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2 장


11


김성우는 아빠트 3층에 있는 침실 겸 서재로 쓰는 자기의 방안에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있었다.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그대로 술에 취하여 다리를 뻗고 엎드려있는 그는 이따금 벌겋게 피발이 선 눈을 들고 무엇인가에 대하여 맥락이 닿지 않는 말로 저주를 터뜨리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리고는 침대머리에 붙여놓은 낮은 탁자우에 놓인 청주를 잔에 부어가지고는 안주도 없이 꿀꺽꿀꺽 마셨다.

몸매가 호리호리한 안해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귀염성스러운 얼굴을 찡그렸다. 그 녀자는 철부지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듯이 청주병과 잔을 압수하면서 짜증을 냈다.

《정말 어쩌자고 이러세요. 아유, 이 옷주제! 벗겨줄게 일어나 앉기나 해요!》

그러나 남편은 탁 풀어진 눈으로 안해를 쳐다보고는 손을 내저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나가라, 술을 놔두고 나가! 그거 없으면 난 죽는다.…》

안해는 어쩔수 없어 술병과 잔을 제자리에 놓고 남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웃옷을 겨우 벗겼다. 진수와 동혁이 이 집에 찾아온것은 이때였다. 집안복도에서 종이 울리자 시인의 안해는 볼모양없이 구겨진 남편의 웃옷을 벽장속에 감추고는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그 녀자는 왕진하러 온 의사에게 위급한 환자를 보이는듯 한 태도로 진수와 동혁을 서재로 안내하면서 남편에게 일어나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엎드려 잠들기라도 한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는것을 보고는 용서를 비는듯 진수에게 애달픈 미소를 보내고 건너방으로 피했다.

모처럼 동혁이까지 데리고 온 진수는 모욕적인 도발이라고도 볼수 있는 김성우의 무례한 태도에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동혁에게 시인의 다채롭고도 재기에 넘친 경구와 자극적인 해학을 빌어 풍성한 웃음을 차려주고 성우에게는 동혁의 새롭고도 창조적인 가치관과 깊이가 있는 사색을 선물하려던 계획은 틀어지고만것이다.

《여, 리태백이, 이건 또 뭘 굉장한걸 구상중인가? 일어나게. 형님들이 왔어.》

진수는 돌아가자고 눈짓하는 동혁을 쏘파에 주저앉히고 연방 시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떤 자식들이야?》

엎드린채 웅얼거리던 성우는 겨우 침대우에 일어나 앉아 헝클어져 드리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찌뿌둥한 얼굴로 동혁에게 눈인사를 보내더니 울화에 짓무른듯 한 눈길을 진수에게 옮기며 걸그렁거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모욕받은줄 알고 왔나? 조롱하려고, 나의 희극적인 꼴을 즐기려고 왔겠지.》

《모욕이라니?》

진수는 성우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는듯 서가의 책들을 살피고있는 동혁을 곁눈으로 살피며 성우에게 반문했다.

《자넨 언제나 사건속에 있구만.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성우는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 하고 재여보는지 지루하게 입을 다물고있다가 두덜거렸다.

《저 망할 새끼들이 오늘 나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참, 우스워서… 나의 시집에 서울시장의 상인지 〈문화상〉인지 하는걸 주었단 말이야. 더러워서…》

《어이구, 상을 탔나? 그렇다면 뭐가 모욕인가. 아주 저명인사가 됐군그래.》

진수가 빈정거리자 성우는 두사람을 노려보았다. 상을 탄데 대해서 불쾌하게 여긴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는것이 화가 난 모양이다. 하기는 상을 받아온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안해였다. 자기가 표창자로 선정된것을 미리 안 성우는 시상식을 할 장소로 정해진 문화극장에는 가지도 않았다. 이날 극장에서는 문인, 예술인들과 함께 시상식보다 시상식후에 상영된다는 봉절영화에 더 관심을 가진 적지 않은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시상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여갔으나 회의집행부에 서울시장과 나란히 선 사회자가 염소목소리로 《다음은 시인 김성우씨에게 서울시장이 〈문화상〉을 수여하시겠습니다. 김성우씨, 어서 나오십시오!》 하고 선언했을 때 혼란이 생겼다. 김성우의 이름은 거듭 불리웠으나 대답이 있을리 없었다.

객석의 앞쪽에서 젊은 소설가가 사회자에게 빈정거렸다.

