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4 장


5


한편 부여의 통치배들과 노예주들을 불안과 공포속에 벌벌 떨게 만든 려송의 초적부대는 구려와의 접경을 가까이 한 깊은 수림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있었다. 지치고 상한 군사들이 많았다.

벌써 여러달째 그들은 부여땅 곳곳을 무풍지대처럼 종횡무진하며 놈들의 시선을 자기들에게 끌어당기느라 피로에 피로를 덧쌓았다.

입고있던 의복들은 전장에서 찢기고 행군중에 해지여 형색들이 말할수 없이 초췌해졌다. 사선을 넘으며 고락을 함께 나누던 형제들의 얼굴엔 의기소침한 기색들이 비껴있었다.

려송은 깊은 숲속의 여기저기에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고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가슴아픈 눈길로 둘러보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려송은 침중한 기색으로 대충 쳐놓은 막사앞을 오락가락 거닐었다.

자기를 믿고 이곳까지 따라온 그들의 운명을 지켜주고싶었다.

문득 오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 한시각도 마음에서 떠나본적이 없는 그리운 모습이였다.

(그이한테 부탁하면 어떨가? 저들을 장차 일떠설 새 나라의 백성으로 되게 하여달라고, 그러면 오이무사님은 꼭 들어주실거야. 아- 저들과 함께 나도 갈수만 있다면.)

려송의 얼굴에서 처량하고 쓸쓸한 기운이 풍겨나왔다.

살고싶었다.

저들과 함께 새 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태여나 오이와 함께 복락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고싶었다. 허나 그것은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수 없는 한갖 꿈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그는 불공평한 이 세상이 저주스럽고 증오스러웠다.

려송은 지금껏 악만이 란무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오직 복수라는 무자비하고도 랭정한 감정 하나만을 가지고 대해왔었다.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자기에게서 부모들을 앗아가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오랍과도 생리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이 세상, 속이는것이 업이고 속는것이 여반사여서 오빠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뛰여든것이 대소태자의 무서운 음모에 걸려들어 종당에는 사랑하는이와의 가슴아픈 리별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복수! 그것은 타고난 반항아인 그의 운명이 불공평한 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항거의 작은 돌이 아니였던가.

려송이 방황하듯 착잡한 생각에 잠겨 막사앞을 거닐고있었다.

출로를 모색해야 한다. 수백명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린것이다.

《두령님, 숲변두리에서 이상한 놈을 하나 잡았소이다.》

파수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뢰였다.

이윽고 굵은 삼포승에 묶이운 장년의 사나이가 려송의 앞에 끌려왔다.

오랜 기간 산속을 정처없이 헤매인 흔적인듯 해지고 람루한 옷차림을 한 장년의 사나이의 눈가엔 피곤이 무겁게 실려있었다.

《무슨 일로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헤매이는가?》

려송이 따지듯 물었다.

《난 잃어진 사람을 찾는 중이요.》

장년의 사나이는 눈을 내리깔고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당한 소리 말아. 너 부여의 간자지? 이 산속에 무슨 사람이 산다고…》

파수장이 세모진 눈을 부라리며 다그어댔다.

《그렇게 다 알면서 묻긴 왜 묻는거요.》

장년의 사나이는 예상외로 배포유하게 대답했다.

《이 자식이-》 파수장이 주먹을 쳐들었으나 사나이는 수그렸던 머리를 쳐들고 려송을 바라보았다.

《혹시 려송두령이 아니시오?》

장년의 사나이의 이 말에 려송이도, 파수장도 다같이 놀랐다.

《절 모르시겠소이까?》

사나이는 간절한 기대가 어린 눈길로 려송을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듯 한 얼굴이였으나 누구였던지 정확히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 그때 서늪말에서…》

그제야 생각이 떠올랐다.

애기를 안고 순장터에 뛰여들었다던 사나이, 불무지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를 마리가 구원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사나이가 도대체 구려땅도 아닌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단 말인가?

《파수장, 거 뺏은것을 어서 내놓소.》

사나이는 얼떠름해 서있는 파수장에게 을러멨다.

