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3장 남경으로 가는 렬차에서


1


11월 중순이였다. 립동이 지난 이맘때이면 조선이나 중국의 동북지방 같은데서는 산과 들에 락엽이 와슬랑거리고 살을 콕콕 찌르는 찬바람이 머리를 쳐드는 초겨울이다. 그러나 중국의 동남지방은 달랐다. 아직은 겨울이 멀리에서 어스벙거리는 여름이나 같았다.

베이징을 지나고 황하를 건너 정주땅에 들어서서부터는 도시의 가로수들은 물론 드넓은 초원과 저 멀리로 흘러가는 산발들에는 푸른빛이 더욱 두드러진다. 기차길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숲덤불속에서는 이름모를 꽃들이 아직도 고개를 잔뜩 쳐들고있다. 차창밖으로 언뜻언뜻 지나치는 삿갓을 쓰고 멜대를 어깨에 걸친 중국농민들의 모습도 이채롭다.

김진희는 렬차침대칸 복도에 나와 거의 30분나마 서성대고있었다.

반쯤 들어올린 차창을 가로지른 하얀 안전대우에 두팔을 포개여놓고 그우에 턱을 댄 진희는 지금 창밖으로 미끄러져가는 대자연에만 마음을 쏟는것 같지 않다.

어찌 보면 까치알같이 주근깨가 다문다문한 동그스름한 두볼, 그사이에 균형맞게 오똑 선 코날우에는 바람을 안은 몇오리의 앞머리칼이 착 달라붙어있었다. 함함한 옆머리카락은 사색의 꾸리를 풀어던지듯 쉼없이 나붓긴다. 우에 걸친 브라우스는 등쪽으로 불룩한 공기주머니를 만들어놓았다. 마치 그속에 그 무슨 생각이 팽팽하게 들어찬것만 같다. 서느러운 바람결에 간지럼을 타는 가느스름한 두눈에 추연한 빛이 력연하다. 30대의 녀성치고는 눈귀에 잔주름이 많은편이다.

《아직도 할머니생각이요?》

옆침대칸에서 문을 열고 나서던 황정식이 사람좋게 웃으며 던지는 말이다.

《아이, 황동지!》

《허, 이러단 우리 진희동무가 렬차칸에서 눈 한번 붙여보질 못하겠소.》

《전 피곤하지 않습니다.》

《저런, 거짓말쟁이같으니라구. 밤새 제대로 누워보지도 못했다고 하던데?》

실지 그랬다. 렬차에 오른 때로부터 의사선생과 함께 이번 현지조사에 동행하는 박순정의 시중을 드느라 언제 자리에 앉아볼새가 없은 진희였던것이다.

《좋소, 피곤하지 않다면 우리 이야기나 좀 해볼가?》

황정식은 김진희를 데리고 자기 침대칸쪽으로 향했다.

진희는 황정식의 뒤모습을 여겨보았다. 50대 중반을 넘긴 사람치고는 더없이 단단했다. 숱많은 뒤머리에 희끗희끗한것이 유표했지만 근육이 불뚝불뚝한 육체는 체육선수를 찜쪄먹을 정도였다.

황정식은 으드득 소리가 나게 몸통운동을 하고나서 침대칸문을 가볍게 열어제꼈다.

웃단침대에서는 달그락거리는 렬차바퀴소리에 박자를 맞춘 드르릉- 드르릉- 코고는 소리와 푸- 푸- 하는 입바람소리까지 뒤섞여 들린다. 함께 가는 남성동무들이였다.

김진희는 앞쪽 두칸건너에 자리를 잡았는데 지금 거기에는 박순정과 적십자종합병원의 녀의사가 함께 들어있었다.

베이징발 상해행 렬차에 탄 이들이 바로 이번에 일본군성노예범죄를 파헤치는 3개국합동조사단에 망라된 조선측 조사단성원들이다.

황정식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측 조사단은 닷새전에 평양을 떠나 베이징에서 일을 보고 지금 남경으로 가고있는중이였다.

중국측 조사단과 일본측 조사단은 어제 남경에 먼저 도착하였다고 한다. 기본조사는 남경에서부터 시작하기로 약속했던것이다.

