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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5일

평양시간


제 8 회


제2장 용단


4


《어머니, 황정식선생이 오시거들랑 제가 병원면회를 왔던 길에 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에 갔댔는데 출장을 가셨다고 하길래 못 만나고 그냥 내려갔다고 좀 전해주세요. 다음번에 올 때에는 꼭 만나뵙고 인사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오냐, 오냐. 알겠다.… 헌데 워낙 그 선생은 바쁜 일만 안고 돌아가는것 같더라. 그러니 언제 널 만나주겠다고 기다려줄새가 있겠느냐?》

《그래도 전 만나야 하겠어요. 어머니일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분인데 고마운 그 선생에게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 할게 아니나요. 다음번에 와서는 꼭 만나보겠단다고 전해주세요.》

《오냐. 알겠다질 않느냐.》

박순정은 재삼 당부하는 아들을 가볍게 나무랐다.

하지만 그의 말끝에는 신경질적인 어조가 다분히 비껴있었다. 아들이 황정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전번에 와우도해수욕장에 가서 본 사진이야기가 나올가봐서였다. 박순정으로서는 그 사진에 응축된 자기의 치욕스러운 지난 일들이 공개되는것이 제일 두려웠다.

점심시간을 맞춰 면회를 온 아들과 며느리는 단풍이 들기 시작한 병원정원의 느티나무그늘밑에 준비해가지고 온 음식들을 차려놓았었다.

《어머니, 어서 드세요. 담당의사선생의 말을 들으니 이젠 거의다 완치되였다고 하는데 많이 들고 빨리 몸을 추세워야 할게 아닙니까.》

아들이 이렇게 말하며 박순정의 손에 수저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참기름이 발린 송편이 보기 좋게 담긴 접시를 그의 앞으로 끄당겨놓았다.

《어머니, 이건 어머니가 터밭에서 가꾼 완두콩으로 소를 만들어 넣은 송편이예요. 자, 어서 들어보세요. 얼마나 쫄깃쫄깃하고 맛이 있는지 몰라요.》

《그래, 그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몸에 배지 않은 애교까지 부리며 자기를 위해 극성스레 왼심을 쓰는 아들과 며느리를 보느라니 박순정은 속이 울컥하며 눈굽이 확 저려났다. 원, 자식들두…

박순정은 머리를 돌려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괴여오르는 눈물너머로 불쑥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자기의 기막힌 처지를 제일먼저 리해해준 사람, 자기에게 말없이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던 못 잊을 정대석의 모습이였다.

그로 말하면 지금 박순정을 어머니로 모시고 효도를 다하는, 바로 눈앞에서 음식을 많이 들라고 어리광이 섞인 목소리로 재촉하는 대견스러운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어쩌면 얼굴모색도 마음씨도 그렇게 꼭 닮았을가. 만일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축축해나는 눈을 애써 내려감은 박순정이 추억에 잠길가말가 하는데 아들이 그의 팔을 껴잡았다.

《어머닌 또 뭘 생각하시네. 음식은 드시지 않고 자꾸 몸을 상하게 하는 옛날일만 생각하시면 뭐가 좋을게 있나요. 어머니, 이제는 뒤를 돌아볼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면서 아무 근심걱정없는 오늘의 복을 한껏 누리면서 사셔야 합니다. … 자, 어머니, 여기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갓김치도 있어요. 어서…》

박순정은 환영처럼 피끗 떠오르던 지난 일들을 덮어버리면서 눈굽을 꾹꾹 찍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던듯 밝은 안색을 지으며 음식그릇앞으로 다가앉았다.

《자, 너희들두 같이 먹자꾸나. 먼길을 오느라 시장했겠는데…》

《저희들은 일없어요. 나나 이 사람은 그저 어머니가 많이 맛있게 잡숫는걸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요. 어머니, 많이… 많이 드세요.》

아들의 목소리는 여느때없이 젖어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난 뒤였다.

박순정은 음식그릇들을 하나하나 치우는 아들과 며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애들도 이 에미의 지난 일에 대해 다 아는것 같구나. 얼마나 놀랬을가. 못난 에밀 만났다구 가슴은 또 얼마나 쥐여뜯고… 속에 재가 가득찼을거야. 그런데도 에미앞에선 티끌만 한 내색도 내지 않고 그저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이 에밀 위해주지 못해서…

박순정은 머리를 외로 돌렸다. 목안이 알알해나고 눈물이 막 쏟아지고 곡성이 터져나갈것만 같은것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어머니-》

아들은 어릴적에 응석을 부리듯 박순정의 곁에 붙어앉았다.

