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6장 력사는 인멸되지 않는다 (1)


2


뻐스는 포장도로를 따라 달렸다. 상해에서부터 곤명을 거쳐 송산전역을 꿰질러 먄마의 만달라이와 통하는 비교적 넓은 산악도로였다.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이 도로를 《원장도로》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장개석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시기 수송로로 리용하였던 도로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했다. 그것이 정확한지는 알수 없으나 그 시기 중미련합군이 리용한 수송로라는것만은 명백하였다.

차창밖 눈아래로는 험준한 골짜기와 날벼랑이 끝날줄 모른다. 새로 낸 포장도로옆으로는 옛날 일본군대가 행진해가던 우불구불하고 어떤데는 뭉청 끊어져내린 낡은 도로가 아직도 제모습을 잃지 않고있었다.

지금 합동조사단은 운남성 보산시 룡릉현의 어느 한 마을에 살고있다는 리창조라는 중국인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가 바로 박순정이 이곳 송산에 있을 때 인연이 깊어진 사람들중의 한명이였다.

가던중 조사단일행은 일제가 구축했던 《우라야마진지》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몇채의 집들이 추녀를 잇대고 줄지어있는 자그마한 부락에도 들려보았다. 그곳에 박순정이 끌려가 치욕을 당하던 《위안소》가 있었댔다고 한다.

그곳에서 오래 산 로인들은 자동차차고처럼 칸칸을 널판자로 막고 한줄로 붙여지은 《위안소》가 8.15해방후 몇해동안은 그대로 있었다고 말하였다.

《위안소》자리는 강냉이밭으로 변해버린지 오랬다고 한다. 비록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박순정의 가슴속에 남은 치욕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곳에서 조사단성원들은 박순정의 증언과 부락의 몇몇 로인들의 말을 통하여 당시 《위안소》가 있던 자리가 《우라야마진지》구역안이였다는것을 정확히 확인하였다.

다시 길을 떠난 조사단일행은 부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기슭에 있는 큰 호수가에서 잠시 휴식을 하게 되였다.

뻐스에서 먼저 내린 중국측 조사단성원들이 펑퍼짐한 호수기슭에 길다란 깔개를 두줄로 펴놓고 거기에 준비해가지고 간 청량음료와 간식들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이름난 청도맥주병들이 나오고 바나나를 비롯한 남방과일들과 곤명의 특산물들도 나왔다.

일행은 박순정을 둘러싸고 앉았다. 아마 이번 현지편답기간 제일 즐거운 분위기인것 같았다.

호수기슭쪽에서 아이들이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런닝그바람에 볕에 그슬린 적동색의 작은 어깨들을 들썩거리며 걷어올린 바지가랭이도 내리우지 않은 마을의 조무래기들이였다. 한뼘씩이나 되는 푸들쩍거리는 메기를 버들가지에 주렁주렁 꿰들고 사기가 나서 깡충깡충 깨구막질하는 애들도 있었다. 애들은 조사단일행이 앉은 옆의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가는중이였다.

휘친거리는 낚시대를 어깨에 멘 그중 큰 아이의 두리에 벌떼처럼 모여붙어 지나가던 조무래기들은 웬 사람들인가 해서 머루알같은 눈들을 깜박거리였다.

아사꼬가 애들에게 손짓하며 과자봉지를 집어들었다.

《얘들아, 이리 온!》

진희도 아이들에게 사탕봉지를 쥐여주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은 정말 난처하게 번져졌다.

낚시대를 멘 큰 아이가 아사꼬의 말소리를 듣고는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불쑥 새된 소리를 내지르는것이 아닌가.

《르번 궈이즈(일본놈이다)!-》

아사꼬는 얼굴이 하얗게 되여 돌미륵처럼 굳어졌다.

당황해난 중국통역원처녀와 과진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그런게 아니라고 소리쳤으나 마이동풍이였다.

《르번 궈이- 즈!- 르번 궈이- 즈!-》

조무래기들은 입나발까지 불면서 아사꼬를 놀려대다가 새무리처럼 저 멀리로 달아나버렸다.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사꼬의 가슴을 세게 쥐여박은 《르번 궈이즈》라는 소리는 그의 귀전에서 한동안 메아리를 일으켰다.