려송이 묻는듯 한 눈길로 파수장을 쳐다보자 그제야 생각이 주머니에 미친 파수장이 한손에 들고있던 베천주머니를 내여밀었다.

《수상한 작자가 틀림없소이다. 옷주제를 보면 우리같은 못사는 놈이 분명하온데 이 주머니안에는 은냥들이 들어있소이다, 이걸 좀 보소이다.》

파수장의 말대로 주머니안에는 약간의 은냥이 들어있을뿐 별다른것이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려송은 베천주머니를 뒤집어 땅우에 쏟았다.

좌르르 은냥이 쏟아져내렸다. 흩어진 은냥속에 무엇인가 류다른것이 눈에 띄우자 얼른 그것을 집어든 파수장이 려송이앞으로 가져갔다.

《이게 어떻게?》

려송의 두손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하여 떨리고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가 오이에게 주었던 구슬목걸이였던것이다.

려송의 표정변화를 주시하고있던 사나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려송두령, 그것은 과루부의 주몽대인이 보낸것이오이다. 대인께서는 오이장군이 두령의 오빠를 찾았으니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소이다.》

《오빠를?》

《그렇소이다. 마리장군이 바로 십여년전에 헤여졌던… 오빠로소이다.》

려송은 해쑥하니 질린 얼굴로 어지럼이라도 일으킨듯 휘청거렸다.

그게 참말이란 말인가? 마리가 정말 나의 오랍이란 말인가?

하다면 지금껏 그는 업은 애기를 찾듯 오랍을 곁에 두고도 그토록 방황하며 헤매였단 말인가. 려송의 눈가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자, 이제 당장 떠나자.

려송은 파수장에게 대오를 집합시키라고 령을 내렸다.

뿔나팔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기세충천한 초적대오는 구려지경을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이보라구, 그 나라엔 정말 노예가 없나?》

대오중간쯤에서 장년의 사나이를 둘러싸고 걸어가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있었다.

《없긴 왜 없어? 아직도 몇몇 귀족놈들이 고집을 부리며 노예들을 안 내놓고 완고하게 논다네. 하지만 어림없지, 제깐놈들이 얼마나 오래 견디겠다구.》

《정말 그리 될가?》

《아따, 이 사람 그리 될가가 아니라 벌써 그리 되였어야지.

노예들도 같은 사람인데 노예주놈들은 무슨 권한으로 제 마음대로 우릴 죽이고 살리며 시집, 장가도 못 가게 하는가 말이야. 우리도 제 집을 가지고 자기 색시를 얻어 농사도 짓고 사냥도 하고 술도 제 마음대로 마실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란 말이야. 안 그런가?》

《딴은 그렇구만. 그럼 난 가자마자 제깍 장가부터 갈라네. 고운 색시를 척 얻어놓고 그까짓 소작땅이라도 부치며 보리죽이나마 제것을 먹을라네. 가난살이 아무리 힘들어도 노예살이에 비길텐가?》

《쳇, 난 군사가 될라네. 노예땐 그러고싶어도 군사로 뽑아주질 않았는데 지금은 맘만 먹으면 군사가 될수 있다 하니 무엇을 주저할텐가?

무어니무어니해도 나라지키는 군사만 한게 없다니.…》

끝이 날상싶지 않은 이야기는 물결마냥 대오의 이끝에서 저끝으로 흘러갔다. 려송의 입가에도 기쁨의 미소가 노상 잔즐거렸다.

함께 생사를 기약했어도 래일이 없던 그들이였다.

오직 원한과 복수의 일념으로 피발진 그들의 눈빛이 삶의 희망과 래일에 대한 꿈으로 반짝이고있었다.

려송의 눈앞에는 오이와 마리의 얼굴이 엇갈려 떠올랐다.

이날의 상봉을 위해 그는 얼마나 파란곡절 많은 길을 걸어왔던가.

십여년세월 자나깨나 한시도 잊어본적 없는 오빠, 이제 만나면 다시는 헤여지지 말자요.

그리고 꿈속에서도 그려보던 오이무사님, 우린 이제 머지않아 만나게 될거예요.