《왜?》

《어머니, 어머닌 자꾸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상심해하시는데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 자식들도 어머니의 그 심정을 다… 다 알아요. 이젠 그… 그만 속을 쓰십…시오. 이런대도 내 어…머니이고 저…런대도 내 엄마가 아…아니나요. 그러니 아무 근심마시고 그… 그저 오래…오래 …앉아계시면…돼요. 어…머…니!-》

아들은 끝내 순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였다.

박순정의 얼굴에도 눈물이 화락했다.

며느리는 그 정상을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어 아름드리 느티나무밑둥곁에 쪼그리고 앉아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한줄기의 소슬바람이 솨- 하고 불어왔다. 소소리높이 키를 솟구고 세상을 굽어보던 느티나무가 몸부림을 쳤다. 뒤미처 느티나무가지들을 가까스로 붙잡고 파르르 떨던 검붉은 잎사귀들이 피눈물방울인양 뚝뚝 떨어져내렸다.…

박순정은 부디 치료를 잘 받고 빨리 완쾌되여야 한다고 두번세번 당부하고 병원문을 나서는 아들과 며느리의 뒤모습을 점도록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을 바래워주는 박순정의 안색은 여느때없이 신중한 빛을 띠였다.

《할머니, 이젠 그만 들어가십시다.》

박순정을 부축하며 함께 나왔던 간호원처녀였다.

입원실이 있는 병동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정은 자기 팔을 끼고 그림자처럼 묻어다니는 간호원에게 나직이 말했다.

《간호원체네, 내 좀 여기서 머리쉼을 하다가 호실에 들어가면 안될가?》

《그렇게 하세요.》

박순정은 병동 앞마당에 우거진 포도넝쿨아래 놓여있는 길다란 의자에 걸터앉았다. 초가을이였지만 한낮의 땡볕은 아직도 따가와 포도넝쿨이 무늬를 짜놓은 그늘이 좋았다. 머리를 들어보니 가녁마다 누르스름하게 황이 들기 시작한 포도나무잎새들사이로 해빛이 줄줄이 쏟아지는데 눈길이 가는 곳마다에는 자주빛포도알들을 한뭉테기씩 그러안은 포도송이들이 탐스럽게 주렁져있었다. 알알이 윤기가 도는 포도송이들을 보느라니 흡사 귀여운 손자, 손녀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하는것 같았다. 그 눈망울들은 다시 커다란, 영채가 도는 두개의 눈동자로 바뀌여들었다. 환각속에 비껴든 그 눈은 정대석의 눈이였다. 아, 정대석!-

박순정이 정대석을 처음 알게 된것은 1946년 봄이였다.

그때 일본군성노예로 끌려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순정은 중국 상해에서 배를 얻어타고 인천을 향해 가고있었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가 탄 배는 중미련합군이 일본해군에게서 로획한 자그마한 낡은 군함이였다.

넓지 않은 배의 갑판우에는 일제가 《징병》, 《징용》, 《정신대》의 명목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각지에 끌어갔던 조선사람들로 장사진을 치고있었다. 견장을 뜯어버린 낡은 일본군군복을 걸친 사람, 어깨와 무릎이 다 드러난 작업복을 걸친 사람, 헌 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성들… 행색은 각양각색이였다.

낡아빠진 후렁한 옷차림에 자그마한 보퉁이를 껴안은 순정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피해 갈구리나 바께쯔따위의 잡동사니들을 무져놓은 배의 후미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정조마저 빼앗기고 육체까지 다 파괴당한 순정으로서는 고향쪽 하늘가를 바라볼 자신심마저 다 잃어버렸다. 그저 불쑥불쑥 떠오르는것은 바다에 빠져죽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러나 그 고향에 대한 생각은 정말 집요하기도 했다. 치욕을 들쓰며 일본군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던 그때에조차 그리며 잊지 못하던 고향, 그 고향이 보이지 않는 바줄을 내던져 순정을 꽁꽁 비끄러매가지고 끌어당기고있었던것이다.

배 앞머리에서 함성이 터졌다.

《인천이다!-》

《인천이다! 인천! 인천이요!-》

《인천이 맞능기오? 으흐흐, 내 우찌 고향에 발을 들이놓는당기요?- 아하하- 어멈! 아부지!-》

배에 탔던 장정들이 울며불며 붙어안고 돌아갔다. 알고모르고가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그런 기쁨마저 악몽의 보따리속에 꿍져넣은 순정은 멀기치는 검푸른 바다만 멍청히 바라보고있었다.

《아니, 거기서는 내릴 차비를 안하오?》

《?》

순정이 머리를 들어보니 토목로동자차림의 수염이 더부룩하고 눈이 어글어글한 한 청년이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

《고향은 어데요?》

순정은 배에 올라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평…안도 강서…》

《그럼 동향사람이나 같구만. 우리 집은 평안도 룡강이요. 가는데까지 같이 갑시다.》

순정은 고마운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이 바로 정대석이였다.