《김성우씨는 술집에 있을겁니다. 아까 누가 그러더라, 시상식에 가자고 하니까 더운밥 먹고 식은 소리 한다고 코웃음치면서…》

모두들 와자자 웃어대는 바람에 말끝은 흐려졌다. 여기저기서 김성우를 《걸작》이라고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이때 회의장의 뒤쪽에서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젊은 김성우의 부인이 모두의 시선을 끌며 앞으로 나가서 박수갈채속에서 서울시장이 주는 상을 받았다. 상을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시인의 안해는 남편으로부터 결혼이래 가장 심한 랭대를 받았다.

《이 친구가 정말 불이 났나? 그러지 말고 타온 상을 좀 보자구.》

진수가 다시 웃으면서 말하자 성우는 침대밑에서 옻칠을 한 넙적한 목갑통과 두툼한 지페뭉치를 발로 끌어냈다.

그러더니 진수와 동혁이 미처 그것을 살펴볼 여유도 주지 않고 도로 발뒤축으로 제자리에 차넣으며 밑빠진 헛웃음을 웃었다.

상처받은 허영심과 얄팍한 자존심의 발작으로만 보이는 성우의 이러한 태도는 동혁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비록 바라지 않던 표창이여서 특별한 만족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모욕이니 뭐니 하면서 이렇게 야단스레 구는것은 깊이가 없는 성격이 낳은 허세나 위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인의 괴벽스런 기질을 잘 알고있는 진수는 이 친구가 만약 우습강스러운 이 기질을 버린다면 오히려 싱거울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표창을 받은거야 자네의 작품들이 그자들의 비위에 맞았다는 증거지 뭔가. 인과응보야.》

《모르면서 뭘 자꾸 부아를 돋구는가?》

성우가 항의하며 기세를 올렸다.

《권력과 자본, 질서와 권위, 그 모든것에 경멸의 침을 뱉는 나의 작품들이 어떻게 그자들의 마음에 들수 있단 말인가? 반항과 애수는 나의 무기다. 나의 시는 반체제, 반생활, 반인간이다. 이 속박, 이따위 허위와 추악이 인간의 생활이라면 모든것이 차라리 원시에로,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는것이 낫다 그거야. 그런데 이 김성우가 그자들의 마음에 들수 있단 말인가? 천만에. 그놈들은 무지한 돼지들이니까 자기를 때리는 몽둥이에 표창하는 넌센스를 부렸단 말이야.》

성우는 자신이 뛰여난 반항시인인듯이 마구 위세를 부리더니 거치른 이발을 온통 드러낸채 얼굴을 내두르며 폭소를 터뜨렸다.

별반 친교도 없는 동혁에게는 놀랍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태도로 시인에게 표창으로 모욕을 받았다는 작품집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성우는 서가의 맨 웃단에서 시집을 집어내여 뽀얗게 앉은 먼지를 훅훅 불더니 제법 공손하게 넘겨주었다.

《빈집과 거미》라는 시집의 제목을 읽으며 동혁은 빙그레 웃었다.

《제목에서 어쩐지 악마주의의 먼 입김 같은것이 풍기는것 같군.》

시집을 뒤지며 동혁이 하는 소리였다.

《실례인지 모르겠는데 김형을 혹시 실존주의자나 그의 친척으로 보아도 좋을가요?》

성우는 반사적으로 자기를 방위하려는듯 벽에 자빠듬히 기대면서 거만하게 대답했다.

《실존주의 같은건 기저귀를 차고 두발걸음을 배우던 때에 벌써 졸업했소.》

《그럼 쇼펜하우어 같은건 어떻소? 아니면 모든 전통이나 도덕에 일제사격을 퍼부어대는 〈비트 제네레이션〉이나 영국의 〈노한 젊은이들〉은?》

《떠보지 마시오.》

성우는 손을 들어 허공을 베며 단언했다.