이제는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거예요. 아, 그리운 나의 님.…

려송은 품속에 질러넣은 구슬목걸이를 매만지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게 무슨 군사들이야?》 하는 놀란 목소리가 대오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선두대오가 멎어서고 술렁거림소리가 려송의 귀가에도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요?》

다급히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간 려송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위를 살폈다.

《저길 좀 보소이다.》

척후병격으로 앞장서나가던 군사가 숲이 무성한 골짜기아래를 손들어 가리켰다.

얼핏 줄잡아도 천명은 훨씬 넘을듯 한 군사가 매우 조심스런 거동으로 숲속오솔길을 따라 행군해가고있었다.

《혹시 놈들이 우리의 행동을 눈치채고 앞지르려고 하는것이 아니오이까?》

구레나룻수염이 더부룩한 부두령이 불안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리 없소이다. 놈들이 말발굽에까지 감발을 대고 병장기를 천으로 감싼걸 보면 꼭 도적고양이형색이라 이는 몰래 과루부로 쳐들어가려는것임이 틀림없소이다.》

얼굴이 갱핏한 초적부대의 모사가 멀리 골짜기아래의 적병을 주의깊게 살피며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여기서 구려땅까지는 불과 수십리안팎이다.

려송은 숨막히는듯 한 중압감을 느끼며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컴컴하게 질린 낯빛으로 려송을 쳐다보고있었다.

모사가 조심히 자기의 견해를 내놓았다.

《빨리 사람을 띄워 이 사실을 과루부중에 알려야 할것 같소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것이 지금의 형편에서 가장 합당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려송은 저도 모르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적들은 지경을 넘어서게 되고 불의적인 역습에 미처 싸움준비를 갖추지 못한 주몽이네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게 될것이다.

그것이 장차 새 나라의 건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과루부에서 다라나녹살 두로의 반란이 일어나고 부여군사들이 그에 호응하기 위해 은밀히 기동하고있는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려송은 자기의 속생각을 부하들에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날랜 군사 몇을 뽑아 속히 과루부경내로 떠나보내고 부대를 둘로 갈라 자기를 비롯한 자원군사들로 한개 부대를 편성하여 적을 급습하자는 제안이였다.

《부두령은 그사이 상병자들과 나머지군사를 데리고 길을 에돌아 구려지경 안전한 곳까지 부대를 이끌어주사이다.》

려송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부두령은 음울한 눈빛을 내리떨구며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렇게 못하겠소이다. 어쩌면 두령은 이런 급박한 시기에 나를 성쌓다 남은 돌 팽개치듯 하시오.》

《그런게 아니오이다. 부두령은 먼저 군사들의 목숨부터 생각하여야 할것 아니오이까?》

려송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부두령을 설복하려 헛되이 애썼다.

《사지동고를 맹약할 때부터 우린 목숨이란걸 이 세상밖에다 내여놓고 살았지오다. 그래 우리 군사들중 두령을 내놓고 제 목숨하나 살리자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녀석이 있을상싶소이까?》

부두령이 옹고집을 쓰며 머리를 돌리는데 파수막에서 붙들렸던 사나이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두령, 군사들은 새 나라의 성립을 위한 이번 싸움에 자기들모두를 참가시켜줄것을 요청하였소이다.》

사나이의 이 말에 고개를 쳐든 려송은 자기의 주위를 둘러싼 간절한 기대가 담긴 수백쌍의 눈동자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렬한 빛을 보았다.

그렇다. 이들도 새 나라의 백성들이다.

려송은 감동어린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검을 높이 쳐들었다. 가까이에 있는 적이 들을가보아 소리는 치지 않았으나 삼백여명이 추켜든 기치창검은 해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싸움은 구려땅이 시작되는 병아구리처럼 좁고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량옆이 깎아지른듯 한 벼랑턱으로 이루어진 좁은 오솔길은 구려지경으로 넘어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였다. 지형이 험하고 묘하여 지키기에는 유리하고 빼앗기에는 불리한, 이른바 병서에 이르는 《일부당관에 만부막개》 (한사람이 나서서 지키면 만사람이 범접하지 못하는 지세)라 할수 있는 곳이다.