뜻밖의 봉변을 당한 아사꼬는 가슴이 아파났다.

부모들에게서 《천하에 악독한 일본군》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저 어린것들의 눈앞에 일본사람인 내가 갑자기 비껴들었으니 그럴수밖에… 악을 심으면 재앙이 열린다는 말이 그른데가 하나도 없어.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수가 없는 일이지. 어쩌겠는가. 옛날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에 가서 종종 당하게 되는 이런 저주와 타매를 묵묵히 받아들이는것외에 다른 방도는 없지 않는가. 정말 가슴이 아프다. 저 철모르는것들의 눈에조차 《반성을 모르는 일본놈》으로 비껴들지 않으면 안되는 이 가슴아픈 일은 무엇때문에 계속되여야 하며 또 누구때문이란 말인가! 아-

아사꼬는 지금 죄많은 부모를 둔 《덕》에 가는 곳마다에서 화를 당하는 자식의 심정이였다. 방금 있은 일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쓰려와 견딜수가 없었다.

아사꼬는 어떻게 하나 마음을 달래보자고 호수기슭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수풀을 헤치며 한자욱두자욱 옮길적마다 등때기가 얼룩덜룩한 개구리들이 퉁방울같은 눈알을 데룩거리다가 물속으로 첨벙- 첨벙- 뛰여들었다. 첨벙- 첨벙- 하는 소리가 아사꼬의 귀전에서 또다시 《르번 궈이- 즈-》 하는 메아리를 일으켰다.

중국측의 몇몇 성원들과 통역원이 아사꼬에게로 다가와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나 그의 마음은 더 심란해만졌다.

조사단일행은 다시 뻐스에 올라 리창조로인이 살고있는 마을로 향했다.

오불꼬불한 농촌길을 따라 한동안 달리던 뻐스는 어느 한 농촌마을의 한 농가앞에 멎어섰다.

일행은 박순정을 앞세우고 머리가 허연 로인과 여러명의 자손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서성거리는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통보를 받은 리창조로인과 그 집안사람들이 대문앞에 마중을 나와있었다.

녀의사와 김진희의 부축을 받아 비척거리며 대문앞까지 간 박순정은 마중나온 사람들을 일별하다가 머리가 허연 로인을 여겨보았다.

《아, 아, 이…이게 누구요? 리창조! …어이구, 세월두 참, 이제는 머리가 하얀 신선이 됐구만. 내… 내가 〈와까하루〉라 부르던 박순정이요. 박순정이…》

얼굴이 길쑴한 리창조도 순정의 손을 붙들고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했다.

《그래, 그래. 박순정이. 내 알구말구… 온다는 기별을 받고 이렇게… 어허, 상기두 그때 모색은 좀 남았구만. 당신도 백발이 다 됐소그려.…》

두 로인은 집마당가의 나무그늘밑에 놓인 참대의자에 마주앉아 회포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박순정은 리창조를 만난것이 너무도 꿈만 같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창조는 박순정의 얼굴을 여겨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젠 퍼그나 늙었구만.》

《난 벌써 여든이 거의다 되였소. 당신은?》

《여든? 세월은 빠르긴 빨라. 하긴 나도 벌써 일흔을 넘겼으니까. 그때로부터 어느새 거의 예순해가 훌떡 지나갔구만.》

《그래 그사이 어떻게 지냈소?》

《나야 로친네랑 함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까지 거느리고 보다싶이 이런 집에서 살고있소. 터밭이나 가꾸고 집짐승도 끌고 다니면서… 그래 당신은?》

이렇게 묻고난 리창조는 혹시 박순정의 아픈데를 다쳐놓지나 않았나 해서 마음을 바재이였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활달한 박순정은 《나두 근심걱정없이 살고있다오. 자식낳이는 못했어도 무던한 양아들의 부양을 받으며 손자, 손녀에다 얼마전에는 증손녀까지 보았다오.》 하고는 소리내여 웃었다.

리창조도 웃음을 지으며 응대했다.

