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4 장


3


네귀반듯한 커다란 기와집 안방에서 잠을 자던 두로는 아침늦게야 눈을 떴다. 지난밤에 늦도록 술을 마신탓인지 머리가 뗑하고 입안이 텁텁하였다. 상우에는 먹다남은 안주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술을 퍼마시던 주발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망할녀석들 같으니라구!》

두로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하인들을 불러들여 모조리 주리를 돌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기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것은 그자신이 내린 분부였던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발을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남겨둔 술이 주발밑굽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자신은 마음속에 남아있던 그 모든 희망을 스스로 버리지 않았는가, 부귀도 공명도, 권력도.…

문득 마지막희망을 안고 연타발을 찾아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였군요. 지금 성안팎이 부마가 될 주몽의 이야기로 들썩하오이다. 우린 속았소이다. 애초에 주몽의 마음속엔 우리 과루부나 소서노따위는 안중에 없었소이다.

그들은 단지 우리를 리용해먹었을뿐이오이다.》

연타발은 생각에 잠긴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로는 그의 침묵을 달리 리해했던지 대번에 열이 나서 떠들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연타발은 문뜩 입을 열었다.

부마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가장 마음을 쓰고있는 문제였다. 두로는 웬일인지 히쭉 웃었다.

《주몽은 이번 기회에 아예 소서노를 떼여버리려 할것이옵니다.

더구나 소서노는 허물이 많은 녀자라 할말이 없게 되지요. 이 모든 계략은 바로 오이의 머리속에서 나온것이오이다.》

《오이, 그사람이?!》 연타발은 수염을 떨었다.

《주몽이 부마로 선출되면 부여의 금와왕은 대군으로 구려에 침노할것이오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과루부는 참혹한 전란을 입게 될것인즉 그때 가서 누구에게 책임을 따지겠소이까?》

연타발은 《음-》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낯색을 달리했다.

두로는 자기의 계교가 성사될듯싶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소이다. 이제라도 어른께서 저에게 령을 내리시여 주몽의 인장을 거두게 하시고 그 무리들을 엄벌에 처한다면…》

연타발은 생각에 잠긴채 한동안 꼼짝않고 서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딸의 일을 놓고 생각해보면 신의없는 그들의 일이 괘씸하기 그지없으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수 없는 하늘의 뜻인가보네.》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하는 연타발의 말에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된 두로는 이를 갈며 돌아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바로 그때부터 정신없이 화술을 퍼먹기 시작한 두로였다.

(아니다!) 두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스스로 저버린게 아니라 빼앗기고말았다!)

그는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그러자 캄캄한 어둠이 내려덮인 광막한 초원이 그려졌다. 사나운 바람에 무인지경의 숲이 태질을 하며 아우성친다.

컴컴한 그 숲을 헤치며 웬사람이 술에 취한듯 비틀비틀 걸어가고있다.

산발한 머리, 여위여 훌쭉한 얼굴, 볼품없이 찢겨진 옷자락…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언제까지 가야 할지 그 사나이는 알지도 못한다.

알지 못하고 방랑하고있다. 그에게는 해빛도 안식도 없고 오직 불안과 공포, 절망만이 있을뿐이다.…

두로는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눈앞에 그려졌던 환영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초원의 어둠속에서 헤매는 그 여윈 사나이가 바로 두로자신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화가 나서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방구석으로 주발을 내던지며 쓰러지듯 털썩 자리에 누웠다.

온몸에 쭈욱- 퍼지는 술기운이 느껴지자 그는 기분이 더 잡쳐졌다. 가슴속에 미칠듯 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솟구쳐올랐던것이다.

(나는 막강한 재부와 수백의 군사가 있다. 지금껏 어느 누가 감히 이 두로를 허술하게 여겨왔던가. 이제라도 거병하여 주몽을 짓밟는것이 옳지 않은가.…)

그는 무의식중에 깨문 혀에서 흘러나온 침섞인 피를 내뱉고 계속 일문일답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주몽과 그의 패거리에게 돌아서지 않았는가. 멀지 않아 주몽은 구려의 왕을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여 나를 해하려고 할것이다. 5부의 병력이 합세하여 공격하는 날이면 이까짓 작은 성은 반나절도 못되여 깨여져나가고말것이다.)