대석은 5년전에 일제의 징용에 걸려 중국의 장춘, 상해, 항주, 대만에까지 끌려다니며 고역을 치르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세상물정에 까막눈이였던 순정은 정대석에게 의지하여 인천에서 서울로 갔다가 청단을 거쳐 고향 강서로 돌아왔다.

그때 대석은 페인이 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순정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면서 그를 마을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하였다.

《순정이, 자기의 생을 너무 속절없는 인생으로 타매하지 마오. 그렇게 자기를 계속 괴롭히면 좋아할건 바다건너 일본쪽발이놈들밖에 없소. 또 그렇게 사는건 달리 보면 나약한 표현이기도 하고…

이제는 우리에게 해방된 조국이 있소. 그리구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인민을 위한 정사를 펴나가신다는데 앞으로 두고보오. 모든 일이 다 잘될게요. 힘을 내오. 이젠 우리에게도 살길이 열렸단 말이요. 그러니 불우하고 기구했던 지난날을 붙들고 통탄만 할것이 아니라 구만리같은 앞날을 생각하며 가슴을 쭉 펴고 새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오.》

정대석은 징용에 끌려다닌 사람치고는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리 밝았다.

일제의 징용살이 5년에 못해본 고생이 없었고 보지 못한것이 별로 없었다. 동북땅 장춘에 있는 일제의 토목공사장에서 고역을 치를 때 김일성빨찌산의 신출귀몰하는 전법앞에서 그렇게 으시대던 《무적황군》이 단번에 수백명이나 까마귀밥이 되는것도 목격했던 사람이였다.

그때 대석은 일제의 토목공사장을 탈출하여 항일유격대를 찾아가려다가 놈들에게 붙잡혀 숱한 매를 맞고 한동안 구류장신세를 졌다. 그후 상해로 이송되여갔으며 그 다음에는 대만에까지 끌려갔다고 한다.

박순정과 정대석은 고향땅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돕고 위해주면서 거의 열흘동안을 함께 있었다. 그 과정에 대석은 거짓을 모르고 아직도 순진한 조선농촌처녀의 심리를 소중히 간직하고있는 순정이를 잘 알게 되였고 순정은 대범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로운 대석의 인간됨을 엿볼수가 있었다.

치욕스러운 생활을 강요당하던 그때에조차 잊지 못하던 고향집, 그 고향집 대문앞에 선 순정은 눈굽을 찍었다. 가슴이 활랑거려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집은 예전대로구나. 그런데 이제 부모들이 그간 어디에 가있었는가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가?

흥분으로 높뛰던 순정의 가슴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순정은 대문앞에서 몇발자국 물러서며 집주변을 살펴보았다. 절기로 보면 이젠 피였던 꽃들이 한물졌을 때인데도 해방후 처음으로 맞는 봄이 되여 그런지 집둘레 돌각담우로 기여오른 개나리가지끝에는 아직도 노란 꽃들이 듬성듬성 남아있었다. 앞뜰의 살구나무가지에도 연분홍꽃송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대문을 열고 집마당에 들어선 순정은 목갈린 소리를 냈다.

《어머니!- 아버지!-》

부엌에서 행주치마바람으로 나온 계모(순정은 8살때부터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는 유령을 마주하고 선 사람처럼 어리둥절해있다가 물묻은 두손으로 무릎을 철썩- 치더니 고무신이 벗겨지는것도 모르고 달려나와 순정을 와락 껴안았다.

《순정이가 분명하구나! 네가 살아있었구나!》

《어…머…니!-》

조용하던 순정이네 집은 순간에 대사집으로 되였다.

해방전 탄광에서 한쪽다리를 잘린 아버지는 웃방에 누워있다가 순정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지팽이도 없이 벌렁벌렁 기여나와 딸을 부둥켜안았다. 아버지가 울음절반에 환성절반으로 기쁨을 막 쏟아놓는데 귀여운 두 동생들이 순정의 팔에 매달리고 앞집, 뒤집 사람들과 면인민위원회 일군들까지 달려와 순정을 둘러쌌다.

순정의 손을 붙들고 끝내 살아돌아왔다고 칭찬을 하면서 혀를 차는 로인들과 그의 어깨를 부여안고 죽을 고생을 하다가 왔겠다며 눈물을 쏟는 아낙네들, 이 아지미가 누군데 무슨 장한 일을 하고 왔길래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복새를 피우는가 하는 눈길로 순정을 빤히 올려다보는 코흘리개들… 이랬든저랬든 순정이네 집은 생겨서 처음 그렇게 흥성거렸다.

