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제6장 력사는 인멸되지 않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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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에서 현지조사를 일단 마무리한 3개국합동조사단은 비행기를 타고 운남성의 곤명으로 향했다.

기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운남성은 온통 굵은 산줄기로 짠 하나의 큰 고기그물같았다. 히말라야산줄기에서 겹겹으로 뻗어내려 장관을 펼친 험준한 산발들과 협곡들, 덩지큰 산들로 뒤섞인 운남지역은 보기 드문 고산지대였다.

운남성의 소재지 곤명도 전형적인 고원지대였다. 그러나 해발고는 높은 반면에 열대지방을 가까이 하고 호수까지 끼고있어 기후는 매우 온화하였다.

곤명은 베이징이나 남경과는 달리 잎이 넓은 남방식물들이 이채로운 풍치를 드러내는 우아한 분위기의 도시였다.

일행은 곤명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뻐스를 타고 박순정이 마지막으로 끌려가 치욕을 당한 먄마와 린접한 지역으로 갔다. 당시 사람들은 그 일대에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송산이라고 불렀다.

이 지대는 티베트에서 시작되여 운남성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는 노강의 서쪽에 위치하고있었다.

태평양전쟁사를 놓고볼 때 바로 이곳 송산과 등충을 중심으로 한 중국 전서지역에서 벌어진 일본군 대 중미련합군의 싸움은 그 어느전선 못지 않게 치렬하였다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중국사람들속에서도 잘 아는 사람이 많지 못했다.

합동조사단은 이 전역에 찍혀진 박순정의 행적을 기본으로 조사를 심화시키면서 력사의 구름속에 가리워진 중국 전서지역의 전장들을 구체적으로 편답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제는 이 송산일대에 먄마방면군 제15군산하 제56사단의 보병 제113련대와 제56야포련대 3대대 그리고 이러저러한 잔여세력으로 수비대를 조직하고 주요수송로를 장악하고있었다. 린접한 등충에도 제56사단 제148련대를 핵심으로 수비대를 조직하고 서로 협동하여 중미련합군의 행동을 견제하도록 작전을 펴고있었다. 두 수비대의 인원을 합치면 근 5 000명에 달했다.

이렇게 먄마에서 중경으로 통하는 외통로를 장악한 일본군은 2년남짓한 기간 이 일대에 《마쯔야마진지》, 《니시야마진지》, 《요꼬마따진지》, 《우라야마진지》 등 여러개의 크고작은 진지들을 구축해놓았다. 등충현성안에도 곳곳에 든든한 포대들을 쌓아놓고 거기로부터 운남-먄마도로상의 요충지들에 있는 여러 영구진지들을 련결하는 지하구조물까지 굴설해놓았다. 그리고는 밀물에 꺽저기 뛰듯하면서 요새화된 이 일대를 난공불락의 《동방의 지브롤터》라고 호언장담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벌린 그 놀음은 무당판에 헛돈질에 불과했다. 그때 이 진지들은 4만 8 000여명에 달하는 중미련합군앞에서 100여일만에 물먹은 담벽이 되였던것이다. 그런즉 100여일이라는 기간에 이 《동방의 지브롤터》가 도꾜의 지요다구에 있는 야스구니진쟈에 거주하게 될 령혼들을 수없이 낳은 하나의 큰 《산원》으로 전환된셈이다.

그때 이 치렬한 격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력량은 얼마안되는 일본군포로들과 총포탄이 튀는 전호에까지 끌려갔던 수십여명의 성노예들뿐이였는데 그속에 박순정이 끼여있었던것이다.

조사단일행은 송산일대에 대한 현지편답에 특별히 모를 박았다. 그것은 아직까지 태평양전쟁을 기록한 사진화면들은 많이 나왔지만 태평양전쟁사에서 하나의 열점으로 인정되는 이곳 격전과 관련된 사실이 공개된것이 극히 드물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다가 이제 곧 세상을 크게 놀래우게 될 《성노예생존자의 현지확인》이라는 미증유의 특별뉴스가 바로 여기에서 엮어진다는 사정은 합동조사단 성원들로 하여금 마음의 촉수를 더욱 곤두세우게 했던것이다.

녀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노강이 내려다보이는 말잔등같은 산마루에 올라선 박순정의 눈가에서는 추연한 빛이 떠날줄 몰랐다.

격전의 흔적이 력력히 남아있는 진지아래 험한 계곡으로 백룡이 꾸불럭거리듯 사품쳐 흐르는 노강의 물결우에는 아직도 그날의 피맺힌 사연이 실려있는것만 같았다.