김진희는 황정식과 마주앉았다.

차창아래 탁우에는 황정식이 좀전까지 들여다보던 중국 서남부지역 지도가 접혀져있다. 그가 앉은쪽 침대우에는 일본군성노예제도와 관련한 각종 자료들이 들어있는 소형트렁크가 놓여있다. 그속에는 황정식의 고심이 어린, 보풀이 일고 색이 바랜 《박순정의 증언자료》라는 두툼한 문건철도 있다.

김진희가 말했다.

《저더러 쉬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황동지는 더 무리하시는것 같군요.》

《어깨가 무거워지는구만. 난 력사전문가는 아니지만 력사란 거짓을 모른다고 하지 않소.… 강물이 아무리 흘러도 돌은 남는 법이거던. 그래서 남경과 송산일대의 지형지물을 료해하면서 일제가 강점했던 시기의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해보는중이요. 그리고 지역에 따르는 당대 시대상 같은것도 연구해보고… 그럴수록 인간이 상상할수 없는 그런 행위도 서슴지 않은 후안무치한 야수들이고 호색광들인 일제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격만이 끓어오를뿐이요. 참, 진희동무네 할머니의 제사날이 11월 며칠이더라?》

《바로 오늘, 11월 16일이 할머니의 3년상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일을 맡고 이곳 중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금까지도 자꾸 할머니생각이…》

《음, 그럴게요. 참 강직하고 대바른 할머니였지. 좀더 오래 앉아계셨더라면 진희동무가 세계면전에서 일본군성노예제도의 진상을 발가놓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마음상으로나마 조금이라도 시름을 덜수가 있었겠는데…》

황정식의 말에 진희는 격정을 억누를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렬차도 억이 막힌듯 뿡- 하고 기적소리를 높이 내지르며 남경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린다.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몸부림치는 진희의 눈앞에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던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얼른거렸다.

진희네 할머니는 마음이 비단결같아 마을에서 《우리 할머니》로 통했다.

그런 반면에 불의앞에서는 눈을 감거나 물러선적이 없고 대범하기도 하여 사람들은 그 할머닌 대쪽같은분이였다고 두고두고 외운다.

황정식으로 말하면 누구보다 진희네 할머니를 잘 아는 사람이였다.

8년전 김진희가 대학졸업반때 있은 일이다.

그때가 바로 일본군의 성노예범죄가 국제적으로 문제시되고 그것으로 하여 일본정부가 인류량심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남조선에서 사는 김학순이라는 일본군성노예피해자녀성이 1991년8월 일본정부를 상대로 공식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여 일본 도꾜지방법원에 제소한것을 계기로 북과 남의 곳곳에서 일본군성노예생존자들이 주먹을 쳐들었다. 중국과 네데를란드의 성노예피해자들도 이때부터 특대형의 반인륜적범죄를 감행하고서도 시치미를 따고있는 일본정부를 국제법정에 끌어내기 위한 투쟁에 발벗고 나섰다. 제소자들의 심리는 하나같이 자기들의 치욕에 찬 과거가 세상에 공개되는 한이 있더라도 철면피한 일본정부가 오도하려는 그 력사를 기어이 바로잡아야 하겠다는것이였다. 그런 소식이 신문과 텔레비죤방송으로 매일같이 방영되고있었다.

김진희네 할머니 김옥녀도 그무렵인 1992년 5월에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로 찾아가 《나도 옛날 일본군성노예였소.》라고 말하고 자기가 함경북도 경흥군 청학(당시)이라는데 있던 일본군병영에서 치욕을 당한 과거지사를 다 까밝혔다. 그러면서 자기가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공개청문회에서 증언할수 있도록 해주며 일본정부를 국제재판에 제소해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때 황정식이 법률가로서 김옥녀의 국제공개청문회참가를 위한 실무사업을 맡아하였던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희네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대학생이였던 진희는 물론 가족들도 할머니가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 뜻밖의 사실앞에서 아연해졌다.