모진 세상에서 귀한 딸이 죽지 않고 살아돌아온것이 그리도 기쁘고 대견스러워 아버지와 계모는 밤새 순정의 등을 어루쓸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그때에야 순정은 자기가 몇해동안 갇혀있던 지옥같은 곳에서 해방되였다는것을 의식하였다. 순정은 난생 처음 만시름을 다 잊었다. 그러나 결코 시름이 덜린것은 아니였다.

며칠이 지나서 계모가 나직이 물었다.

《그래, 지금까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면서 지냈니?》

가시박힌 물음도 아니고 수상쩍은 기미를 눈치채고 묻는 말도 아니였지만 순정은 그 물음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죽어도 사실대로 말할수가 없는 순정이였다.

《그저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왔어요.》

기껏해서 순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순정의 생활이 안착되자 아버지와 계모는 《너도 이젠 나이가 다 찼는데 빨리 좋은 대상을 고르는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성화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순정은 묵묵부답이였다. 일본호색광들에게서 입은 치욕의 상처가 내 몸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결혼을?

속에 재를 안은 순정은 매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어푸러져 땅을 치며 한바탕 울군 하였다.

갈수록 생기가 넘치는것이 아니라 시들어가는 딸의 정상을 보다못해 아버지와 계모는 순정을 앉혀놓고 그간 외지에 나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따져물은적도 있었다.

했으나 순정은 치욕스러운 일본군성노예생활에 대하여 터놓을수가 없었다. 입이 찢어진대도 말할수가 없었다.

이런 속에서 한해가 거의 지나가고있었다.

하루는 뜻밖에도 룡강에서 살고있던 대석이가 순정을 찾아왔다. 그와 결혼하자고 온것이였다.

딸의 혼기를 놓쳤다고 한숨만 내쉬던 아버지와 계모는 이렇게 호박이 넝쿨채 굴러떨어질수가 있나 하며 대석의 두손을 꼭 잡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정은 대석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그와 함께라면 어데든 그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생각까지 해본 순정이였지만 그는 대석의 그 진정에 찬 청을 거절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대석의 청혼이 진심이라는데로부터 더 강하게 거절하게 되는 순정이였다.

내가 저렇게 깨끗한 사람과 어떻게… 내게 과연 결혼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늘이 내려다본다! 아! 안된다. 그것만은 안된다, 안돼!…

순정은 응낙을 기다리는 대석을 아래방에 앉혀놓은채 웃방에 올라가 노전바닥을 쥐여뜯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소리에 놀란듯 순정이네 집마당가의 대추나무가지에 앉아 깍깍거리던 두마리의 까치가 푸르릉- 푸르릉- 하고 날아가버렸다.

일제가 박순정에게 가한 반인륜적인 악행은 이렇게 그의 앞길에 그늘을 던지고 결혼의 권리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리였다.

그후 1949년 가을 어느날 순정은 남포시내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정대석을 만났다.

《이게 누구요? 순정이 아니요?》

《아니? 대석아저씨!-》(순정은 자기보다 6살이나 우인 정대석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때 대석은 면에 현물세를 바치러 갔다 돌아오는 길이였다.

살이 피둥피둥한 황소가 힘을 들이지 않고 끄는 빈달구지앞쪽에 걸터앉아 괜히 빈 채찍으로 허공을 휙휙 가르는 대석의 얼굴은 벌겋게 취기가 올라있었다. 기분은 이미 하늘을 날고있었다. 현물세를 바치고 막걸리집에 들려 한대포 한 모양이였다. 달구지가 덜커덩거리는데 따라 대석의 머리와 상체가 흥겹게 장단을 치고있었다.

그래도 정신만은 똘똘했다.

《어데 갔다오는 길이요?》

《저 남포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어이구, 그러니 한 30리길을 내처 걸었구만. 힘들겠는데 어서 달구지에라도 올라앉소.》

대석이와 순정은 달구지를 타고 오면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가정은 꾸렸겠지?》

순정은 고개를 숙인채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대석은 순정을 넘겨다보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묻지 말아야 할것을 물었구나 하는 생각에 할 말을 못 찾아 갑자르다가 신신펀펀히 잘 가는 황소의 엉덩짝에 채찍을 먹이였다.

《이랴!- 이놈의 소, 어서 가자!-》

한참만에야 대석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장가를 갔소. 이젠 아이가 둘씩이나 되오.》

그때에야 순정의 얼굴에 웃음이 피여났다. 두눈은 새물거리며 반짝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요? 참, 잘됐어요.… 아저씨, 그럼 아주머닌 뭘 하시게?…》

《우리 집 아낙네? 그야 나같이 해방전에 천덕구니로 살던 농군이지 뭐. 한마을에 있던…》

《야- 아주머닐 한번 보고싶네. 마음곱고 인물도 곱겠지요?》

취기가 오른데다가 순정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까지 치밀어 대석은 우정 엉너리를 치면서 말소리를 높였다.