《증손녀까지 보았다니 즐거움이 크겠소. 허허… 그런데 참, 당신은 80이 다된 고령의 그 나이에 용케도 예까지 왔소.》

《아, 나이가 많다고 꼭 와봐야 할데도 못 온다는 법이야 없지않소. 그래서 용기를 내서 예까지 왔소.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당신도 만나보자고 말이요. …이번에 남경에도 들렸다가 여기로 왔는데 와보니 죽지 말고 이런 길을 많이 걸어야 하겠다는 생각만 자꾸 하게 되오.》

《그럴테지요.》

리창조는 박순정의 속마음을 제꺽 넘겨짚고 부드러운 말로 정황에 맞게 응수해주었다.

무량한 감회속에서 재회를 하는 두 늙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사단성원들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


저녁에 곤명호텔의 크지 않은 방에서 박순정과 리창조를 위한 간단한 연회가 있었다. 3개국조사단의 공동명의로 차린것이였다.

연회탁앞쪽 가운데는 2명의 로인들이 앉고 그 주위에 합동조사단성원들이 빙 둘러앉았다.

먼저 년로한 늙은이들이 이번 3개국 합동조사사업의 성과를 위해 발벗고 나서준데 대해 각국 조사단 단장들의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발언들이 있은 다음 로인들의 건강을 바라며 잔을 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된 연회가 거의 끝나갈무렵이였다.

박순정과 리창조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아사꼬가 맑은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들고 리창조에게로 다가갔다. 중국통역원처녀가 인차 따라섰다.

아사꼬는 리창조앞에 머리를 숙이며 잔을 권했다.

《리상, 부디 건강하여 장수하세요.》

《고맙소. 법률가선생도 건강하여 지금 하는것과 같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 바라오.》

리창조도 아사꼬에게 한잔 권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모아졌다.

아사꼬는 리창조가 부어준 포도주를 내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장소에서 조사를 한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

《리상, 전번에 물을가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그렇소? 그럼 어서 묻소.》

《전번에 우리가 리상의 댁을 방문했을 때 박상과 마주앉아 회포를 나누던 당신이 옛날 〈우라야마진지〉에 있던 건물들과 그때 겪은 일들에 대해 간단간단히 이야기하는것을 들었습니다. 그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리상의 기억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박상도 당신을 보고 기억력이 젊은 시절이나 다름없다고 칭찬하던데…》

리창조가 손을 휘휘 내둘렀다.

《아니, 아니. 내가 무슨… 그때 일본군대가 틀고앉았던 송산의 〈우라야마진지〉안에 있던 마구간에서 고역을 치르면서 당한 일들이 너무도 뼈에 사무쳐 그런걸 아직까지 기억하고있는거지요. 그리고 거기로 드나들던 일본장교들과 병졸들의 이름 같은거나 좀…》

아사꼬는 리창조가 일본군병졸들의 이름도 좀 기억하고있다는 소리에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가 이번 현지조사를 떠나기 전날에 오빠 히로미에게서 《난 송산에 있던 〈우라야마진지〉에 있다가 그곁에 있는 〈요꼬마따진지〉에서 중미련합군에 포로되였다.》라는 말을 들었던것이다.

리창조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은 아사꼬가 나직이 물었다.

《혹시 그때 일본병들속에 있던 오따니 히로미라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나이가 리상과 비슷합니다.》

《오따니 히로미?》

미간을 쪼프렸다가 펴면서 한참 생각을 굴리던 리창조가 환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옳아! 그래, 그래. 히로미!- 일본군수비대 중대장의 련락병을 하던 나보다 한살우인 초년병! 맞았어. 히로미야! 지금 저기 과진량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박순정이도 기억할거웨다.》

아사꼬는 깜짝 놀랐다. 머리가 허연 이 중국로인의 기억속에 히로미오빠가 자리잡고있는줄은 꿈에도 몰랐기때문이였다. 오빠의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부터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시작하였다.

(아, 아- 그랬댔구나! 이제는 모든것을 다 파헤칠 때가 되였다!)

하지만 아사꼬는 그 좌석에서 오빠에 대한 말을 들려줄것을 요구할수가 없었다. 리창조가 박순정과 다른 화제를 꺼내놓고 즐거운 분위기속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던것이다. 보다는 이런 연회장에서 조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는것은 례의에 좀 어긋나는 일이기때문이였다.

아사꼬는 히로미오빠와 관련된 이야기는 후날 듣기로 작정하고 자기 자리에 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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