《질서와 모든 때묻은 개념들을 반대하는 나는 그 어떤 주의나 류파의 포로도 아니요. 나는 나를 확립한 비반복적인 김성우란 말이요!》

동혁은 다시 성우의 시집을 뒤졌다. 진수는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허탈과 애수에 그늘지고 일그러진 성우의 짜거운 몰골을 응시했다. 고민하는 시인에게 동정이 갔다. 능력과 자존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 누가 거꾸로 선 이 현실에서 고민하지 않으랴. 어느집 추녀아래에도 말 못하는 울화가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본심과 량심을 속이고 권세와 황금앞에서 서로 앞자리를 다투면서 네발걸음을 치고있다. 그리고는 혼자 있을 때나 잠자리에서는 량심의 채찍을 맞으며 자기를 개탄하고 저주하는것이다. 하기는 이 김성우라는 사나이는 그런 점에서는 깨끗한지 모른다. 뛰여난 재능을 갖고있으면서도 명예와 인기를 싫어하는 그는 신문사에서는 모든 기사를 잡담으로 매닥질하듯 써내깔렸으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나 오만스레 독설을 퍼부으며 곁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피를 쏟아 주조하듯 고심하여 창작한 작품들에는 떠들썩한 행동과는 정반대로 묘하게도 밤 3시의 어둡고 조용한 거리나 미풍도 없이 괴괴한 전야의 달밤같은 이상한 정적이 차있었다.

생활이 빠져달아난 그런 비현실적인 캄캄한 정적속에서 그는 기준도 지향도 없이 모든것을 저주하며 절망을 뿜어댔다. 자살하고싶다는 말을 여러번 진수에게 비친 그는 자기의 짤막한 형이상학적인 시를 읽으면서 울기도 하였으나 쉰살을 갓 넘은 아버지가 급병으로 사망했을 때는 먼 친척들까지 몰려들어 통곡하는 속에서도 눈물 한방울 흘릴수 없었다. 애수에 병든 그는 그 어떤 충격도 원색적인 의미로 순수하게 받아들일수 없었고 슬프면 끅끅 흐느끼며 우는 그런 《행복》도 누릴수 없는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막을 잘 아는 진수는 술이나 마시자는 성우의 제의를 물리치며 말했다.

《내가 아는바로는 넌 반항아도, 투사도 아닌 환자다. 친구로서 너의 시를 읽어왔지만 터놓고 말해서 읽기가 막 괴로왔다. 무의미한 신음소리다.》

성우는 꼬깃꼬깃해진 넥타이를 풀어 방구석에 던지는것이 여차하면 결투쯤 청할상싶은 꼴이였으나 진수는 맵짜게 말했다.

《너의 시가 압제자들에 대한 송가가 아니라는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폭탄으로 될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사회와 인간 일반에 대한 너의 허무의 노래는 부자들에게 자장가로 들릴지 모른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너의 시의 우울과 애수는 민중의 정신을 시들게 하는 독이란 말이다. 잘은 모른다만 생활이나 인간일반과 엇선 예술은 그자체가 해골이 아닐가. 리기적인 향락문화의 종점이지 뭔가! 성우, 안개를 뿜지 말고 불을 피워라! 너의 안개는 죄진자들에게 숨기가 편리하고 민중에게는 눈을 흐리게 한단 말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네가 서울시장의 상을 탄것이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어지간히 맵짠 비판을 남의 일을 관조하는것처럼 랭소를 짓고 듣고있던 성우는 여전히 자기 진지를 고수했다.

《그 정치론설같은 소리와 나의 시가 무슨 관계가 있나? 싹 걷어치우게!》

성우는 팔을 내저으며 소리를 지르더니 그때까지 시집을 뒤지고있던 동혁에게 말했다.

《좀 말해주시오. 강형도 나의 시를 안개로 보는지?》

동혁은 열적은 미소를 짓고있는 진수를 넘겨보더니 점잖게 말했다.

《글쎄, 어떻다고 할가요. 내가 알기로는 훌륭한 문학예술, 더 넓게 훌륭한 문화의 가치는 그것이 사회의 변혁과 정의를 위한 인간들의 투쟁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복무하는가 하는데 따라 평가된다고 보는데, 잘못 봤는지는 몰라도 김형의 시에는 창조적능력이 마비된 부르죠아지들의 신음소리 같은것이 느껴지거든요.》

동혁은 성우가 무엇에 찔린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는것을 보고서도 비판의 도수를 높여갔다.

《용서하시오. 당신을 환자라고 한 진수의 말에 나도 동감이요.