그 옛날 사냥군들에 의해 생겨난것인지 아니면 지경을 몰래 넘어다니던 상인들에 의해 생겨난것인지 딱히 알수 없는 이 길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을 가로지른것으로 하여 국경이라면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그 무슨 봉수대라든가 파수막같은것조차 없는 길아닌 길이였다.

그런것만큼 부여군사들이 이 길로 들어선것은 이 고장 토배기의 길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였다.

첫눈에 앞장에서 길안내를 하는 귀얄수염을 알아본 려송은 한살에 놈의 멱통을 꿰였다.

그를 신호로 놈들의 무리속으로 화살들이 비오듯 날아갔다.

부여의 군사들은 선자리에서 날벼락 맞은셈이 되였다.

마음을 푹 놓고 기여들던 적들은 당황망조하여 불덴 황소마냥 이리저리 뛰다가 사처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맞아죽었다.

그러나 아닌밤중의 홍두깨에 얻어맞은듯 한순간 혼란에 빠졌던 놈들은 자기들을 기습한 부대가 불과 얼마 안되는 초적무리라는것을 알게되자 대오를 수습하고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싸움은 첫시작부터 격렬하였다.

화살이 날고 창과 칼이 공중에서 휘파람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황급히 내달리는 군마들의 말발굽소리며 화살에 맞고 창에 찔리여 울부짖는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긴 메아리가 되여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좁은 골짜기는 삽시간에 시체들로 한벌 덮였다.

눈에서 불꽃을 튕기며 와- 와- 함성을 올리는 초적군사들은 비호처럼 날래였고 황소처럼 억세였다.

칼이 춤추고 화살이 비오듯 하는 살벌한 싸움마당에서 초적군사들은 한사람이 열명, 백명의 군사들을 대적하여 싸웠다.

앞줄의 군사가 쓰러지면 또다른 군사가 그 자리를 메꾸어 싸웠다.

기를 쓰고 달려들던 놈들은 벌써 몇차례나 뒤로 물러섰다.

한바탕의 싸움이 멎고 전장은 잠시 조용해졌다.

귀청을 멍멍하게 만들던 함성과 비명은 언제 그랬냐싶게 잠잠해지고 들판은 고요속에 잠겼다. 려송은 잠시 부여군의 진중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기였다. 다음번 싸움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이런 때를 잘 리용해야 한다는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다. 군사들은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을 북- 찢어 상처를 감싸거나 숫돌에 썩썩 칼을 갈면서 다음번 싸움을 준비하고있었다.

낯익은 많은 얼굴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려송은 결코 이번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전신을 감쌌다.

적들은 쉽게 물러설 차비가 아니였다. 그러나 초적들에겐 화살마저 떨어져갔다.

천명이 넘는 적의 대병앞에 초적군사들은 불과 삼백명 남짓하다.

적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수적우세를 믿고 또다시 공격을 준비하고있는것이다.

서쪽산마루에 노을이 불그레 물들기 시작하였다.

오늘따라 별로 진하게 피빛으로 타오르는 저녁노을이였다.

락조의 잔광이 비껴간 골짜기안에서 또다시 피비린 격전이 벌어졌다.

비명소리, 고함소리가 또다시 골짜기를 메우며 울려퍼졌다.…

바로 그 시각 비맞은 장닭처럼 후줄근해진 두로의 일행은 게발놀리듯 수림속을 헤쳐가고있었다. 하루전까지만도 그토록 기세충천하고 자신만만했던 두로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물에 빠진 생쥐모양이 되여버렸다.

애초부터 부여놈들을 믿은것부터 잘못이였다.

다라나성을 중심으로 반변을 일으키고 주변고을을 적지 않게 함락하였던 두로세력은 오이와 마리의 질풍같은 공격에 바자끝에 몰린 도적개신세가 되고말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처음부터 동요하던 귀족들은 저들의 군사를 끌고 앞을 다투어 투항하거나 도망쳐버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귀얄수염이 끌고온다던 부여것들은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두로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자 십여명의 호위군사만 몰래 데리고 성을 빠져나왔다. 이럴 때는 삼십륙계 줄행랑이 제격이다.