집식구들은 자기네 할머니가 수치스러운 그런 일을 당한 녀성이였다는 랑패감으로부터 황정식이 집에 오는것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때처럼 진희네 집안공기가 무거워진 때는 없었다.

황정식이 그해말 일본 도꾜에서 열리는 일본의 전후배상을 요구하는 국제공개청문회에 김옥녀로인을 참가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진희네집을 찾았던 날에도 집안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날 진희는 대학생복을 입은채로 웃방 책상앞에 앉아 깍지낀 두손을 턱밑에 고인채 생각을 굴리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불었다.

이제 동네사람들이 부끄러워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닐가.… 할머니가 국제공개청문회 연단에 나서면 모든 일이 학급동무들과 선생님들에게도 다 알려질텐데… 아!-

진희네 아버지, 어머니도 할머니를 국제공개청문회에 내세우는것을 처음에는 반대하였다.

시원림사업소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하는 진희의 아버지는 황정식과 마주앉아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선생,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저의 어머니는 여태 속에 재를 안고 산 병약한 늙은이가 아닙니까.… 물론 지금 일본쪽발이들이 놀아대는 꼴을 보면 이가 갈리고… 또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공개청문회에 가서 일제의 죄행을 낱낱이 까밝히는건 백번 옳은 일이지요. 하지만 너무도 쇠약한 늙은이의 심장이 꽤 견디여내겠는지…》

진희네 어머니는 딱 잘라맸다.

《안돼요. 우리 어머니의 심장이 그걸 감당해내지 못해요. 설사 별일없이 갔다온다고 해도 그 어진 늙은이가 그 다음부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볼수 있겠나요. 난 우리 어머니를 절대로 못 보내겠어요.》

황정식은 그날 침울한 기색을 짓고 아무 대답도 할수가 없었다. 애꿎은 담배하고만 해보았다.

그때 청원을 제기한 당사자인 본인이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날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졌을는지 모른다.

《여길 좀 봐라, 애비에미야. 그러면 못쓴다. 일본군성노예문제가 어찌 나 하나에만 한한 일이겠냐. 우리 나라에서만도 적게 잡아서 20만이라더라.… 생각들을 좀 해봐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죄다 그 쪽발이들의 피해를 받은 가정들이고 그런 가문의 후손들이야. 그런데도 그 망할 놈의 일본쪽발이들이 그냥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 집안망신이라고 해서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입에 빗장을 지르고있어야 옳겠냐? 애애비도 그렇지, 누구보다 나라의 혜택을 많이 받으며 자라온 네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옹졸한 생각을 가지면 타일러줘야 할텐데 도리여 제 에미신상을 먼저 생각하면서 안사람과 맞장구를 치다니…

난 이번에 황선생이랑 같이 일본 도꾜에 가서 기어코 그 죄많은 일본쪽발이들과 해봐야 하겠다. 가다가 숨이 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되여 김옥녀는 일본의 전후배상을 요구하는 도꾜국제청문회 연단에 나서게 되였다.

그가 증언을 마치자 남조선에서 온 여러명의 일본군성노예생존자들이 연단으로 달려올라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바다를 펼쳐놓았다. 그러면서 일본정부를 국제재판에 회부할것을 주장해나섰다.

김옥녀는 세계 각국에서 온 회의참가자들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어놓았을뿐아니라 일본군의 성노예제도가 없었다고 발뺌질을 하는 일본정부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갈겨놓았다.

이때로부터 조선의 북과 남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범죄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및 력사적책임인정과 배상을 요구하는 열기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후 진희네 가족은 물론이고 김옥녀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일본쪽발이들이 사죄하고 배상하는 날까지 오래오래 앉아계시라고 진심으로 위로하였다.

그러던 김옥녀는 세해전 가슴에 한을 품은채 운명하였다.

진희가 대학을 졸업한 후 력사연구소에 들어가 조일관계사를 연구하면서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일군으로 된것도, 이번에 박순정이 동행한 3개국합동조사단에 망라되여 남경으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은것도 바로 이런 연고로부터 시작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황정식은 따뜻한 눈길로 김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젠 진희동무도 좀 쉬오. 얼마 안 있어 남경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현지조사에 착수해야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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