《나한테야 그런 아낙네면 과남하지! 순정이처럼 마음씨 곱고 일잘하고… 그런데 살아보니 인물은 아무래도 순정이보다 못한것 같애! 암, 못하구말구. 순정이야 사실 절색이지. 세해전에 이놈이 좀 어째볼가 했다가 못생긴탓에 퇴짜를 맞고 쫓겨온 일도 있었지. 허허허…》

대석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풍요한 가을들판을 흔들며 하늘가로 메아리쳐갔다.

처음에는 대석이의 노죽스러운 언행에 덩달아 웃던 순정이였지만 대석이가 세해전에 있은 일을 상기시키는통에 또다시 입술을 옥물며 속으로 눈물을 씹었다.

이날 순정은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대석의 손에 이끌려 룡강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려보았다.

《여보, 내 일전에 말하던 강서에서 사는 우리 동생벌 되는 순정이가 왔소.… 현물세를 바치고 돌아오다가 저 재등너머에서 만났지. 허허허…》

대석의 안해는 반색을 하며 순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 어서 들어와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강서 어드메서 살기에…》

순정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면에서 좀 떨어진 양지촌에서…》 하며 대석의 안해가 이끄는대로 방안에 들어섰다.

《양지촌? 양지촌이면 고대로구만요. 앞으로는 동기간처럼 지내며 자주 집에 놀러 와요. 네?》

《고마워요. 아주머니.》

순정은 대석의 집에서 륭숭한 대접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박하지만 성의가 넘치는 음식상을 물리고난 뒤로는 내내 대석이네 2살 난 딸애를 무릎우에 앉히고 놀면서 엄마등에 업혀 생글거리는 젖먹이아들애의 고운 볼에 입을 맞춰주기도 했다.

대석의 안해가 등에 업었던 아들애를 내리워 순정에게 안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고우면 자, 한번 안아봐요. 그리고 자꾸 부러워만 하지 말고 순정이도 빨리 가정을 이뤄요. 그래서 우리 귀염둥이같은 아들딸들을 한구들 낳구요. 그래야 나도 순정이네 집에 놀러 갈 멋도 있지.…》

웃방문턱앞에 마주앉아 두툼한 마라초를 말던 대석이도 술을 한잔 한김에 눈확이 불깃불깃해가지고 맞장구를 쳤다.

《옳거니, 당신 그 한마디는 참 잘했소.》 하고 안해를 두둔하던 대석은 순정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마디들에 힘을 박았다.

《일본쪽발이들이 휘뜩 나가자빠지게스리 꼭 그래야 하우.》

순정은 자기를 위해 왼심을 써주는 대석의 내외가 그지없이 고마웠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맞대여놓고 일본놈들에게서 치욕을 당한 지난 일들을 상기시킬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래도 했다면 머리칼이 곤두서고 단박에 랭랭해졌을 순정이였지만 대석이의 그 말에는 속이 울컥하며 코마루가 찡해졌다. 그 어떤 치레도 없는, 구수한 인정미가 풍기는 대석의 말에서 순정은 참으로 큰 힘을 얻었다.

그때로부터 9개월이 지나 전쟁이 터졌다.

미제와 리승만역도가 도발한 전쟁은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다.

순정이네 집에서도 그 혼자만 남았다. 마을에 조직된 전선공동작업대에 망라되여 전방에서 싸우는 인민군전사들에게 보낼 원호미를 달구지에 싣고 남포항에 갔다오니 무시로 날치던 미군비행기들의 폭격으로 집에 있던 식구들은 몰살되고 가산까지 죄다 불타버렸던것이다. 결국 순정은 외토리가 되였다.

정전이 된 이듬해 순정은 면에서 시범적으로 무은 농업협동조합에 남먼저 들었다. 그가 의지할 곳은 국가의 시책에 의해 조직된 협동조합밖에 없었다.

순정은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다. 조합에서 모범농민을 꼽을 때면 두번째가 아니면 세번째손가락에 드는 정도였다. 알곡생산을 높이기 위한 소토생산전투때 밭머리에 초막을 지어놓고 숙식을 하면서 혼자서 수백톤의 소토를 생산하여 면적으로 진행된 소토생산전투총화에서 라지오를 상으로 탄적도 있었다.

박순정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혀를 차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당위원장이나 관리위원장도 일 잘하는 순정을 적극 내세워주면서 각근히 보살펴주었다.

하루는 박순정이 룡강군 립송리로 갔다. 그곳 협동조합 민주선전실에서 군내 모범농민들의 모임이 있었던것이다.

