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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1일

평양시간


제 9 회


제2장 용단


5


밝은 해빛이 호실창턱을 발볌발볌 넘어서고있었다.

창턱우에는 몇마리의 공작어가 들어있는 네모난 어항과 알로에가 자라는 둥그런 사기화분이 보기 좋게 놓여있었다. 공작어들이 춤추며 돌아가는 어항에 반사되는 해빛이 호실천정우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희한한 무늬를 짜놓는다.

창밖 정원의 끼끗하고 일매진 은행나무들의 탐스러운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박순정의 눈길이 창턱의 화분에 가멎었다. 살진 싱싱한 잎사귀들을 쭉쭉 내뻗친 알로에가 힘있게 뿌리박은 화분은 매우 이채로와보이였다.

순정은 탁자우에 놓인 물병을 들고 화분있는데로 다가갔다. 화분에 물을 주며 보니 밑둥에서 엄지줄기 좌우켠에 착 달라붙은 두개의 새끼알로에가 세모뿔을 가진 연청색의 머리를 쏙쏙 내밀고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순정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물을 솔솔 부어 새끼알로에의 잎사귀에 덮씌워진 흙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잠시후 어항속을 들여다보던 순정은 느슨히 웃으며 《에이구, 고기도 새끼를 낳는군.》 하고 기뻐 중얼거렸다. 엄지손가락보다 좀 작은 알락달락한 공작어가 부채살같은 지느러미와 꼬리를 나풀거리며 몸뚱이를 구불떡거릴적마다 밑으로 바늘귀보다 조금 더 큰 새끼들이 톨랑톨랑 삐여져나왔다. 깜찍하기란 이를데없었다.

박순정이 어항속의 공작어를 바라보며 웃고있는데 호실문이 열리더니 김진희가 들어섰다. 거의나 매일같이 병원에 들리군 하는 그였다.

《할머니,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어이구, 연구사선생인가? 이젠 다 나았소. 아, 시간도 바쁠텐데 뭘 자꾸…》

《아이, 할머닌 오늘 기분이 참 좋으신가보군요.》

《그래, 그래. 내 지금 참 재미있는걸 보고있는중이야.》

《?》

《연구사선생, 이것들을 좀 보라구. 이런것들두 제 새끼를 남기느라구 이렇게…》

박순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서글픈데가 있었다.

진희는 그가 가리키는 화분과 어항속을 들여다보았다. 생명체인 알로에나 공작어가 본능적으로 후대를 남기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여서 여느때 같으면 별치 않게 보았을것이다. 하지만 이 시각 그것을 목격한 진희는 일순 전신이 짜릿해나는것을 느꼈다.

아!- 할머닌 지금 이것들을 보고 겉으로는 웃고있지만 속에서는… 진희는 가슴이 아파났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내비칠수가 없었다.

진희는 꾸려가지고 간 비닐구럭속에서 보온국통과 밥그릇을 꺼냈다.

《할머니, 식기전에 이걸 좀 들어보세요. 메기탕입니다.》

순정은 두손을 내흔들면서 사양하였다.

《어이구, 뭘 자꾸 해오느라고 그러는지… 저 탁자밑에도 그저께 이 할미를 찾아왔던 맏손녀사위가 가져온 음식들이 상기도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 제가 해온건데 드셔야지요. 그래야 제 마음도 좋고 할머니의 몸도 빨리 추서고…》

진희는 보온국통에서 김이 문문 나는 메기탕을 국사발에 옮겨담고 오이김치랑 먹음직스러운 찬들도 꺼내놓았다.

아침밥을 몇숟갈 뜨지 않은 순정이라 메기탕을 달게 들었다.

《참, 맛있게 먹었소. 별맛이야. 그런데 평양에도 이런 메기가 있나?》

《할머니,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군대를 동원시켜 일떠세워주신 메기공장에서 지금 메기가 꽝꽝 쏟아져나온다질 않습니까.》

박순정은 놀란 눈길로 진희를 쳐다보았다.

《원, 저런. 메기를 만드는 공장? 그런 공장두 있나?》

순정은 메기공장이라고 하니 거기에서 메기를 사탕, 과자 같은것을 만들어내듯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허 참, 처음 듣는 소리다. 메기를 공장에서 만들다니… 순정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진희는 순정의 손을 꼭 잡고 소리내여 웃으며 볼우물을 곱게 팠다.