그우로 가로 걸린 외통로 쇠바줄다리인 혜통교의 교각구조물들마다에도 그날의 포연이 슴배여있는듯 했다.

곤명에서 산다는 중국측의 력사학자 과진량이 옛 전장들을 답사하는 조사단성원들에게 당시의 격전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지탱하고있던 《요꼬마따진지》에 몰켜들어 끌고다니던 성노예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집단적으로 학살한데 대하여 력점을 박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격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일본군장교 요시다께가 그때의 정황을 말하면서 우리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성노예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졌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아사꼬가 박순정에게 물었다.

《그럼 그때 박상도 그속에 있었겠는데 어떻게…》

박순정은 기억을 더듬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은 아마 내가 방공호에서 도망쳐나온 후에 있은 일 같구만. 난 그때 송산에서 다시 만났던 백화자와 함께 방공호입구옆에 앉아있었댔소. 일본군이 군기를 불태워버렸다는 말을 듣고 이젠 일본군이 완전히 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소. 그러다가 백화자랑 몇몇이 함께 방공호에서 뛰쳐나왔소. 그때 산경사지를 따라 수무천이 흐르는 골짜기로 내뛰는데 뒤에서 〈쾅- 콰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소.》

아사꼬는 무슨 말인가 더 물으려다가 생각을 돌리였다.

히로미오빠도 바로 여기 《요꼬마따진지》에서 격전을 벌리다가 중미련합군에 포로되였다고 했지. 그럼 그도 그때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겠는데 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지 않았을가?

아사꼬는 전홍을 뒤에 달고 당시 진지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교통호들을 돌아보면서 곳곳에 설치했던 화점자리들을 살펴보았다.

전홍의 어깨우에 올려놓은 촬영기는 성노예의 력사를 캐내는 착암기라도 된듯 쉼없이 돌아갔다.

교통호속에서는 이젠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고있었다. 어떤데는 발을 들여놓을수 없게 숲덤불이 꽉 덮이여있었다. 바닥은 흙과 락엽이 쌓이고쌓여 무릎노리나 겨우 가리울만치 얕아졌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봉우리부근에는 아직도 목까지 잠기는 전호가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확연히 알리는 포탄구뎅이들도 곳곳에 보였다.

그 주변에는 마지막으로 피여난 연분홍패랭이꽃들이 드문드문 깔려있었다.

아사꼬에게는 그 패랭이꽃들이 무심히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천황》페하를 위해 《옥쇄》한 《황군》장병들을 추모하고있는것 같기도 하고 끝끝내 일본군진지를 함락시킨 중미련합군군인들을 축하해주는것 같기도 했다. 혹은 수천수만리를 일본군에게 끌려다니면서 온갖 치욕을 다 당하다가 이역땅에서 무주고혼이 된 성노예녀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애써 진한 향기를 풍기는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옛 격전장에서 보게 된 패랭이꽃은 아사꼬에게 서글픔을 더 자아냈다.

황정식도 김진희와 몇몇 조사단성원들과 함께 당시 일본군수비대가 마지막은페부로 삼았을상싶은 널다란 방공호안에 들어섰다.

콩크리트를 친 웃뚜껑이 아직도 예대로인 방공호입구는 폭탄에 맞았는지 포탄에 맞았는지 한쪽귀퉁이가 허양 무너져내렸다. 벌그스름한 석비레가 깔려있는 방공호바닥에는 움푹움푹 구뎅이가 패워져있고 거기에는 솔검불과 넝마쪼박같은 헝겊따위들, 깨여진 가마뚜껑, 헌신발짝 같은것들이 아직도 나딩굴고있었다.

방공호 제일 안쪽에는 오물 같은것들이 무드기 쌓여있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거기에 감빛노란색을 띤 닭알버섯이 한벌 쭉 덮여있었다. 거멓게 그슬린 벽체에 파편자리가 수두룩했다. 아마 성노예들을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렸을 때 난 자국같았다.

《진희동무, 이 방공호안의것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사진으로 찍어두오.》

《네.》

진희는 불행한 성노예희생자들의 피가 슴배인, 마마자국같은 흠집이 다닥다닥한 방공호벽체며 천정, 바닥에 사진기렌즈를 돌려대고 연방 샤타를 눌렀다. 사진기에 달린 조명기가 분노한듯 펑긋- 펑긋- 퍼런 불꽃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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