립송리에 당도한 순정은 민주선전실앞 둔덕에 올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을쪽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정대석,… 잊지 못할 정대석아저씨가 바로 저 마을에 살고있지.…

이날 회의가 끝난 후 박순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대석이네 집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대석아저씨내외가 어떻게 지내고있을가. 대석아저씨네 귀여운 아들딸들은 또 얼마나 컸을가.…

순정은 대석이네가 살고있던 나지막한 둔덕을 등지고 선 초가집마당가에 들어섰다.

《아저씨!- 대석아저씨 계시나요?》

부엌문이 빠금히 열리였다. 부엌안에서는 뽀얀 김과 내굴이 서리서리 엉켜 떠돌고있었다. 저녁때가 되여오니 밥을 짓는것 같았다.

그런데 부엌에서 어른이 아니라 반질반질 때가 오른 몽당치마를 걸친 예닐곱살쯤 되는 소녀애가 얼굴에 온통 눈물코물 범벅을 해가지고 벼짚검부레기가 가득 묻은 푸시시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소녀애는 손등으로 눈굽을 벅벅 문대고나서 순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나요?》

《응?》

순정은 그애가 대석의 딸이라는것을 제꺽 알아챘다. 2살때 본 얼굴모습과 비슷했다. 오른쪽볼우물이 오목한것을 보니 대석의 딸이 분명하였다. 전쟁전에 그가 대석이네 집으로 왔을 때 대석은 자기딸의 오른쪽에 난 볼우물을 가리키며 《복우물》이라고 자랑한적이 있었던것이다.

순정은 소녀애의 머리카락에 붙은 검부레기를 털어주며 다정히 물었다.

《아버지 안 계시니?》

소녀애는 쭈밋쭈밋하더니 《저, 저… 아버… 진… 없… 어요.》 하고는 제김에 울먹거렸다.

순정의 예감에서 번개불이 번쩍했다.

《그럼 어머닌?…》

《엄마도…죽…었어.》

《아니, 그럼?》

순정의 가슴에서는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대석의 딸은 제 설음에 겨워 흑흑대며 방안으로 뛰여들어가 노전바닥에 이마를 박고 엉엉 소리를 냈다.

순정은 황황히 방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6살짜리 대석의 아들이 누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울상이 돼서 입술을 비죽거리며 순정을 쳐다보고있었다. 그때 대석의 아들은 가마목에 쪼그리고 앉아 배고프다고 칭얼대고있었던것이다.

순정은 너무도 억이 막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집안꼴은 말이 아니였다. 전쟁은 대석이네 집에도 큰 재난을 들씌워놓았던것이다.

방금 대석의 딸이 불을 올린 가마에서는 시래기가 반나마 섞인 멀건 피죽이 풀떡거리며 끓고있었다.

쌀독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항아리를 열어보니 대강 껍데기를 벗긴 피쌀이 서너줌밖에 없었다.

순정은 당장 아이들에게 밥을 해먹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옆집문을 두드리고 쌀 한되박을 꾸어왔다.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지어먹인 후 순정은 옆집에서 사는 할머니로부터 이런 가슴아픈 사연을 듣게 되였다.

전쟁이 터지자 정대석은 남먼저 인민군대에 탄원입대하였다.

그런데 침략자들을 쳐부시는 전투마다에서 그렇게 용감히 싸우며 락동강까지 갔다온 대석은 1952년 여름 그만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군사동원부 일군과 면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대석의 안해를 찾아와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내놓으면서 가슴아픈 사실을 전해주었다.

했으나 대석의 안해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펄펄하던 사람이 잘못되다니? 일제시기에 그 험악한 전쟁터로 끌려다닐 때에도 죽지 않았던 그이가 어떻게… 아니다. 아니다!

그는 무작정 부정하였다. 그는 군사동원부 일군이 내놓은 전사통지서를 믿을수 없었다. 제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남편이 잘못되였다고 단정할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은 대석의 안해를 끝내 쓰러뜨렸다. 그는 며칠간을 밤낮 눈물속에서 지냈다.

정대석의 안해는 강의한 녀성이였다.

이를 악물고 일어선 대석의 안해는 전선원호미를 마련하는데서도 남보다 앞장에 섰고 남편이 남기고 간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석이네 집에 또 불상사가 들이닥쳤다. 전쟁이 끝난 해 가을 어느날 밭에 나가 낟알을 거두어들이던 대석의 안해가 적들이 강점했을적에 묻어놓은 지뢰가 터지는통에 그만 목숨을 잃었던것이였다.

그때로부터 대석이네 어린 자식들은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들끼리 생활해가고있었던것이다.