《호호호… 할머니, 메기공장이라는건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내는 두부공장 같은데가 아니라 널직한 건물안에 있는 양어못들에서 메기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도 깨우고 빨리빨리 키워내는데야요.》

《오, 그래?… 그런걸 난 또…》

순정은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는 아직 처녀티가 완전히 바래지 않은 진희를 미덥게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말 한마디를 해도 부드러운 인정미가 느껴지는 진희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면 순정은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그앞에서는 속에 품고있던 말도 스스럼없이 꺼내놓는 순정이였다.

진희는 매번 면회를 와서 그랬듯이 순정의 어깨와 목부위를 살살 주무르면서 가볍게 안마를 시작하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친딸같은 진희에게 몸을 푹 맡긴 순정은 피기가 다 빠진 주글주글한 볼편을 맥없이 실룩거리면서 두눈을 꾹 내리감았다.

부지런히 안마를 하던 진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놀리던 손을 멈추고 그의 얼굴앞으로 자기 얼굴을 바투 가져다 대며 나직이 물었다.

《할머니, 할머닌 지금도 일본쪽발이들에게서 당한 옛날일을 생각하면서 속을 쓰시나요?》

순정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진희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의 쑥 우무러든 눈확에서는 물기가 번뜩이였다.

진희가 넘겨짚은것처럼 순정은 늘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꿍져넣은 일본호색광들에게서 당한 그 치욕때문에 그 순간에도 속으로 몹시 괴로와하고있었던것이다. 이제는 눈물도 다 말라버렸는지 순정의 우멍한 눈시울속에 묻힌 두눈에서는 눈물대신 퍼런 불찌가 튕겨나는것만 같았다.

박순정의 심상치 않은 인상에 진희는 더럭 겁이 났다. 자기네 할머니도 생전에 일본쪽발이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런 인상을 해가지고 한동안 허공을 쳐다보다가는 땅을 치며 태질하는것을 여러번이나 목격한 그였던것이다.

내가 괜한걸 물어본것 같구나.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안정시킬수있을가?

진희는 평생 《시한탄》을 안고 사는 박할머니가 전번 남포 와우도해수욕장에 갔을 때처럼 될가봐 허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천천히 그의 등허리를 주물러주면서 《할머니, 제가 괜한 소리를…》 하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박순정은 용케도 자기를 다잡았다. 손수건으로 눈굽을 꾹꾹 찍던 그는 퍽 안정된 목소리로 《그게 무슨 괜한 소리겠나. 난 여태까지 살면서 꿈자리에서조차 일본쪽발이들에게 당한 치욕의 상처를 안고 통곡을 하고있네. 그러니 내가 연구사선생의 말을 나무람할 무슨 언터구가 있겠나.》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난 죽어도 그때 당한 치욕을 잊을것 같지 못해. 이번에 여기 병원에 들어와서두 밤이구 낮이구 때없이 그때 일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군 했는데 요새는 담이 커졌는지 내가 속이나 쥐여뜯으며 통곡이나 해가지고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네. 그래서인지 옛날일을 돌이켜보아도 접때처럼 그렇게 가슴이 활랑거리지는 않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해방전 일본호색마귀들에게서 치욕을 당하며 청춘시절까지 다 빼앗기고 살아온 이 부실한 늙은 할미에게도 더 늙기전에 그 짐승같은 놈들을 세상에 기어이 고발하여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생긴것 같기두 하구…》

진희는 순정의 쇠진한 등허리를 꼭 껴안으며 진정의 목소리를 터놓았다.

《할머니, 참 말씀을 잘했어요. 일본쪽발이들의 천인공노할 그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라는것은 력사의 뜻이자 인류량심의 뜻이고 온 겨레의 뜻이예요. 할머닌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을 든든히 가지고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저의 할머니도 생전에 박할머니처럼 잠을 자다가도 옛날일을 생각하고는 와뜰 놀라 눈물을 흘리군 하시더니 일본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도를 폭로하는 국제회의에 증인으로 참가하여 연설까지 하고 와서부터는 일본쪽발이들에게서 값을 단단히 받아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어깨를 쭉 펴고 사셨어요.》

박순정이 벌써 몇번이나 듣는 말이다. 진희가 이미 여러 기회들에 박순정에게 자기 할머니의 과거지사를 죄다 터놓았던것이다.

