다는 뒤떨어진다는걸 알았지. 하하, 괜찮아.》

《차라리 욕이나 하십시오.》

《내가 뭐 욕만 하는 사람인가. 동무가 말밥에 오르는게 싫어서 그러지. 내 말을 욕이라구 생각하면 안돼.》

동소옥은 목이 꽉 잠겨들어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인간의 진정이란 어떤것인가를 알수 있었다. 사심이 없기에 남의 잘못을 제탓처럼 여기는것 아닌가. 그렇게 드는 매라면 어찌 아프랴.

사랑에 주리며 산 그에게는 지금처럼 고마움에 마음이 젖어본 일이 그리 많지 못했다.

《법랑을 성공시키면 우리 공장의 제품생산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돼. 동문 꼭 해낼거야. 그땐 온 공장이 동무를 업고 다니자구 할거다.》

려현석이 사라지자 동소옥은 밑둥잘리운 나무처럼 주저앉았다.

나를 업고 다니겠대, 정말 업혀봤으면… 나한테도 저런 오빠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눈물겹도록 치받쳐올랐다. 그와 함께 자기 일을 진심으로 도와나선 동무들의 모습이 다가들자 조직과 집단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음미해보았다. 지금까지는 민청조직이 자기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말썽꾸러기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있다고만 여겨왔다. 때없이 불러다 다불러대고 회의를 열고서는 톡톡히 망신을 주든가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비판을 주어 정신을 차리게 하는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여있었던것이다. 하지만 그 민청조직이 이처럼 어려울 때 자기에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해줄수 없는 크나큰 의지로 되고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자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후 문밖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동소옥은 귀를 기울였다. 지배인과 기사장이다. 실험실로 오는 모양이다. 서둘러 일어난 그는 방안을 정돈하면서도 밖을 내다보았다.

여느때없이 낯색이 긴장한 정시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금기준을 실행한다는게 사실입니까?》

《지시했소. 부기장한테.》

《당위원장동문 며칠 강습이 있다고 하던데요.》

《도당에서 조직한 강습이라오. 래일부터 시작할거요.》

《지배인동무, 우리가 지금 검열을 받고있다는것을 고려해서 조심하는것이 나쁠게 없다고 봅니다.》

《그건 정상적인 검열이요. 받으면 되는거지.》

정시홍이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말을 더 하려다만다는것이 알렸다. 지배인의 얼굴에는 근심 같은건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다.

《여보, 기사장. 법랑생산공정을 빨리 갖춰야 하지 않소. 며칠후엔 자재과에서 늄판을 실어올거요.》

《우물 가서 숭늉 찾겠수다. 아직 칠감도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그저 무작정 내밀기만 하니, 원.》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뛴단 말이요. 난 황소걸음은 질색이요. 마음을 먹었으면야 죽든살든 내밀어야지. 난 오늘부터 소옥이네 실험실에 자리를 정하겠소. 기사장은 빨리 세척탕크를 만들어야겠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사람은 동소옥이 있는 실험실문앞에 이르렀다.

《어이구, 허줄한 창고가 제법 실험실체모를 갖췄구만.》

남계수가 흡족해하자 정시홍이 변죽을 울렸다.

《이 기사장이 놀구만 있은줄 아슈?》

《되겐 으시대는군.》

《민청조직에서 해제꼈지요. 왁왁대는게 젊은 사람들이 달라요.》

한옆에 오도카니 선 동소옥을 스쳐보며 남계수가 물었다.

《너 요즘 여기서 자면서 일한다는게 사실이냐?》

《이따금…》

정시홍이 슬며시 끼여들었다.

《책임성이란게 있으니까요.》

《너무 춰주지 마오. 가뜩이나 들뜨기 좋아하는 앤데.》

얼굴이 빨개난 동소옥이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자 남계수가 말했다.

《나도 아예 여기에 자리를 옮길가부다. 녹아서 법랑이 되든가 아니면 온몸이 삭아 없어지든가. 네 밥두 내가 날라오구 네가 먹구싶다는건 다 해줄테니 언제까지면 칠감을 만들겠니?》

남계수가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것을 안 동소옥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며 놀란 소리를 냈다.

《원, 기술적인 문제도 그렇게 푸는 법이 있습니까. 우격다짐으로 내밀바엔 단조에 가서 차라리 함마질이나 하는거지요.》

정시홍이 나무리자 남계수는 코투레질을 해댔다.

《여보, 기술자면 다요? 난 뭐 판무식쟁이구. 법랑의 기본성분이 이산화규소라는것쯤은 나도 들여다봤소. 화학식도 분자량도, 첨가제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도 풍월로는 안단 말이요.》

정시홍이 동소옥에게 놀랍지 하는 눈길을 보내고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거 안되겠수다. 이 기사장은 사표를 내야 할가 봅니다.》

《하하하.》

남계수도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웃지만 무거운것을 가슴에 안고있다는것이 얼굴 한구석에 비껴있는 그늘로 하여 알렸다.

새로 꾸린 실험실을 떠난 두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 검열을 책임지고 내려온 부처장을 안다지요?》

《알기야 뭘, 그저 그러루한 사이일뿐이요.》

《당위원장동무가 나한테 권고하는 말이 검열인것만큼 받는 태도를 잘 가지는것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우리 태도가 어째서? 그 사람들은 저희들의 방에서 일을 하는데 제 일을 다 보면 돌아가겠지.》

검열쯤은 꿈쩍하지 않는 남계수의 태도에 정시홍은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처마가 낮으면 고개를 숙이기마련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이 겸손치레를 왜 하는가. 낮추 붙어서 싫다는 사람은 없다. 세상은 그런 조화를 이룬지 오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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