당신의 시는 일반의 모더니즘문학가운데서는 나은편이긴 하지만 역시 이 시집도 20세기의 타락한 서방문화가 인간의 창조적능력을 얼마나 마비시키는가 하는것을 립증하는데서는 례외가 아니라 그거예요.…》

여기서 진수가 다시 끼여들었다. 성우에게는 거칠게 굴어도 우정만은 변할수 없다고 믿는 그는 동혁의 말을 풀이하듯 이렇게 말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땅을 휩쓸어버린 병든 서방문화 특히 아메리카니즘은 옛날의 그 어떤 시대의 반동문화보다도 더욱 반인간적인 더러운 사이비문화란 말이야! 흔히 중세기를 암흑시기라고 하지. 인간본성에 대립되는 노예상태의 강요나 봉건의 절대권력이 그런거겠지. 한번 잡혀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길 없는 왕바위로 무어진 요새, 복종과 강제를 찬미하는 침울한 미학, 백성들의 피눈물우에 솟아오른 궁궐들과 대사찰들, 사회적침체우에 펼쳐진 고관대작들의 미친듯 한 춤놀이… 다 더럽지.

그러나 여보게, 그 시기엔 그래도 사람들에겐 루추한것이나마 아직 미처 정복되지 않은 소박하고 건강한 정신이 남아있었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어스레한 등잔불아래에는 마음의 보배도 있었고 아름다운 민요나 시적인 꿈도 있었거던. 요컨대 벌을 받아 육체적으로 손을 잘리운 농노도 정신은 소박하고 건강했거던. 그러나 어떤가. 20세기의 타락한 운명은 중세의 인간학대와 구속의 메카니즘을 더 확대하고 악질적으로 세련시킨데다가 뭐랄가, 아메리카니즘은 사람들의 정신속에까지 온통 타락의 병균을 쓸어넣었단 말이야. 덕분에 속을 다 파먹히우고 류행복을 걸친 허수아비들이 됐지!…》

진수는 너무 설교조로 말한것을 어색해하며 롱으로 끝을 맺으려했다.

《이런 점에서 시집 〈빈집과 거미〉의 저자도 하다못해 콩팥 같은거라도 갉아먹히운 바보가 아닌가 그 말이야.》

동혁도 성우도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러나 성우는 인차 낡은 침대가 마사질가싶도록 소란스레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채더니 벌떡 일어나며 히스테리적으로 소리쳤다.

《야-야, 듣기 싫다! 너의 그 리성과 진리가 딱 싫어죽겠다! 그래, 나는 환자다. 내 병이 무섭거든 썩 사라져라!》

그리고는 두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털썩 주저앉아 헉헉 가쁜숨을 쉬였다. 그럴수록 진수는 노여움을 누르고 푸접좋게 껄껄 웃으며 응수했다.

《내가 진리를 말했나? 그걸 인정한다면 화를 내야 멋인가?…》

오랜 침묵이 흘렀다. 머리를 떨구고 침대우에 반쯤 엎드려있던 성우는 마음속의 맹렬한 갈등이 내비친 혼란된 시선을 동혁에게 옮기며 물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떻다는거요?》

동혁은 일어나 어두운 창문밖을 내다보더니 돌아서서 창턱에 기대여서며 가라앉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해전에 동래온천에서 만난 한 광산기사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그 사람은 지난 전쟁때 〈국군〉 소대장으로 인민군의 포로가 되여 이북의 어느 산골마을에 가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이북사람들은 그 험한 전쟁환경에서도 그냥 노래를 부르더라는거요.》

이렇게 허두를 뗀 동혁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북에서 포로생활을 한 사병들은 고요한 밤이면 가까운 마을들에서 어른들과 소년들이 쉬지 않고 무슨 일인가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푸른 달빛이 가득한 꿈속같은 밤에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도 들려왔다. 포로들은 다채롭고도 락천적인 우아한 노래들을 들으며 외세의 강박에 못이겨 동족을 반대하는 전쟁에 끌려나온 자기들의 억울한 신세에 대하여, 동물적인 충동과 공포에 시달리여 헤매여다닌 불타는 전선길이며 페허로 변한 스산한 도시들과 촌락들을 생각하였으며 부서져 널린 옛 생활의 파편들우에 비친 자기들의 비참한 운명을 생각하였다.

포로들이 들은 북녘사람들의 노래는 정치적인 숭엄한 노래로부터 사랑에 대한 서정가요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상은 끝없이 다양하면서도 모두가 깊은 정신의 표현이거나 힘을 주고 마음을 정화해주는 밝은 노래들일뿐 타락이나 애수, 절망 따위를 주는 곡은 하나도 없었다. 필시 그런 예술과 문화를 량식으로 삼은 민중은 인간생활에서 겪게 되는 무서운 난관이나 시련속에서도 꺾이는 일없이 강한 탄력을 발휘할수 있을것이다.