《그랬을테지.》

순정은 머리를 끄덕이며 후- 하고 긴숨을 내그었다.

진희는 순정의 팔을 꼭 잡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떼질하듯 말했다.

《이-잉, 할머니, 할머닌 또 자꾸 옛날일을 되짚어보며 한탄하고 걱정하며 괜히 속을 태우시네. 거기에 무슨 걱정할게 있나요. 그렇게 한탄하고 걱정하며 애를 태우지 말고 전번에 황선생이 이야기한것처럼 〈이 천하에 짐승보다 못한 왜놈쪽발이들아, 똑똑히 봐라! 네놈들의 죄행을 낱낱이 발가놓을 박순정이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하고 호통을 좀 치세요.》

《?》

《할머니, 들으시나요?》

진희는 박순정의 팔을 잡아흔들며 코멘소리를 냈다.

《응, 응, 그래그래. 그렇게 해야지.…》

박순정과 김진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졌다. 간호원처녀가 약봉투와 체온계를 들고 호실로 들어섰던것이다.


×


어느날 저녁이였다.

박순정이 환자들속에 끼여 입원실 복도 한켠에 설치해놓은 텔레비죤화면을 마주하고있는데 이제부터 일본군성노예생존자의 공개증언을 방영하겠다는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소리에 순정은 와뜰했다. 머리칼이 쭈삣 일어서고 관자노리에서 풀떡풀떡하는것이 감촉되였다. 그러나 애써 내색은 감추면서 텔레비죤화면에 시선을 박고 귀를 도사렸다.

《내가 이루 다 상상 못할 정신육체적고통속에서 페물이 된 이런 육신을 가지고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죽지 않은것은 일본쪽발이들을 세상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수 없었기때문이였수다.》

화면에 나온 생존자는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12살때인 1929년에 경상남도 창원에 있던 일제의 군수공장《위안소》에 끌려가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했던 사실들을 터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쪽발이들이 조선녀성들에게 가한 짐승도 낯을 붉힐 그런 비인간적인 만행들에 대하여 실례를 들어 말하다가 너무도 억이 막혀 《저…하…늘에 하느님이 있다면 하…느님!- 하느님은 왜 이런 쪽발이호색마귀들을 그냥 놔둡네까.… 아!-》 하고 얼굴을 싸쥐며 오열을 터뜨리였다.

그의 피타는 절규는 사람들의 심장만이 아니라 하늘땅을 울리고 력사를 울리였다.

순정은 저도 모르게 《어휴-》 하고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12살? 그 어린 나이에? 날벼락을 맞아뒈질 그 쪽발이호색광들을 그저…

숨소리가 높아진 순정은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화로를 들쓴것 같더니 텔레비죤수상기앞에 있는 환자들과 간호원들, 의사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는것 같은 환각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잠시후에는 텔레비죤화면속에 있던 성노예생존자가 자기에게로 손가락을 내뻗치며 《박순정, 당신은 어째서, 무엇때문에 쪽발이호색마귀들을 세상에 고발하지 않소?》 하고 부르짖는 환영이 눈앞으로 어룽어룽 비껴들었다.

박순정은 《음-》 하며 머리를 외로 돌렸다. 속이 후들후들해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담당간호원이 그 모습을 띄여보고 다가왔다.

《할머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어디 편치 않으세요?》

《으-응-》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호실침대에 가서 누운 박순정은 진정제를 몇알 입에 넣고서야 당장 터져나갈것만 같던 가슴을 달랠수가 있었다.

그날 밤 지긋지긋한 악몽속을 헤매이며 피눈물을 씹어삼키는 박순정의 귀전에서는 《내가 이루 다 상상 못할 정신육체적고통속에서 페물이 된 이런 육신을 가지고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죽지 않은것은 일본쪽발이들을 세상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수 없었기때문이였수다.》 하는 생존자의 피타는 음성이 진폭이 큰 메아리를 일으키며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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