대석이네 집정상을 보며 순정은 억이 막혀 통곡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통곡끝에 순정이는 대석이네 부부가 남기고 간 아들딸을 맡아안을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순정이가 해주는 밥을 게눈 감추듯 하고 가마목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철부지오누이는 웃방에서 옆집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열을 터뜨리는 순정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엉- 엉- 울기 시작하였다.

순정은 눈물을 훔치고 아래방으로 내려가 두팔을 벌렸다.

《얘들아, 이…리…오너라. 어…서!》

《?》

처음 보는 고마운 아지미가 왜 통곡을 했는지, 왜 울음섞인 목소리로 자기들을 부르며 품에 안으려고 하는지 철모르는것들은 아직 다는 몰랐다.

순정은 의지가지없는 아이들을 와락 껴안았다.

《얘들아, 내가, 내가 너희들의 〈고모〉다! 이 〈고모〉가 잘못했구나. 너희들이 이렇게 된줄도 모르고… 흐윽-》

《고모!-》

《고…모…야!-》

어린것들은 가슴에 찼던 설음을 한꺼번에 쏟으며 순정의 가슴에 매달렸다.

그날 밤 순정은 어린것들을 량쪽팔에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장밤을 눈물로 보냈다. 어린것들이 너무도 가긍하여 가슴아파 울었고 한편으로는 쌔근거리며 자기의 품을 파고드는 그애들의 체취를 난생처음 느끼면서 억이 막혀 울었다.

순정은 이렇게 아들딸을 가진 어머니가 되였다. 자기를 리해해주고 자기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가장 준엄한 시기에 조국과 인민, 자기를 포함한 고향마을사람들을 위하여 한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정대석이가 남기고 간 아들딸을 품에 안은 어머니가 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된다는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순정이가 대석이네 오누이를 데려다 기르던 초기 한임이나 되는 빨래함지를 이고 마을앞 시내가로 나갈 때면 동네아주머니들이 이렇게 수군덕거리군 하였다.

《에그, 정말 기찬 일이요. 홀몸에 어렵게 살면서도 부모잃은 친척아이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려다 기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겠소?》

《아니, 순정이에게 저런 친척애들도 있었소?》

《글쎄, 그렇다고 합데. 깨진 둥지속의 새새끼들처럼 애비에미를 다 잃고 의지가지할데가 없어 그냥 목놓아우는것을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데려왔다고 합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음. 쯧쯧…》

《그러게 말이요. 하여간 순정인 마음이 비단결이요.… 그리구 저 빨래하는 솜씨를 좀 보오. 얼마나 손끝이 여물었는지 아이들의 옷에서 때국물이 말짱 빠지는걸. 저렇게 일 잘하고 마음씨고운 순정이를 어느 남정넨들 마다하겠소.》

《글쎄말이요. 장가 못 간 남자꼬부랭이들이란 죄다 눈이 멀었다니까. 내가 하나 달구나왔더라면 벌써 독수리 병아리 채가듯 했겠는데… 흐흐흐.》

《흐아아… 옳슴메, 옳슴메… 아무튼 순정이네 집에 빨리 기대고 살만 한 남정네가 들어와야 하겠는데.》

《에그, 그게 어디 그렇게 떡먹듯 쉬운 일이요? 더구나 숱한 남정네들이 전선에 나갔다가 다 돌아오지 못한 이런 때에…》

《글쎄말이요. …》

순정은 동네아낙네들이 찧고 까불어대는 이런 수다 같은건 귀등으로 날려보냈다. 그저 대석이네 부부가 남기고 간 아들딸을 잘 키워야 하겠다는 강심이 머리끝에까지 꽉 차있을뿐이였다.

순정은 자기의 심혼을 품어안은 아들딸의 발밑에 고스란히 묻으며 이를 악물고 일떠섰다. 대석이가 남기고 간 아들딸, 어쩐지 자기 살붙이로만 느껴지는 사랑하는 어린것들… 그들은 곧 순정의 여생의 전부였다.

어느날 아들과 딸이 밖에 나가 놀다가 동네아이들로부터 《너희네엄만 진짜엄마가 아니래.… 너희들을 얻어다 기른대.》 하고 놀려대는 소리를 듣고 순정이앞에 와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적이 있었다.

순정은 철없는 동네조무래기들의 입방아질에 아들과 딸의 양기가 꺾이는것이 너무도 가슴에 맺혀 어린것들을 품에 껴안고 소리치듯 말했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내가 너희들을 낳은 엄마다!- 내가 너희들의 엄마다!-》

순정의 목소리에 문풍지가 드르릉- 하고 울었다.