두로는 순간 등골로 차디찬 얼음덩이가 미끄러져내리는듯 오싹해났다.

금시라도 자기 목에 주몽의 장검이 와닿는듯 한 무섬증을 느꼈던것이다.

두로는 살고싶었다.

살아서 반드시 주몽을 짓밟고 구려의 왕이 되고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주몽과 맞선단 말인가.

지금은 주몽의 세력이 너무도 크게 강성하였다.

그의 세력이 보잘것없이 미미하였을 때 수수방관하다가 이제 와서 뒤늦게야 그 뒤수습을 하려고 덤벼치는 자신이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마가을이여서 성밖의 산야는 황량하고 쓸쓸하였다. 그러나 가없이 푸르게 트인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부신 해빛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이때에야 두로는 자신이 불행하게도 세상의 버림을 받은 외로운 존재라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고독감에 부르르 몸을 떨며 어쩐지 낯설어 보이는 창밖을 다시 둘러보았다.

숲이 무성한 산발들과 깊은 골짜기, 시내물, 노예들이 등짐으로 곡식단을 나르는 전야와 새초이영을 올린 초가막들, 골목길에서 뛰노는 아이들… 아무리 보아도 두로가 늘 보아오던 세상 그대로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모습의 양상을 띤 세상으로 변화되고있었다.

문란하던 정사가 점차 바로잡히고 노예들은 땅을 가진 농노로 되고있다. 그리고 조상대대로 연나부의 구려왕실에 복종하여온 과루부는 점차 구려라는 큰 나라를 좌지우지할수 있는 무서운 세력으로 자라나고있지 않는가.

다만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도모하는 두로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변화를 헤아려볼수 없었을뿐이였다.

두로는 우묵한 눈에 독기를 가득 싣고 악에 치받쳐 부르짖었다.

《아니다. 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테다. 래일 당장 군사를 일으켜 주몽의 머리를 베고야말것이다. 그리고는…》

하지만 이것은 밝은 대낮의 잠꼬대나 같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이때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귀얄수염이 방으로 들어와 두로의 팔을 부여잡았다.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대체 웬놈이야, 응?》

두로는 취기가 올라 새빨개진 눈을 치떴다.

《다 망한 판에 너두 이젠 소용없으니 가고싶은데로 가거라.》

귀얄수염의 눈가에 언뜻 조소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말은 다르게 나갔다.

《소인이 성주님을 모신지 여러해째인데 가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듣자니 죽을수가 생기면 살수도 나진다는데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

두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무슨 계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귀얄수염은 바싹 다가앉으며 두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였다.

《지금 천하에 주몽과 맞설 세력은 오직 부여이고 주몽을 누를수 있는자는 부여의 대소왕자뿐이오이다.》

《뭐?! 뭐라구… 그럼 내가 부여와 손을 잡으란거냐?》

두로가 놀라서 펄쩍 뛰는데도 귀얄수염은 아무렇지도 않는듯 태연하게 입을 놀렸다.

《성주님이야 이미전에 부여와 손을 맞잡지 않았소이까?

대소왕자는 항상 주몽을 절치부심하는터이니 우리가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 않을것입니다. 부여의 힘을 빌려 주몽을 제거하고 이 나라를 수중에 장악하는 길만이 성주님이 몸을 일으킬 유일한 길이옵니다.》

두로는 마침내 부여왕과 손을 잡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이 자기를 죽을 고비에서 구원해준 연타발이나 소서노에게 죄되는짓이라 할지라도 가릴 경황이 없었다.

간신들이 걷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가닿게 되는 꼭같은 종착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권세와 재부, 목숨을 위해 종당에는 나라와 겨레, 임금까지 팔아먹는다는 그것이다.

두로의 경우에도 이와 다를바 없었다.

두로는 마침내 자기의 성을 부여에 바치고 부여왕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약을 적은 밀서를 례물과 함께 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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