생각에 잠긴 포로들은 남쪽에서 자기들이 배웠거나 들은 어둡고 어지러운 노래와 북의 노래를 대비해보고는 놀라운것을 발견했다. 요컨대 북의 노래와는 반대로 남쪽에서 부르는 노래는 리성과 사색을 무시한, 범죄행위를 추동하는 눈먼 저돌적인 노래들을 한 극으로 하고 다른 극단에는 병든 타락의 노래들과 그 아류들뿐이라는것을 알게 됐다.

몇해전에 동래온천에서 얻어들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한 동혁은 창가에서 천천히 오락가락하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그 광산기사의 결론이 흥미있거던. 뭔고 하니 죄많은 자본이 인간을 타고앉은 사회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색이나 선언은 탄압을 받는 대신 온순한 노예를 위한 타락과 숙명론은 박수를 받는다는거요.

여기에 무엇인가 교훈이 있다면, 어떤가요? 김형도 쉬운 언어로 민중의 지향과 꿈을 노래할수 없을가 하는 그건데…》

성우는 담배연기를 몰몰 피워올리며 숨결도 없이 앉아있었다.

몇마디 무의미한 말을 나눈 끝에 두사람은 성우와 작별했다.

성우는 진수와 동혁이 방에서 나갈 때도 앉은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발자국소리가 사라지자 그는 문제의 시집을 펼치고 급히 읽어내려갔다. 하더니 어두운 눈을 들고 혀를 깨물며 끙끙 신음소리를 냈다. 가치있는 교양서로, 반항의 무기로 여겼던 그 시집이 문득 한푼의 가치도 없는것으로 보였던것이다. 높은곳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렬을 지은 시행의 활자들은 악취풍기는 곤충의 무리로 변하여 전에는 신성불가침이였던 여백으로 지글지글 끓어대며 기여나가는것이 아닌가!

성우는 시집을 던지고 눈을 꽉 감았다. 진수와 동혁이 남긴 말마디들이 소리없는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지졌다. 동혁의 타이르는듯한 목소리가 밤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려왔다.

《김형의 시에는 창조적능력이 마비된 부르죠아지들의 신음소리 같은것이 느껴지거든요.》

그런가 하면 검은 수풀속에서 진수의 하얀 얼굴이 내다보며 소리친다.

《아메리카니즘은 사람들의 정신속에까지도 온통 타락의 병균을 쓸어넣었단 말이야. 덕분에 속을 파먹히우고 류행복을 걸친 허수아비들이 됐지.》

성우는 막연하게나마 그릇된 길에서 헛되이 정력을 써버린 허무감을 느꼈다. 무엇인가 어둠속에서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당거린다.

(반항아, 이단자의 영예, 얼마나 야심만만했던가!)

그는 자기 내면의 어스레한 부분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니야. 알맹이없는 개념의 껍데기들만 널린 이 길은 첫걸음부터 무엇인가 본성에 맞지 않고 꺼림직했지.

헛된 유혹의 포로가 되여 헤쳐온 길, 나아갈수록 생활도 세계도 뒤켠으로 빠져달아나고 괴괴한 정적만이 점점 압도해왔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 목청을 다해 피타게 불러보아도 사람들의 대답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없고 다만 통곡같은 내 목소리의 텅 빈 메아리만이 음산한 바람속에 되돌아왔지.

아, 이것이, 이 단절, 이 고립, 이 죽음이 나의 투쟁의 승리란 말인가?…)

성우는 캄캄한 밤에 험한 산속에서 길을 헛갈려 문득 깊이를 알수 없는 벼랑끝에 나선 환각을 느꼈다. 성우는 화김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자기의 허무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염증에 시달리는 그에게는 이제라도 새롭게 살면서 무엇인가 생명력이 넘친 아름다운 형상을 포옹하고싶은 갈망이 뜨거운 눈물처럼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충격일뿐 그는 여전히 자기의 낡은 진지에 엎드려있을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는 비록 매력이 떨어지고 의혹으로 금이 가고 짬이 벌려진 진지이긴 했으나 거기에 널린 모든것은 그의 손에 익은것이였고 그것을 가지고있어야 자기의 힘을 느낄수 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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