어린것들도 순정의 뜨거운 진정에 공감되여 울음소리를 더 크게 냈다. 애들은 순정이가 자기들을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는것을 뻔히 알았지만 그의 품을 파고들면서 《엄마야!- 어머니!-》 하고 머리끝까지 찼던 설음을 죄다 쏟아놓았다.

그날 순정은 애들의 입을 통하여 거의 매일 동네조무래기들로부터 그런 성화를 받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다음날 순정은 리당위원회를 찾아가 위원장에게 전날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기 여생의 전부인 아들딸들의 성장에 자그마한 그늘도 지지 않도록 다른 마을로 이사했으면 하는 의향을 내비치였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순정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을수도 있었겠지만 리당위원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순정의 말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이였다. 리당위원장은 전쟁때 일가식솔 거의 전부를 잃고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삼촌어머니네 집에 얹혀살고있는 사람이였는데 원래 인정이 깊고 특히 전쟁의 참화를 크게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높았다.

리당위원장이 순정에게 물었다.

《정 그렇다면 순정동무네가 읍으로 이사를 가는것이 어떻겠소? 내 생각에는 홀몸으로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농사를 하기보다는 편직물생산협동조합 같은데서 일하는것이 순정동무에게는 더 나을것같은데…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도 여기보다는 읍이 더 나을게요.》

《?》

그때 국가적으로 강서군안의 두개 리에 갈라져있던 편직물생산합작사들을 통합하여 편직물생산협동조합을 내오면서 군적으로 로력을 모집하고있었는데 리당위원장은 박순정을 거기로 추천할 생각이였던것이다.

순정은 리당위원장으로부터 편직물생산협동조합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제 처지에는 너무도 과남한데 여태 농사만 해온 제가 어떻게 천짜는 일을…》

박순정이 이렇게 머밋거리자 리당위원장은 《일없소. 순정동무의 그 성실성이면 무슨 일인들 못 배워내겠소. 자, 그럼 그렇게 합시다.》라고 하면서 필요한 이동수속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얼마후에는 그의 집을 편직물생산협동조합옆으로 이사시켜주었다.

새 협동조합으로 옮겨온 후에도 순정은 언제나 모범로동자로 속보판의 중심을 차지하군 하였다.

그는 고집스러운데는 좀 있어도 강직하고 대바르고 성실했다.

한번은 순정이가 해방전 일본쪽발이들에게서 당한 치욕살이의 후유증으로 몹시 앓은적이 있었다.

그때 생산협동조합의 당위원장과 관리일군들은 자주 순정의 집으로 병문안도 오고 따스한 봄철에는 아들딸과 함께 강서약수터곁에 있는 휴양소로 병치료겸 가족휴양을 보내주었다.

휴양생활은 즐거웠다.

휴양소에 온 사람들은 나라의 혜택으로 호사하는 세월을 맞았다고 좋아하며 윷놀이판이나 장기판에 마주앉아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휴양기일을 보냈다.

그러나 순정이만은 그 휴양기간에도 부지런히 손발을 놀렸다. 짬만 있으면 호미를 손에 쥐고 휴양소주변 공지에 팥이나 콩종자를 박아넣었다. 어떤 날에는 주변에 널려있는 파철도 주어모았다.

《어머니, 여긴 휴양소예요. 우리 집 터밭이 아니야요. 그리구 저런 파철은 자꾸 모아서 뭘 할려구 그래요?》

아직 철없는 아들이 이렇게 볼부은 소리를 할 때면 순정은 이렇게 말해주군 했다.

《허, 녀석두… 이 좋은 세월에 내 밭 네 밭 가릴게 있냐? 심어놓으면 아무튼 조선사람이 먹겠지 일본쪽발이들이 먹겠냐? 빈땅을 놀리는건 국가에 죄되는 일이다. 우리 수령님께서 인민들을 잘 먹이시려고 비오는 날 질척거리는 두렁길을 걸으시는걸 너도 접때 영화에서 보질 않았느냐? 그리구 지금 신문과 방송에서도 계속 나오지 않던? 남조선에서 박정흰지 백정인지 하는 그 못된놈이 일본쪽발이들과 한동아리가 돼서 어쩐다저쩐다하는 소식이… 그런 소리를 귀등으로 흘려보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저 좋은 세월을 만났다고 허리띠를 풀어놓고 뚱땅거릴 생각을 하지 말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하나라도 더 찾아서 해야 한다. 알겠느냐?》…

곡절많은 자기 인생의 한 구간을 다시 걸어보면서 속으로 울기도하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던 박순정이 현실로 되돌아온것은 간호원의 고운 목소리때문이였다.

《할머닌 아직도 여기 계시나요? 약을 드셔야 할 시간인데… 자, 이젠 호실로 들어가시자요. 어서요.》

앵두볼을 한 간호원처녀는 박순정의 팔을 껴잡으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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