두로의 일행은 산발을 타고 부여군사들이 오게 된 밀로를 따라 허둥지둥 도망치고있었다. 어느 순간에 오이와 마리가 뒤를 다쫓아와 뒤덜미를 잡아챌는지 알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부여지경에 들어서게 된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요란한 함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혹시 주몽네 패거리가 우릴 앞질러…)

두로는 자기가 돌이킬수 없는 무서운 함정에 빠졌다는것을 깨달았다.

창졸간에 식은땀이 등곬을 따라 흘러내렸다.

경악과 공포로 하여 숨이 꺽 막혀오는듯싶었다.

그렇다고 되돌아설수도 없는 노릇이다. 숲속 오솔길은 외통길인데다 뒤에서는 호랑이같은 오이와 마리의 군사가 그들을 추격하고있는것이다.

두로는 체면도 잊고 말에서 내려 겁먹은 눈길을 두리번거리며 숲속에 몸을 옹송그렸다. 조금 숨어있느라면 설피기 시작한 어둠이 그들의 모습을 감추어줄것이다. 함성은 차츰 잦아들어갔다.

두로는 몸을 숨기고 몇걸음 앞으로 나갔다.

살며시 풀덤불을 헤집고 골짜기를 내려다보던 두로는 엉겁결에 놀란 소리를 쳤다.

《엉, 저년이?…》

소서노의 시비였던 려송을 알아보았던것이다.

처절한 싸움이 방금 끝난듯 려송을 위시한 초적들이 하나둘 모여들고있었다. 갈가리 찢어진 부여군의 기발을 알아보자 두로는 입술을 옥물었다. 앙큼한 년, 네년이 오이와 좋아지내다가 부여에서 초적 두령노릇을 한다더니 끝내 내 일에 재구를 치누나.

두로는 시위에 활을 먹이고 볼편살을 푸들푸들 떨면서 한눈을 지그시 감았다. …

오이와 마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달렸다.

두로의 패잔병무리를 추격하는 길에 만난 초적부대의 파발을 통해 려송이 힘겨운 싸움에 뛰여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정신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찬바람이 금시 투구를 벗길듯 불어치고 휘여들었던 나무가지가 얼굴을 아프게 후려쳤다.

(려송!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

오이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발굽이 거의 땅에 닿을새없이 달리는 말등우이지만 어쩐지 거부기 잔등에라도 올라탄듯 가슴은 마냥 무겁고 답답하기만 하다.

자기의 마음이 그럴진대 성미급한 마리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얼굴을 험상궂게 이지러뜨린 마리는 불이 펄펄이는 눈으로 앞쪽만을 바라보고있었다.

문득 자기들의 앞으로 다가오는 낯설은 군사들의 무리가 보였다.

누구인가를 들것에 눕혀 맞들고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엔 끝없는 비감과 분노의 빛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두사람은 거의 동시에 온몸으로 줄달음쳐가는 전률을 느끼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들을 알아본 서늪말의 사나이가 일행에서 벗어나 몇걸음 마주 걸어왔다.

《가망이 없소이다.》

사나이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말에서 뛰여내린 오이는 사나이의 두어깨를 바스러지도록 틀어쥐고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누가?》

《려송두령이 그만…》

사나이는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초적군사들이 들고있던 들것을 땅우에 내려놓았다.

군사들은 몸을 떨며 흐느꼈다.

오이는 심장이 비틀리는듯 한 아픔을 느끼며 들것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둠속이였지만 그는 꿈속에도 잊어본적이 없는 려송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았다.

《려송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려송아!》

마리가 려송을 두팔에 안아들며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여기저기서 비통한 울음이 터져나왔다.

오이는 고통이라도 느끼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떨었다.

손에 끈적끈적한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려송의 오른쪽가슴노리로부터 복부까지 시꺼멓게 젖어든 피자욱을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것 같던 려송의 눈까풀이 힘겹게 쳐들리였다. 뽀얗게 앞을 가리운 안개를 헤치듯 손을 더듬어 자기를 안고있는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남은 한손으로 또 누군가를 찾으며 안타깝게 모대기였다.

마리는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오이를 불렀다.

려송은 떨리는 손으로 두사람의 손목을 잡고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귀를 실룩거렸다.

《오- 랍-》

한참 흘러서야 실같은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려송은 손을 힘들게 움직여 자기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하많은 사연이 담긴 소뿔을 깎아만든 작은 구슬목걸이였다.

숨이 꺽 막혀오는듯싶었다.

려송은 바르르 손을 떨며 그 목걸이를 오빠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려송아!》

마리는 끝내 려송을 끌어안고 소리내여 울음을 터뜨렸다.

아픔과 후회, 쓰라린 추억을 안고 소리내여 울었다.

려송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소리없이 흘러내리는것을 오이는 똑똑히 보았다. 오이는 자기도 모르게 려송의 한손을 꽉 잡았다.

려송의 얼굴에는 한없는 기쁨과 애정이 어려있었다.

《부디 새 나라의 훌륭한 신하가…》

려송은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가까스로 붙잡고 안깐힘을 모았으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기만 했다.

오이는 려송이 하자는 말의 뜻을 짐작하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오이의 손을 다정히 감싸쥔 려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이 싸늘하게 식어가는것이 알렸다. 군사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려송의 손을 쥔 오이와 마리는 억장이 터진듯 소리내여 울지조차 못하였다.

군사들도 하나, 둘 다가와 머리를 숙이였다.

《두령님은 죽지 않았을수도 있는데…》

부두령이 목이 꺽꺽 메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려송은 죽지 않을수도 있었다.

생전에 그리도 오빠와 만나고싶어했던 려송.

파란만장의 곡절을 겪으면서 겨레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임을 깨달은 처녀.… 바로 그러한 려송을 오이는 사랑했고 한평생 위해주고싶었다.

그러나 려송은 새 나라의 성립을 위해 자기 한몸을 바쳤다.

이 땅의 유명무명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단군겨레의 새 나라를 위해 성돌이 되고 방패가 되고 창과 검이 되였다. 그들의 애국의 넋을 자양분으로 하여 새 나라의 려명은 밝아오는것이 아닌가?

오이는 오열을 짓씹는 마리를 곁에 두고 천천히 몇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에는 마리의 손에서 넘겨받은 구슬목걸이가 쥐여져있었다.

초적군사들이 동아줄로 꽁꽁 묶은 두로를 앞으로 끌어왔다.

《오이장군, 바로 이놈이 활로 우리 려송두령을 쏘았소이다.》

부두령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처절한 패배감과 굴욕감을 안고 두무릎을 꿇은 두로의 온몸은 화들화들 떨고있었다. 그는 자기가 패했다는것과 다시는 살아날길이 없다는것을 예감했다. 어떻게 되여 이런 운명의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지게 되였단 말인가?

지금껏 두로는 자기야말로 가문에서 보기 드물게 출중하며 운수가 좋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야말로 가장 운수가 나쁜 불행아라는 생각에 오싹 소름이 내돋았다.

아버지는 비록 비명에 횡사했어도 충실한 신하로 그 이름을 남기였고 자기자신은 그 덕을 입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력사에 역적으로 그 오명을 남겨놓았다.

분명 그의 몸에는 충신이였던 선친의 피가 흘렀으나 넋은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사심을 품은자는 언제가도 충실한 신하가 될수가 없는 법이다.

그가 연타발을 따랐고 그의 신하로서 복무한것은 언제인가는 자기가 이 과루부의 주인이 될수 있다는 그러한 미련과 권세욕때문이였다.

충신과 간신은 한자리에 나란히 설수 없고 한가마밥을 먹을수 없다는것은 력사가 보여준 진리이다.

결국 오늘의 비극적운명은 주몽이네가 처음 졸본땅에 발을 들여놓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였는지도 모른다.

두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서서히 장검을 쳐드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목청껏 고함지르며 지랄하고싶은 충동이 온몸을 훑어내렸다.

하지만 그 모든것이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랴?

두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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